전국의 숨은 명산을 찾아서
청도-밀양 천왕산(619.2m)
산이 낮고 작아도 이름은 내가 제일!
'천왕(天王)'. 이름 한번 대단하다. 600m를 겨우 넘긴 높이에 산세 또한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 품이 넓지도 못한데 어찌 이런 거창한 이름을 얻었을까? 이 산이름과 관련된 홍수에 얽힌 설화가 북쪽 자락인 청도군 풍각면 월산동에 전해져 온다.
아주 먼 옛날, 큰 비가 내려 온 천지가 물에 잠겼을 때 '족금당'은 봉우리 끝만 조금 남아서 '쪼금댕이'로, 천왕봉은 물에 잠기지 않고 당당하게 버텨서 '천왕'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남동쪽의 바위에 배를 맸다고 해서 '배바위', 그 옆 봉우리를 '배바위산' 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오늘 목적지인 천왕산은 낙동정맥 사룡산에서 비슬산을 지나 밀양 종남산 오우진나루까지 146km의 산줄기로 뻗은 비슬지맥의 한 봉우리다. 묘봉산(514m)에서 배바우산(608m)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비슬지맥을 종주하는 등산인들이 꼭 들리는 곳이다.
"아따, 정말 습도 높네. 산행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땀이 나마 우야노?"
옥산2리 마지막 집 앞에 주차한 후 배낭을 챙기던 김성수씨가 후텁지근한 날씨를 탓하며 한마디 던진다. 남해 멀리 어디쯤에서 머물고 있다는 장마전선 때문인지 찌는 듯한 더위에 대기는 습해 오늘 산행 고생 좀 할 낌새다.
만수위에서 몇 미터 낮아졌지만 대산지는 여전히 푸르고 넓다.
"이 못을 대산사 오르는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전체 모양이 핫바지를 닮아서 우리는 핫바지못이라고 불렀어요."
"아, 이기자 고향이 산 너머 풍각 차산이라고 했제?"
지금은 폐교된 차산초등학교 시절, 해를 거르지 않고 소풍을 갔던 곳이 대산사다. 그때마다 신기해 보였는데 오늘은 30여년 만에 직접 찾았다. 1970년대에 대산사로 가려면 풍각 쪽의 가양에서 꼬불꼬불한 산길 3km를 걸어 오르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1999년에 이곳 각남의 옥산에서 차도가 뚫렸고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
산딸기가 탐스럽게 익은 산길을 굽이굽이 틀며 오르기를 30여분, 감나무밭이 나오더니 '월여산 대산사'라 적힌 커다란 바위가 일주문을 대신해 버티고 섰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도 월여산은 생소하다. 족금당, 천왕봉, 478봉? 어디가 월여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대산사 종무소 보살에게 물어봐도 대산사가 들어선 산 일대가 월여산이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정확히 어딘지는 알지 못하는 눈치다.
대산사는 최근 대대적인 불사로 인해 일신했다. 한가운데 금단청 한 원통전을 중심으로 종무소와 요사채가 좌우로 날개를 펼친 듯 당당하다. 원통전 뒤의 칠성각과 신령각, 용왕단은 옛 모습 그대로다. 번듯한 가람에 비해 마당 한 가운데의 3층석탑이 왜소해 보인다.
비슬지맥과 열왕지맥 만나는 요충지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산길은 등산로라고 하기엔 너무 날것 그대로다. 크게 자라지 못한 소나무가 칫솔모처럼 빼곡한 능선에는 '부산 두타산악회'와 '99클럽' 표지기 두 개만 눈에 띈다.
이윽고 도착한 족금당 정상. 어릴 적에 올라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숲 속에 작은 돌무더기가 쌓였다. 돌무더기 사이에 섞인 기와조각은 그때처럼 지금 보아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족금당을 지나면서 활엽수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잠자리피를 배경으로 보라색 싸리꽃과 다홍빛 중나리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밀양과 청도, 창녕을 가르는 봉우리인 천왕산은 비슬지맥과 열왕지맥이 갈리는 곳답게 주변 나무에 많은 표지기가 매져 있다. '비슬지맥 천왕산 619.2m 준.희' 라고 적힌 플라스틱 팻말도 참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준.희'는 산을 좀 다녔다는 사람이라면 몇번씩은 보았을 이름이다. 부산 산꾼으로 '준'은 자신의 이름, '희'는 사별한 아내의 이름이다. 내게도 외진 곳에 매진 그의 짙은 오렌지색 표지기가 길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준 적이 여러번이다.
예서부터 길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 많은 이들이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세도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곧 만난 능선 삼거리, 제법 굵은 나무둥치에 '열왕지맥 분기점 준.희' 라는 팻말이 붙었다. 이곳에서 오른쪽은 묘봉산 지나 비슬산으로 이어지고, 남서쪽 산줄기는 열왕산(663m)을 지나 관룡산(754m), 화왕산(756m)으로 뻗어가는 열왕지맥이다. 왼쪽은 배바위산, 건티재를 거쳐 화악산(932m), 형제봉(557m)으로 내달리는 비슬지맥이다.
배바위로 가는 능선은 그야말로 고원평지다. 참나무가 주를 이룬 숲은 공간이 넓어 답답하지 않다. 곧 오른쪽으로 숲에 가린 바위가 나타난다. 누군가 줄을 매 둔 배바위다.
"엇, 뱀이다!"
먼저 오른 김성수씨가 바위를 뒤덮은 담쟁이넝쿨을 가리키며 외친다. 검은 무늬를 가진, 꽤 굵은 까치살모사다. 한번 물리면 일곱걸음을 떼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해서 '칠점사' 라고도 부르는 독사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몸을 말린다고 바위를 찾은 모양이다. 한바탕의 소동은 뱀이 바위 아래로 숨어들며 끝난다.
출발할 때는 해가 났지만 족금당 쯤부터 흐려진 날씨 탓에 아래 천왕재만 보일 뿐, 화왕산~관룡산 조망이 흐릿하다.
다시 평탄한 능선으로 돌아와 북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선다. 비비추 군락지를 지나자 길은 오리무중이다. 애초부터 길이 없는 듯, 온통 수풀이 우거져 진행이 어렵다. 멧돼지가 목욕을 한 물웅덩이를 지나자 희미한 길이 나타나지만그마저도 금방 사라진다. 지형도와 비교해가며 능선을 따라 내려서니 다시 희미한 길이 보인다.
적어도 몇 해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을 것 같은 길따라 20여분 갔을까? 상석과 향로석까지 갖춘 전주이씨 무덤이 나타난다. 다시 능선따라 5분 더 가니 잘록한 안부 한쪽에 터를 다져 세운 텐트가 보인다. 약초꾼들이 베이스캠프로 썼을 법한 텐트는 몇 해는 방치된 듯 무너지고 찢겨져 있다.
안부 위 밋밋하 봉우리를 지나 얼마 안 간 곳에서 길은 왼쪽으로 꺾인다. 지도를 펴보니 동국사 들어서는 길이 멀지 않아 보인다.
"아이고, 살 것 같네. 이기자, 이리 오소. 시원하이 끝네주네."
먼저 내려선 일행들이 길 옆 개울에서 띰을 씻고 있다. 후텁지근했던 하루 산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산행길잡이
옥산2리-(40분)-대산사-(1시간15분)-족금당-(30분)-천왕산-(5분)-열지기맥 분기점-(25분)-배바위-(30분)-전주이씨 무덤-(5분)-움막터-(15분)-비포장도-(30분)-옥산2리
홍수 설화 간직한 비슬지맥의 명산
옥산2리 위에 대산지가 있다. 대산지 둑을 가로질러 대산사까지 1.5km의 콘크리트 포장도를 따라 오른다. 대산사 종무소 뒤편 솔숲으로 산길이 나있다. 이후 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족금당을 지나 천왕산으로 이어진다.
'비슬지맥'의 한 봉우리인 천왕산에서 5분 가면 남서쪽으로 '열왕지맥'이 갈린다. 배바위산은 비슬지맥인 동남쪽 능선을 따른다. 천왕산에서부터 배바위산까지는 길이 순하다. 배바위산 직전 오른쪽으로 툭 튀어나오며 솟은 배바위가 있다. 올라가면 남서쪽으로 천왕재 너머 화왕산~관룡산 산세가 잘 보인다.
하산은 배바위산에서 다시 돌아와 동국사 남쪽, 대산지로 뻗은 능선을 따른다. 초입은 길이 너무 희미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울창한 수풀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능선을 벗어나지 않고 진행하면 곧 희미한 길을 만난다. 표고 450m 지점쯤에 전주이씨 무덤이 있고, 조금 더 간 안부에서 약초꾼들이 사용했을 법한 버려진 텐트를 만난다. 텐트 바로 위 봉우리를 지난 다음 봉우리에서 왼족으로 꺾어 내려선다. 동국사로 들어서는 콘크리트 포장도를 만나 2km 내려서면 대산지 지나 옥산2리다.
능선에는 샘이 없기 때문에 대산사에서 식수를 보충한다.
*교통
대구 남부시외버스터미널이나 청도버스터미널에서 풍각행 버스가 수시로 출발한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 경부선 청도역에 내리면 된다. 청도역 앞에 청도버스터미널이 있다.
풍각버스터미널에서 들,날머리인 청도군 각남면 옥산2리까지 1일 5회(09:20, 12:10, 13:30, 18:00, 19:00) 버스가 다닌다. 요금은 1,000원.
풍각에서 택시를 이용할 경우 5~6분 걸리며 요금은 미터기로 8,000원 안팎이다. 옥산2리에서 택시를 부를 경우 콜요금 1,000원이 추가된다. 풍각개인택시 054-373-6363~4.
승용차로는 중앙고속국도 청도나들목을 나와서 20번 국도를 따라 풍각으로 가다가 각남을 지나 옥산(왼쪽)으로 들어서면 된다.
*잘 데와 먹을 데
천왕산 자락은 청도군이나 밀양시에서도 변두리여서 이렇다 할 식당이나 숙박시설이 없다. 청도읍이나 밀양시가지로 나가야 한다. 청도역전에 '할매 추어탕'으로 유명한 의성식당(054-371-2349)이 있다.
중앙고속국도 청도나들목을 나와 25번 국도를 따라 대구방면으로 2분 가면 '청도용암웰빙스파(371-5500)가 있다. 게르마늄 온천수로 유명하며 6층으로 이뤄졌으며 객실과 연회장, 가족탕, 남녀사우나실과 노천탕, 대형 휴게실에 편의점과 식당도 갖췄다.
*볼거리
죽바위 옥산리로 들어서기 전 구만리 건너편에 있는 너럭바위다. 높이는 20m 남짓이지만 윗부분은 수백 평이 넘을 만큼 널따랗다. 북에서 남으로 완만한 경사를 보이는 바위 끝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풍상을 이기며 서있다. 원래 '죽(粥)바위'라 불렀는데 지나던 스님이 "이곳은 장사가 태어날 고장인데 장수가 죽을 먹고 어찌 힘을 쓰겠냐"며 대나무 한 그루를 구해와 심어놓고 앞으로는 '죽암(竹岩)' 이라 부르라고 한 후 죽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대산사 신라 흥덕왕 5년(830)에 창건하고 목지국에서 남해에 표류해 온 천수관음불상 3구 중 한 구를 이곳에 봉안해 용봉사라 하였다. 임란과 일제강점기 때 방화로 법당이 사라지고 불상도 큰 피해를 입어 주변에 묻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에 명성황후의 시주로 의문화상이 중수하고 대산라라 개칭하였다. 2000년 여름 사찰 경내 밭에서 천수관음 불상이 발견되었다.
글쓴이:이승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