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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
출처 : http://www.mjsky27.com.ne.kr/
1. 민속명절
민속명절이란 절기의 이름 있는 날이라는 뜻으로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일정한 행사도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특별한 날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자연기후조건, 농사철 등을 참작하여 뜻있는 날을 명절로 정하고 맞아왔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해마다 즐겨맞아오던 민속명절들이 적지 않는데, 옛 기록들에서는 이러한 민속명절을 《세사(한해의 일)》, 《속절(민간의 명절)》 혹은 《월령(민간행사를 다달이 적은 표)》 등으로 써왔다.
이 가운데서 속절은 민속 명절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세사, 월령은 민속 명절뿐 아니라 한해에 지내는 잡다한 제사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었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일 년을 단위로 해마다 되풀이되는 풍속을 말한다.
농경사회의 풍속은 대부분 일 년을 주기로 하는 농사력(農事曆)에 따른다. 그러므로 세시풍속에는 농사력이 반영되어 있고, 농업 생산력이 발전해서 농사력이 바뀌면 세시풍속도 바뀐다.
세시풍속은 음력의 달별, 24절기, 명절 따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이에 따른 의식 및 의례 행사도 포함된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농민이나 어민과 같은 직접 생산자인 민중들의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삶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시간 관념이 나타나 있는 역법체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는 땅 면적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지만 북부지방과 남부지방, 산간지대와 평야지대의 기후와 풍토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재배하는 농작물과 농사 주기 또한 다르다. 그에 따라 지역마다 세시풍속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업을 주로 하는 어촌이 생기면서 농촌과는 다른 어촌의 세시풍속도 형성되었다.
세시풍속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 문헌은 대부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작성한 것이다. 정동유(鄭東愈, 1744~1808)의 서영편(晝永篇, 1805), 유득공(柳得恭, 1749~?)의 경도잡기(京都雜記, 정조연간), 김만경(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1819),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 등은 대표적인 세시풍속 관련 종합서이다.
- 설(음력 1월 1일)이란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지고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한다는 뜻이다.
원단은 한해의 첫날로 세수(歲首) 또는 연수(年首)라 부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설' 또는 '설날'이라고 부른다.
세수•연수란 말은 한해의 머릿날 즉 첫째날이란 뜻이고, '설'이란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 하는데, 근신(謹愼)하여 경거망동(輕擧妄動)을 삼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석(除夕, 섣달그믐)을 마지막으로 묵은해는 지나가고 '설날'을 시점으로 새해가 시작되니, 1년의 운수는 그 첫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옛사람들은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몸가짐으로 복(福)을 기대해서 연초인 설날에 심신(心身)을 근신했다.
농사를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 여겨온 한민족은 신라 때 이미 '원일상경 시일배일월신(元日相慶 是日拜日月神)'하였으니, 1년 동안의 우순풍조(雨順風調, 농사가 잘되도록 때를 맞추어 비가 오고 바람이 고르게 부는 것)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신에게 제사를 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가졌다.
조선시대에 의정대신들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드리고, 전문과 표리(거친 무명 또는 흰 명주)를 바치고 정전(왕이 임어하여 조회를 하는 궁전)의 뜰로 나가 조하(조정에 나아가 임금께 하례함)을 올렸다. 이 날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 하고 아이들이 입는 새 옷을 세장이라고 하며 어른들을 찾아 뵙는 일을 세배라 한다. 이 날 대접하는 시절 음식을 세찬(떡국)이라고 하며, 또한 이에 곁들인 술을 세주(초백주, 도소주)라 한다. 또 시루떡을 쪄서 올려 놓고 신에게 빌기도 한다. 한편 사돈집 사이에는 부인들이 근친하는 뜻으로 하녀를 서로 보내어 새해 문안을 드리는데, 이 하녀를 문안비라 한다.
민가에는 벽 위에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가기를 빌고, 남녀의 나이가 불길한 일을 당한 자는 세 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인다.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 맨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1년간의 길흉을 점치는데, 이를 청참이라 한다. 또한 나무에 금․목․수․화․토를 새겨 장기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던져서 자빠지고 엎어진 것을 보아 점괘를 얻어 새해의 신수를 점치는데 이를 오행점이라 한다.
남녀가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황혼을 기다려 문 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다.
설날부터 3일동안은 길거리에 많은 남녀들이 떠들썩하게 왕래하는데, 울긋 불긋한 옷차림이 빛나며,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에 안녕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등 좋은 일을 들추어 말하는 것을 덕담이라 한다.
새해 첫날을 설날이라 하니 설날 아침에는 식구들이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새로 지은 옷(설빔)을 입고, 세찬과 세주를 마련하여 조상님께 세배 드리는 의식 곧 차례를 지낸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께 새해 첫인사를 올리니 곧 세배다. 집안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일가 친척, 이웃 어른을 찾아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는 쪽에선 손님께 대접하는 음식상을 차린다. 어른에겐 술과 음식을, 아이들에겐 과자나 돈을 주고 덕담을 건넨다. 아이들에게 주는 세뱃돈은 저축 정신을 기르는 뜻으로, 곧 계란을 사서 닭으로 늘려 다시 송아지에서 소로 늘려 논밭을 장만하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또한 돌아가신 조상의 묘소를 찾아 새해 인사를 올리고 안방마님은 노비를 친정으로 보내 길어(吉語)로써 문안을 드린다. 벼슬하고 있는 집에서는 붉은색을 칠한 상을 대청에 마련해 두면 세배 온 사리(司吏)들이 이름 쓴 종이를 상에 놓고 돌아간다. 또 설날 새벽 가족들은 이명주(耳明酒)라 하여 귀가 밝아지는 약주를 한잔씩 마신다. 세찬 가운데 어느 집에서나 흰떡(白餠)을 만들어 떡국을 끓인다. 떡국 한 그릇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뜻이 있다. 떡을 만들 때는 멥쌀을 가루로 찧어 체에 쳐서 물을 뿌려 버무려 시루에 쪄서 고수레 떡을 한다. 절구나 안반에 놓고 장정들이 힘을 다하여 떡메로 식기 전에 여러 번 쳐서 차진 떡덩이를 만든다. 이것을 손으로 비벼 가래떡을 만들어 적당히 굳으면 돈짝처럼 썰어 떡국 떡을 마련한다. 또한 가래떡을 굵게 비벼서 떡살로 문양을 찍어 절편이나 꽃절편을 만들며, 쑥이나 송기를 넣어 떡을 만들어 차례상에도 올리고 꿀에도 찍어 먹는다. 차례상에는 메 대신에 떡국을 올린다. 식사 때에는 떡국과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내고 그 밖에는 다과상을 준비한다. 정월의 설날 음식으로는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떡국, 떡만두국, 떡볶음, 떡찜, 떡산적, 떡잡채 등이 있다. 고기 음식으로 갈비찜, 사태찜, 생선점, 편육, 족편, 지짐으로 녹두빈대떡, 각색 전, 채소 음식으로 삼색 나물, 겨자채, 잡채 등이 있다. 우리나라 음식을 대표할 수 있는 신선로와 김치 곧 떡과 함께 먹는 장김치가 있고 후식류로는 약과, 다식, 정과, 엿강정, 강정, 산자, 식혜, 절편, 꽃절편, 인절미,수정과 등이 있다. 정월 상차림은 아침 일찍 밝은 마음으로 조상께 지낸 차례 음식으로 고루 차진다.
- 차례(茶禮), 덕담(德談), 토정비결(土亭秘訣) 보기, 복조리 사고팔기
-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간신히 맥을 유지해가는 몇가지 풍속
- 이른 아침 : 사람들은 짐승의 소리를 듣고 그해 1년 동안의 운수를 점쳤는데 까치소리는 길한 것, 까마귀 소리는 흉한 것으로 여겨 노인들은 일부러 까치가 울만한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 이른 새벽 : 부인네들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는데 이를 '용(龍)알뜨기'라고 부른다. 설날 우물안에다 용이 알을 낳는다고하여 가장 먼저 우물물을 떠가는 사람이 용알을 떠가는 것이고, 먼저 떠간 사람은 지푸라기를 우물 안에 던져 표시를 해놓았다고 한다.
- 저녁 : 1년 동안 모아두었던 머리카락을 불태웠는데, 머리털을 그대로 기름종이에 싸서 모았다가 설날에 태우면 길하다는 것이다.
- 밤 : 사람들은 초저녁부터 신발을 감추어 두었는데 설날 밤에 하늘에 있는 야광귀(夜光鬼)가 설날 밤, 인간세상에 내려와 집마다 찾아다니는데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그 신의 주인은 1년내내 재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모두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잔다. 그리고 체를 마루벽이나 뜰에다 걸어 두어 이 야광신이 와서 이 체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갔다고 한다.
- 설빔(歲粧) : 설날 아침 갈아입을 새옷을 말한다.
- 차례(茶禮) : 설날 아침 일찍 음식(歲饌)과 술(歲酒)을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차례(正朝茶禮)라고 한다.
- 세배(歲拜) : 차례가 끝나고 어른께 드리는 새해 첫인사로, 세배를 마치고 어른에게는 술과 음식을 아이들에게는 과자와 세뱃돈을 마련하였다가 주었다.
- 세찬(歲饌) : 설날 차례와 손님 접대를 위해 준비한 여러 가지 음식, 대표적인 것으로 흰 떡국이 있다.
- 세주(歲酒) : 설날에 먹는 냉주(冷酒)를 말하며, 찬 것을 그대로 마신다.
- 덕담(德談) : 새해를 맞아 서로 복과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말이다.
- 성묘(省墓) : 조상의 묘에 새해 인사를 고(告)하는 것이다.
- 복조리 : 1년 동안 이른 새벽에 조리를 사두면 1년 동안 복이 많다는데서 이날 산 조리를 복조리라함.
- 윷놀이 : 둥근 밤나무를 반으로 쪼개 4개의 가락으로 하는 놀이로서 윷판을 만들어 목적지까지 먼저 도착하면 승리하는 놀이이다.
- 널뛰기 : 정초나 5월 단오때 마을처녀들이나 새댁등 젊은여성들이 주로 즐겼던 놀이로 두꺼운 판자를 짚단이나 가마니 같은 것을 둘둘말아 가운데를 괴어놓고, 양쪽에 한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가며 발을 굴러 궁중에 높이 솟아 뛰는 놀이이다.
- 떡국 : 명절마다 먹는 음식을 "세시음식"이라고 하는데 떡국도 세시 음식 중의 하나이다. 설날 아침엔 차례상을 차릴 때 밥 대신 떡국을 올리고 나서 아침을 떡국으로 먹는다. 떡국을 끊이려면 우선 가래떡을 만들어 굳으면 동전 모양으로 납작납작하게 썰어 넣고 국을 끊이면 떡국이 된다. 가래떡은 가늘고 기다랗게 만든 흰떡을 말하는 것으로 새해 첫날 아침에 먹는 떡국은 병 없이 오래 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 수정과 : 곶감을 달인 물에 생강과 꿀을 넣고 끊여서 식힌 후에 건져 둔 곶감과 잣을 넣어 만든다.
- 음력(1월 15일) 정월 보름날로 1년중 달이 가장 밝고 크게 빛나는 날이라 하여 달을 보며 제각기 소원을 비는 날
대보름은 그해 맨먼저 보름이 되는 날로서 한자로는 상원(上元, 으뜸되는 밤)이라고 하며 우리나라 전체 세시풍속 행사중 5분의 1이 넘는 행사가 집중될 만큼 중요한 날이다. 상원(上元)이란 중워(中元, 음력 7월 15일, 백중날)과 하원(下元, 음력 10월 15일)에 대칭되는 말이다. 음력 1월 15일(정월 보름날)을 대보름이라 하며, 음력 1월 14일을 작은 보름이라 한다. 민속놀이와 세시 행사들이 가장 많이 행해지는 날이며, 마을신에 대한 大同儀禮, 大同會議, 大同놀이 등이 이때 모두 이루어진다.
정월 대보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땅콩이나 호두를 깨무는 것을 "부럼 깐다"라고 한다. 부럼은 딱딱한 껍질로 된 과일을 말하며 호두나 잣, 땅콩 같은것들이다. 또 "부스럼"의 준말로 피부에 생기는 종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먹을 것도 다양하고 좋은 음식도 많아 부스럼이 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피부에 버짐이 피기도 했다. 그런데 땅콩이나 호두 같은 열매에는 그런 부스럼을 막아주는 영양소가 쌀보다 수십 배나 많이 들어있어 아이들에게 이것을 미리 먹여 일 년 동안 피부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했다. 정월 대보름날 뜨는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소원을 빌며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농부들은 풍년이 들기를 빌곤 했다. 보름날 아침에 집집마다 약밥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다섯가지 이상의 곡식(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섞어 지은 밥을 나누어 먹었으며 세집 이상의 타성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아진다고 전해온다.
14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대보름 행사는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달맞이나 달집태우기를 했다. 밤에 들판으로 나가서, 새싹이 잘 자라게 하고 논밭의 해충을 없애기 위해 쥐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연날리기, 바람개비 돌리기, 실싸움, 돈치기 따위를 즐겼으며, 어른들은 다리밟기, 편싸움, 횃불싸움, 줄다리기, 동채싸움, 놋다리밟기 따위를 했다. 대보름날 밤에는 항상 온 마을이, 때로는 마을과 마을이 대항하는 경기를 집단적으로 즐겼다.
정월 대보름에는 여러 종류의 세시풍속 행사가 벌어졌다. 이는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 민족이 대보름을 풍요의 원점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신라시대부터 지켜 온 명절로 달이 가득 찬 날이라 하여 재앙과 액을 막는 제일(祭日)이다. 정월 14일 저녁에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먹는다. 또한 달을 보면 운이 좋다고 하여 달맞이를 하고 서울에서는 답교놀이를 하였다. 어린아이가 봄을 타고 살이 여위는 것을 막기 위해 백 집의 밥을 얻어다가 절구 위에 앉아서 먹는 풍습도 있었다. 또 새벽에 일어나 사람을 불러서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 하며 더위팔기를 하여 병이 없는 여름이 되길 기원했다.
- 보름밤지키기: 정월 열나흗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해서 잠을 자지 않는다. 자는 아이가 있으면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 놓는다.
- 부럼깨기: 밤, 잣, 호두, 은행 등을 소리나게 깨물어 먹으면 1년동안 이가 강해지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를『부럼』이라 하며, 일 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고 치아가 튼튼해져서 건강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여겼다.
- 귀밝이술(耳明酒): 새벽에 맑은 술, 청주(淸酒)를 데우지 않고 마시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귀가 밝아지고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일년내내 좋은 소식만 있고 귀가 밝아지고 눈이 잘 보인다고 한다. 어린이에게도 귀밝이술을 마시게 한다.
- 보름나물(묵은나물) : 호박고시, 무고시, 외고시, 가지나물, 버섯고사리 등 여름에 말려둔 나물을 삶아 먹는데 이를 진채식(陣菜食)이라고도 한다. 대보름날 이를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하였음
- 다리밟기: 다리를 밟아 건강을 기원한다.
-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 달맞이: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농악대의 상쇠가 악기를 울리면 달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소망을 빌었다.
- 농점(農占) : 달집 태우기, 사발점, 그림자점, 달불이, 소밥주기 등으로 그 해의 풍.흉(豊.凶)을 점친다.
- 소밥주기: 대보름날 아침에 찰밥과 나물을 키에 담아 가지고 외양간에 가서 소에게 준다. 소가 밥과 나물 중 어느 것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 달점: 달의 빛깔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붉으면 가뭄, 허옇게 비추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 불놀이: 깡통 속에 솔방울이나 관솔을 넣어 불을 지핀 뒤 깡통을 빙빙 돌리면 불꽃이 원을 그리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 더위팔이 : 아침해가 뜨기전에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대합하면『내더위』라고 소리친다. 이렇게 자기의 나이만큼 하고나면 더위를 팔아서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 동제(洞祭): 마을 공동체의 신에게 제를 올린다.
- 제의(祭儀)와 놀이 : 지신밟기, 별신굿, 안택고사, 용궁맞이, 연띄우기, 연싸움, 줄다리기, 용잡이, 놀이, 윷놀이, 널뛰기, 걸궁(농악), 햇불놀이, 다리밟기
- 연날리기 : 각가지 모양의 연을 하늘 높이 띄우는 놀이로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주로 즐겼으며 그 해의 재난을 멀리 보낸다는 뜻에서 연줄을 일부러 끊어 띄우기도 하였다.
- 더위팔기․수해쌈․사자놀음․햇불쌈․놋다리밟기
- 오곡밥 : 찹쌀, 찰수수, 팥, 차조, 콩을 다섯 가지 종류의 곡식을 섞어 만든 밥
- 묵은 나물 : 가을이 되면 호박이나 가지, 시래기, 곰취 같은 나물들을 손질해서 겨울 동안 잘 말렸다가 대보름 날이되면 이 나물들을 삶아서 기름에 볶아 먹는다.
- 약식, 부럼, 귀밝이술, 복쌈, 원소병, 팥죽
일군날은 음력 2월 초하루를 말하는데 이날은 《천하지대본》으로 여겨온 농사에서 기초적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일인 밭갈이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서 하나의 민속명절로 쳐왔다.
이조초기까지의 자료에는 일군날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민속명절은 그 이후시기에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농민들은 밭갈이를 시작하기 전에 이날을 쉬면서 집손질도 하고 새해 밭갈이 차비도 하며 민속명절을 지내었다.
농민들은 2월 초하루가 되면 정월 대보름날에 세웠던 오곡낟가리대를 거두고 거기에 달아맸던 낟알을 털어《만석이요》, 《천석이요》하면서 가마니에 넣었다. 이것은 풍년이 들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새해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하나의 행사였다.
다음은 털어낸 얼마 되지 않는 쌀에 다른 쌀을 보태여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일군날에 먹는 송편은 흔히 자기 나이 숫자만큼 먹는다고 하였다.
이날 집안과 뜨락 청소도 깨끗이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날 벽을 바르면 초가집에 흔히 생기는 노래기를 없앨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집안팎을 깨끗이 가셔내고 벽도 바른 다음 서까래위에 《향랑각시 속거천리》(노래기는 빨리 천리밖으로 사라지라)라는 글을 써 붙였다. 이것은 노래기를 싫어하여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농민들의 생각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다. 농민들은 일군날을 농사 준비를 잘하기 위한 민속명절로 지냈다.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날로 음력으로는 대개 2월이 되고 간혹 3월에 드는 수도 있다.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이다.
한식(寒食)은 동지후(冬至後) 105일째 되는 날로 잡는다. 언제나 청명(淸明) 안팎에 든다. 한식때는 조상의 묘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무덤이 헐었으면 떼(잔디)를 다시 입히니 이것을 개사초(改沙草)라 하며, 묘 둘레에 식목도 하게 된다. 한식에는 글자 그대로 더운 밥을 안 먹고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중국 진(晉)나라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간신배에 몰려 금산에 숨어 있었는데, 진(晉) 문공(文公)이 그의 충성을 알고 그곳에서 나오길 명했으나 나오지 않았다. 도리없이 불을 지르고 나오길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안나오고 타죽고 말았다. 그래서 타죽은 충신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 더운밥을 삼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식은 중국에서 전해온 풍속이다. 이즈음에는 새싹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이고 농가에서는 농경준비를 하기 시작하며 식목을 하거나 채소씨를 뿌린다.
중국 진나라에 개자추란 충신이 있었는데 간신(조선시대 사관원․사헌부에 소속된 과리의 총칭)에게 몰려 면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충성심을 안 문공은 그를 찾아갔으나 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산에 불을 놓으면 내려 올줄 알고 불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고 말았고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여 찬밥을 먹는 속이 생겼다고 한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조선의 역대 왕 및 비)와 각 능원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만일 무덤이 헐었으면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라고 한다. 또 묘 둘레에 식목을 하는 것도 이 날이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날 성묘하는 습관은 당나라 때 중국에서 시작하여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숭상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 민속적 권위가 중시되어 조정에서는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근세에 들어와서는 성묘 이외의 행사는 폐지되었다.
또 이날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옛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삼짇날은 3의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음력 3월 3일)로서 3월 3일은 설날(1월 1일),단오(5월 5일),칠석(7월 7일),중구 (9월 9일)와 더불어 중절(中絶)의 하나이다. 강남 갔던 제비도 옛집에 돌아오고 동면하던 뱀도 땅 속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봄철의 시작을 장식하는 명절이다. 이날 흰나비를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한다고 하고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제비를 보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하며 뱀을 보면 운수가 길하다고 한다.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고 호박을 심으면 잘되고 약수를 마시면 연중무병하고 아무리 집안 수리를 해도 무탈하다고 한다. 새싹이 나고 꽃이 피는 삼월에 모든 이가 조를 짜서 산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 하루를 즐기는 것을 화전 놀이 또는 꽃달임이라 하고, 머리를 감으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머리결이 윤기가 나고 소담하며 아름다워진다고해서 부녀자들은 머리를 감는다. 삼짇날 먼저 보는 나비의 빛깔로 나비점을 치는데 호랑나비나 노랑나비를 보면 길조(吉兆)라 하고 흰나비를 먼저 보면 양친 상(喪)을 당한다 하였다.
두견화주, 두견화전, 꽃국수(화면), 수면 등이 있는데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해서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이라 한다. 이런 것들은 시절음식으로 제사에도 쓰인다.
- 4월파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일로서 기록에는 흔히 이날을 《욕붙일》(부처가 태어나서 목욕한 날이라는 뜻), 《불탄일》(부처의 생일이라는 뜻)로 쓰여있다.
이날 불교도들은 절로 찾아가서 불공을 드리고 탑돌이도 하였다. 탑돌이는 절의 탑 주위를 수없이 빙빙 도는 것인데 이것을 하면 죽은 다음에 《극락세계》로 간다는 설교를 믿는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4월초파일을 고려시기에는 불교행사로 맞아왔으나 이조시기에 들어와서는 날자만 그대로이었을뿐 이날에 하는 행사는 민속놀이가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불교를 믿지 않던 농민들은 이날 불교와는 인연이 없는 다른 행사들을 하였다. 함경도의 금야와 황해도의 송화 일대에서는 사자놀이를 하였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여러 지방에서는 탈을 쓰고 농악 놀이를 하였으며 강원도의 김화지방에서는 전날인 7일밤에 지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 등놀이 : 장대에 여러 가지 등을 매달아 놓고 즐기는 것이다. 장대 꼭지에는 꿩의 꼬리를 꽂고 흰 비단으로 만든 깃발을 달았으며 그 밑에는 집안 식구의 수만큼 등을 만들어 달았다. 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었으며 등에는 안녕과 부귀를 염원하는 글자를 썼다.
- 불꽃놀이 : 종이에 화약을 싸서 새끼에 매서 늘여 놓고 한 끝에 불을 달아 화약이 연달아 튀면서 줄불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산에 저절로 자라는 관목인 석남나무잎을 넣어서 만든 증편과 찐 검정콩, 데친 미나리 나물이 알려져 있다.
- 명절의 하나로 5월 5일이다. 단오는 초오의 뜻으로 5월 처음의 말의 날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 한다. 음력 5월은 이른 바에 해당하며 양수, 즉 기수의 달과 날이 같은 수로 겹치는 것을 중요시한 데서 5월 5일을 명절날로 한 것이다.
음력 5월 5일을 천중절(天中節) 또는 수릿날 또는 중추절(天中節)이라고도 부른다. 단오는 1년 중에서도 큰 명절로, '단'(端)은 끝과 처음이라는 뜻이 있고 '오'(午)자는 5(五)자와 음이 통하여 단오란 '초닷새'라는 뜻이 된다.
고대 중국의 음양 사상에서 홀수를 양으로 치되, 5월 5일은 양기가 가장 왕성한 천중가절로 쳐왔다. 실제로 이때는 오랜 겨울을 보내고 신록이 우거지는 부활의 계절이며 쑥이나 익모초(益母草) 등 약초를 뜯어도 약기운이 제일 많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는 이 날 쑥을 뜯어서 만들어 먹는 쑥떡이 수레바퀴 모양이기 때문에 수릿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수리'란 위, 높은 곳, 봉우리, 산 등의 뜻이 있으니 수릿날이란 윗날, 신의 날이란 명절의 뜻을 가진 옛말이라는 주장에 더 수긍이 간다.
옛날부터 5월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로 접어드는 달로 나쁜 병이 유행하기 쉽고, 여러 가지 액을 제거해야 할 나쁜 달로도 보아, 그 예방초치로서 여러 가지 미신적인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이날에 약초를 캐고 창포를 문에 꽂아 두기도 하며, 창포주나 웅황주라는 약주를 마셔 재액을 예방하려 하였다. 또, 쑥으로 인형(호랑이)를 만들어 인형을 문에 거는 등 고래의 풍습으로 보아, 약초․창포․쑥 등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대나무통에 쌀을 넣 고 소태나뭇잎으로 감아 물 속에 던졌던 풍습이 변하여, 지금 대나무 잎으로 싸서 찐 떡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날은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삿날인 5월제의 유퓽으로 보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며 차륜병이라 하여 수리취를 넣어 둥글게 절편을 만들어 먹는다.
이 날 여자들은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에서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홍색, 녹색의 새옷을 입는다. 창포 뿌리로 비녀를 깎아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소담스럽고 윤기가 난다고 하는데, 이 창포탕에 쑥을 넣어서 삶기도 한다. 또 단오날 오시(午時)에 익모초, 쑥을 뜯어 말려 두었다가 일 년 내내 약용으로 쓰는 풍속이 있다. 여름에 익모초를 달여서 즙을 먹으면 매우 쓰지만 식욕을 얻는다고 해서 민간의 약으로 태고적부터 동서양에서 써왔다.
단오날은 연중 가장 양기(陽氣)가 많은 날이라 했다. 또한 지금은 없어졌지만 단오 차례라고 하여 각 집에서는 이른 아침에 여러 가지 제물을 가묘에 괴고 제사를 지냈다. 고을에서는 중앙에 있는 관리에게 부채를 바쳐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조정에서는 헌납받은 부채를 하사했다. 궁중의 내의원에서는 제호탕을 만들어 왕께 바치면 신하에게 하사하여 여름 더위를 막도록 해주었다. 여자들은 그네뛰기, 남자들은 씨름을 즐기고, 혼인한 여자는 친정 나들이를 하였다. 단오 때의 음식으로는 수리치떡, 앵두 화채, 준치국, 붕어찜, 제호탕, 앵두편, 도행병, 준치 만두가 있다. 또 항간에서는 장을 담그기도 한다.
남자들은 씨름과 활쏘기를 하여 승부를 겨뤘고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하여 단오 명절의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강릉단오제와 법성포단오제 등이 유명하다.
- 놀이
그네뛰기, 씨름, 탈춤, 사자춤, 가면극
▶ 의미
- 음력(6월15일)을 '유두절'이라고 해서 신라 때부터 내려온 '유두'의 풍습이 있다. 이날 남자,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찾아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였다. 이것으로 모든 액을 풀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두연'이라고 해서 잔치를 베푸는 풍속이 이어져 왔었다.
음력 6월 15일은 유두일이라고 한다. 유두는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이란 말에서 나온 약자이며, 풍속은 신라시대에서 온 것이다. 고려시대에 씌여진 「동도유속집(東都遺俗集)」에 "6월 보름을 유두일이라 하고 맑은 개울에서 멱을 감고, 궂은 것을 털어버리고 선비들은 유두 음식을 차려 물가에서 풍월을 읊는 유두연을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하는일
이날에는 삼복이 끼어 있는 무더운 한여름이니 유두일에는 맑은 개울물을 찾아가서 목욕하고 머리를 감아 하루를 청류(淸遊)한다. 유두의 풍속은 신라 때에도 있었으며 동류(東流)에 가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은 청(淸)이요 양기가 가장 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인들은 약수를 찾아 머리를 감고 물맞이를 하며 놋솥에 밥을 지어 제를 드린다. 그러면 액(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참외등을 따고 국수와 떡을 만들어 그 동안 농사를 잘 보살펴 준 조상이나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의 의미로 사당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를 유두천신이라고 한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강했던 옛날에는 새 과일이 나도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조상에게 올린 다음에 먹었다. 유두날엔 찰떡이나 밀떡을 해 논이나 밭에 가서 한 덩이씩 놓고 농사가 잘 되기를 빌기도 했었다. 이것으로 옛 어른들이 얼마나 농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갔는지 잘 알게 해 주는 풍습임을 알수있다. 유두날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고 건강하게 여름을 날수 있다고 생각해서 또 밀가루를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 물감으로 알록달록 색을 입혀 예쁜 색실에 꿰어차고 다니면 나쁜 액을 막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 이야기
한창 더운 계절에 들어 있는 음력 6월은 "썩은 달"이라고 했는데 비도 자주 오고 더위가 가장 심해 음식도 금방 변해 썩은 달이라고 한다. 농사일로 눈코 뜰새없이 바쁜 백성들이 모처럼 몸을 씻고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시간이 된 명절이 바로 이날이다. 보통 때에는 여자들이 밖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는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두날만큼은 얼마든지 씻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 유두의 절식
유두 무렵에는 참외, 수박 등의 과일이 새로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전(水團), 밀전병 등의 각종 떡이 있는데 국수도 아울러서 이들을 먼저 조상신들게 올리니 이것이 유두천신(流頭薦新)이었다. 사당에 유두날 전후로 나온 햇과일인 참외, 오이, 수박과 떡을 빚고 국수를 말아 사당에 제를 올리는 유두천신을 하고 나면 식구들이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날 먹는 수단이라는 것은 멥쌀가루를 쪄서 만든 떡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는 것이고, 밀전병은 빈대떡처럼 부친 것이다.
- 유두면 : 햇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 같은 모양의 국수를 만들어 5색으로 물들이고, 3개씩 포개어 색실에 꿰어 맨 것인데, 악신을 쫓는다 하여 몸에 차거나 문짝에 달기도 하였다.
- 수단 : 쌀가루를 쪄서 길게 빚고, 또 가늘게 썰어서 구슬같이 만든 다음, 꿀물에 담가 얼음물에 넣어서 먹는다.
- 건단 : 위 수단을 얼음에 넣지 않고 먹는다.
- 연병
우리나라의 4계절 가운데 초복, 중복, 말복이 지나는 30일 동안은 장마 뒤여서 습기가 많은 때이고, 섭씨 30도에서 35도로 더위가 심할 때이다. 하지후(夏至後)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넷째 경일(庚日)을 중복(中伏), 입추후 첫 경일(庚日)을 말복(末伏)이라 하고 이 셋을 통틀어서 삼복(三伏)이라고 한다. 따라서 복은 10일에 한 번씩 오지만 말복은 입추 관계로 20일만에 오는 경우가 많다. 절기상으로는 가장 힘겨운 농사인 김매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산의 물가에 가서 복놀이를 하며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더위를 잊고, 오행의 원리로 열이 있는 것을 먹음으로써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보양하였다. 복음식으로 삼계탕, 개장국(보신탕), 닭죽, 육개장, 임자수탕, 민어국, 팥죽 등이 있다. 삼계탕과 보신탕은 조선 후기의 기록인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열량세시기」에 전한다.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삼복(三伏) 조(條)에 보면 관심은 개장(狗湯)에 집중되어 있다. 개를 삶아 피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개장이라 한다.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국에 고cnt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서 시절 음식으로 먹는다. 그렇게하여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것을 보충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허해지기 쉬운 때의 가장 손쉬운 우리의 영양보급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또한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대추와 찹쌀을 넣고 삶아 먹는 삼계탕(蔘鷄湯)도 만들어 먹었으며, 복날에 팥죽을 먹는 것도 있는데 팥죽은 무더운 복중에 악귀를 쫓고(적소두죽(赤小豆粥)이라 하여 붉은팥으로 죽을 쑤어 동지와 같은 의미로 잡귀를 빨간색으로 쫓아 열병을 예방하였다) 무병하려는 데서 나온 풍속이다. 이때 팥죽에는 찹쌀가루로 빚은 새알심을 넣어 끓였다.
복날에는 벼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속언이 있는데 절기상으로 벼이삭이 패기 직전이어서 생긴 말이다.
백종날은 음력 7월15일로서 기록에 《백중》, 《망혼일》, 《중원》으로도 쓰여있다. 이러한 명칭들은 7월15일 명절의 행사내용과 전설들에 기초하여 나온 것이다. 백종이라는 것은 백가지 종류라는 뜻으로서 백가지 꽃과 과일을 부처에게 공양한다는 것이다.7월 15일쯤 되면 논김을 다 매고 난 뒤여서 농밀들의 발뒤굼치가 닳고 씻겨서 하얗게 된다는 뜻에서 白腫(백종)이라고도 썼다. 백중이라는 말은 백종이 발음상 와전된 것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에는 백중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중이라는 소몰이 아이가 소를 먹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내려왔다. 백중이 숨어서 살펴보니 옥황상제가 〈거북아〉하고 거북이를 찾더니 〈거북아, 오늘 밤 석자 다섯치의 비가 내리게 하고 바람이 많이 불게 하라!〉고 그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남기고 옥황상제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백중이 가만히 생각하니 큰일이 날 것 같아 꾀를 써서 옥황상제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거북이를 불러세우고 〈비는 다섯치만 내리게 하고 바람은 불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한편 옥황상제가 굽어보니 자기가 명령한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중이를 잡아올리라는 명령이 내렸다. 백중은 이미 각오한 바대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러한 백중의 희생적인 노력의 결과로 그 해에 풍년이 들었다. 농민들은 백중을 기념하여 그가 죽은 날을 백중절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가을철의 첫 민속명절로서 백종날에 하는 큰 민속행사는 김매기를 끝낸 기쁨을 축하하는 호미씻기었다.
호미씻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김매기를 끝낸 다음 호미를 깨끗이 씻어둔다는 뜻으로서 이날을 계기로 농민들은 호미를 모두 깨끗이 씻어서 광이나 허청간에 걸어두었다. 호미씻기는 힘든 김매기를 끝낸 기쁨을 나누고 축하하며 이웃사이에 서로 협조하고 친목을 도모하는데서 좋은 계기로 되었다.
호미씻기가 끝난 다음 여성들은 곧 길쌈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백종날은 김매기를 마감하고 다음 농사와 길쌈으로 넘어가는 계기로 되는 날이었다.
- 음력 7월 7일에 행해지는 행사
음력 7월 7일은 칠석(七夕)이라고 부르며,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오작교(烏鵲橋)를 통해 1년중 단 한차례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날이다. 칠석날에는 은하수에 까치와 까마귀가 오작교를 놓고, 동쪽의 견우성과 서쪽의 직녀성이 만나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느라 대체로 날이 흐리고, 비가 온다고 한다.
칠월 칠석날에는 주로 비가 오거나 흐린 경우가 많은데,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또 이 무렵은 바쁜 농사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더위도 한풀 꺽이는 때라 여름 내내 입었던 옷을 빨아 햇볕에 말리는데 이날 옷과 책을 말리면 일 년 내내 좀을 먹거나 상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 밖에도 칠석날은 가진 고추 등 햇것을 맛보는 날이었다.
이 날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밀가루 음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는 음식으로 마지막으로 밀 음식인 밀국수와 밀전병을 만들고 또 햇과일을 차린다. 잉어를 재료로 음식을 만들며 오이 김치나 복숭아, 수박으로 과일 화채를 만들어 먹는다.
부녀자들은 마당에 바느질 차비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문인들은 술잔을 교환하면서 두 별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또한 볕이 좋을 때 옷과 책을 말린다. 집집마다 우물을 퍼내어 청결히 한 다음 시루떡을 해서 우물에 두고 칠석제 또는 칠성제라고 해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빈다.
이날 처녀들은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고 소년들은 학업성취를 빌었으니 칠석날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젊은이로 하여금 소원을 이루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빈다. 마을에서는 서낭당 등에서 자녀의 무병과 장수를 빌기도 한다. 장마가 지난 때라 그 동안 축축해진 옷과 책을 볕에 쬐는 거풍(擧風)의 풍속이 있다.
먼 옛날 옥황상제에게는 직녀라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 종일 베짜는 일만 하며 살고 있었다. 직녀가 짠 옷감은 정말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어느날 직녀는 베 짜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창밖을 내려다 보다가 무심코 은하수 건너편의 청년을 보고 첫 눈에 반해 곧 옥황상제에게 달려가 그 청년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하자 옥황상제는 견우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터라 곧 혼인을 시켜 주었다. 결혼후 두 사람은 너무 사랑해 잠시도 떨어져있으려 하지 않아 둘 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하늘 나라 사람들은 옷이 부족해지고 견우의 소와 양들은 병에 걸려 앓고 농작물들도 말라죽어 하늘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땅의 세상도 어지러워졌다. 옥황상제는 몹시 화가나 직녀는 서쪽에서 베를 짜고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서 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용서를 빌었지만 옥황상제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대신 일년에 딱 한번 음력 칠월 칠일 한번 만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칠석날이다. 그러나 견우와 직녀가 일 년을 기다려 만나기 위해 나왔을 때에는 은하수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만나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까마귀와 까치들은 너무 불쌍해 곧 서로의 몸을 이어 다리를 만들어 두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다리를 오작교라고 한다.
견우성과 직녀성의 두 별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있었다. 두 별은 서로 사랑을 하지만 마주 바라만 볼 뿐 은하수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은하수에 다리만 있으면 자주 상봉하여 사랑을 나눌 수가 있겠으나 다리가 없는 것이 늘 원망스러웠다.
견우와 직녀의 딱한 사정을 알고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지상에 있는 까치와 까마귀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으니, 이것이 오작교(烏鵲橋)이다.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한 번 소원을 이룬다. 그러나 사랑의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새벽 닭이 울고 동쪽이 밝으면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다시 1년을 떨어져서 보내야 한다.
칠석날 지상에는 까마귀와 까치는 한 마리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 하늘에 가서 오작교를 놓는데 참여 못하는 것들 뿐이었다.
- 음력 8월 15일을 중추절, 한가위라고 부른다. 한가위는 옛부터 전해오는 큰 명절로서 춥지도 덥지도 않고 높고 맑은 하늘, 풍성한 과일과 햇곡식을 모아 놓고 저녁이면 동산에 둥글게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온가족이 즐겁게 모이는 날이다.
처음에는 가배•가위라 칭해지다가 한문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중추․추중․칠석․월석 등을 사용하였으며 뒤에 정리되고 합해져 추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8월 보름날을 추석(秋夕), 한가위, 가위, 중추절 또는 가배일(嘉俳日)이라 하여 정월 명절과 더불어 제일 큰 명절이다. 예로부터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하여 바쁜 일손을 잠시 쉬는 1년 중 가장 즐거운 명절이었다.
이때는 이 달에는 추분(秋分)이 들어 있고, 농사일도 거의 끝나서 햅쌀과 햇과일이 나오기 시작하므로 햇곡식을 먹을 수 있으며, 과실도 풍성하고 달도 가장 밝았다. 하늘은 높고 날씨는 쾌청하여 예부터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추석에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햅쌀로 밥도 짓고 송편을 빚고 술도 빚어 신도주(新稻酒)라 하여 조상께 수확의 기쁨을 추석 차례로써 알린다.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성묘와 벌초로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다. 객지에 분산되었던 가족들도 고향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맞이한다.
새옷 차림으로 차례를 지내고 음복하고,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은 다음 집안 식구가 산으로 성묘간다. 추석날에 남자들은 씨름판에서 힘을 겨루고, 여자들은 널뛰기를 한다. 저녁에는 식구가 평상에 앉아 둥근 달을 보며 담소하고, 남쪽 지방에선 강강술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에 여섯 부락의 여자들을 두패로 나누어 칠월 보름부터 팔월 보름까지 길쌈짜기 시합을 하게 하여 이긴 편은 상을 주고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이긴 편에게 대접하게 하면서 가무와 유희를 즐겼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고 하였으며, 이 때 부른 노래는 회서곡(回蘇曲)이라고 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길쌈의 공동작업은 영남지방에 그 풍속이 남아 있다.
추석은 민족 대명절이 되어 객지의 자손들이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해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는 아름다운 풍속으로 정착했다.
추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의 큰 명절로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다.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 "일 년 열두달 3백 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말이생길 정도였다. 음력 8월 15일 추석을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때 길쌈 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 유리왕때 한가위 한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 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다. 새로나온 과일과 곡식으로 차례상을 차려 드려 한 해에 거둬들인 것을 보고들이고 아침을 먹은 후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하러갔다. 우리의 명절인 추석은 즐겁고 신나는 날인 동시에 그런 즐거움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은 날이기도 하다.
- 벌초 : 대개 추석전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서 풀을 베는 풍속이다.
- 송편 : 햅쌀로 빚은 달떡으로 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 그해 수확한 것을 쓴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밉게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하여 총각․처녀들은 솜씨를 뽐낸다.
- 강강수월래 : 남도지방 풍속으로 추석날 밤에 하는 부녀자들의 놀이다.
지역마다 특색있는 추석놀이가 있는데, 전라도는 강강수월래, 경기도와 충북은 거북놀이로 유명하다. 여유있는 집에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농사에 꼭 필요한 소(牛)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소의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전라도에선 '올게심니'라 해서 추석을 전후하여 잘 익은 벼나 수수․조의 목을 모아 기둥이나 방문에 걸어두고 다음 해의 풍년을 빌기도 했다.
- 강강술래 : 남해안 일대에 전승되어 오는 민속놀이로 주로 팔월 한 가위에 여성들이 노는 놀이인데 , 여성 놀이 중 가장 정 서적이며 율동적인 놀이이다. 수십 명의 부녀자들이 손을 맞잡고 둥그런 원을 지어 무리를 이루고 이 들 중에서 목청이 빼어난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뒷소리를 받으면서 춤을 춘다. 노래는 처음에 느린 가락의 진양조로 시작하다가 점점 빨라져 춤동작도 여기에 따라 변화한다. 이렇게 노래가락에 맞추어 여러 형태로 원을 변형시키며 고사리꺾기, 덕석몰이, 청어엮기, 문열기, 기와밟 기, 가마둥둥, 닭살 이, 남생이 놀이 등 재미있는 춤놀이를 벌이는 것이다.
- 씨름대회, 활쏘기 대회, 농악. 거북놀이
정월 차례 때의 떡국 대신 햅쌀밥과 편 대신 송편을 놓는다. 주, 과, 포, 탕, 적, 혜, 나물, 침채(김치), 청장을 정해진 굽이 있는 제기에 담고, 위치는 가풍이나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차린다. 8월의 시식으로는 오려 송편, 햇과일, 토란탕, 송이버섯 요리, 배숙, 화양적, 느르미적 등이 있다.
-송편 : 떡의 한지로 맵쌀가루를 끓는 물로 반죽하고 깨, 팥, 콩, 밤등으로 만든 소를 넣어 반달모양이나 모시조개모양으로 빚어 솔잎(소나무) 위에 놓고 쪄서 찬물에 헹군 다음 건져 참기름을 고루 바른다.
음력 9월 9일은 삼짇날에 왔던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는 날로써 중구(重九) 또는 중양(重陽)이라고 부른다. 중구란 말은 9가 겹쳤다는 뜻이고, 중양이란 홀수인 숫자가 2개 겹쳤다는 뜻이다. 즉 양수(陽數)가 겹쳤다는 뜻으로 3월 3일의 삼짇날, 5월 5일의 단오 같은 음양철학적인 중일명절(重日名節)의 하나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구에 대하여 《단풍이 들고 국화가 피는 시절에 남녀가 유람하는 것이 대체로 화류놀이와 같은데 양반들 가운데 옛날 풍속을 좋아하는 자는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구에 노는 것이 화류놀이와 같다고 한 것은 꽃과 버들이 피는 봄날의 놀이인 삼월삼질놀이와 같다는 것이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 때부터 시작된 풍습으로 술친구를 찾아가거나 술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선비들은 단풍을 주제로 시를 짓고, 부녀자들은 내방 가사를 읊고 농부들은 농악을 울리며 즐겼다. 이날 각 가정에서는 화채와 국화전, 국화주를 만들어 먹었다. 사람들은 산이나 계곡을 찾아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하여 하루를 단풍놀이로 즐겼는데, 요즈음 학교 가을소풍의 유래라고 볼 수 있다.
1년의 마지막 날인 음력 12월 30일을 섣달 그믐 또는 제석(除夕), 제야(除夜)라 부른다. 이날 저녁에는 1년도 다 지나간다는 인사로 사당과 어른을 찾아가 묵은세배(구세배, 舊歲拜)를 하였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도 하였다. 밤에는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하여 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를 해지킴(수세,守歲)라고 하였다.
집 안팎을 깨끗이 대청소하여 묵은해의 잡귀와 액을 물리치고 신성하게 새해를 맞이하였다. 또한 1년 중에 있었던 거래의 종결을 맺으니 외상값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다.
11월중에 동짓날이 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옛날에는 동짓날을 작은 설이라고 불렀을 만큼 명절로 삼았다.
음력 11월을 동지달이라고 하며 이 달안에서 밤이 제일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을 동지날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하지에 낮이 제일 길어졌다가 점차 줄어져서 동지날에 이르러 가장 짧아지며 다음날부터는 다시 조금씩 길어지며 밤은 점차 짧아진다. 이처럼 낮과 밤 시간이 반대로 바꾸어지는 변화를 경사로 기념하기 위하여 이날을 민속명절로 쇠기 시작하였다.
중국 진나라에 공공이라는 사람에게 골칫덩어리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날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짓날 공공의 말썽장이 아들이 그만 죽었는데 죽은 아들이 그만 역질(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지금은 예방 주사를 맞으면 걸리지 않는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 작없이 앓다가 죽는다) 귀신이 되었다.
그러자 공공은 내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공공은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써서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려 놓았더니 역질 귀신이 공공의 집에 와서 팥죽을 보더니 달아나 버렸다. 그 날 이후로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게 되었다.
팥은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색을 지닌 것이이라 옛날 사람들은 귀신은 밝은 것, 즉 붉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색이 있을 때 달아나거나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 아기를 낳은 집에 붉은 고추를 새끼줄에 꿰어 놓는 것도 그렇고 또 귀신들이 소녀를 좋아한다고 해서 소녀들은 봉숭아 꽃잎을 찧어 손톱에 빨갛게 물들이게 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요즘도 남아 아기들의 백일이나 돌에 수수 팥떡을 한다. 그런데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이전에 들면 "애동지"라고 해서 팥죽을 쑤어 먹으면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팥죽을 쑤어 먹지 않는다. 동짓날 팥죽을 먹지 않으면 귀신을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쉽게 늙고 잔병이 많이 생겨 일년 내내 몸이 불편해진다고 생각을 하기때문에 이런 풍습은 오늘날까지도 잘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 팥죽 : 액을 막고 잡귀를 없애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팥을 푹 삶고 거기에 흰쌀을 넣은 다음 물을 많이 붓고 꿇이였다. 이때 찰떡을 새알같이 빚어넣고 쑤었다. 이 떡을 새알심이라고 하는데 동지날 새알심을 자기 나이만큼 먹어야 몸이 건강해 진다는 말이 전하여온다. 또한 동지에 팥죽을 먹으면 감기를 앓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 냉면, 신선로
2. 김치
1. 김치의 구수한 맛과 영양의 균형을 위해 국물김치를 담을 때는 양지머리 고기를 푹 삶아 창호지나 한지에 밭혀 기름을 제거한 맑은 육수로 김치 국물을 만들고, 풀을쑬때는 물대신 다시 국물과 콩물을 내어 사용한다.
2. 김치를 담을때 통고추를 분마기에 갈아서 사용하고 통홍고추가 없을 계절에는 마른 통고추를 분마기에 갈아 사용하거나 고추가루와 함께 사용하여 김치가 빨리 무르지 않고 빛갈도 곱고 맛도 깊다.
3. 멸치가루, 다시국물, 콩물, 육수, 액젓 등을 사용하여 김치가 구수하고 맛갈스러우며 깊은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거지가 잘생기지 않는다.
- 1300년의 역사를 지닌 김치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주식이 된 곡물의 영양균형을 위해 비타민과 미네랑이 풍부한 채소를 먹게 되었는데, 채소생산이 어려운 추운 겨울철에도 이용할 수 있는 염장이라는 사용방법이 자연발생적으로 개발되었다. 한국은 7세기부터 염장에서 비롯된 김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치 어원은 현재까지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중국시경(詩經)에서 ‘저(菹)’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으며, 우리민족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순무’에 관한 기록으로 ‘순무’가 소금에 절인 김치류가 있었다는 것을 문헌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삼국의 농경문화 생활권에서 김치무리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으나 정확한 문헌과 자료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김치를 의미하는 옛말은ꡐ디히'와•지'인데•지'는 지금까지도 김치의 다른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상고시대에는 김치를ꡐ저(菹)'라는 한자어로 표기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김치•젓갈무리인•저해'가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저'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지(漬)', `염지(鹽漬)', `지염(漬鹽)', `침채(沈菜)', `침저(沈菹)', `침지(沈漬)', `엄채(掩菜)', `함채(鹹菜)' 등이 김치무리로 표기되었다. `저'란 날채소를 소금에 절여 차가운 데 두고 숙성시킨 김치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19세기초의 저서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선보이고 있다.
김치의 어원을 살펴 보면, 고려 시대의 김치류에는 지금과는 달리 고춧가루나 젓갈, 육류를 쓰지 않았다. 소금을 뿌린 채소에 천초, 마늘, 생강 등의 향신료만 섞어서 재워두면 채소에 있는 수분이 빠져 나와 채소 자체가 소금물에 가라앉는 침지 상태가 된다. 이 때문에 '침채'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의미의 ’침채(沈菜)‘는 ’팀채‘, 혹은 ’딤채’로 발음되었는데 조선 중중때의 '벽온방'에 "딤채국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 하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저'를 우리말로 '딤채'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국어학자 박갑수는 김치의 어원에 대해, '침채'가 '팀채'로 변하고 다시 '딤채'가 되었다가 구개음화로 인해 ‘짐치’가 되었다가 오늘날의 ‘김치ꡑ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김치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조로 “고구려인은 술빚기, 장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고 씌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저장발효식품을 생활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ꡑ에는 신문왕이 683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품목 가운데 간장, 된장, 젓갈류가 들어있어 발효식품이 널리 퍼졌음을 알려준다.
즉 김치류는 3000년 전부터 조선의 중종 22년(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ꡐ저(菹)ꡑ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저(菹)'를 '딤채 조'라고 하였다는 내용과 채소를 소금에 절여 두면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 나와서 소금물이 되고 채소는 소금물 속에 침지 되므로 여기서 "침채(沈菜)"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침채)沈菜"가 "팀채" 로 변화여 "딤채"로 변화되어 구개음화 하여 "짐채"가 다시 구개음화의 역현상이 일어나서 "김채"로 변하여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이 이론에 근거하여 "침장(沈藏)"이 김장으로 되었다고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침장(沈藏)"을 김장으로 "침지(沈漬)"는 김치로 변화되어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제조방법이 변천되어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치류는 무를 주원료로 한 동치미, 짠지, 장아찌가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와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한 김치류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즉, 배추와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보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채소를 즐겨 식용하였고 소금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사실, 젓갈과 장 등의 발효 식품이 만들어진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치무리가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김치무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동이전"고구려조이다. “고구려인은 술빚기, 장 담기, 젓갈 등의 발효 음식을 매우 잘한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이미 저장 발효 식품이 생활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문왕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품목 가운데 간장, 된장, 젓갈무리가 들어 있어 발효 식품이 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에도 소금에 절인 김치와 젓갈이 나오지만 양념이 가미된 담금 형태의 김치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에 산출된 채소인 순무, 외, 가지, 박, 부추, 고비, 죽순, 더덕, 도라지, 고비 등으로 소금에만 절인 것이 주된 김치무리였을 것이다. 그밖에 이들 채소를 장에 절인 형태, 초에 절인 형태, 술지게미에 절인 형태, 소금과 곡물 죽에 절인 형태 등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런 절임법은 오늘날의 장아찌형으로 우리나라는 풍부한 해산물과 양질의 채소, 훌륭한 발효 기술로 장아찌형 김치무리와 생선, 곡물, 채소, 소금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자미식해, 북어식해 같은 식해형 김치무리가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백제 문화로서 서기 600년경에 창건된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100센티미터 이상 되는 대형 토기들이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승려들이 생활하였던 곳에서 출토되었다. 크고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대형 토기는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며 삼국시대 김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 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시대 성덕왕 19년(720)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법주사 경내에 있는 큰돌로 만든 독은 김칫독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김치무리를 만들어 저장한 것으로 생각하면 김장의 기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고려 초기는 사회 전반에 숭불 풍조가 만연하여 육식을 절제하고 채소요리를 선호하였다. 전시대의 김치 형태에서 순무, 무, 가지, 오이, 부추, 미나리, 고비, 아욱, 박, 고사리, 도라지, 토란, 대산(大蒜),죽순, 형개, 동과(冬瓜,동아), 산갓, 황과, 산추, 파, 생강 등으로 재배 채소의 종류가 더욱 많아지고 나박지형의 김치가 선보인 것이 특징이다.
김치에 있어 절임 형태의 김치무리와 함께 새롭게 개발된 국물 있는 김치무리 곧 동치미류가 등장하여 분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 시기에도 단순 절임형 김치무리에 마늘 등의 양념과 천초, 피, 귤피(橘皮) 등의 향신료가 가미되는 양념형 김치무리가 등장하게 된다.
"동국이상국집"의 "가포육영(家圃六泳)"에는 “무청을 장 속에 박아 넣어 여름철에 먹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장아찌와 김치가 분리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겨울을 대비한다는 것으로 보아 김장의 풍습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소금에 절인 김치류는 오늘날의 짠 무를 물에 희석하여 먹는 나박지, 동치미 등의 침채류를 생각할 수 있다.
고려 말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는 “여귀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 절임을 하였다.”는 구절이 있어 김치무리 야생초를 이용하여 제철 김치의 맛을 즐겼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또 "목은집(牧隱潗)"에 나오는 이색의 시구에 ‘침채(沈菜)', ’산개염채(山芥鹽菜)', ‘장과(藏瓜, 된장에 담근 오이장아찌)' 등이 나온다. 여기에서 김치란 우리말의 직접적인 한자 표기인 ‘沈菜'가 선보이고 있으며 장아찌가 문헌상으로 처음 소개되고 있다. 한편 "고려사"-"예지(禮志)"에 ‘근저(미나리 김치)', ’구저(부추김치)', ‘청저(나박김치)', ‘순저(죽순김치)', 등의 김치무리가 있었다. 이러한 제향음식(祭享飮食)과 관련되는 김치류 외에도 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 사회에서의 김치는 앞서 밝힌 채소류가 주원료로 쓰인 단순 절임형 김치무리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며 그 밖에 장아찌형, 나박지형 김치와 양념이 가미된 김치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김치의 원료에 있어 배추가 주재료로 된 통배추김치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쓰여진 숭채(배추)는 약용으로 사용되었고 김치로 이용된 문헌상의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배추김치의 보편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조선 초기의 김치
조선시대에는 초기 문예진흥책과 더불어 정엽, 인쇄술, 천문학, 등의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였다. 따라서 채소류의 재배도 더욱 풍성해지면서 김치류의 제조도 활발해졌고 인쇄술의 발달에 따른 농서(農書)의 폭넓은 보급 덕분에 채소 재배 기술이 향상되었다. 또 외국에서 여러가지 채소가 유입되어 김치 재료가 다양해졌고 여러형태의 담금법도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조리 방법을 기록한 여러 문헌에는 순무, 무, 오이, 가지, 동아, 산갓, 죽순, 파 등이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고 있다. 김치는 각 지역 산물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향토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꿩(생치,生稚)이 김치의 재료로 이용되는 등 채소에 육류가 가미된 형태를 보여 주기도 한다.
김치는 단순 절임의 장아찌형과 싱건지 형태의 김치가 있으며 나박지형, 동치미형 물김치까지 등장하고 있다. 김치의 국물색을 낼 때는 맨드라미나 잇꽃, 연지 등으로 붉은 색을 내기도 하였다. 또 김치에 양념 사용이 많아져 주재료와 부재료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 조선 중기 이후의 김치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상업의 발달에 따라 상품 작물의 재배도 활발해졌다. 각종 전래 채소와 과수 재배, 원예 작물과 약초가 널리 보급되었고 이것들이 김치의 주재료, 부재료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래 식품으로는 호박, 고추, 옥수수, 고구마, 동아, 사과, 수박 등인데 특히 17세기 초에 유입된 고추는 우리 식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고추가 김치 양념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담백한 맛의 김치무리가 조화미(調和味)로 바뀌게 되었고 주재료와 양념 재료의 종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고추는 "지봉유설(芝峰類說)"(1613년경)에 그 기록이 보이나 김치에 이용되었다는 문헌기록은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에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면서 젓갈이 다양하게 쓰이게 되었다. 식물성 재료에 동물성 재료를 첨가하여 맛과 영양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으며 김치의 감칠맛을 더욱 향상시켰다.
김치의 주재료도 배추와 무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특히 김치의 대명사인 통김치는 배추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져 반결구형, 결구형 배추가 등장하기 시작한 19세기부터 대표적인 김치가 되었다. 김치 담그는 법도 장아찌형, 물김치형, 소박이형, 섞박지형, 식해형 김치 등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고 제조방법도 퇴렴하여 김치를 담는 2단계 담금법으로 발전하였다.
대략 고려시대의 절임형 김치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던 단순한 양념이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사용한 김치 담그는 법으로 발달하여 보편화 되기 시작한다. "음식디미방"(1670년경)은 마늘 김치에 천초가 양념으로 사용되었고 또 육류인 꿩을 오이와 함께 담근 생치 김치가 기록되어 있다.
1766년경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에 무려 41종의 김치무리가 다양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어 대단히 귀중한 문헌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책에는 오늘날 김치의 대명사인 배추김치가 `숭침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 배추김치는 생선과 고기가 곁들여진 것이 특이하다. 또 무의 뿌리와 잎이 한데 붙은 채로 담근 오늘날의 총각김치의 원형이 선보이며 가지, 오이의 세 면에 칼집을 내서 고춧가루와 마늘을 양념으로 하여 소를 채운 소박이형 김치, 배추를 무와 한데 섞어 담근 섞박지, 동치미 등이 문헌상 처음 소개되고 있다.
놀랍게도 배추나 무 등을 익혀서 김치를 담가 치아가 좋지 않은 노인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한 숙(熟)김치도 있다. 그밖에 채소에 곡물과 생선, 소금으로 숙성시켜 만든 식해형 김치, 새우젓을 사용한 젓갈김치, 초절이김치, 짠지 등 다양한 형태의 김치무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헌상 고춧가루가 김치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하며, 김치를 땅속에 묻은 독 속에 꼭꼭 눌러 담아 보관하면서 숙성시킨 발효 김치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주고 있어 김치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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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꾼다 우리 밭농사는, 마치 아이 안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긁어주고 어르듯이 정성을 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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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는다. 재료를 다듬는 순간부터 음식에 손맛이 들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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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는다. 모든 푸성귀는 세벌 씻고도 맑은 물에 여러 번 헹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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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다. 우리나라는 채소를 조리할 때 가급적이면 쇠칼로 써는 것을 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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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우리 음식의 조리에서 `간다’는 동작은 마술처럼 정교하고 신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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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인다 `절인다’는 것은 조금씩 서서히 간을 배게 하는 과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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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근다. 김치 맛의 오묘함은 양념들의 다양한 배합에 따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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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힌다. 한국 특유의 `삭은 맛’은 음식의 발효로부터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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갊는다. 응달에 놓인 독은 김치를 서늘하게 보존하는 데 가장 알맞은 그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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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다. 흙의 단열효과를 이용해, 오래 보관하는 김치독은 땅에 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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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는다. 짚은 보온 보습 통풍성이 뛰어나, 채소류의 보관재료로서 |
3. 한복
한복은 우리 나라의 옷이 다.
한복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한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고구 려 시대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속 벽화에서였다.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시대의 의상과 불 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한국의 왕과 몽골족 공주와의 혼사로 중국 용안시대의 옷이 한국에 들어왔고, 그것이 한복의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한복은 시대에 따라 저고리 길이, 소매통 넓이, 치마폭이 약간씩 달라질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즉 한복은 둥글고, 조용하고, 한국의 얼을 담고 있다. 실크나 면, 모시로 주로 만들어졌으며, 고름의 색상이나 소매통 색상이 여자의 신분을 나타낸다. 또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 계절 에 따라 색상에 변화를 줄뿐 옷의 모양은 안동의 시골아낙이나 대통령부인이나 모두 똑 같다. 18m의 원단에도 불 구하고 가볍고, 입기 쉬운 점이 한복의 장점이다. 명절과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 주로 입 혀진다. 한국에는 약 오만개의 제작업체가 있으며, 발행부수 만 부가 넘는 한복 전문잡지 도 다수가 있다.
신석기 시대 유 적지에서 바늘이나 실을 잦던 도구들은 가장 오래된 우리 옷의 자료이다. 또 농경문 청동 기에는 저고리와 바지의 기본 복식에 성인 남자는 상투를 하고, 미혼남자는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나타난다. 그 뒤 부족국가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면 두루마기를 중심 으로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를 중심으로 모자, 허리띠, 화 또는 이를 착용하는 고유 의 식 양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옷은 아한대성 기후로 삼한 사온이 계속되는 자연 조건 과 북방 유목민 계통의 문화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속옷부터 겉옷인 두루마기에 이르기까지 몸을 싸는 형식이다. 또 저고리와 바지가 떨어져있고, 앞이 트여 있는 활동적 인 옷이다. 복식이란 사람의 몸 위에 표현되는 것이다.
- 한복이란 간단히 말해서 한국 고유의 옷을 뜻합니다.
한복은 쭉 뻗은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룬 우리 나라의 전통 의상이다. 한복의 상의는 저고리라 부르며, 하의로 바지를 입는데 여성도 애초에는 바지를 입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나중에는 치마를 입어 남성복과 달라졌다. 여성의 옷은 상의가 짧고 하의는 길어 단정하고 아담하다. 여성은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로 우아한 멋을 풍겼으며, 남성은 바지저고리를 기본으로 조끼와 마고자로 멋을 냈다. 백의민족답게 기본색은 흰색이었으며 계절에 따라, 신분에 따라 입는 예법이나 소재, 색상이 모두 달랐다. 결혼과 같은 특별한 예식에는 평민들도 귀족이 입는 화려한 빛깔의 옷과 장신구로 한껏 멋을 냈다. 최근 국내에는 한복의 장점에 실용성을 가미한 개량 한복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복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한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고구려 시대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속 벽화에서였다.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시대의 의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한국의 왕과 몽골족 공주와의 혼사로 중국 용안시대의 옷이 한국에 들어왔고, 그것이 한복의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오fot동안 한복은 시대에 따라 저고리 길이, 소매통 넓이, 치마폭이 약간씩 달라질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즉 한복은 둥글고, 조용하고, 한국의 얼을 담고 있다. 실크나 면, 모시로 주로 만들어졌으며, 고름의 색상이나 소매통 색상이 여자의 신분을 나타낸다. 또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 계절에 따라 색상에 변화를 줄뿐 옷의 모양은 안동의 시골 아낙이나 대통령부인이나 모두 똑같다. 18m의 원단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입기 쉬운 점이 한복의 장점이다. 명절과 결혼식같은 특별한 날 주로 입혀진다.
한국에는 약 오만개의 제작업체가 있으며, 발행부수 만부가 넘는 한복 전문잡지도 다수가 있다. 한복에 대한 연구와 전시회도 있다. 1992년 뉴욕 I.B.N 화랑에서 한복에 대한 전시회가 한국의 국보적인 인물 석주선 박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석주선 박사는 1946년부터 일생을 바쳐 한복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1996년 타계하였지만 1976년에 세워진 그녀의 기념박물관에는 오늘날 7,000여점이 넘는 한복 콜렉션이 전시되어 있다.
한복은 그 형태나구성,아름다움,재질,위생적인면에서 그 뛰어난 특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특색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립니다.한복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복은 평면적인 옷감을 직선적으로 재단하고 이를 꿰메어 평면적인 옷을 만들며 이것을 다시 입체적인 인체에 맞도록 남은 부분을 주름을 잡거나 접어서 끈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이다. 바지의 경우에는 마루폭 이외에 활동에 필요한 여유분을 주기 위하여 사폭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어 전후 좌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구성방법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 나라의 자연적인 조건과 민족적인 미적감각을 잘 살려준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한복은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져서 입어야 비로소 입체감이 형성되어 부드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한복의 아름다움은 외관으로 보이는 선의 흐름과 옷감이 지닌 색채의 조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추녀의 곡선과 같이 하늘을 향한 듯한 저고리의 배레선과 도련의 곡선 동정의 예리한 직선과 조화 이루며 여기에 깜찍하고도 앙증스러우리만큼 둥글면서도 뾰족한 작은 섶코의 선은 저고리를 한층 돋보이게 해준다. 한복에 나타나는 이같은 선의 흐름과 조화에서 우리는 선조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여기에 옷을 입고 움직일 때에 생기는 동적인 선의 아름다움까지 가미하면 우수한 선의 조화는 세계적으로 호평받을 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옷감의 색채면에서 볼 때에는 한민족을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했듯이 백색은 좋은 인연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옛부터 숭상하게 되었고 따라서 흰옷을 즐겨 입었다.
한복은 원래 의고 분리의 알타이계 복식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복식제도이다. 한복은 의고(衣袴) 분리라는 복식 특색을 가지고 있다.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져 있어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된다. 저고리는 길, 소매, 깃, 동정, 고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자의 경우 끝동이 달리기도 한다. 저고리는 소재, 재봉법, 모양에 따라 여러종류가 있는데 홑․겹․솜․누비저고리는 소재의 두께와 재봉법에 따라 나눈 종류이고, 저고리 각 부분에 다른 색의 감을 쓴 데에 따라 민저고리, 반회장저고리, 삼회장저고리로 나누었다. 여자 바지는 치마와 단속곳 속에 입는 속바지로 되어 모양이 남자 바지와 다르며, 조선후기에는 관고의 밑을 따로 떨어지게 만들어 여러 계층에서 모두 입었는데 그 종류로는 바지, 너른바지, 고쟁이, 단 속곳 등이 있다. 그리고 치마는 유동적인 곡선미가 뛰어난 옷으로 허리부분에서 잘게 주름을 잡아 볼륨감을 살려 항상 풍성하게 한 특색이 있어 한복 특유의 매력을 보여준다.
저고리는 성인 남자, 성인 여자,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4가지로 구분이 된다.
저고리의 주된 명칭은 다음과 같다.
- 성인 남자용 - 겹저고리
저고리의 모양이 여자 저고리의 모양과 비슷하고 명칭도 같다. 그러나 치수가 크고 모양이 여자 저고리와 같이 예쁜 곡선으로 되어있지 않고 평평하다. 치수가 넉넉하여 풍성하게 보이며 압박감을 주지않아서 입으면 매우 편하다.
- 성인 여자용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 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의복의 관리면에서 세탁하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이용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로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회장 저고리
회장 저고리는 우리 나라 고유 복식의 하나로서 깃, 부리, 단, 고름에 서로 다른 색 천을 댄 저고리이다. 원래 선을 댄 목적은 푸서 처리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점차적으로 장식을 위한 것으로 변천하였다. 회장 저고리 중 곁 마기가 있는 것을 삼회장 저고리, 없는 것을 반회장 저고리라고 한다.
회장감의 색은 원래 자주색 한가지로 정해져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같은 색깔 계통의 빛깔이나 또는 대조적인 다른 색깔을 쓰는 것도 볼 수 있다.
색동 저고리
회장 저고리와 같이 한국 고유 옷의 하나로 소매를 색동으로 한다. 색동의 색은 오행설에서 유래되었다. 종전에는 길의 색을 연두색, 노랑색, 옥색만을 사용했는데 요즈음은 여러가지 색을 전부 다 사용한다.
깨끼 저고리
안팎이 비치는 엷은 옷감을 두 겹으로 박아 지은 저고리다. 바느질이 어렵고 세탁할때 만지기가 어려워 많이 입지 않았으나 근래에는 옷감의 발달과 함께 다리지 않고도 그냥 만져 입을 수 있는 옷감이 나와서 많이들 입는다.
깨끼는 안팎을 무늬 없는 같은 감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나 무늬 있는 감으로 할 때는 안감은 무늬 없는 감을 사용한다. 무늬가 있는 것이나 없는것의 형태는 같다.
- 남자아이용 - 저고리
모양이나 만드는 방법은 성인용 저고리와 같고 빛깔은 옥색, 분홍색, 연두색 등 이 많이 쓰인다. 명칭도 형태도 성인용 저고리와 같다.
- 여자아이용 - 색동 저고리
이 옷은 첫 돌부터 6~7세 어린이들에게 알맞은 옷으로 한국적인 미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옷이다. 원래 색동 저고리는 돌날 남녀 구분없이 입혔으나 단 돌띠만은 구별하여 남아는 남색, 여아는 자주색을 달았다. 돌이 지나면 남아는 그대로 길게, 여아는 짧게 하여 입혔고 저고리의 길은 연두색으로 하였다
- 조끼는 성인 남자와 남자 어린이가 입는 옷이다.
조끼는 우리 나라 고유의 의상은 아니다. 이 옷은 원래 영국의 "VEST", 프랑스의"GILET"이라는 의복을 흉내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착용된 것은 일본의 영향인 듯하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의상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디자인 된 것도 우리의 자랑이다.
조끼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것인데 주머니가 달려 있어 일용품을 넣기에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손색이 없는 옷으로 오늘날 남자복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고자는 성인 남자, 성인 여자, 남자아이의 3가지로 구분된다. 마고자의 주된 형태와 명칭은 다음과 같다.
- 성인 남자용
마고자 원래 마고자는 만주인의 의복이었으나 대원군이 만주 보정부에서 유거 생활에서 풀려나와 귀국할 때 입고 돌아오면서 널리 착용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이후에 특수계층의 집안에서 방한을 겸한 사치복으로 등장했었다.
마고자는 일명 덧저고리라고도 불리며 용도에 따라 재봉법이 다르고 방한용으로 남녀가 같이 널리 착용되고 있으며 남자에 있어서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덧입는 옷이므로 옷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 입기도 한다.
- 성인 여자용
실내에서 방한용으로 입는 덧저고리였는데 요즘은 외출용으로 쌀쌀한 늦봄과 이른 가을에 입으므로 치마 저고리의 감과 색이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형태는 저고리와 같으나 깃과 섶 옷고름이 없다.
- 남자아이용
남아용 마고자는 거의 입혀지지 않았다.
방한용의 경우 동색이 많이 쓰이며 바지, 저고리의 색에 맞추기도 한다. 형태나 명칭은 성인용 것과 같다.
마고자는 성인 남자, 남자아이의 2가지로 구분된다. 마고자의 주된 형태와 명칭은 다음과 같다.
고의(袴衣)라고도 불리워지는 바지는 남성들의 외의(外衣)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착용되었다. 저고리의 변천과 함께 바지의 형태도 북방 한대 기후의 수렵 유목에 적합하도록 활동성이 요구되던 바지폭이 좁은 궁고(窮袴)에서 점차 폭이 넓은 대구고(大口袴)로 바뀌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바지는 남녀 모두의 기본적인 하의로 겉옷이나 치마 아래에 입었고, 신분에 따라 바지의 폭, 길이, 색 등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경우 바지는 계속 겉옷으로 착용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각이 분리된 형태, 앞뒤가 절개된 형태, 사폭(斜幅)으로 구성된 형태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신장을 중심으로 폭을 잡아 제작되기 때문에 체형에 꼭 맞는 서양의 바지보다는 여유가 많아 좌식생활에 편리한 구성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 성인 남자용 - 겹바지
남자 바지는 통이 넓어서 좌식 생활에 편리한 옷이여서 가내 생활에 애용되고 있다. 겨울에는 명주 바지에 솜을 넣어 지으면 겨울철의 방한용으로 대단히 좋다. 바지는 허리띠와 대님을 매는 번거로움과 허리가 통으로 되어있어 입은 모양이 간단해 보이지 않고 처지기 쉬우므로 입기에 불편하나 가정에서 입기에 이상적이며 손쉽게 만들어 입을수 있어 경제적이다.
- 남자아이용 - 풍차바지
풍차 바지 풍채 바지라고도하며 주로 활동하기 시작한 2세부터 4~5세까지의 어린이들이 입는 옷이다.어른 바지와 같이 큰 사폭 작은 사폭을 달아 막히게 하여복부를 가리게 하고 밑을 트고 재물무를 달아 뒤로 여미게 한 것이다.입는 법은 저고리속에 입는것이 원칙이나 평상복으로 입힐때에는 저고리 위에 입혀 웃옷으로 사용하면 입고 벗기에 편리하고 보온도 잘된다.솜으로 누벼입기도 하며 요즘같이 누빈천이 많이 있을때에는 그것으로 만들어 입기도 한다.
- 치마는 여자를 위한 옷이다. 바지와 대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치마는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용이 있다.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할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 성인 여자용
의복의 한가지.허리에서 그 아래부분을 가리어 입는 여성 겉옷의 한가지 이다.요즘의 치마는 주로 세폭의 주름을 잡아 어깨 허리를 달아 입는데 만드는 방법이나 에 따라 홑치마,겹치마,누비치마가 있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다.그밖에 예복용인 스란치마와 대란치마,일할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와 무기치마가 있다.
겹치마
한복 치마의 한가지.겉감만으로 바느질한 홑치마에 대하여 안을 넣어 겹으로 바느질 한것이다.
풀치마
한복 치마의 한가지. 양쪽으로 선단이 있어 둘러 입게 된 치마이다.치마폭이 통으로 된 통치마에 상대되는 것으로 한복치마의 기본이다.띠허리나 어깨로 치마허리를 만들고, 치마폭과 치마허리를 맞추어 주름을 잡으면서 치마허리와 치마폭을 붙여 박는다.
통치마
한복치마의 한가지. 양쪽 선단이 없이 통으로 지은 치마이다.띠허리를 달아 뒤로 여며 입는 풀치마와는 달리 통으로 박아 주름을 잡은 치마폭에 조끼허리 또는 어깨 허리를 단다.조끼허리의 앞은 여미게 되어 있으며 풀치마에 비해 간편하고 활동적이다.길이에 따라 긴 통치마와 짧은 통치마로 구분 된다.
스란 치마
치마에 금박무늬의 스란을 댄 치마.옛날에 궁중이나 일반 부녀자들이 입었던 예복용 치마로 폭이 넓고 길어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는다. 왕비는 용무늬 세자빈은 세자빈은 봉황무늬, 공주나 옹주는 꽃과 글과 무늬,일반 부녀자들도 꽃과 글자무늬를 놓았다.스란을 두층 댄것을 대란치마라 한다.
앞치마
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앞에 두르는 작은 치마. 행주 치마, 또는 에이프런이라고도 한다. 가정에서는 흰색이나 밝은색의 무명천이 많이 쓰이고 그밖에 음식점, 생선가게, 정육점 등에서는 가죽 제품이나 고무 제품등이 쓰인다.
속치마
여성용 속옷의 한 가지. 겉치마 밑에 받쳐서 입는 치마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끼허리에 겉치마와 비슷한 치마폭을 이은 것과 겉치마 폭이 푸하게 퍼지도록 하는 무지기치마가 있다.
무지기 치마
여성용 속옷의 한가지. 한복으로 정장 차림을 할 때 치마 바로 밑에 입는 속치마의 한가지이다. 홀수인 3층,5층,7층 등으로 각기 길이가 다른 여러 개의 치마를 겹쳐서 한 허리에 이어 붙여 만든다. 각 단 밑 부분에 각각 다른 색으로 물을 들이며, 가장 긴 것이 무릎 아래에 이르고 차차 짧아지므로 무지개 색을 이룬다 하여 무지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 여자아이용
여아의 치마는 대개 설빔으로 많이 입히는데 평상복으로 입는 경우가 적으므로 화려한 감을 준다. 색은 다홍색이 많이 쓰이는데 남색, 초록색, 분홍색 등도 많이 쓰인다.
- 두루마기는 갑오경장 이후로 등장하였다. 두루마기에는 성인 남자, 성인 여자, 남자 아이용의 3가지 구분이 있다.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는 두루마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상고시대부터 입어온 우리의 민족복이다.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복으로 그 착용 범위가 넓어진다. 벽화의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깃, 소매, 부리, 도련의 선을 두르고 저고리의 맺음과 중복되지 않도록 두루마기의 띠는 뒤중심, 혹은 옆허리 주변에서 매도록 하여 기능적인 구조의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두루마기는 고려시대의 백저포(白苧袍)로 이어져 왕실과 귀족, 관료 및 평민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착용한 겉옷으로서 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여 왕과 신하의 제복을 비롯하여 조복(朝服), 상복(喪服)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직령포, 단령포, 창의, 중치막, 천릭 등과 같은 각종의 두루마기 형태로 발달하였다. 특히 선비사회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옥색의 이 도포는 옷이 갖고 있는 풍성함과 너그러움, 권위의 장엄함마저 깃들어 있어 지고한 선비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 성인 남자
남자 두루마기를 웃옷으로 입게 된것은 고종 31년 이후의 일이다. 백궁의 통상 예복 으로 입게 된 것이 오늘날 남자 두루마기의 시초다. 그후 두루마기는 남자 한복의 웃옷으로 착용되어 왔으며 밖에서는 예복또는 방한복으로 사용되는 유일한 한복의 웃옷이었다.또 두루마기는 실내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세배할때 착용한다. 두루마기의 종류로는 박이 두루마기(여름용)와과 홑단 두루마기(춘추용)가 있다.
홑단 두루마기
이것은 등바대, 겉바대를 대고 섶에 다른 단을 댄다. 도련,소매부리의 단을 꺽는데 소매부리는 2~3cm, 도련은 5~6cm 안으로 단을 접어 놓고 공그른다.
박이 두루마기
홑단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박이 두루마기는 다시 뜻지 않도록 아주 꿰매는 옷이라서 바느질은 박음질과 감침질로 한다.보통의 박이 두루마기는 베나 모시로 짓는다.
- 성인 여자용
두루마기는 갑오경장 이후로부터 입게 되었다. 개화기 이후 옷의 간소화와 여성의 외출이 잦아지면서 내외류 쓰개류였던 장옷,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남자들과 같이 봄, 가을에는 겹두루마기, 여름에는 홑두루마기 겨울에는 솜 두루마기를 입었었지만 경제적 부담과 손질의 번거로움 때문에 많이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섬유의 발달로 손질이 간편해져서 웃옷이나 방한복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치마 저고리 위에 입으므로 한결 옷차림이 돋보이는 웃옷이다.
- 남자 아이
남아용 두루마기는 연두색 색동 소매를 달거나 연두색, 분홍색 등의 단색으로 만든다. 또 길과 소매는 연두색, 섶은 노랑색, 무는 자주색, 고름과 깃은 남색으로 하는 것을 까치 두루마기라고 한다.
4. 한옥
집은 문화의 총체
우리 어린 시절 마을이나 집들을 생각하면 동거족 8촌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요즘 사람들에겐 아득한 옛 일 처럼 여겨질 지 모르나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대가족 제도하에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삼대가 모여 일가를 이루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살아가는 방법을 여기에 맞추었고 아래, 위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사는 효친이 기초를 이루었다.
집도 이와 같은 가족제도에 맞추어 조화롭게 지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양친부모 모시고 화목하게 살 수 있게 지은 집을 이상형으로 삼았고 분수에 맞는 알뜰하고 소박한 잠자리를 마련했다.
우리의 옛 집들을 살펴보면 그 섬세한 마음 씀에 여간 놀라게 되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이 살아가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터득한 지혜가 종합적으로 나타난 것이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은 곧 그 사회의 문화를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건축을 종합예술이라고 칭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집은 한 민족의 고유한 생활풍습과 생활철학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총체가 집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고학의 고찰로는 구석기 시대이며, 최초의 주거는 자연 동굴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4000년 무렵인 신석기 시대에 오면 무덤처럼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이른 바 수혈 주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최초의 집이다.
수혈 주거는 움막집에서 시작해서 자연의 조건에 따라 토막집, 귀틀집, 오두막집 등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이 서로 뒤섞이고 다듬어져 토벽의 초가집이 생겨나고, 추운 지방의 온돌과 습하고 더운 지방의 마루 구조가 합쳐지면서 마침내 부엌과 온돌, 마루로 된 우리 살림집의 기본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 시대엔 대부분 초가였으나 일부에서 기와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궁궐, 사찰 등 공공 건축과 지배층의 살림집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줄곧 같은 모습으로 이어 내려온 초가집과 달리 기와집은 중국에서 전래된 건축술과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구조와 의장이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낸 조선시대의 상류 주택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되었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들은 추위와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연동굴이나 구릉지의 언덕위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당시의 구석기인들은 수렵과 채집생활을 통해 이동하며 살았지만 신석기시대부터 그 당시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한곳에 정착하여 움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움집은 지표면 보다 낮게 땅을 파서 원형이나 타원형, 말각방형 등의 움을 만들어 중앙에 화덕을 만들고 바닥은 진흙을 펴 다졌다. 그 당시의 움집은 움의 깊이가 60~100㎝로 깊었으나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움의 깊이가 얕아지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오늘날과 비슷한 한옥(韓屋)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한민족은 춥고 찬바람이 불고 눈이 많이 내리는 긴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 방바닥을 따뜻하게 해 주는 '온돌'이라는 난방시설을 사용하였고, 덥고 비가 자주 내리고 습기가 많은 여름을 지내기 위해서 바닥이 시원한 '마루'를 사용하였다. 추운 북쪽지방에서는 온돌방이 발달하였고, 더운 남쪽 지방에서는 마루가 발달되었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온돌과 마루라고 할 수 있다. 한옥을 짓는 재료는 자연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와 흙, 돌 등을 활용하였고, 골격은 주로 나무를 사용하였고, 지붕은 나무를 사용하였고 그 위에 풀을 덮거나 흙으로 구운 기와를 사용하였다. 벽체와 바닥은 흙과 돌을 혼합하여 사용하였고, 방바닥은 진흙으로 발라 그 위에 종이를 발라 사용하였다. 가구(家具)는 주로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고, 잠자리는 쉽게 접었다가 펼칠 수 있는 이불과 요를 사용하였다.
한옥을 짓는 터전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북쪽의 찬바람을 막아 주고 남쪽의 땅을 경작하기 쉬운 곳을 선택하였다. 한민족은 대부분 남향집을 선호하고, 동쪽이나 남쪽으로 대문과 출입구를 설치하였다. 대부분 얕으막한 담장으로 이웃집과 경계를 표시하였고, 집 안팍에 과실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초가인 경우에는 일년에 한번 추수를 한 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볏짚으로 이엉을 엮고 용구새를 틀고 새끼를 꼬아서 지붕을 한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주로 방안에서 생활하고, 여름에는 주로 시원한 마루에서 생활 한다. 대문을 제외한 한옥의 출입문은 문을 오른손으로 밖으로 당겨 열게 되어 있고, 방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댓돌을 밟고 문턱을 넘어 서거나 마루를 거쳐 방안으로 들어 간다. 방바닥에 앉아서 주로 생활하고, 손님이 왔을 경우 사랑방으로 모시고, 주인은 방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방웃목에 앉은 손님과 대화를 나눈다.
한민족은 오랫동안 농경중심의 정착생활을 해 왔기에 부유한 농가에는 안채와 사랑채, 장독대, 우물, 외양간, 돼지우리, 닭장, 개집 등이 있고, 마당 한 모퉁이에 변소와 잿간, 거름터가 붙어 있으며 가까운 곳에 채전이 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안채와 남정네들이 거처하는 사랑채가 보이는데 안채가 사랑채 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다. 서민들의 집은 주로 초가 지붕으로 되어 있고, 한지붕 아래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안방과 남정네들이 거처하는 사랑방, 밥을 짓는 부엌 등이 배치되어 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의 집은 주로 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고, 부녀자들의 공간인 안채와 남정네들의 공간인 사랑채가 있으며, 사대부들의 집에는 조상신의 위패를 있는 사당(祠堂)이 있다.
부유한 집의 안방에는 부녀자들이 사용하는 반짇고리와 옷을 담는 이층농이나 삼층장이 놓여 있고, 사랑방에는 옷을 담는 삼층장이나 의걸이장, 귀중품을 담는 반닫이, 약을 보관하는 약장 등이 놓여 있다. 주경야독하는 선비집 사랑에는 서안과 책장 등이 놓여 있고, 사대부의 사랑에는 사방탁자와 문갑 등이 놓여 있다. 마루에는 곡물을 담는 뒤주와 귀중품을 보관하는 궤짝이 놓여 있다. 광에는 뒤주와 전궤, 곡물을 담은 섬 등이 보관되어 있다. 부엌에는 음식을 조리하는 조리기구와 음식을 담는 식기, 음식을 보관하는 찬장, 물을 담아두는 물통, 나무땔감 등이 놓여 있다.
한민족의 전통사회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動席)이라는 관념때문에 성인남녀들이 마주치면 서로 얼굴을 피하는 내외(內外)를 하였다. 양반집에서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관념 때문에 남편은 사랑방에서 생활하고 아내는 안방물림을 할 때까지 안방에서 살았다. 전통적으로 남자들은 거의 음식조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부엌은 부녀자들의 전용공간이었다. 그러나 서민들의 집에서는 양반들집처럼 내외하는 풍속이 강하지는 않았다.
▷ 우리 나라 전통한옥의 이상적인 입지형
우리 나라 전통한옥의 이상적인 입지형은 배산임수(背山臨水)다. 이를 비과학적인 풍수지리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를 단순히 미신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마을은 주산에 기대어 남향을 바라보고 좌우에는 청룡과 백호를 상징하는 산이 감싸주고, 앞으로는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막아 안온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안산 앞으로는 수구가 트여 하천이 합류하는 것이 좋다.
물론 조선시대에 들어와 풍수지리를 절대시하여 물의를 빚은 일도 있지만 배산임수의 남향구조는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조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또한 농사짓기에 알맞은 구조이기도 하다. 마을 뒤의 산은 바람을 막아주고 연료를 공급해주는 곳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것이다. 산을 소중히 가꾸고 그 산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다고 믿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앞에 흐르는 하천은 관개용수의 공급, 운송수단의 역할을 했으며 마을의 습도와 온도를 조절해준다. 이 역시 사람이 살기 위해 없으면 안될 조건이다.
▷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집의 방향은 남향집이다. "삼대가 적선을 해야 남향집에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남향은 겨울이면 햇빛이 집안 구석구석까지 들어온다. 여름이면 창머리에 머물다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것이 남향집의 특징이다. 남향집만큼 기후의 한냉온열에 맞게 집의 온기를 조절해줄 수 있는 구조는 없다.
▷ 한옥 구조
우리 한옥구조는 일반적으로 안채와 사랑채였는데 대개 방은 자기 몸을 기준으로 크기를 정했다. 방은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대체로 우리 나라 방의 크기는 한 변이 9척이었다. 가로, 세로 9척이 최소한의 평면이다. 형편이 좋아지면 18척으로 늘리기도 했고 신분에 따라 21척의 방에서 살수도 있으며 왕실에서의 방 크기는 27척이었다. 방의 크기가 3배수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 3배수는 무엇을 뜻하는가, 3은 천부경에서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의 수이다. 또 방의 높이는 보통 7.5척으로 잡았다. 한국인의 평균키의 1.5배에 해당한다. 이 7.5척은 사람 앉은키에 사람 한 명이 올라설 수 있는 높이로 기(氣)가 가장 잘 호흡될 수 있는 공간이다. 창의 기본구조도 인체에 맞추었다. 머름대 높이를 앉은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에 들도록 하였다. 가슴팍이 닿을 높이이다. 1.8척 즉 54㎝ 가량인데, 이는 사람이 누웠을 때 두께의 두 배에 해당하는 높이로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
대청마루의 천장높이는 보통 10척 정도로 한국인 평균 신장의 두 배이다. 가능한 대청은 넓게 잡고 천장도 높게 하여 인간이 내뿜는 기가 승하여 뻗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물론 통풍이나 환기도 배려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 조상들은 마루 하나를 만들어도 기가 승하여 의기양양한 인격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이들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인격을 함양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집을 지었다. 세간이 빈한해도 좋았다. 서민집 아이들에겐 산과들이 곧 터전이요, 집이었던 것이다.
사랑채는 주로 남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우선 집을 들어서면 사람들은 사랑방에 거처하는 집안 어른께 문안을 여쭙는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채는 요즘 말로하면 사무실도 되고 응접실도 되었던 셈이다. 때로 외부손님이 찾아오면 자고 갈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자아이들이 학문을 배우고 교양을 쌓는 터전이 또 사랑채이다.
사랑채가 연장된 것이 마을 앞 정자나 유산각 등 부락 공동주택이다. 큰 나무 밑에 동네어른들이 모여 마을의 중소대사를 논한다.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질서를 잡는다.
여인들의 사랑채는 마을 냇가였다. 빨래하면서 여인들은 가정의 대소사를 논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렇게 하여 동네문화가 생기고 상부상조의 정신이 싹트게 돼 따뜻한 인정과 예의가 온존하는 마을 문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전통의 미풍양속인 계, 두레, 향약도 다 이와 같은 마을문화가 성숙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장독대는 부엌 동쪽에 높이 돈대를 돋구어 만들었다. 야생동물이나 집짐승으로부터 장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장독대는 고추장, 된장을 담은 독을 놓는 것으로 주부의 정성이 모아진 곳이다. 정월에 농악대들이 액막이굿을 할 때는 집집마다 독 뚜껑을 열어 놓는다. 독 속에 복이 담기게 하기 위해서이다.
옛날엔 대부분의 집들이 따로 단군성조를 모신 삼신당을 두었다. 또 정화수 떠놓고 빌면 그곳이 바로 삼신당이었다. 그만큼 살아가는 일에 정성을 들였다. 사랑의 마음으로 살았다. 한 가정이 자급자족의 터전이었고 조상과 신을 모시는 혼이 있는 장소였다. 한 가정 안에서 공동체의식을 배운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을 통해 두레, 품앗이, 상부상조의 정신을 배우고 더 나아가 충효정신, 민족정신을 알게 되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집은 한, 냉, 온, 열의 조절을 위해 기후와 토양에 따라 각각 다른 구조를 가졌다. 당연히 자연 기후조건이 혹독할수록 집의 구조도 엄격해 집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그러므로 집 문화도 이에 맞게 발달해왔으며 계절에 따라 한, 냉, 온, 열의 조절이 잘 되도록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한옥의 신토불이 원리는 우리나라 내의 지역간 한옥구조의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우리의 전통 한옥은 일반적으로 나무와 흙으로 만든다. 이러한 한옥의 특징은 구들과 마루에 있다. 구들과 마루. 이 두 단어는 우리 한옥구조에 있어서 신토불이 현상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들은 북방 추운 지방에서 시작되었고 매우 폐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 마루는 남쪽 고온 다습한 고장에서 만들어졌으며 더위를 견디기 위해 개방성이 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들과 마루는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상호절충하면서 지역에 맞는 형태로 정착해 왔다.우리 나라 북방지역의 겨울은 매우 길고 춥다. 시베리아기단의 영향을 받는 겨울에 우리 나라 기후를 지배하는 것은 북서풍이다. 그러므로 북쪽 지방의 한옥은 겨울철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여름철 남쪽지방은 고온 다습하다. 그러므로 남쪽지방의 한옥은 여름철의 더위와 장마를 극복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가옥의 구조는 오랜 역사를 통해 그 지역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발달하고, 이는 사회적 관습으로 인하여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특히 서민층 가옥은 그 지역의 특색을 잘 반영하므로 서민층 가옥 몸체는 가옥의 지역적 분류의 기본이 된다.
가옥의 지역적 구분은 대개 대들보를 중심으로 방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느냐(홑집), 이열로 배열되어 있느냐(겹집) 하는 것과 전체 몸체의 모양이 - 자, ㄱ 자, ㅁ 자냐 하는 것, 툇마루의 유무, 대청의 유무와 기능, 기타 특수용도 방의 유무 등에 따라 결정된다.
분류상 우리 나라의 한옥은 관북관서형, 중부형, 울릉도형, 남부형, 제주형으로 나누는데 각 한옥의 특색을 간단히 살펴본다.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관북형은 일자형이 주 형태이다. 부엌과 외양간이 연결되어 있고 광과 정줏간도 겨울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것이다. 특히 정줏간은 부엌과 방 사이에 있는 벽이 없는 온돌방으로 중부지방의 안방과 같은 역할을 하며 그 공간의 일부는 실내 작업장으로도 이용되는 독특한 구조이다.
- 폐쇄적인 가옥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어 대청(집 가운데에 있는 마루)마루가 없고 전형적인 겹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옥 구조가 가장 독특하다. 기본형은 -자와 田자형으로 부엌과 방 사이에는 정주간이라고 하는 벽이 없이 높낮이로 부엌과 구별되는 공간이 있다.
- 정 주간은 부엌과의 사이에 벽이 없이 연결되어 부엌의 열기를 최대한 수용하여, 가장 따뜻한 공간으로 추운 겨울의 식당과 거실 역할을 한다. 남한계는 대체로 태백산맥을 따라 고성, 양양에 이르며 주로 낭림산맥의 동쪽에 분포한다.
- - 자, ㄱ 자, ㅁ 자 등 가옥 구조가 다양하나 마루가 좁아지고 부엌이 가옥의 중심에 위치하는 ㄱ자형 홑집이 탁월하다. 모서리에 부엌이 있고 벽의 양면에 아궁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한계는 멸악산맥으로 주로 낭림산맥 서쪽에 분포한다.
- 대청은 마루방이라 해서 방과 방 사이에 있지 않고 한쪽 귀퉁이에 있다. 또 부엌과 방 두개가 연속으로 구성되어 "삼간형(三間形)"이라고도 하며, 남부지방의 가난한 서민주택들이 이 형을 많이 채택하기 때문에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므로 "일반형"으로 분류한 학자들도 있다.
중부형은 일반적으로 "□"자형의 구조를 이루며 이 지역의 높은 사회, 문화수준을 반영하여 안채와 사랑채가 확실히 분리되어 있다.
- 대청 마루가 있으며 ㄱ자형을 기본으로 ㄷ자, ㅁ자, -자형이 혼합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ㄱ자형 홑집이 많다. 관북의 폐쇄적 구조와 남부의 개방적 구조의 점이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난방도 고려하면서 통풍의 기능도 어느 정도 갖춘 것이다.
-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청마루라고 하는 대청이 있고 부엌은 안방에 이어져 있거나 한쪽 귀퉁이에 있다. 우리 나라 가옥의 가장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멸악산맥의 이남에서 차령산맥의 북쪽에 주로 분포되며 한강 유역이 그 중심이 된다. 큰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현저한 특징이다.
남부형은 여름철 더위에 대비하여 대청과 툇마루의 특색이 강조된 개방형 구조를 이룬다.
- 전형적인 홑집의 -자형으로 중부형에 비해 개방적이다. 개방적 구조로 대청마루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앞뒤로 벽체가 없는 대청마루는 가장 개방적인 구조로 영남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충남북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속한다.
- 부엌, 방, 마루와 툇마루가 기본 구조를 이루며 문지방의 높이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서민주택 중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일자형 몸체 이외에 광, 헛관, 오양관, 측간 등으로 구성된 부속채가 별도로 세워진다.
제주도 한옥의 특징은 그물지붕과 돌담, 그리고 고팡이라는 창고에 있다. 제주도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지역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그물지붕과 돌담을 설치했다.
또 홍수피해가 많았던 낙동강지역, 한강 상류지역 등에서는 터돋움집이나 피수대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한옥의 지역적 특색은 현대에 들어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지역적 차이가 줄면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한옥의 현대화 과정에서도 지역간 기후조건에 합당한 집의 구조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 중앙에 마루가 있고 좌우에 방과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기본구조가 -자형인 것은 남부형과 같으나 오랜 문화적 고립으로 평면구조는 겹집으로 특이하다. 온돌 구조가 단순하며(아궁이 위치가 방과 반대), 방 뒷쪽에 고팡을 두어 물건을 보관한다. 고팡은 온돌 시설이 되어 있지 않고 주로 곡류, 두류, 유채 등을 항아리에 넣어 두는 저장 공간이다.
- 아궁이는 난방의 기능보다는 취사 및 재의 생산 기능이 더 크기 때문에 굴뚝이 없고 불을 때는 입구 맞은편은 트여 있으며, 그 뒤에는 땔감을 때고 난 후 생기는 재를 모아 둘 수 있도록 일정한 공간이 비어 있다. 이것은 제주도의 토양이 현무암이 풍화된 화산회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산성화가 심한데, 재를 뿌림으로써 토양을 중화시켜 작물의 생육을 돕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 제주도 안채 - 제주도 현무암집
울릉도형의 특징은 우데기에 있다. 울릉도는 눈이 많은 지역이다. 그러므로 눈에 대비하여 방설벽을 설치한 것이 우데기이다. 우데기 안은 작업공간, 통로로도 이용된다.
- 가옥 주위에 겨울의 폭설에 대비한 우데기(울릉도 민가에 딸린 독특한 방설, 방우, 방풍 설비)라는 방설벽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옥과 우데기 사이의 공간을 겨울철 작업 공간으로 활용한다. 너와집(지붕의 재료를 사용함에 있어 나무가 많은 산간 지방에서는 지붕을 이는데 기와나 돌 대신 보통 너와라는 판자 쪽을 사용)
- 울릉도의 우데기와 너와지붕
5. 태극기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 (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 (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 세계 각국이 국기(國旗)를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민족국가가 발달하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에 체결된 조미수호 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淸)이 자기나라 국기인 용기(龍旗)를 약간 변형하여 사용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즐겨 사용해 오던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 도형기'(太極 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종전의 '태극 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이 국기를 지니고 일본으로 가던 중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을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 의 기를 만들어 바로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다.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고종은 다음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태극기는 구체적인 제작 방법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1942년 6월 29일 국기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국기통일양식」(國旗統一樣式)을 제정․공포하였으나 일반 국민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 「국 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을 확정․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계속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은 태극기가 지닌 이러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어받기 위함이다.
- 제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은 오른손을 펴서 왼편 가슴에 대고 국기를 향하여 주목한다.
- 제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 중 모자를 쓴 사람은 오른손으로 모자를 벗어 왼편 가슴에 대고 국기를 향하여 주목하며, 모자를 벗기 곤란한 경우에는 이를 벗지 아니할 수 있다.
- 군인․경찰관 등 제복을 입은 사람은 국기를 향하여 거수경례 한다.
- 각종 의식에서 행하는 국민의례 절차를 정식 절차로 할 경우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시경례곡 연주와 함께 위 맹세문을 낭송하여야 한다.
- 다만, 약식 절차로 할 경우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시 전주곡이 없는 애국가를 주악하고 맹세문은 낭송을 하지 아니한다.
1. 깃면
- 국기의 깃면은 그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
- 깃면의 길이(가로)와 너비(세로)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3 : 2의 비율로 한다.
① 3(가로)
② 2(세로)
③ 지름(세로x1/2)
④ 지름x1/2
⑤ 지름x1/4
⑥ 지름x1/2
⑦ 지름x1/3
⑧ 지름x1/12
⑨ 지름x1/24
⑩ 직각(90도)
[가로:세로=3:2]
◆ 태극의 작도
- 각태극의 원은 깃면의 두 대각선이 서로 만나는 점을 중심점으로 하는 원을 그리며, 지름은 깃면 너비(세로)의 2분의 1로 한다.
- 태극의 빨강과 파랑을 구분하는 곡선은 영문 S자형(두 반원의 한쪽 끝을 이은 곡선)을 왼쪽으로 50°정도 기울인 선으로, 깃면의 왼쪽 윗 모서리에서 오른쪽 아래 모서리로 대각선을 그었을 때 태극의 원 안에 나타나는 직선(태극 원지름)을 2등분하여, 그중 왼쪽 직선을 지름으로 한 아래쪽 반원을 그리고, 오른쪽 직선을 지름으로 한 윗쪽 반원을 그린다.
◆ 태극기의 표준색도
색 표시방법 |
태극기 빨강 |
태극기 파랑 |
CIE 색좌표 |
x = 0.5640 y = 0.3194 Y = 15.3 |
x = 0.1556 y = 0.1354 Y = 6.5 |
Munsell 색표기 |
6.0R 4.5/14 |
5.0PB 3.0/12 |
- Pentone 가이드 (1996-1997, 제9판)에서 태극기의 빨강은 186C를 태극기의 파랑은 294C를 가장 가까운 색으로 추천함
- 위 표준색도는 백색아트지(120g)에 별색 잉크로 구현하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표준광원C로 측색한 수치를 기준으로 함.
◆ 괘의 작도
- 4괘는 건(乾:)․곤(坤:)․감(坎:)․이(離:)로 하되 깃면의 왼쪽 윗부분에 건을, 오른쪽 아랫부분에 곤을, 오른쪽 윗부분에 감을, 왼쪽 아랫부분에 리를 각각 배열한다.
- 괘와 태극과의 간격은 태극 원지름의 4분의 1이다. 4괘는 깃면의 두 대각선과 태극의 원이 만나는 4점에서부터 대각선을 따라 바깥쪽으로 태극 원지름의 4분의 1을 각각 띄워 그린다.
- 괘의 가로길이는 태극 원지름의 2분의 1, 괘의 세로길이는 태극 원지름의 3분의 1로 한다.
- 괘의 가로길이의 중심은 깃면의 대각선상에 두되, 괘의 가로가 깃면의 대각선과 직각을 이루도록 한다.
- 괘의 구성부분은 3개의 효(爻)로 하되, 각 효의 세로길이는 괘의 세로길이의 4분의 1로 하고, 효와 효 사이는 괘의 세로길이의 8분의 1로 하며, 2등분으로 끊어진 효의 끊긴 간격은 효와 효 사이의 간격과 같다.
- 괘는 검정색으로 한다.
◆ 국기의 흑백표시
- 국기는 원칙적으로 규정 이외의 색으로 제작․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
- 특히, 외국인의 열람을 위한 인쇄물 등에 국기를 표시할 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흑백으로 표시하여서는 아니된다.
- 다만, 부득이한 사유로 인쇄물 등에 국기의 깃면을 흑백으로만 인쇄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깃면의 바탕과 태극의 윗부분은 인쇄물 등의 바탕색으로, 태극의 아랫부분과 4괘는 검정으로 나타내야 한다.
◆ 국기의 호수별 표준규격
- 국기의 호수별 표준규격은 아래와 같다. 다만, 건물규모나 게양대의 높이 등 필요에 따라 국기 깃면의 길이(가로)와 너비(세로)의 비율을 3 : 2로 하여 그 크기를 달리할 수 있다.
호수 |
깃면의 표준규격 (길이 × 너비) |
비 고 |
특호 |
540cm 이상 × 360cm 이상 |
용도별 권장규격 ․ 건물게양대용 : 특호, 1호~7호 ․ 가 정 용 : 7호 또는 8호 ․ 차 량 용 : 9호 또는 10호 |
1호 |
450cm × 300cm | |
2호 |
306cm × 204cm | |
3호 |
270cm × 180cm | |
4호 |
225cm × 150cm | |
5호 |
180cm × 120cm | |
6호 |
153cm × 102cm | |
7호 |
135cm × 90cm | |
8호 |
90cm × 60cm | |
9호 |
45cm × 30cm | |
10호 |
27cm × 18cm |
◆ 금실의 부착
깃면의 둘레에 금실을 부착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에 한한다. 이때의 금실의 폭은 깃면 너비(세로)의 1/7~1/8로 하고 깃대에 접하는 부분에는 달지 아니한다.
-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의 승용차에 다는 경우
- 의전용으로 쓰이는 경우
- 실내에서 게양하는 경우
- 각종 국제회의시에 탁상용으로 쓰이는 경우
◆ 옥외게양용 국기천의 소재 및 염색가공기준
- 국기천의 소재는 폴리에스텔 섬유 100%로서 1㎡당 53g 이상, 밀도는 5㎝당 경사 165본 이상, 위사 131본 이상의 천을 사용한다.
- 염색 및 가공은 본염날염 방식으로 하고 태극의 빨강과 파랑색이 서로 겹쳐지거나 틈새가 생기지 않도록 하며, 앞뒤 모두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처리하여야 하고, 때가 덜 묻고 정전기의 발생을 방지하고 발수도가 뛰어나도록 처리하며, 깃면은 두줄박이로 봉제하여 바람 등에 의해 깃면이 쉽게 훼손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완제품 품질기준]
구 분 |
기 준 |
비 고 |
-일광 견뢰도 |
4급이상 |
|
-세탁 견뢰도 - 변퇴 - 오염 |
4급이상 4급이상 |
|
-발수도 |
90이상 |
세탁전 |
2. 깃대
- 깃대는 견고한 재질로 한다.
- 깃대의 색은 흰색․은백색․연두색 또는 이와 유사색으로 한다.
- 깃대는 지상이나 건물 옥상 등에 고정하여 수직으로 설치하거나 건물 벽면에 하늘을 향해 기울어진 형태로 설치한다.
- 2개 이상의 깃대를 설치할 경우 깃대와 깃대 사이는 게양하는 깃면의 길이(가로)보다 넓어야 한다.
3. 깃봉
- 깃봉은 꽃받침 5편이 있는 둥근 형태의 무궁화 봉오리 모양이며 그 색은 전부 황금색으로 한다.
- 깃봉의 지름은 깃면 너비(세로)의 1/10로 한다.
◆ 깃봉의 제작방법
- ㄴ ㄷ 은 깃봉의 지름임 (깃면 너비의 1/10)
- ㄱㄴ : ㄱㄹ = 7 : 8로 하여 ㄴ,ㄹ,ㄷ의 반타원을 이룸
- ㄻㄼ은 각 ㄱㄹ의 1/8
- 꽃받침 첨단의 부피는 ㄱㄴ의 1/10
- ㄱ을 중심으로 하여 ㅅㅊㅅ의 반원을 그려 꽃받침을 이룸
- ㅈ은 ㄱㅊ,ㄳ의 각 중간점에서 수평 수직된선의 교차점임
- ㅊㅋ은 ㄱㄴ의 1/3
- ㅋㅌ은 ㄱㄴ의 2/5
- 국기를 게양하여야 하는 날을 아래와 같이 정하고 있으나 다른 날에도 국기를 게양할 수 있다.
◆ 국기를 전국적으로 게양하는 날
경축일 기념일
- 4대 국경일(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 1월 1일․국군의 날․한글날
조의를 표하는 날(조기게양)
- 현충일, 국장기간, 국민장일
기 타
-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
-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경사스러운 날 (당해 지방자치단체에 한함)
◆ 국기를 연중 게양하는 곳
-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기타 공공단체의 청사, 각급 학교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여야 한다.
- 다음의 장소에는 가급적 연중 국기를 게양하여야 한다.
* 공항․호텔 등 국제적인 교류장소, 대형건물․공원 등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
* 주요 정부청사의 울타리, 기타 많은 게양대가 함께 설치된 곳
◆ 국기의 게양시간
-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에 그 게양효과를 높이기 위해 가급적 조명시설을 하여야 한다.
- 다만, 학교 및 군부대의 주된 게양대는 교육적인 목적을 고려, 낮에만 게양한다.
* 국기를 낮에만 게양할 경우 게양․강하시각
기간 |
게양시각 |
강하시각 |
3월 ~ 10월 |
07:00 |
18:00 |
11월 ~ 다음해 2월 |
07:00 |
17:00 |
- 국기는 심한 비․바람(악천후) 등으로 국기가 훼손되어 그 존엄성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게양치 아니한다.
- 재외공관의 국기게양 및 강하시각은 주재국의 관례에 따른다.
◆ 국기 게양․강하식
대상기관
- 각급학교및 군부대
식의 거행방법
- 식은 애국가 주악에 맞추어 행하되, 자체방송(녹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주악 시간과 게양․강하 시간이 일치되도록 하여야 한다.
- 애국가 주악은 건물안과 경내에서 들을 수 있도록 한다.
- 일기변화로 정해진 시간 외에 게양․강하할 때에는 식을 생략한다.
- 게양식의 경우에는 애국가의 주악을 생략할 수 있다.
식중 경의 표시방법
건물 밖에 있는 사람
- 게양․강하되는 국기가 보이는 곳에 있는 사람은 국기를 향하여 경례를 한다.
- 주악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방향을 향하여 선 채로 차렷자세를 하여 경의를 표한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
- 국기가 있는 경우 그 국기를 향하여 선 채로 차렷자세를 한다.
- 국기가 없는 경우 주악방향을 향하여 선 채로 차렷자세를 한다.
울타리 안에 있는 차량탑승자
- 차량을 정지하고 앉은 채로 차렷자세를 한다.
◆ 게양국기의 높이
- 경축일 또는 평일에는 깃봉과 깃면의 사이를 떼지 않고 게양한다.
- 조의를 표하는 날(현충일, 국장기간, 국민장일 등)에는 깃봉과 깃면의 사이를 깃면의 너비(세로)만큼 내려 조기로 게양한다.
경축일 및 평일 |
조의를 표하는 날 |
|
|
◆ 조기 게양 ․ 강하요령
- 국기를 조기로 게양할 때에는 깃면을 깃봉까지 올린 후에 다시 내려서 달고, 강하할 때에도 깃면을 깃봉까지 올렸다가 내린다.
- 깃대의 구조상 조기게양이 어렵다고 하여 검은색 천을 달아서는 안되며, 깃면의 너비(세로)만큼 내린 완전한 조기를 달 수 없는 경우에는 바닥 등에 닿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내려 단다.
- 이때 국기를 다른 기와 함께 게양할 경우 다른 기도 조기로 게양하여야 하며, 국기를 외국기와 함께 게양할 경우도 외국기를 조기로 게양하고 이 경우에는 사전에 해당국과 협의를 거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 국기와 다른 기의 게양 강하 순서
- 게양할 때에는 국기를 다른 기와 동시에 게양하거나 국기를 먼저 게양한 후 다른 기를 게양해야 한다.
- 강하할 때에는 국기를 다른 기와 동시에 강하하거나 다른 기를 먼저 강하한 후 국기를 강하해야 한다.
◆ 기 종류간 우선순위
다수의 기를 게양할 때의 위치상 우선순위는 기의 수가 홀수일 경우와 짝수일 경우가 다르다.
기를 앞에서 바라볼 때, 홀수인 경우에는 중앙이 가장 윗자리(1번)이고 그 왼쪽이 차순위(2번), 중앙의 오른쪽이 차차순위(3번)로, 중앙에서 왼쪽이 오른쪽에 우선하면서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후순위가 된다.
짝수인 경우에는 가장 왼쪽이 가장 윗자리이고 그 오른쪽으로 가면서 차순위(2번), 차차순위(3번)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후순위가 된다.
◆ 국기와 다른 기의 게양
태극기를 가장 윗자리에 게양 즉, 기의 수가 홀수인 경우 앞에서 보아 태극기를 중앙에, 짝수인 경우 가장 왼쪽에 게양한다.
- 게양대가 2개 설치된 경우
국기만 게양할때 |
다른기와 함께 게양할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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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양대가 3개 설치된 경우
국기만 게양할때 |
|
다른 기와 함께 게양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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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기 2개와 함께 게양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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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양대가 4개 설치된 경우
국기만 게양할때 |
|
다른 기와 함께 게양할 때 |
|
다른기 2개와 함께 게양할 때 |
|
다른기 3개와 함께 게양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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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외국기의 게양
- 외국기는 우리나라를 승인한 나라의 국기에 한하여 게양하는 것이 원칙이다.
- 다만, 국제회의 또는 체육대회 등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를 승인하지 아니한 나라의 국기를 게양할 수 있다.
-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은 채 외국기만을 게양해서는 안된다
- 하나의 깃대에 2개국의 국기를 게양할 수 없다.
- 태극기와 외국기를 함께 게양하는 경우 그 크기 및 높이는 같아야 한다. (외국기의 가로 : 세로 비율이 태극기와 같지 않을 때에는 상대국에 문의하여 이를 조정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한변 또는 면적을 태극기와 같게 한다)
- 게양순위는 게양하는 기의 수가 홀수인 경우와 짝수인 경우에 따라 구분하여 태극기를 가장 윗자리에 게양하고, 그 다음 위치부터 외국기를 게양한다. 외국기의 게양순위는 국명 머릿 글자의 알파벳 순서에 따른다.
홀수인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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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수인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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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국제연합기 또는 외국기의 게양
- 국제연합기, 태극기, 외국기 순으로, 국제연합기를 가장 윗자리에 게양한다. (국제연합기규정)
◆ 태극기와 외국기를 교차 게양할 경우
- 밖에서 보아 태극기의 깃면이 왼쪽에 오도록 하고 태극기의 깃대는 외국기의 깃대 앞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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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깃면을 늘여서 벽면에 다는 방법
- 경축행사 등에 깃면을 늘여 벽면에 다는 경우 이괘가 왼쪽 위로 오도록(국기를 오른쪽으로 90°회전) 한 후 깃면의 하단 흰 부분만을 필요한 만큼 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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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 이상의 태극기 |
태극기와 외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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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로용 국기 게양방법
중앙분리대 녹지공간이나 가로변의 가로등 기둥에는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국기를 게양한다. 이때 경사진 형태로 기를 게양할 경우에는 3 : 2 비율의 정국기를 게양하도록 하고, 깃면을 늘여 다는 형태로 게양할 경우에는 앞에서 설명한「깃면을 늘여서 벽면에 다는 방법」과 괘의 위치가 다르므로 주의를 요한다.
- 태극기만을 게양하는 경우
경사진 형태 |
깃면을 늘여 다는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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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외국기를 함께 게양하는 경우
경사진 형태 |
깃면을 늘여 다는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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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외게양
단독주택
- 집 밖에서 보아 대문의 중앙이나 왼쪽에 게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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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주택
- 집 밖에서 보아 앞쪽 베란다의 중앙이나 왼쪽에 게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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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 전면지상의 중앙 또는 왼쪽에 게양, 옥상이나 차양시설 위의 중앙, 또는 주된 출입구 위 벽면의 중앙에 게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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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외 정부행사장
- 이미 설치되어 있는 주게양대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다만, 공설운동장 등 대형 행사장의 경우 단상인사 등 참석인사들이 옥외 게양대의 국기를 볼 수 없거나 국기가 단상 또는 전면 주요 인사석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단상 또는 전면을 바라보아 왼쪽에 별도의 임시 국기게양대를 설치, 게양함으로써 참석인사 모두가 국기를 잘 볼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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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내게양
- 깃대에 의한 게양을 원칙으로 하되, 교육목적이나 관리목적 또는 옥내 여건 등을 감안하여 필요할 경우 깃면만을 게시할 수 있다.
사무실
- 기관장 집무실 등 사무실의 경우에는 실내 환경에 맞는 국기 크기와 게양위치를 정한 후 실내용 깃대에 국기를 달아서 세워 놓는다.
회의장,강당등
- 회의장이나 강당 등에 국기를 깃대에 달아서 세워 놓을 때에는 단상 등 전면 왼쪽에 위치하도록 하고, 깃면만을 게시할 경우에는 전면 중앙에 위치하도록 한다.
옥내 정부행사장
- 중․대형 행사장의 경우 대형 태극기 깃면을 단상 뒷쪽 중앙 벽면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원형 실내체육관 등은 참석인사 모두가 깃면을 잘 볼 수 있도록 시설 내부구조에 알맞은 위치를 선정토록 한다.
차량용 국기게양
- 차량의 본네트 앞에 서서 차량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본네트의 왼쪽이나 왼쪽 유리창문에 단다.
◆ 국기의 존엄성 유지
- 국기는 제작․보존․판매 및 사용시 그 존엄성이 유지되어야 하며, 훼손된 국기를 계속 게양하거나 부러진 깃대 등을 방치하여 서는 안된다.
- 국기가 훼손된 때에는 이를 방치하거나 다른 용도에 사용하지 말고 즉시 소각하여야 한다.
- 각종행사나 집회 등에서 수기(手旗)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주최측에서는 안내방송 등을 통해서 행사 후 국기가 함부로 버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 국기의 세탁사용
- 다만, 때가 묻거나 구겨진 경우에는 국기의 원형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이를 세탁하거나 다려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
◆ 영구에 국기를 덮는 방법
- 영구(靈柩)에 태극기를 덮을 때에는 영구의 덮개를 위에서 바로 내려다보아 덮개의 윗부분 오른쪽에 건괘(乾卦) 부분이, 왼쪽에 이괘(離卦) 부분이 오도록 한다.
- 이때 국기의 깃면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국기를 영구와 함께 매장하여서는 안된다.
◆ 국기 또는 국기문양의 디자인 활용
- 국기 또는 국기문양은 국민들이 친근한 이미지를 갖도록 그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디자인하여 각종 물품 등에 이를 활용 할 수 있다.(*예시: 학용품, 사무용품, 스포츠용품 및 생활용품)
- 국기는 국기 깃면을 특정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구멍을 내거나 절단하는 경우와 기타 국민에게 혐오감을 느도록 활용되어서는 아니된다.
- 국기문양(태극과 4괘로 이루어져 국기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무늬와 모양을 말한다)은 국민에게 혐오감을 느끼도록 활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첫댓글 국기에 대한맹세는 올해 조금 바꾸었습니다,,<예전>"나는 자랑스런 태극기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것을 굿게 다짐합니다.<새롭게 바뀐 맹새>''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