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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삼
중요한 요소들
그 시대의 사상 그리고 통치자의 성격, 통찰력 이런것 보다는 위치,영토의 크기, 지형, 국민의 수, 국민성 같은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현명하거나 현명하지 못하거나 개인의 행동이 어떤 시기에는 넓은 의미에서 한정적인 영향을 아주 크게 줄수는 있다.
지리적위치, 자연조건,영토의 크기, 인구, 국민성, 정부의 성격 이 6가지 요소는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1.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영국 : 육지에서 방어할 필요가 없고, 육상을 통한 영토 확장을 모색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상의 적을 살펴보자 네덜란드와 북방의 열강들(스웨덴이나 덴마크)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접하고 있다. 종종 그들은 연합해서 영국을 위협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해협이나 브레스트 앞바다의 함대들도 모두 안쪽의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쉽게 대처가 가능했다. 또한 북쪽이든 남쪽이든 안전하게 접근할수 있는 항구와 해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은 또한 공격하기 편하고 공해로 쉽게 나갈수 있으며 세계교통로의 요지가운데 한가지를 통제할수 있는 전략적으로 대단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은 발트해국가들- 스웨덴,덴마크에 대한 상대적 이점중 하나다.)
네덜란드 :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의 육군을 유지하고 돈이 많이 드는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빠른 국력소모와 네덜란드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된 원인도 되었다.)
프랑스 : 해양정책을 대륙확장정책으로 계속 바꾸었다. 막대한 부를 낭비.
대양과 지중해에 접하고 있어서 프랑스 동 서 함대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야만 서로 결합될수 있었다.
미국 : 두개의 대양에 접해있어서 초기에는 약점과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게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극복되기 시작한것은 바로 파나마 운하이다. 파나마 운하로 인해 카리브해는 불완전하고 도중에 중단되는 여행로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로가운데 하나로 변하였다. 그리고 이것의 영향력과 지배력을 미국은 확보함으로써 미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가졌다.
스페인 :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 이후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했지만 이를 뒷받침해줄만한 해양력이 없어서 많은 모욕과 피해를 입었다.
특히 스페인은 1704년 영국이 지브롤터를 점거하고(조지루크제독) 1713년 위트레히트조약으로 지브롤터의 소유권이 영국으로 넘어감에 따라 지브롤터 해협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겨 버렸고 스페인의 지중해함대와 대서양함대는 합동작전을 쉽게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탈리아 : 이탈리아의 긴 해안선과 좋은 항구들은 이탈리아에게 좋은 이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탈리아가 말타와 코르시카를 각각 영국과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하게 함으로써 그것의 이점을 크게 줄어들게 하여 버렸다. 이런 단점들은 매우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발전에 심각한 저해요소로 작용되었다.
일본 : 일본은 지리적 위치에서 영국과 비슷한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역시 육지에서 방어할 필요가 없고, 육상을 통한 영토확장을 모색하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가상의 적인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 안쪽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방어가 가능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공격하기 편하고 공해-태평양- 로 쉽게 나갈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 : 한국은 대륙에 통일된 왕조들을 상대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국력과 부의 낭비를 심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한국에서 도로가 쉽게 발전하지 못하고 한국이 쉽게 해양정책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한국은 공격받지 않고 쉽게 공해로 나가는 것이 일본과 중국에 의해 저지될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
중국 : 중국은 명의 영락제 사후부터 해양정책을 대륙확장정책으로 계속 바꾸었으며 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막강한 몽골과 유목민족의 북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막대한 부를 쏟아부어야 했다. 또한 청 등장이후에도 북방에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진출하였고 많은 원정이 실패했기 때문에 역시 이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 1767 - 1771년 청나라는 버마를 네 차례 정벌하여 명목상 조공을 받아내기는 했으나 원정자체는 실패로 끝났다. 1786년 베트남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후례의 마지막 왕인 민제가 폐위되고 민제가 도움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육로와 해로로 원정군을 파병하였지만 원정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1789년에는 청이 패배하여 정벌을 포기하게 된다.
중국 서나망 윈난,구이저우,쓰촨 일대에는 묘족을 비롯한 현지부족들의 반란이 계속 일어났으며 1746년 이후 쓰촨의 대-소금천(쓰촨성 진추안현과 샤오진현) 지방에서는 30년간 간헐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청나라가 1771-1776년 이 봉기를 완전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이것은 중가르 정벌때보다 두배의 군비를 지출해야 했다.
1780년대에는 타이완의 토착부족과 서북일대의 무슬림들도 봉기를 일으켜 청나라는 많은 군비가 소요되는 원정을 벌여야 했다.
2. 자연조건
영국 : 자연으로부터 얻을 것이 거의 없었고 제조업이 발달하기전까지는 수출할 것도 별로 없었다. 많은 분야에서 부족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자연조건들은 국민성과 다른 조건들과 결합하여 영국이 해외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본국보다 해외에서 더 안락하고 풍부한 자원을 가진 땅들을 찾을수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이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가 되게 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아일랜드 : 아일랜드 해는 실질적인 경계선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만처럼 보인다. 이것은 교통의 취약점을 나타낸다. 또한 남쪽과 서쪽의 대양에 접한 면에서 이루어질수 있는 공격은 영국의 해군력이 약해질경우 이곳을 취약점으로 만들수 있다. 아일랜드가 영국의 해군력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독립하게 된것은 영국의 위험을 약화시키기 위한 면도 많다고 볼수 있겠다.
네덜란드 : 네덜란드가 한때나마 유럽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그들에게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바다로 진출한것이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면 네덜란드가 바다로 나간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수 있다. 네덜란드의 전성기 때 네덜란드의 국토는 그 국민의 1/8 이상을 부양할수 없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발트해와 프랑스 사이에 있을 뿐 아니라 독일강들의 입구에도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전성기때는 유럽운송업의 대부분을 흡수할수 있었다. 가난이 그들을 바다로 나가게 했고 강력한 함대를 보유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그당시 부를 쌓을수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영국- 네덜란드 전쟁 당시 네덜란드가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지 못했던 것은 모든자원을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약점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보이는 약점과도 유사할수 있겠다.)
프랑스 : 기후가 매우 쾌적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 이것은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않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적용될수 있다. 상대적으로 일본은 영국과 가까운 환경이다.)
미국 : 미국은 초기에는 부분적으로 비옥하지만 거의 개발되지 않고 항구가 많은 바다근처의 땅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많은 지역들이 바다에 대부분 접해있고 강의 지류에 닿아 있었으며 내륙지방에도 많은 부를 낼수 있는 지역들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특별히 육로로 접근할수 있는 해외 소유지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미국해안선에 특별히 취약하게 돌출된 지점이 별로 없다. 또한 국경지대에 중요한 지점은 기차로 빨리 갈수 있었으며 태평양방면은 미국이 발전하는 동안 위험한 적들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약점이 그다지 되지 못하였다. 또한 국내자원은 풍부하여 자연조건에서 미국은 큰 이점들을 지니게 되었다.
이탈리아 : 이탈리아는 중앙에 있는 산맥이 그 나라를 두개의 길고 가느다란 지대로 분리하고 있다. 또한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라는 섬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이탈리아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지 못할 경우 약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
스페인 : 스페인은 여러지역들이 강력한 해양력으로 인해 하나로 연결되지 못한채 분리되어 있어서 여러가지 약점을 노출시켰다. 스페인이 스페인령 네덜란드(벨기에), 시칠리아, 서인도제도들을 가지고 있었을 때도 대단히 낮은 해양력을 지니고 있었다. (스페인은 서인도제도에서 국가의 거의 모든 수입을 획득했다. )
앙리 4세의 대신이었던 쉴리는 "팔과 다리가 강하고 힘이 넘치지만 심장은 대단히 약하고 연약한 국가들 중에 하나" 라고 스페인을 평가하였다. 스페인이 많은 타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것은 상업과 산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인도에서 오는 보물선이 실어오는 은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이후 심해지게 되었다.) 해상에서의 무력함은 오늘날까지 스페인이 강력한 국가가 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던것이 확실하다.
3. 영토의 크기 (해안선의 길이)
해안선의 길이는 인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장점으로도 단점으로도 작용된다.
이것은 남북전쟁의 예로서 알수 있다. 만약 남부에 강력한 해군이 존재했고 인구가 많았다면 북부의 남부 봉쇄는 이루어 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북군은 대단히 넓은 내륙수로를 흩어져서 지켰는데 이것은 남군에게 유리하게 작용될 수도 있었다. 남군은 수로에서 비밀리에 북군에 접근할 수 있었고 수로의 뒤에는 긴만과 강력한 요새들이 도처에 있었다. 이런 자연적 이점과 북군의 분산에서 비롯된 이점을 방해할 해군이 있었다면 북군은 상호지원을 위해 함정을 집중해야 했고 이것은 많은 접근로에서 남부가 상업을 할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북미대륙은 여러 경쟁국이 아닌 하나의 큰 국가가 존재하도록 만들게 되었다.
4. 인구
해군력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
- 함정과 예비부대의 부족(해군력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분야다.)
1782년 영국은 함선 120척을 보유했지만 프랑스는 71척 이상을 보유한적이 거의 없었다.
또한 프랑스는 소집했던 소함대 배후에 예비부대가 없었지만 영국은 있었다.
시간은 전쟁의 중요한 요소다. 비군사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국민들이 군대시설을 위해 돈을 내기를 거부하는 국가는 전쟁이 그 국민들의 정신과 재정능력을 새로운 전쟁 수행능력으로 전환시킬수 있을 충분한 시간을 지닐수 있을 만큼 강해야 된다. 만약 현존하는 육군이나 해군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하다면 그 국가는 자국의 천연자원이나 인구, 경제력(산업력) 이 제 역할을 하는 것에 의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육군이든 해군이든 모든 군대가 적에 의해 쉽게 제압되거나 격파될수 있는 경우에는 자연조건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를 굴욕적인 상황으로부터 구할수 없다.
5. 국민성
모든 사람들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익을 얻으려 하고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이익을 얻는 방법이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와 상업적인 번영에 대단히 큰 영향을 준다.
스페인,포르투갈 : 부를 추구한 방법에서 문제가 있었으며 이것은 건전한 상업의 발달에도 장애가 되었다. 또한, 이것은 산업은 물런 국가의 부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신대륙에서 추구했던 것은 산업의 새로운 분야나 탐험이 아니라 오로지 금과 은 뿐이었다.
땅에서 금을 채굴하면서 부를 추구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런 그들은 용감하고 진취적이며 절제를 잘하고 열정적인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의 위치, 스페인이 신대륙의 넓고 풍요로운 부분을 차지했고 오랫동안 경쟁자가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을 발견한 후에도 유럽에서 지도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수십년간 더 유지했다는 것은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1571년 레판토 해전이래 수많은 전쟁에 참여했지만 역사상 빛나는 결정적인 승리를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한 넓은 식민지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곳으로 떠났지만 해외에서의 부를 본국으로 거의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선박이 필요하지 않았고, 상업과 해군력이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페인은 양모와 과일, 철을 빼곤 거의 생산하는 품목도 별로 없었으며 제조업은 실패했고, 산업도 시들해지고 인구도 계속 줄어들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세계 각지로 돈을 가져간 네덜란드 상인들은 유럽의 한 나라에만 물건을 팔고, 그 대금을 가지고 귀국했다."
스페인은 힘들게 획득한 정금을 네덜란드에게 간단히 넘겨 주었고 해운업의 쇠퇴와 전쟁자금의 바닥은 스페인의 성장을 방해했다. 이는 중요한 순간에 스페인과 하나로 묶여있던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였다.
"멕시코와 페루의 광산이 스페인을 몰락시켰듯이, 브라질의 광산은 포르투갈을 몰락시켰다. 모든 제조업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천대받았다. 따라서 오래지 않아 영국은 포르투갈에 의류뿐만 아니라 모든 일용품과 공장에서 나오는 상품, 그리고 소금에 절인 고기와 곡물까지도 공급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처음에는 금을, 다음에는 땅까지 포기해버렸다. 오포르토의 포도밭은 결국 브라질산 금을 받고 영국인에게 팔렸는데, 그 금은 포르투갈에 잠시 머무른 후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50년 동안 5억달러가 브라질의 광산에서 채굴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대 말에는 포르투갈에 2500만 달러의 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도 진정한 부와 허구적인 부의 차이를 보유주는 것이 되겠다.
영국,네덜란드 : 이들은 번갈아 '장사꾼의 나라'로 불렸다. 그리고 이들은 무력이 아닌 노력을 통해 부를 추구했으며 가까운 길 대신에 먼길을 선택하였다. 이런 노력과 부지런한 성격은 그들이 통치했던 해외의 생산품을 증가시켰고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거래가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선박을 필요로 했고 해양국으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 : 데위트 "네덜란드인은 평화로운 시기에 전쟁을 두려워하여 미리 금전적으로 희생을 하면서 전쟁준비를 하려고 결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인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위험이 바로 눈앞에 닥쳐오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 나라의 방위를 위해 돈을 내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절약해야 할 곳에서는 사치스러우면서도 돈을 꼭 써야 할 곳에서는 탐욕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국민을 상대하고 있다."
프랑스 : 국민들은 부지런하고 지리상으로 좋은 위치다. 프랑스 해군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때가 많았다. 하지만 프랑스가 부를 추구하는 방식은 국민들의 검소함과 절약, 그리고 저축이었다. 아껴서 저축을 하고 소규모로 모험을 하는 것은 적은 규모의 부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아니며 대외무역이나 해운업의 발달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국민전체가 지나치게 신중하거나 재정적으로 소심하다면 이것은 상업의 확대나 국가 해운의 성장을 방해한다.
유럽의 귀족계급은 중세이후로 평화적인 무역을 멸시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것은 국민성으로 인한 무역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사람들은 자존심은 이런 경향에 상처받기 쉬웠고 일을 해서 재산을 증식하려 하지 않는 잘못된 정신과 결합하여 상업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프랑스사람들은 스스로 국민성으로 인정하곤 했던 허영심에 의해서 스페인사람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귀족들의 사고방식은 자신이 경멸하는 직업이 열등한 것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부유한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은 귀족의 영광을 얻게 되면 곧바로 직업을 포기해 버렸다. 부지런한 민중과 비옥한 토지가 상업의 완전한 쇠퇴를 막기는 했지만 이것은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고 쉽다는 생각아래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다. 물런, 콜베르나 몽테스키외가 반대되는 생각을 가르쳤지만 국민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귀족이 있었지만 공화국이었고 개인의 자유와 기업을 많이 허용했으며 국가가 강력하게 된 근본이 돈, 즉 부였고 부는 사회적인 존경과 지위를 얻게 해 주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귀족의 자부심은 강했지만 부는 특권으로 비쳤을 뿐만 아니라 존중되었다. 이런 사회적 정서가 상당한 영향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물런 그런게 없었고 상업과 부에 대해 그것이 특권이며 존중될만한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 중국, 일본 이 3개국을 비교하더라도 국민성에서 다소 차이를 나타낸다. 중국과 한국은 명과 조선이후로 사농공상이라 해서 상업을 천시했으며 유럽과 비슷하게 부유한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은 권력을 얻게 되면 곧바로 직업을 포기해 버렸다. 민중은 부지런했고 토지는 비옥해서 상업이 쇠퇴하는 것을 막긴 했지만 이것은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국민성은 계몽을 통해 쉽게 바뀌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반면 일본은 일종의 사무라이라는 귀족층이 있었지만 중앙권력의 힘이 한국,중국에 비해 약한 편이었으며 부에 대한 사회적 정서가 좋았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의 발전방향을 바꾸는데 많은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식민지
재도와 감독, 목표에 대한 수단의 적절한 적용, 교육, 체계적인 기능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앞섰지만 성공적 식민지화는 영국이 했지 프랑스가 하지 않았다. 그럼 왜 영국이 식민지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을까?
일단, 영국 식민지 이주자들은 새로운 땅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정착했으며 자신의 이익과 그곳의 이익을 동일시했다. 또한 고국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은 가졌지만 돌아가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다음올, 영국인은 가장넓은 의미에서 자신이 정착한 국가의 자원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쾌적한 고국에서 누렸던 즐거운 생활을 그리워 했다는 점에서 달랐으며
스페인인들은 관심을 드러낸 범위가 너무 좁아서 새로운 국가의 가능성을 완전히 개발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제국의 확장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무역과 통상을 얻는 데만 신경썼으며 환경의 압력이 있을때만 정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점을 나타낸다.
6. 정부의 성격
이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빠지는 것을 피하겠다.
정부의 형태, 제도, 통치자의 성격은 많은 영향력을 지닌다.
전제적인 정부라도 때때로 일관성과 올바른 판단력에 의해 자유로운 국민들이 오랜 진행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특정 군주가 사망한후 유업의 계승이 어렵다는 점이 난관이다.
영국만 일단 예로 들겠다.
정부의 목적을 과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의미가 없던 국가에 대한 무의미한 존경에 대한 요구는 왕정과 크롬웰 때에도 변함없이 지켜졌다. 이것은 하지만 영국이 여러세기 동안 실수를 거듭하면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목적의 단일화, 해양력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 다른 국가들이 그 해양력을 느낄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영국의 정치제도가 만들어낸 특징이며 자국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영광이 유지됨에 따라 발생하는 사회의 고통에 둔감해서 전쟁의 준비와 유지에 필요한 금전적 부담을 쉽게 감당하였다. 또한 단체정신이 군대제도에 정착되기 전에는 군사적 명예심을 유지하였으며 최하층 출신으로 제독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프랑스가 1789년 말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할때 귀족출신임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확인하였던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정부는 일반적으로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국방비 지출에 호의 적이지 않다. 평화가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투자함으로써 국가의 번영을 확보할수 있지만 말이다.
중국 몰락의 원인 - 추가
1795년 종교적 비밀결사인 백련교단의 봉기는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1813년에는 백련교 일파인 팔괘교 교도들이 북경에 잠입하여 황궁인 자금성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19세기 초에는 타림분지의 무슬림들이 자항기르를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재개했으며 이것은 코칸트한국의 무슬림지원까지 있었다. 경제불황도 겹치면서 상황은 악화되고 1840년대엔 청나라의 쇠퇴조짐은 눈에 보일정도였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쇄국 정책을 계승했으며 외국의 사절은 중국천자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증거로 허황된 외교정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청이 조공사절단에 대한 과대한 접대비용으로인해 사절단을 그다지 반기지 않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문에 1757년에는 해외무역을 광주 한곳으로 제한하기에 이르렀으며 건륭제는 중국은 외국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교역이 필요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유럽열강의 군사적- 상업적 압박을 계속 봉쇄할수는 없었고 영국은 아편을 청에 팔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1731년 아편반입을 금지했으나 1770년대 이후로 아편밀수가 성행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해 무역적자를 보였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1816년부터 대량의 아편을 풀기에 이른다. 아편은 청나라의 사회질서를 붕괴시켰고 은의 국외유출로 통화제도를 흔들었다. 이상황에서 청에 산업혁명 비슷한것라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또한 국민들의 아편중독은 심각한 문제였다. 청은 특단의 조치로 임칙서를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사태는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청나라는 유럽열강과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채결하게 되었다.
청의 우월감과 자신감의 신화가 깨지고 청나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이후 청엔 대규모 봉기와 몰락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청나라의 군대
1759년 알트쉬르 전투도를 보면 만주족 기병이 화승총(머스켓)을 사용하는 무슬림 기병에 활로 맞서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30년 후에는 팔기군 병사들이 새로운 화약무기를 선호한 나머지 활쏘기를 게을리 할까 우려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시대착오적인 집착은 아니었다. 화승총은 말 위에서 조작하고 장전하기가 불편하였으며 잘 훈련된 궁사라면 화승총보다 빨리 활을 쏠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초 청군의 쇠락 조짐의 원인은 오랜기간의 평화로 군의 기강이 해이하고 나태해진것 대부분의 부대가 실전경험이 없고 훈련내용이 점점 더 실전에서 필요한것과 멀어진 것이다. 또한 1820년대 겨우 활 대신 총이 제식병기가 되었지만 그것은 활보다 총이 훈련시키기 더 쉬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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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