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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선] 연재/131031송고 200자 16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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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연재 마지막 무관생도들
이 원 규
2 조국을 떠나다
이갑 참령의 권총
토요일 오후 대한제국무관학교 생도들은 외박을 나갔다. 홍사익은 외출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일본 소설을 읽겠다고 했으므로 이응준은 지석규와 함께 복장검사를 받고 정문을 나섰다.
지석규의 집은 생도들의 말처럼 ‘서서 오줌 누는 사이에 뛰어가면 다녀올 수 있는’정도는 아니지만 학교에서 가까웠다.
모친이 대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아들 오는구나. 열심히 병법을 연마하였느냐?”
“네, 열심히 연마했습니다. 어머님도 잘 지내셨지요?”
모자는 그런 대화를 나누며 손을 잡았다.
지석규가 모친에게 응준에 대한 간단한 소개 말씀을 올렸고 응준은 대청에서 큰절을 올렸다.
“어머님, 석규 형 옆에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러시게. 석규하고 나란히 큰 나무로 커서 나라의 기둥이 되시게.”
모친이 격려했다.
그렇게 인사를 올리고 지석규의 집을 나섰다. 삼청동에서 안현동은 멀지 않았다. 이갑 참령 댁에 도착하자 외동따님 정희가 쪼르르 대문으로 달려 나왔다.
“오빠 기다리느라고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응석을 부리며 업어달라고 매달려, 그는 정희를 업고 봄 냄새 가득한 마당을 거쳐 안채로 갔다.
“저런, 저 철없는 것이 오빠를 괴롭히는구나.”
참령 부인이 혀를 차면서 웃었다.
이갑 참령은 해가 진 뒤에 말을 타고 귀가했다. 응준은 말발굽 소리를 듣는 순간 달려 나가 대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지금 퇴청해 오십니까?”
예전에도 그랬다. 이 참령 댁에 몸을 의탁했던 1년 동안 단 한 번도 참령의 귀가 때 대문 열어 맞아들이는 일에 늦은 적이 없었다.
“우리 응준이가 왔구나.”
참령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참령이 대청에 앉았고 그는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외박허가를 받아 나왔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참령은 생도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새로 사귄 친구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응준은 지석규와 홍사익에 대해 말씀드렸다.
“지석규는 모르겠고 홍사익은 유년학교 수석졸업생이라 내가 알지. 그 어려운 사서삼경을 줄줄이 외는 녀석이지. 그리고 김준원이란 녀석이 있을 거다. 나하고 육사 동기인 김기원 참령의 아우다. 무관학교 동기생들은 서로 돕고 서로 경쟁하며 평생을 같이 간다. 잘 사귀어 두어라.”
이 참령은 권총과 군도가 매달린 가죽 요대를 풀면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응준은 공손히 대답하며 권총과 군도를 받아 들고 대청의 문갑을 열었다. 거기 집어넣으려는데 참령이 말했다.
“권총을 네 손에 잡아라.”
응준은 시키는 대로 했다.
“군인은 총과 같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때에 군인은 보통사람과 다르다. 조국을 지키는 총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조국을 쏘는 총이 될 수도 있다. 내 말을 알겠느냐?”
이 참령의 말에 응준은 힘차고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조국을 지키는 총이 되겠습니다.”
“이제 넣어 둬라. 담배를 피우고 싶다.”
참령의 음성은 깊고 침착했다.
“네.” 응준은 얼른 권총을 문갑 안에 넣고 서랍에서 파이프와 담배합, 그리고 제물포 세창양행에서 만든 성냥갑을 꺼냈다.
참령은 그것을 받아 파이프에 담배를 다져 넣고 성냥불을 일으켰다. 20촉짜리 전등불 속에 푸르고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참령은 고개를 돌려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곧 군복을 벗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소식을 듣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네.” 하고 응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이갑 참령은 어젯밤보다 기분이 나아진 듯해 보였다. 볼 일이 있다며 군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대문 밖에 나가서 인사를 하는 응준을 바라보며 말안장에 올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외박을 나와 집에 오너라.”
“네.” 응준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외출하자 심심해진 정희가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른 키로 한 길이 넘는 담장 위에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 대신 한 시간 동안 업어준다 해도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떼를 썼다. 어머니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열한 살짜리 소녀를 담장 위에 올려놓았다. 소녀는 깔깔 웃다가 눈을 감고 그의 품으로 뛰어 내렸다.
홍사익이 다음 주에 있을 학과 시험에 대비해 공부하라고 노트를 빌려 주어 가방에 넣어 왔으나 그는 정희 때문에 거의 공부하지 못했다. 그러나 참령 댁에 와서 지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황제의 은시계
지석규는 외박 복귀시간을 앞두고 모친과 결혼에 대한 마지막 의논을 하고 있었다. 졸업 후에 하겠다고 하루를 버티다가 결국 어머니의 호소 앞에 두 손을 들어버린 것이었다.
“납채는 운영 당숙님에게 맡기시고, 저쪽에게 연길을 보내기 전에 제가 무관학교 생도 신분이란 걸 생각해 달라 하셔요. 칠월에 방학을 하고 식 올리면 좋지요.”
모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결혼 문제에 대해 매듭을 지으니 아직 식을 올린 건 아닌데도 어깨에 문득 무거운 짐이 턱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국이 심상치 않아 자신은 무관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독립전쟁 일선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이응준이 귀교하기에 적당한 시간에 그의 집에 들렀기에 함께 학교로 들어갔다. 외박 나간 학생들은 학교로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숙소에 죽치고 있었던 홍사익을 불러내 셋이 식당으로 걸어가는데 생도 몇 사람이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둘러쌌다.
“이응준 생도, 이갑 참령님과 교장님이 후견인이란 게 사실이야?”
그들 가운데는 김준원 생도가 들어 있었다. 외박을 나가서 집에 갔다가 형인 김기원 참령에게서 들은 것 같았다.
이응준은 그들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사실이야. 내가 말 안한 건 잘난 체하는 것같이 보일까 봐서였어.”
시비를 건 생도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지석규는 새내기인 이응준이 한 마디 말과 진심에 찬 표정만으로 상대를 사로잡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응준에 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모든 생도들에게 알려졌다. 몹시 부러워하고 조금은 시기하는 생도들의 눈빛을 받으며 이응준은 더 겸손하게 행동하는 듯했다.
다시 주말이 오고 외박들을 다녀왔고 시간이 흘러갔다. 이응준은 소대장 생도가 되어 일주일을 보냈다. 지휘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대체 편입한 지 한 달도 안 된 존재라는 사실을 모두가 잊을 만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홍사익은 여전히 강의 중에 보는 시험마다 만점을 받으며 우등생의 자리를 이어갔다. 지석규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 나갔다.
4월 셋째 일요일, 외박에서 돌아온 김영섭이 저녁 학습시간에 조용히 생도들을 모이게 했다.
“내 고향 강화에서 의병들이 다시 저항을 시작했어. 지난 열나흗날 북사면에서 군용품을 모집했고 엊그제는 의병 열네 명이 교동 섬 주재소를 습격했어.”
생도 하나가 누가 오나 출입문에 귀를 대고 망을 보았다.
김영섭은 외출 중에 누군가를 만난 듯 작은 쪽지를 보며 빠른 속도로 말했다.
“양력 2월에는 전라도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이 체포됐으나 부하들이 공격해 구출해 냈어. 민긍호(閔肯鎬) 의병장은 강원도 원주에서 전사했어. 3월에는 함경도 의병장 홍범도(洪範圖) 대장이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어. 4월에는 한영준(韓永俊) 의병장이 경상도 거창에서, 김수민(金秀敏) 의병장이 황해도 장연에서 일본군과 싸웠어.”
“앞으로 어떻게 될까?”하고 염창섭 생도가 말했다.
유승렬 생도가 나섰다.
“어떻게 되겠어? 그러다 꺾이고 꺾이고 그렇게 가는 거지. 지난겨울 경기도 양주에서 의병장 허위(許蔿) 대장과 이강년(李康秊) 대장이 심삽도의군을 조직해 시도했던 한성 진공도 실패했는데 어쩌겠어?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이 나라 운명은 이토 히로부미 손바닥 안에 있어.”
김영섭이 멱살을 잡을 듯 다가갔다.
“뭐라구?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구? 이토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무관생도가 그렇게 패배의식을 갖고 있으면 어떡해?”
유승렬은 목에 핏줄이 뻘겋게 드러나도록 흥분하여 소리쳤다.
“너만 애국심 있는 줄 알아? 너만 잘난 줄 알아?”
유승렬은 주먹으로 퍽퍽 자기 가슴을 쳤다.
“나도 내 나라를 생각하면 복장이 터져. 차라리 의병대로 뛰어 들어가서 총 쏘다가 죽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기 와 있는 거야.”
지석규는 두 사람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우리는 똑같아. 생각도 똑같고 애국심도 똑같고 우리 미래도 그럴 거야.”
그러자 다른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논쟁한 두 사람을 둘러쌌다.
그렇게 갈등도 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5월 중순 지석규는 소대장 생도로 일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교관단과 조교, 생도 전원은 일과를 중단하고 정오에 학교 서북쪽 소나무 숲에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생도들을 인솔해 그 곳으로 가보니 녹음이 짙은 숲속에 시골부잣집 잔칫날처럼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늘 배가 고팠던 생도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허리띠를 풀어놓고 실컷 먹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물러나려 할 즈음 교장 노백린 정령(正領 현재의 대령)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교관단과 생도 제군, 지금 우리 조국의 사정이 나를 더 이상 제군과 같이 있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 부득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생도 제군, 그대들은 개인적 영달보다는 기울어가는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장교가 돼야 한다. 지금 조국은 쓰러지기 직전이다. 조국을 구할 사람은 그대들밖에 없다. 그대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의 희망이다. 부디 내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지석규는 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일부 생도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석규는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서며 구령을 내렸다.
“생도 전체 일어섯! 교장님께 대하여 경롓!”
교관들도 그의 구령에 따라 함께 경례했다.
노백린 교장의 후임으로 온 사람은 이희두 장군이었다. 이갑 참령과 함께 강제 양위에 반대해 봉기한 전력이 있으나 최근에는 친일로 기울어 있었다.
“우리의 앞날이 점점 더 암울해지는군.”
생도들은 한숨을 쉬었다.
한여름이 다가오고 방학이 되었다. 지석규는 방학 다음날 윤용자(尹龍慈) 규수와 혼례를 올렸다. 처가에서 벌어진 혼례식에 홍사익과 이응준은 물론 염창섭 · 신태영 · 유승렬 · 김영섭 등 동기생들이 찾아가 축하해 주었다.
초야에 그는 신부에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 명에 따라 그대를 아내로 맞았지만 이미 세운 뜻이 있어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없소. 나라와 겨레를 위망(危亡)에서 지키려고 결심한즉 언제 죽을지 모르오. 나를 용납할 수 없으면 나를 따라 시집으로 가지 않아도 좋소. 어떻소? 뜻을 분명히 해주시오.”
말을 끝내면서 그는 자신의 표현이 너무 과했다고 약간은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신부가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또렷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각오한 바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다시 만난 동기생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참 고지식한 사람이라며 모두 끌끌 혀를 찼다.
“한심한 친구야, 그런 다음 아내 옷을 벗기고 초야를 치렀냐?”
지석규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9월이 되고 지석규와 동기생들은 2학년이 되었다. 어찌된 셈인지 무관학교는 신입생을 뽑지 않았다. 생도들은 우리가 그냥 버려지는 게 아닌가 웅성거렸다.
“12월에 신입생을 뽑을 것이다. 일본과 학기를 맞추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도들을 대표하여 질문을 한 홍사익이 학교 측으로부터 들은 답이었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달라져 있었다. 제식훈련, 총검술, 체육 등 실기 중심 술과(術科)보다 책으로 배우는 학과(學科)가 늘어나고 학과의 대부분을 일본어에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장차 이 나라를 일본이 지배할 테니까 일본에 맞추는 거야. 세상이 모두 일본식으로 돌아가고 있어. 우리는 아마 근위보병대 장교 노릇이나 하다 말겠지.”
홍사익은 학교 측 대답을 전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모든 생도가 인정하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 홍사익, 그는 이것이 그들을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로 보내기 위한 사전작업인 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군부의 핵심간부 이갑 참령의 총애를 받는 이응준, 군수의 아들인 염창섭, 부형이 친일 관리로 있는 다른 생도들도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9월 하순 어느 날 장충단에서 운동회가 벌어졌다. 생도들은 제단 앞에 정렬해 순국 영령들에게 받들어총 경례를 하고 축구, 야구, 줄다리기, 단거리 달리기 등 경기를 벌였다.
마지막 종목은 남산 봉수대까지 달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야전구보였는데 큰 상품이 걸려 있었다. 황제가 하사하는 은시계였다.
지석규는 자신의 특장(特長)을 알고 있었다. 민첩한 동작은 남들한테 뒤져도 전체적인 체력과 심폐지구력으로 경쟁하는 일이라면 누구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교관의 호루라기를 신호로 생도들은 일제히 달려 나갔다.
10분쯤 뒤 그는 얼굴이 까만 조철호와 선두를 겨루었다. 이제부터 가파른 고갯길이므로 어떻게든 조철호를 밀어내자고 생각하며 속도를 빨리했다. 조철호도 빨라졌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겨루며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제치며 추월해 나갔다.
“미안하네. 나 먼저 가네.”
이응준이었다. 다리의 강한 탄력으로 마치 평지를 달리듯 치고 올라갔다.
더 기가 막힌 건 선두그룹이 봉수대까지 300미터쯤 앞두고 있을 때 일어났다. 이미 반환점을 돌아온 이응준이 씩 웃으며 겅중겅중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갔던 것이다.
“아이고, 저 친구를 왜 편입생으로 뽑아 가지고 우리를 힘 빠지게 하나.”
조철호가 헐떡거리며 투덜댔다.
이응준은 융희 황제의 문장이 새겨진 은시계를 주말 외출 때 이 참령에게 드렸다. 이 참령은 핫핫 소리 내어 웃으며 손바닥으로 응준의 어깨를 철썩 두드렸다.
“황제 폐하가 하사하신 은시계를 받다니, 이런 경사가 다 있구나. 하지만 네가 받은 것이니 네 것이지.”
참령에게서 시계를 돌려받은 응준은 그것을 부인에게 드렸다.
“부인께 드리겠습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인은 함박웃음을 웃으며 시계를 받았다.
“그냥 내가 보관하겠네.”
이갑 참령은 노백린 정령과 비슷한 시기에 군복을 벗고 야인이 되어 있었다. 도산 안창호 ․ 이종호 ․ 유동열 ․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과 국권을 회복하는 일에 나서고 있었으나 비탄할 일이 더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응준이 상품으로 받아온 은시계에 기분이 좋아 크게 웃은 것이었다.
신입생들, 그리고 폐교 칙령
1908년 겨울이 젊은 이응준의 생애를 스쳐 지나가고 1909년이 왔다. 일반학교와 다르게 2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무관학교는 달라져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신입생들이 입학한 것이었다. 응시자가 1,000명이 넘었는데 이번에도 25명을 선발했다고 했다.
개학 첫날 1학년과 상견례를 하기 위해 연병장을 향해 걸으면서 그는 염창섭에게 말했다.
“응시자가 천 명이니 40대 1이야.”
창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우리들보다 더 많아. 무관학교를 졸업해 봐야 근위대 장교밖에 할 수가 없는데 많이 왔어.”
응준은 염창섭의 표정에 다른 동기생들 같은 절박함은 적다고 느꼈다. 창섭의 부친은 경상도 의성군수였다. 일본이 득세하는 시대에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장차 창섭도 그 후광으로 탄탄대로를 걸어 갈 것이었다.
신입생과 2학년의 상견례는 정겨웠다. 양쪽에 한 학년 25명이 한 줄로 서 있다가 하급생이 거수경례를 하고 상급생이 답례했다. 그런 다음 2보 앞으로 나아가 악수했다. 1학년이 구령에 따라 좌로 1보씩 이동하며 다음 상급생과 악수하니 모든 생도가 악수하게 되었다. 참으로 간단하고 정겨운 인사였다.
일본군에서 파견된 교관의 위상을 벗어나 조금씩 무관학교의 운영을 장악해 가고 있던 일본인 교관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는 일본 사관학교 식으로 하려 했다. 하급생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하는 위계질서를 강조했다. 그러므로 2학년들은 신바람이 나서 걸핏하면 기합을 주며 하급생들을 잡아돌렸다.
어느 날 신태영 생도가 동기생들에게 말했다.
“김석원(金錫源)이라는 녀석, 제법 눈에 띄는 녀석이지. 제동소학교 한 해 후배이고 우리 집 이웃에 살아. 달리기를 잘해서 한성부 내 여섯 소학교 합동운동회에서 전체 1등을 했지. 잘 부탁해.”
동기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태영의 말대로 제법 눈에 띄는 하급생, 눈빛이 강하고 구령도 힘차고 늠름한 인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흥미로운 꼬마가 하나 있었다. 겨우 열다섯 살인 인천 출신 박창하였는데 키가 합격 기준점 4척 8촌(약 158cm)에 미달되어 불합격했는데 오구라 대위에게 울고불고 매달렸다. 체력도 약하지만 성적이 워낙 좋은 터라 대위가 큰 맘 먹고 합격시켰다고 했다. 얼굴 인상도 귀엽고 붙임성이 좋아 상급생들은 박창하를‘막내’라고 불렀다.
이응준과 이름자가 비슷한 이응섭(李應涉)이라는 생도가 있었다. 이응준은 돌림자가 끝 자였고 본관(本貫)이 달라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생도들은 응준의 사촌동생이라고 불렀고 응준은 응섭을 기꺼이 아우라고 불렀다. 키는 응섭이 한 뼘이나 컸다.
“아우야, 너는 어디서 왔냐?”
그의 물음에 응섭이 어깨를 꼿꼿이 펴고 차렷자세를 한 채 대답했다.
“황해도 장련(長連)에서 김구(金龜) 선생이 세운 광진학교를 다니다가 왔습니다.”
“김구라면 치하포에서 왜놈 밀정을 격살한 김창수라는 사람 아니냐. 너도 애국심이 강하겠구나. 뭘 잘하느냐?”
“한문을 좀 읽습니다. 사서삼경은 읽었지만 홍사익 선배님처럼 외우지는 못합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응준은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후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응섭은 꺽다리라는 별명도 가졌다.
이응준은 무관학교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편입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동기생들은 그가 편입생인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적응하고 있었으며 체력도 학과 성적도 술과의 성적도 선두에 속해 있었다.
학과 성적은 홍사익을 넘어설 수 없고, 덕망으로 신뢰를 받는 면에서는 지석규를 넘어설 수 없고, 그는 술과 과목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부족한 두 가지를 친구들에게서 받아 안는 포용력이 있었다.
새내기 1학년 후배 생도들도 그를 잘 따랐다. 선후배 학년 모두 합해 봐야 50명이고 때로는 합동 수업을 받을 때도 있어서 어떤 생도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특징은 무엇인지 잘 알았다. 어느 날은 후배들이 선배 25명을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했는데 그가 1등이었다.
그 사실을 전하면서 김석원 생도가 1등이 된 이유를 말해 주었다.
“3원 50전을 훔쳐 가출한 시골 소년이 자기 인생을 힘차게 이끌며 여기 서 있으니까요. 이갑 참령님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봄 학기가 흘러가는 가는 동안 시간도 마음도 여유로웠으므로 그는 줄곧 이 참령 댁에 마음을 썼다. 두 해 전처럼 언제 갑자기 이 참령이 감옥에 갈지 모르는 일인데다가 무관학교에 오고 첫 외박을 나갔을 때 권총을 직접 잡게 하고 다짐하던 말 때 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김준원 등 군부 사정을 잘 아는 생도들에게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귀를 기울이고, 참령의 집에 가서도 분위기를 살폈다.
7월이 됐을 때, 중대한 사정이 있어서 방학이 열흘 쯤 늦춰진다는 발표가 있었다. 생도들은 무관학교의 폐교가 아닌가 조바심을 했다. 폐교하더라도 일단 뽑아 놓은 생도들은 졸업시키고 해야 하는 게 상식이라고 그들은 극히 상식적인 상상만 했다.
7월 31일 학교 게시판에 벽보가 붙었다. 무관학교를 폐교한다는 황제의 칙령이었다.
짐(朕)이 앞으로 신민들의 발달 정도를 보아 증병(增兵)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까 지는 군부(軍部)와 무관학교를 폐지한다. 현재의 군사는 궁중에 친위부(親衛府)를 설치하 여 이를 관장하게 하고 사관 양성은 이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해서 군사 일에 숙달하게 하 는 바이니 너희 백성들은 짐의 의도를 잘 헤아리라.
그 아래는 별도의 일본어 공시문이 붙어 있었다.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가 생도들에게 알리는 세부 지시사항이었다.
1. 재학 중인 생도들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9월 3일 본관의 인솔로 남대문역에서 기 차로 출발, 부산까지 가서 연락선을 타고 내지(內地)로 건너가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과 3학년에 위탁생 신분으로 편입한다.
2. 학업에 열등한 자를 제외하고는 유년학교 졸업 후 전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것이 다.
3. 내일 오전 10시부터 본관이 주관하는 체력검정과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때까지 전원 외박을 허가한다.
4. 검사 합격자는 8월 15일부터 12일간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와 똑같은 일과로 적응 훈련을 받는다.
5. 적응훈련이 끝난 뒤 9월 2일까지 4일 간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휴가를 갖는다.
육군 대위 오구라 유사브로
생도들은 얼싸안고 통곡했다.
이동휘가 세운 강화 보창학교 출신 김영섭은 머리를 담벼락에 찧으며 소리쳤다.
“이토 히로부미 그놈을 쏴 죽여야 해. 아아!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이응준도 통곡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폐교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게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장차 일본 육사에 입학하게 된다는 것, 나라가 망해가는 판인데 거기를 나와 무슨 소용이 있을까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교관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짐을 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만에 이응준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이럴수록 냉정해자. 일단 소나무 숲으로 가자.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말해 보자.”
지석규가 제복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그게 옳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도들과 함께 소나무 숲으로 갔다. 지난해 여름 노백린 정령이 이별잔치를 벌여준 그 자리였다.
1·2학년 생도 50명이 모두 모이자 그는 사회자로 홍사익을 추천했다. 홍사익이 최고성적을 기록해온 수재이고 유년학교부터 거쳐 온 정통이기 때문이었다.
홍사익은 이응준과 지석규에게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치 준비된 듯한 수사(修辭)로 말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동기생,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가련한 우리 조국을 끝까지 지키려는 우리들의 비원은 이제 새로운 고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마 더 길게 같은 배를 타고 운명의 항해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선 짧게 냉정한 논리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모두가 그것을 경청하면 좋겠습니다.”
홍사익는 그렇게 말하고 한 사람씩 발언하게 이끌고 나갔다. 예상한 바였지만 발언의 방향은 두 가지였다. 일본 유학이 일제에 순치당하는 일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 노백린 · 이갑 등 존경하는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단 일본 유학을 해서 극일의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부형과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김영섭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일어섰다.
“왜놈들한테 가서 왜놈을 이기는 법을 알자고요? 나 김영섭이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울면서 여러분과 헤어집니다. 체력검정을 받으러 오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2학년 9명, 1학년 5명이 역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따라서 퇴장했다.
지석규도 따라나설 듯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홍사익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신중히 생각하자.”
지석규가 응준을 바라보았다.
“나는 참령님 명대로 할 거야. 참령님 말씀을 듣고 내일 결정하자.”
응준의 말에 지석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끄덕였다.
30여 명의 생도들은 터덜터덜 걸어서 교문을 나섰다.
김준원이 응준의 소매를 잡았다.
“형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여섯 해 전 황실특파 유학생으로 뽑혀 동경에 간 사람들 중 하나가 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대. 작년엔가 죽은 김정우 군기창감(軍器廠監)의 아들이라고 들은 적이 있어.”
이응준은 기억나는 게 있었다.
“군기창감님의 장남은 재작년 급환으로 돌아가신 공병대장 김성은 부령(副領. 현재의 중령)님, 이분은 우리 교장이셨던 노백린 정령님과 일본 육사 11기 동기생로서 약관 27세에 공병대장 자리에 앉았었지. 그분의 아우, 그러니까 군기창감님의 차남이 유년학교에 재학 중이지.”
그는 그렇게 대답해 놓고 기억을 더듬었다. 재작년 설날 참령에게 세뱃돈을 두둑하게 받고 그 다음날 참령을 따라 사륜마차를 타고 사직동 김정우 군기창감 댁에 세배를 갔던 일이 떠올랐다. 이 참령은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말했다.
“군기창감님은 나이 지긋한 어른이시다. 아드님이 공병대장하던 김성은 부령님, …음, 그러니까 부자가 같은 계급이셨다. 김성은 부령님은 일본 육사 11기로 내게 4년 선배이신데 지난해 6월 급환으로 돌아가셨다. 군기창감님은 그래서 상심이 큰 어른이니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네.”하고 응준은 공손히 대답했다.
참령은 사직동에 도착해 군기창감에게 세배를 올린 뒤 응준에게도 절을 시켰다.
"재주가 있어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인데 보성중학에 다닙니다."
참령의 소개가 끝나자 응준은 절을 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래, 고맙구나.”
김정우 군기창감은 세배를 받고 얇은 양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선물로 주었다.
이갑 참령은 군기창감의 장남이자 자신의 육사 선배인 김성은 부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을 했다. 그는 부위(副尉) 시절이던 1905년 김성은 부령과 함께 일본시찰단에 끼여 다녀오면서 받은 가르침에 대해 회고했다. 그리고 황실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다는 차남의 소식을 물었다.
“그때 세이소쿠영어학교 다니던 아우가 유년학교로 가고 싶어하는 걸 말리지 못해 고심하셨습니다. 저도 그때 작은아드님을 잠깐 봤습니다. 생도생활 잘하고 있는지요?”
“잘 견뎌내고 있는 듯하네.”
군기창감이 말했다.
응준이 그 때의 일을 말하자 유승렬이 끼어들었다.
“우리 형이 황실유학생으로 갔다가 보호조약을 거부해 자퇴하고 돌아왔어. 형한테 들었어. 응준이가 말한 유년학교로 간 군기창감의 아들은 이름이 김광서(金光瑞)야.”
“그래, 그날 그 이름도 들은 거 같아.”
응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김준원과 유승렬은 잠깐 서로 눈빛이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은 일본행을 기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무렵, 이 참령은 안현동에서 원동(苑洞)으로 이사해 있었다. 사흘 전 일요일에 외출해 갔었지만 참령이 집에 계시지 않아 못 뵈었던 터라 부지런히 발을 놀려 걸어갔다.
대낮인데도 이 참령은 집에 있었다. 얼굴이 초췌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채 혼자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창 나이인 서른세 살인데 얼굴이 상해 마흔댓 살이 넘어 보였다.
“지금 일본이 철천지원수이지만 나는 일본 육사를 다닌 걸 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국을 위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니 너는 남이 어떤 길을 가든 일본으로 가거라.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가듯이 말이다.”
이 참령은 그렇게 잘라서 말했다. 응준이 “네”하고 대답하자
“꼭 육사를 졸업하고, 조국이 너를 부르면 달려와 총부리를 왜놈에게 돌려야 한다.”
하고는 일본 유년학교와 육사, 장교 양성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유학 갔을 때는 세이죠오학교가 육사 예비학교였는데 지금은 프랑스식을 따라 유년학교를 만들었다. 거기서 예과 3년, 본과 2년을 마치면 일반 군부대로 가서 반년 간 적응과 실습을 위한 대부(隊附)근무를 하고 육사에 진학해 1년을 다닌다. 그런 다음 반 년 동안 견습사관을 하고 소위로 임관된다.”
“재작년에 세배를 갔던 사직동 군기창감 아드님이 재학 중이지요?”
“그렇다. 지금 아마 유년학교 본과를 마쳤을 게다.”
응준은 참령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담고는 무릎을 꿇었다.
“부디 상심하지 마시고 몸을 지키십시오. 참령님은 이 나라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큰 나무 같은 분이십니다.”
“응준아, 네가 나를 걱정해 주는구나.”
참령은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후 크게 취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응준은 참령을 부축해 자리에 눕혔다.
다음날 응준은 지석규의 집으로 갔다. 홍사익도 거기서 잤으므로 셋이 회동했다.지석규의 아내는 첫아이를 임신하여 만삭의 몸으로 국수를 맛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홍사익이 입을 열었다.
“이 참령님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가야지.”
지석규는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을 뜨고 어깨를 폈다.
“참령님 생각이 그렇고 자네들이 간다니까 나도 가야지.”
“곧 아기가 태어날 텐데 그래도 결심하는 거지?”
응준의 말에 지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도 내게 걱정 말고 가라고 했어.”
세 사람은 어깨를 서로 끌어안았다.
출국
다음날 학교에 모인 생도들은 1·2학년 모두 합해 44명이었다. 신체검사와 체력검정에서 몇 사람을 탈락시킬지는 알 수 없으나 6명이 일본행을 거부한 것이었다.
학교에 조선인 교관들은 아무도 없고 오구라 대위와 일본군 하사관 조교들이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영광스럽게도 일본으로 가서 무관교육을 받게 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게 엄포를 놓으며 옆 사람에게 눈길만 돌려도 기합을 주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청진기를 들이대며 검사를 하고 조교들은 신장과 체중을 쟀고, 그게 끝난 뒤에는 100미터 달리기와 철봉 턱걸이, 1000미터 달리기, 40킬로그램 역기 들기 기록을 쟀다.
검사 결과는 정확히 24시간 뒤인 다음날 10시에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발표문에는 체력검정과 신체검사에다 그동안의 교과 성적과 일본어 성적, 품행기록을 포함해 작성했다는 설명과 함께 등위까지 매겨져 있었다. 홍사익 다음으로 성적이 좋았던 염창섭이 1위, 홍사익이 2위, 지석규가 3위, 그리고 이응준은 7위였다.
1. 염창섭(廉昌燮): 19년 1월, 2학년, 일어-갑(甲), 기타학과-갑, 교련-중(中), 체조-중, 성질-직민(直敏), 궁행(躬行)-방정(方正), 체격-강장(强壯)
2. 홍사익(洪思翊): 20년 5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우(優), 성 질-질직(質直), 궁행-방정, 체격-장(壯)
3. 지석규(池錫奎): 21년 5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중, 성질 -솔직(率直), 궁행-방정, 체격-장
4. 유승렬(劉升烈): 18년 3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우, 체조-우, 성질 -침착, 궁행-방정, 체격-강장
5. 권영한(權寧漢): 21년 7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열(劣), 성질 -우유(優柔), 궁행-정(正), 체격-조약(稠弱)
6. 신태영(李應俊): 18년 2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우, 성질-민 첩, 궁행-방정, 체격-장
7. 이응준(李應俊): 18년 1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우, 성질-온 직(溫直), 궁행-방정, 체격-강장
8. 안종인(安鍾寅): 18년 2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우, 체조-우, 성질-질 박(質朴), 궁행-방정, 체격-조약
9. 이호영(李昊永): 19년 2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우, 성질-민 첩, 궁행-정, 체격-강장
10. 조철호(趙喆鎬): 19년 4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우, 성질-박 직(朴直), 궁행-정, 체격-강장
11. 이은우(李殷雨): 20년 2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우, 성질-직 (直), 궁행-정, 체격-장
12. 박승훈(朴勝薰): 20년 10월,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00000000000
13. 민덕호(閔德鎬): 22년 1월, 2학년, 일어-갑, 기타학과-갑, 교련-중, 체조-중, 성질-박 직, 궁행-조정(稠正), 체격-장
14. 김준원(金埈元): 18년 10월, 2학년, 일어-을(乙),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 질-경순(輕淳), 궁행-정, 체격-장
15. 남상필(南相弼): 17년, 2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질-온화(溫 和), 궁행-정, 체격-장
16. 이건모(李健模): 19년 6월, 2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온 화, 궁행-정, 체격-조약
17. 이희겸(李喜謙): 20년 8월, 2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질-우 직(愚直), 궁행-정, 체격-조약
18. 장성환(張星煥): 18년 8월, 2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질-온 화, 궁행-정, 체격-조약
19. 원용국(元容國): 17년 9월,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중, 성질-00 궁행-단정, 체격-강장
20. 윤상필(尹相弼): 19년,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질박 궁행-방정, 체격-강장
21. 장석윤(張錫倫): 17년 5월,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질-민 첩, 궁행-방정, 체격-강장
22. 서정필(徐廷弼): 17년 7월,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열, 성질-민 첩, 궁행-방정, 체격-장
23. 박창하(朴昌夏): 15년 6월,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온 순, 궁행-방정, 체격-조약
24. 민병은(閔丙殷): 17년 6월,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솔 직, 궁행-방정, 체격-강장
25. 김종식(金鍾植): 18년 11월, 1학년, 일어-을,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우 직, 궁행-방정, 체격-장
26. 강우영(姜友永): 18년 11월, 2학년, 일어-병(丙),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열, 성 질-우직, 궁행-정, 체격-장
27. 장기형(張璣衡): 22년 3월, 2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열, 성질- 우직, 궁행-정, 체격-장
28. 이강우(李絳宇): 21년 8월, 2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중열, 체조-열, 성질 우직, 궁행-정, 체격-조약
29. 류춘형(柳春馨): 18년 8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침착, 궁행-방정, 체격-조약
30. 김석원(金錫源): 15년 10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질- 민첩, 궁행-방정, 체격-강장
31. 장유근(張裕根): 18년 6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중, 성질- 민첩, 궁행-정, 체격-강장
32. 이동훈(李東勛): 19년 4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우직, 궁행-정, 체격-강장
33. 이응섭(李應涉): 17년 11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질박, 궁행-정, 체격-장
34. 김중규(金重奎): 16년 3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침착, 궁행-방정, 체격-조약
35. 류관희(柳寬熙): 18년 2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온순, 궁행-방정, 체격-조약
36. 백홍석(白洪錫): 19년 6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솔직, 궁행-방정, 체격-강장
37. 이종혁(李種赫): 00년 0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온순, 궁행-방정, 체격-장
38. 정동춘(鄭東春): 18년 0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온순, 궁행-방정, 체격-조약
39. 신우현(申佑鉉): 18년 0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온순, 궁행-방정, 체격-조약
40. 윤우병(尹佑炳): 19년 6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조방(粗放), 궁행-정, 체격-강장
41. 남태현(南炱鉉): 18년 3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중, 성질- 활발(活潑), 궁행-단정, 체격-조약
42. 김인욱(金仁旭): 18년 3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중, 성질- 활발, 궁행-단정, 체격-강장
43. 이교석(李敎奭): 17년 1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열, 체조-열, 성질- 조방, 궁행-정, 체격-장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가 학당에 집합한 생도들 앞에 섰다. 매우 거만한 표정을 하고는 더듬거리는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깨끗이 잊어버려라. 일본에 가서 일본 학생들과 겨뤄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그걸 가르쳐 주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알겠느냐?”
생도들의 대답 소리가 작은지 대위는 눈을 부라렸다. 당장이라도 기합을 잡아 돌릴 태세였다.
“대답 소리가 작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생도들은 학당이 흔들릴 정도로 힘차게 대답했다.
“우선 모리 오장이 새로운 일과표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물론 일본어로 할 것이다.”
조교 노릇을 해온 모리 오장이 괘도를 가져와 첫 장을 넘겼다.
“똑똑히 들어라. 두 번 설명하지 않겠다. 아침 6시에 기상해 침구를 두부처럼 네모 나게 개놓고 6시 10분에 일조점호를 받는다. 상반신을 벗고 세수와 함께 윗몸 을 냉수로 마찰한다. 6시 40분부터 일본인 생도들은 궁성요배와 군인칙유 낭독을 하나 너희들은 연병장을 구보한다. 6시 55분에 손을 다시 씻고 아침식사를 한다. 2학년 대표생도가 상관에 대한 경례를 하고 식사를 시작한다. 7시 45분에는 복장검사다. 주번사관이 사열대에 서면 일동경례를 하고 2열 횡대로 정렬하면 주번하사관이 한 줄씩 맡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때로는 속옷까지 검사할 것이다.
도쿄 유년학교는 학생 수가 많아 같은 학년을 여러 학반으로 나눈다. 그대들은 한국학반이 될 것이다. 학반을 지휘하는 생도를 소대장 생도 혹은 주번생도라고 안하고 취체(取締)생도라고 부른다.
주번사관이 복장검사를 하는 동안 각 학반 취체생도는 교재 가방을 열어 1,2,3,4교시 과목의 교재와 수부(手簿. 수첩)와 보조재료, 필기구 등을 검사할 것이다. 도쿄유년학교는 오전일과는 무조건 학과, 오후 일과는 무조건 술과이다. 복장검사가 끝나면 군가를 부르며 학당으로 이동한다.
교실에 들어가서는 자기 책상에 삼각 명패, 필통, 수부, 만년필 등을 정해진 위치에 놓고 차렷 자세로 서서 교관을 기다린다. 교관이 입실하면 취체생도는 대표경례를 하고 ‘제2학년 한국학반 총원 15명, 사고 1명, 현재원 14명’ 하고 보고하고, 교관이 ‘쉬어!’명령을 하면 취체생도가 복창하고 생도들은 착석한다.
4교시가 11시 50분에 끝나면 주식(晝食.점심) 시간이다. 조식 때처럼 손을 씻고, 이하는 같다.”
오전 일과를 설명 듣는데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어이기 때문이었다. 폐교 전까지 일본어를 거의 매일 세 시간씩 학과에 넣어 공부했지만 설명 자체를 일본어로 하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모리 오장은 알아듣거나 말거나 이어서 오후 일과를 설명해 나갔다.
지석규 · 홍사익 · 이응준은 모두 일본어에서 갑(甲) 평점을 받는 정도여서 알아들었으나 병(丙) 평점을 받은 생도들은 울상을 했다.
다음날 일본인 교관단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생도들을 잡아 돌렸다. ‘차렷’ 구령을 ‘기오츠케’로, ‘열중쉬어’를 ‘야스메’로, ‘앞으로갓’을 ‘마에 스스메’로 모든 구령을 일본어로 바꾸니 생도들은 제식훈련에서 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눈만 깜짝거려도 찍어내 기합을 주고, 어깨를 웅크리기만 해도 지적해 벌을 주었다. 도대체 쉬는 시간에도 열중쉬어를 시켜놓고 감시를 하니 귓속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오전의 학과 수업은 4시간 내내 일본어를, 오후 술과 시간에는 유도와 검도를 배워야 했다. 그리고 생도대의 내무생활은 내무생활대로 바빴다.
“제기랄, 오줌 누고 거시기 볼 새도 없어.”
생도들은 무더위 속에 혀를 빼물고 뛰어다녔다.
홍사익은 억울하다고 투덜거렸다. 자신은 대한제국의 유년학교를 나와 무관학교2학년까지 올라왔는데 일본에서 다시 유년학교에, 그것도 예과에 가게 되니까 그렇다는 것이었다.
“내 짐작에 우리와 동기생이 될 일본 녀석들은 열다섯 살일 거야.”
“그건 불합리한 일이지.”하고 이응준도 동의했다.
그러나 지석규의 생각은 달랐다.
“이왕 일본까지 가서 편입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우리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바쁘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게 마련이다. 어느 새 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열이틀이란 시간이 폭풍처럼 빠르게 우리 인생을 스치고 지나갔네.”
어떤 생도가 문학적 수사를 써서 그렇게 말했다.
생도들은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짐을 꾸렸다. 나흘이라는 시간이 있어도 집이 멀어 다녀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응준도 그 중 하나였다.
홍사익은 남대문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탔고 평택역에서 내렸다. 고향인 안성 대덕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나절을 걸어야 했다. 벼 포기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 논 방죽 길, 바람에 우수수 흔들리는 수수밭머리를 걷고 산길도 걸었다. 출발할 때는 괜찮았는데 햇볕이 쨍쨍 타오르며 기온이 급상승했다.
그는 무관학교 생도의 여름 정복을 입고 있었다. 웃옷이 반팔이고 얇지만 바지는 길고 군화도 무거웠다. 지금 신분이 무관학교 생도는 아니나 계속 제복을 입으라는 명령이 있었고 그래야 학교에서 준 기차의 무임승차증이 유효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헐떡거리며 땡볕 속을 걸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물 위에 흙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보다 앞서 삿갓을 쓰고 바랑을 멘 탁발승 하나가 건너가고 있었다. 냇물 위에 큰 소나무 두 개를 얹어 놓고 그 위에 적당히 외를 엮고 흙을 부은 다리였다. 십여 일 전 통과할 때도 괜찮았는데 그 새 폭우에 씻겨 나간 흙을 메우지 않아 건너기 위험했다.
건너편 둔덕에 선 미루나무가 보였다. 나무는 그늘을 냇물까지 길게 내리고 있었다. 거기서 땀을 식히고 물에 발이라도 담그며 쉬어갈 요량으로 그는 걸음을 빨리 했다. 그때 앞서 가던 스님이 디딘 흙이 무너지면서 하반신이 빠져 버렸다. 그는 얼른 달려가 스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다리를 건너가 미루나무 그늘에 앉았다.
“군복 입은 젊은이가 이 더위에 어디를 급히 가시는가?”
스님이 말했다.
“먼 길 떠나기 전에 집에 들르러 갑니다.”
“관상을 보니 일취월장하겠군. 먼 길을 가서 높이 올라갈 기회를 잡을 거야. 그러나 말년 운이 안 좋으니 아니다 싶으면 얼른 내려오게.”
사익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에 배우러 간다고 자신이 처한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탁발승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기뻐하고 있군.”
탁발승과 헤어져 다시 걸으며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내가 정말 일본행을 기뻐하는가.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마당 앞 텃밭에서 김을 매던 아내가 벌떡 일어섰다.
“당신 오셨어요?”
사익은 자신을 향해 걸어온 아내에게 군모를 벗어 건네주었다. 아내는 손에 흙이 묻어 있어 모자를 받지 못했다.
“닷새 뒤에 일본으로 떠나. 그래서 집에 온 거야.”
어린 조카가 아버지에게 알린다고 들판으로 달려 나갔고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집도 툇마루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문은 낡아 비틀어지고 있었고 흙을 바른 담벼락은 배가 불룩했다.
“그렇게 됐군요. 그럼 오랫동안 집에 오지 못하시겠군요.”
아내가 말했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들일을 많이 해서 얼굴이 까맣게 탄 아내, 생각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아내, 그녀의 표정에 실렸던 남편을 만난 반가움이 쓸쓸한 아쉬움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연민이 일었다.
“당신이 참고 기다려야 하니 미안할 뿐이야.”
그는 떠나는 날까지 아내를 위로하고 다독거리리라 결심했다.
가진 논이라고는 여섯 마지기가 전부인 가난한 형, 그 논에서 피를 뽑았다는 형은 얼굴에 논흙이 묻어 있었다.
“왔냐?”
형은 사익의 설명을 듣고는 큰 경사를 맞는 사람처럼 입이 벌어졌다. 소를 끌고 나가는 이웃 사람에게 소리쳤다.
“내 아우가 동경의 사관학교로 유학 간대요.”
소문이 바람처럼 빨리 퍼져서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사익을 구경하러 왔다. 이제 일본 세상이 될 텐데 유학을 다녀오면 큰 자리를 차지할 게 아니냐. 사람들은 모두 경사로 여기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달 초에 폐교 칙령을 보고 집에 왔을 때는 고향 친구들과 천렵도 하고 돌아다녔으나 그는 이번에는 나흘 내내 집에 머물며 아내와 같이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격렬하게 아내와 몸을 섞었다. 그러고 나면 아련한 슬픔에 젖었다.
첫 날 몸을 섞은 뒤에 아내가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까 무관생도 제복을 입은 당신 모습이 멋있어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정말이오?”
아내는 쑥스러운 듯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냐. 생도 제복이 나보다 열 배는 더 어울리는 친구가 있소.”
그는 이응준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당신이 제일이에요.”
아내가 그의 귀에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말했다.
지석규는 홍사익보다는 가족과 지낸 시간이 훨씬 많았다. 무관학교에서 집이 워낙 가깝기도 하지만 아내의 출산일이 다가오는지라 조금이라도 더 아내 곁에 있고 싶어서였다.
“내가 떠난 뒤에 아기를 낳게 되니 걱정이오. 어머님도 어머님이지만 당신을 두고 떠나게 되어 어깨가 무겁소.”
그가 그렇게 말하면 아내는 머리를 저었다.
“대장부가 큰 뜻을 품고 멀리 가시는데 아내가 아이를 낳는 일이 방해가 되어선 안 됩니다. 어머님은 내가 잘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걱정 말고 떠나십시오.”
아내의 태도가 그러하니 그는 애착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잠깐씩 외출하여 친척들을 만나 어머니와 아내를 부탁하고, 친구들과 만나 작별인사를 했다. 유유상종이랄까.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우국의 정신이 강했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에 가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응준은 두 차례 이갑 참령을 따라 외출해서 참령이 교유하는 우국지사들과 만나는 자리의 말석에 앉았다. 응준이 와서인지 그들은 일본 유학 무관생도들에 화제를 돌렸다. 희망과 우려가 반반이었다.
“다섯 해 전에 황실특파 유학생으로 간 젊은이들을 보게. 다음해에 보호조약을 맺으니까 반발해서 동맹휴학을 벌이고 전원 자퇴를 감행하지 않았는가? 청년의 피는 정의를 위해 끓게 마련이지. 나는 젊은이들의 피와 정신을 믿네.”
희망을 가진 지사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 떠나는 아이들에게 걱정되는 건 군대교육이라는 거네. 군대의 일체주의 집단교육은 피와 정신까지도 바꿔 놓을 수 있네. 왜놈들에게 길들여지기 십상이네.”
우려하는 분들의 말을 들으니 응준은 정신이 번쩍 나는 듯했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령이 갑자기 잊고 있었던 일을 생각한 듯 말했다.
“참, 내 조카가 일본에 있다. 이름은 태희(泰熙)인데 너보다 한 살 많고 지바의전(千葉醫專)에 다닌다. 그애는 지바현이고, 너는 도쿄이니 만나기 어렵겠지만 그리 알고 있거라.”
그는 그런 외출시간을 빼고는 참령의 집에 있었다. 도무지 정희가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빠를 몇 해 동안 못 보면 정희는 어떻게 살아?”
그렇게 말하며 걸핏하면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면 응준은 소녀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멀어서 가지 못하는 고향집을 생각했다.
9월 3일 오전, 남대문역 플랫폼에서는 대한제국 군부와 조선 주차(駐箚) 일본군 사령부, 그리고 통감부 고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환송식이 벌어졌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황제가 하사한 군인칙유 카드를 받아 가슴에 품는 것이었다. 통감부 서기관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격려사를 대독했고, 친위부장관인 이병무(李秉武) 부장(副將)이 격려의 말을 했다. 그런 다음 생도들은 가족들에게 둘러 싸였다.
고향 평안도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응준은 이 참령 부인과 정희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부인은 아들처럼 시동생처럼 든든히 여기던 그가 떠남을 아쉬워하며 건강을 기원하고 있었고 학교를 조퇴하고 나온 정희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빨개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군복을 벗고 야인 신세가 되어 있던 이갑 참령은 김기원 참령, 오구라 대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쪽으로 왔다. 김기원과 오구라 유사브로와 이갑은 일본 육사 선후배였다.
“한 순간도 네 조국을 잊지 말아라.”
이갑 참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하고 응준은 자신의 의지를 담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참령의 초췌한 얼굴에 구름 그림자 같은 어두운 빛이 흘러갔다.
“그리고 만약 내가 잘못되면 ……그리 되면 집사람과 정희를 부탁한다.”
응준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차리고 진지하게 참령을 응시했다.
“그러겠습니다.”
그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 참령이 곧 독립전쟁 전선으로 망명할 것임을 알아차렸다.
지석규는 배웅 나온 모친과 아내와 작별했다. 홀어머니와 만삭의 아내가 걱정되어 그는 가슴이 아팠다. 안성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홍사익은 칙칙 뿜어 나오고 있는 증기기관차의 허연 수증기를 올려다보다가 두 친구의 이별 장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갑자기 증기기관차가 크게 기적을 울렸다. 인솔하사관인 모리 오장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생도들은 다시 집합하라!”
44명의 생도는 무관후보생답게 3열 횡대로 민첩하게 집합했다.
“전체 차렷! 내빈과 부형님께 대하여 경례!”
오장의 일본어 구령에 따라 생도들은 경례를 올렸다. 그리고 승차명령에 따라 앞줄부터 절도 있게 걸어 객차에 올랐다.
좌석에 절도 있게 앉아 있으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생도들은 차창을 열고 마치 다닥다닥 열린 큰 나무 열매들처럼 머리를 디밀었다. 이름을 부르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함성처럼 커지고, 생도들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기차가 처량한 기적을 길게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속한 것이 아닌데 하나둘 고국 황제의 군인칙유를 꺼내 들여다보며 읽었다.
그들은 다음날 오전 부산에 도착해 일본 땅 시모노세키(下關)으로 가는 정기 연락선 이키마루(壹岐丸)를 타고 떠났다. 이키마루는 최신식 기선으로 기관 고장에 대비해 갑판에 거대한 돛대도 달고 있었다.
생도들은 갑판에 서서 멀어지는 조국 산천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맑았으며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갈매기들이 전송하듯이 천천히 하늘을 돌고 있었고 짙푸른 파도 위로 지천으로 많은 날치들이 날아다녔다.
바다에 붉은 낙조가 퍼졌고 갑판에 있는 생도들의 제목과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생도들이 모국을 떠나는 순간은 그렇게 평화스러웠다.
배는 연해를 벗어나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사방이 침침해지는가 싶더니 낙조가 금시 사라지고 바다가 어둑어둑해졌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른쪽에 대마도가 보인다.”
어슴푸레하게 수평선 멀리 땅이 보였다.
저녁식사 후 생도들은 갑판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그림같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8시 반쯤 되었을까. 초승달은 어느 틈에 사라져 버리고 캄캄한 하늘에는 별빛이 가득 찼다. 생도들은 별빛 아래서, 갑판을 비추는 어슴어슴한 전등불 밑에서 담론을 나누었다.
얼마 후 갑자기 풍랑이 심하고 배가 요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선원이 달려와서 모든 승객은 위험하니 선실로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생도들은 20여 개의 침대들이 3층으로 매달린 넓은 선실 두 개를 배당받고 있었는데 멀미가 심해 모두가 주저앉거나 기둥을 잡고 신음을 올렸다. 배는 밤새도록 요동을 쳐서 생도들의 몸을 흔들고 혼을 빼놓았다. 거의 모두가 선실 바닥에 임시로 가져다 놓은 양동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토했으며 지석규도 이응준도 입에서 노란 물이 나올 정도로 뱃속에 든 모든 것을 토했다.
새벽녘이 되자 풍랑이 가라앉았다. 날이 환하게 들 무렵 이키마루는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부두에서 바라본 일본 땅은 헐벗은 붉은 산이 대부분인 조선 땅에 비해 수목이 우거지고 거리 모습이 윤택해 보였다.
"아아, 우리보다 삼십 년은 앞서 있군."
지석규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하선을 하는데 어지러워 땅바닥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했다. 옆에서 걷는 이응준을 보니 횟배 앓는 아이처럼 얼굴이 하얗고 노란 빛깔이었다.
두 시간 뒤에 도쿄 행 기차를 탔다. 기차는 하루 낮과 밤을 달려 다음날 오후 2시 교토(京都)에 도착했고 거기서 급행으로 바꿔 탔다. 급행열차는 방금 내린 기차나, 고국의 경부선에 비하면 두 배는 빨랐다. 최종 목적지인 도쿄 시내 신바시 역(新橋驛)에 도착한 것은 9월 6일 오후 3시, 부산 출발 사흘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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