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3. 11. 10 작센 아이슬레벤~1546. 2. 18 아이슬레벤.
독일의 성직자·성서학자·언어학자.
교회의 부패를 공박한 그의 95개 조항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촉진시켰다. 그의 사상과 저술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를 낳았으며, 사회·경제·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교육자·수사 루터]
초기생애와 교육
그의 부모 한스 루터와 마르가레테 루터는 뫼라에서 아이슬레벤으로, 다시 만스펠트로 이주했다. 한스 루터는 그곳의 구리 광산에서 일하면서 몇 개의 용광로를 임대해 공장을 운영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1491년에는 작은 마을의 의원직을 얻었다. 몇 안 되는 루터의 유년기 회상록에 따르면, 그의 가정은 당시의 일반 가정들처럼 경건하고 엄격한 훈련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루터의 학교생활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만스펠트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고, 마크데부르크에 있는 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했으며 (이 학교는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형제단이 운영했는데, 이 형제단은 성서연구와 교육에 헌신한 중세의 평신도 집단이었음), 15세에 아이제나흐에서 학교에 다녔다. 그때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훌륭한 친구들과 교제했다. 1501년 봄에 그는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학생 수가 많았던 에르푸르트대학교 인문학부에 등록했다. 학창시절 루터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말하는 버릇 때문에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류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1502년 그는 일반 인문학부 과정을 이수하여 문학사학위를, 1505년 17명의 이수자들 가운데 2등으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까지 받는 학생들이 극소수였던 당시 그는 부모의 소망을 실현한 셈이다. 다른 많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한스 루터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고, 마르틴 루터가 법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기꺼이 값비싼 교과서들을 사주었다. 그러나 아들이 부모와 상의하지 않은 채 종교에 입문하기로 결심하고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에 들어가려는 것을 알고 섭섭하게 생각했다.
수사 마르틴 루터
루터가 왜 종교생활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꼭 믿을 만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 담화 Tischreden〉에 따르면, 1505년 7월 2일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 슈토테른하임 마을 근처에서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 공포에 휩싸여서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수사가 되겠나이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수도 서약에 관하여 De votis monasticis〉(1521)라는 글에서 "내가 수사가 된 것은 자유롭게 결정한 것도 아니고 원해서도 아니었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고뇌에 휩싸여 어쩔 수 없이 서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버질과 플라우투스의 저서만 남기고 거의 모든 책을 팔아치운 후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루터가 가입한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는 중요한 탁발 수도회로,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2,000개 이상의 지회를 거느리고 있었다. 1473년의 개혁으로 루터가 가입한 에르푸르트 수도원은 수도원 규칙을 엄수해야 한다는 해석을 채택했다. 1504년 루터의 스승이자 수도회를 통괄하는 지도신부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지도로 수도원의 회칙이 개정되었다. 루터는 1506년 수사로서 서원을 했고, 1507년 4월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5월초에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때 그는 튀빙겐의 유명론자(唯名論者) 가브리엘 빌(1495 죽음)이 쓴 미사 규범에 대한 논문을 이미 연구한 바 있었다. 다른 '현대적' 유명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이름을 가진 특수자만이 존재하고, 보편적인 개념들은 직관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한 루터는 외경심을 가지고 첫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에 그의 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루터는 이 최초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받은 소명의 중대함을 아버지에게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서의 말씀도 읽어보지 않았느냐"고 시무룩하게 반문했는데, 이 말은 그의 기억 속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비텐베르크대학교
루터는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하도록 선발되었다. 비텐베르크대학교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영국의 철학자·신학자인 오컴(William of Ockham)의 '현대적인' 길을 추구하는 유명론자들이었다. 오컴의 견해는 계시와 이성을 화해시키기 위해 11세기에 창설된 학파인 스콜라 철학을 지배했던 이성주의를 제거했다. 1508년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1502 창설)에 입학했다. 이곳에도 오컴주의가 발판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마르틴 폴리히를 비롯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자가 존재하며 그것은 이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실재론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자그마한 도시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에르푸르트와는 정반대였다. 이 대학교는 활기에 넘치고 진보적인 학교였으며, 에르푸르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비텐베르크대학교는 슐로스키르헤(만인성자 교회로 불림)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작센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1463~1525)는 이들에게 관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509년 3월 루터는 이 대학교에서 성서학사(baccalaureus biblicus)학위를 받고 그 다음 단계의 학위, 곧 명제집 정통자(sententiarius) 학위를 받기 위해 에르푸르트로 되돌아갔다. 이를 위해서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가 집필한 중세의 신학교본 〈신학명제집 Sentences〉에 대한 주석을 이수해야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으며, 〈명제집〉에 대한 강의로 신학자로서 경력을 쌓아갔다. 이때 그가 쓴 비망록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담긴 신학은 별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에 침투하는 것에 대해 루터가 격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독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총대리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교사·친구·후원자로서 그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슈타우피츠는 신학적으로 토마스주의자(실재론자)로 훈련을 받은 것 같다. 또한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명상과 내면생활을 강조한 로마 가톨릭 내의 종교운동)를 독일 신비주의와 융합시키고자 한 15세기의 시도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을 채용하기는 했으나 그가 속한 수도회의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보다 엄격한 훈련을 부활시키고, 수도원답게 규율을 엄수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슈타우피츠의 시도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반체제적인 수도원의 호소문을 전달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된 2명의 수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생애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아마 1510년말이었을 것이다. 진지했던 루터는 로마 교황청 성직자들의 경박함과 고위직 성직자들에게서 엿보이는 세속적인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호소는 실패로 끝나고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어 돌아왔다.
슈타우피츠는 재능있는 그의 제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내성적인 성격에 놀라 그로 하여금 계속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공식적인 교수 경력을 쌓도록 격려했다. 1512년 10월 19일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공적인 책임을 동반하는 박사학위를 루터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곧이어 슈타우피츠의 후임자로 성서신학 교수직을 맡았다. 그것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지속된 소명이었다. 성서를 학생들에게 강해하는 일은 루터의 모든 재능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던 과업이었다. 말년에 질병과 고령으로 포기할 때까지 그는 이 강의를 계속했고, 강의 도중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형식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종교적·신학적 의문들
한편 루터 자신의 종교적·신학적 의문은 첨예화하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진지한 열정으로써 복음의 완벽함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속한 수도회의 회칙을 엄격히 지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곤 했다. 그는 불확실성과 회의에 대항해 싸워야 했으며, 그를 무력하게 만드는 죄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교회의 성례전(성만찬, 고백성사 등)을 통한 위로나 노련한 지도자들의 현명한 조언도 그가 짊어진 죄의 멍에를 완화시킬 수 없었다. 그의 양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번민으로 그는 불안과 절망상태로 빠져들었다. 그의 고통은 오컴주의 신학의 강조점들로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컴주의 신학은 외향적인 도덕주의를 고취했고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루터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유혹의 문제에 관해서는 불확실한 일면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유혹'은 루터 신학에서 중요한 낱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믿음을 위한 싸움을 시사하는 용어였으며, 슈타우피츠는 유혹의 경험이 루터의 양식과 음료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종교체험). 이러한 내적·정신적 곤경은 신학적인 문제로 더욱 고조되었다.
'하나님의 의'의 발견
바울로의 사상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루터는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이었다. 차분한 경건의 분위기에서 자란 루터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하게 의식했다. 또한 비텐베르크 인문학부 교수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연구하면서 발견했던 정의에 관한 그리스적인 개념을 강의했다. 몇몇 유명론자들이 그들의 저작에서 유스티티아(justitia:'의' 혹은 '정의') 개념을 활용하는 것을 본 루터는 하나님의 심판이란 주로 죄인을 특수한 행위로써 징벌하는 하나님의 엄혹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으로 계시된다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의 주장은 루터의 갈등을 가중시켰다. 그것은 최후의 벽이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해 계시된 율법에 대한 외적인 복종을 넘어서서 마음의 순수성과 내적인 동기와 의도까지 요구하므로 은혜 그 자체는 요구이자 강제가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하나님은 공포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사랑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 하나님은 억지로 복종할 대상은 될 수 있어도 그가 그리스도교적 복종의 진수라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대상일 수는 없다.
내면 갈등
루터는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의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결국 도덕신학자들이 '공개적인 신성모독'이라고 묘사하는 극한상태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1545년 전집의 머리말로 쓴 유명한 자서전적 단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묘사했다.
"내가 수사로서 제아무리 나무랄 데 없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설레는 양심을 지닌 죄인이라고 느꼈고, 스스로 만족할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정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록 공개적인 신성모독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큰 불평을 늘어놓으며 이 의로운 하나님을 미워했다. 나는 그분에게 성을 내었다. '비참한 죄인들이 원죄로 인해 영원히 버림을 받고 십계명의 율법을 통해 온갖 불행으로 억눌림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슬픔에 슬픔을 더하며 복음을 통해서조차 자신의 진노를 드러낸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매우 격앙된 불 같은 양심으로 화를 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바울로가 진짜 의도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열렬한 마음으로 바울로의 문을 계속 세차게 두드렸다. 그것은 딜레마였다. 그러나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낱말들의 연관성을 검토하고 본문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때 서광이 비쳤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의란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사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나타난다'는 이 문장은 수동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은혜로운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 점을 깨닫자 나는 다시 태어나 천국으로 통하는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이 내적인 갈등과 관련해서 학자들은 커다란 논쟁을 벌여왔다. 아무튼 루터에게는 그 자신이 나중에 묘사한 것과 똑같은 위기가 있었고, 이 위기는 루터가 이야기한 방식대로 해결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이 발견이 새로운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사실상 분배적 정의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과, 역사와 인간 경험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으로 하나님의 의를 파악하는 성서의 교리 사이에는 심원한 차이가 있다. 루터는 이 점과 관련하여 바울로의 용어를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에 대한 루터의 기억이 과연 정확하고 완전한가에 대한 논란이 종종 벌어지기는 하지만, 현대 가톨릭 역사가 요제프 로르츠의 판단, 즉 이 발견은 비록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루터에게는 새로웠다'는 것은 경청할 만하다.
은혜로서의 구원
만일 루터가 이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로운 신학적 틀에서 으뜸가는 중요성을 갖는 의인(義認) 개념에 루터가 부여한 새로운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와 비슷한 추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루터가 생각하는 복음으로서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은혜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견지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자유로운 죄사함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는 것, 양심은 죄사함을 받고 깨끗해질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죄의 멍에에서 벗어난 영혼은 즐겁게 자발적이고 창조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서를 번역하면서 루터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는 구절에서 '믿음'이라는 낱말 다음에 '오직'(sola fide)이라는 낱말을 덧붙였다. 독일어로 본래 뜻을 충분히 전하려면 그 낱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이라는 낱말은 루터 이후 종교개혁자들이 계속 써왔다. 이 말은 구원이 인간의 업적 혹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에 의존하는 것처럼 견강부회하는 사설(邪說)로부터 이 중요한 교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의인 경험에 대한 평가
루터는 다른 용어(예를 들어 '참회'[poenitential]의 개념)와 연관지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의인 경험을 따로 떼어 놓고 고찰해서는 안 된다. 또한 루터의 이 경험은 밀라노의 정원에서 하나님을 신비하게 경험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회심을 체험한 18세기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결정적인 인격적 경험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놓고 학자들 간에는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루터의 초기 강의록들이 간행되면서 학자들은 젊은 교수였던 루터에게 첫번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의인 경험에 대해 상세히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가 단일한 본문에서 3~4가지 수준의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은 중세의 다각적인 알레고리 방법을 사용했고 단일한 역사적 의미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의인 신학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깨달음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 대한 강의 직전에(1515~16) 그에게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깨달음 자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진다. 만일 의인이 선물이며 능동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루터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과 문자에 관하여 De spiritu et littera〉를 참조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틀에서 거의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며, 루터의 의인 경험은 1515~16년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에 대한 보다 성숙한 발견이었다고 한다면 이 일이 일어난 시점은 1518~19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후대의 시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루터의 사상이 1517년에 시작된 교회투쟁의 절박한 압력에 의해 어떤 자극을 받았고 어떻게 재설정되었는가를 강조한다.
루터의 의인 경험이 언제 있었느냐는 연대에 대한 논의로부터 학자들은 1509~21년 루터의 사상적 발전이 얼마나 중요한가와 이 기간중 그의 신학 용어들과 신학의 범주들이 끊임없이 발전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확실히 루터의 방대한 〈시편 강의록〉(1516~17)·〈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강의록〉(1515~16)·〈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강의록〉(1516~17)·〈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강의록〉(1517~18)은 루터 사상이 끊임없이 풍부해지고 성숙해졌음을 보여준다.
설교자·행정가 루터
루터가 할 과외의 책무들도 늘어났다. 1511년 그는 수도원에서 설교를 했고, 1514년 본당 설교자가 되었다. 이 설교단은 루터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결실을 맺었던 설교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터는 평민들을 위해 성서를 심오하고도 알기 쉽게 해석했으며, 성서를 평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연결시켰다. 자신이 속한 수도회에서 루터는 두각을 나타냈고, 1515년 4월에는 다른 11개의 수도원을 통괄하는 지역관할 지도신부가 되었다. 이렇게 그는 실제적인 행정과 목회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은 루터에게 귀중한 체험이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서신들은 훗날 독일 교회들과 곤핍한 영혼들의 치유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비텐베르크대학교는 그 당시 유럽 대학교들이 직면했던 학문적 위기, 즉 낡은 학문 프로그램과 새로운 학문 프로그램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어느 편인가를 지지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루터가 출현하기 이전 비텐베르크의 지도적인 교수인 마르틴 폴리히는 전통적인 토마스주의를 선호하는 그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의 영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루터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데 앞장섰다(→ 교육사).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신학자들의 사상을 성서를 직접 연구하는 성서인문주의로 대체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도구로 사용했으며, 교리적 규범으로는 '옛 교부들'(초기 교회 교부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활용했다. 루터는 선배 동료인 카를슈타트와 젊은 친구인 필리프 멜란히톤의 도움을 받아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1517년 2월 그는 스콜라 신학자들을 공격하는 일련의 논문을 썼으며, 다른 대학교에서 그것을 변호하고자 했다. 비텐베르크 프로그램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루터는 그해 5월 최소한 비텐베르크에서는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썼다. 그는 "우리의 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다"고 썼다. 이 논문들은 동면상태에 있었지만 그가 그해말에 쓴 논문들은 그의 상상을 넘어서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를 폭파할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개혁가 루터]
면죄부 논쟁
면죄부의 성격과 범위는 중세 후기에 더욱 명확히 규정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세의 신학적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적으로 불확실한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면죄부는 돈을 지불함으로써 죄로 인해 현세에서 받아야 할 징벌의 일부, 곧 고백성사 때 신부가 부과하여 실제로 치러야 할 고행을 면제받는 일이었다. 이 경우에도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참회해야 하며 사제에게 사면을 받아야 했다. 면죄부는 교황의 권위로 수여되었고, 교황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을 통해 사들일 수 있었다. 면죄부가 하나님의 죄사함을 사고팔 수 있다거나, 참회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다는 취지로 통용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중세에 교황청의 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교황청은 자주 면죄부 발행에 의존했기 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 가문인 후거가(家)는 신성한 어음인 면죄부 유통을 감리해야 했다.
1476년 교황 식스투세 4세가 연옥의 영혼들에까지 교황의 권한을 확대하자 오해의 여지는 더 커졌다. 탐욕과 공포심을 이용하려는 속임수, 면죄부와 관련된 허세와 화려한 격식, 면죄부 판매자들이 사용하는 모욕적인 언사 등은 불만의 대상이었다. 루터는 면죄부의 오용을 공격하는 설교를 자주 했다. 그의 후견자인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에 많은 성인 유물을 수집했는데, 거기에는 면죄부도 있었다. 그러나 루터가 공개적으로 면죄부에 저항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영지에서 금지한 한 면죄부가 인근 지역에서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권을 부여하는 희년(禧年) 면죄부였다. 이 면죄부의 표면적인 목적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중수하는 것이었지만 수익금의 절반은 마인츠의 대주교인 젊은 알브레히트에게 흘러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고위 성직으로 빨리 승진했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큰 빚을 지고 있었다.
95개 조항
루터는 시간이 얼마 지난 후까지 이 방면에만 탁월한 수완을 가진 인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면죄부 판매자 요한 테첼의 지나친 주장이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테첼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진리를 이끌어낼 목적으로' 95개 조항을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의 문에 붙였다. 그날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전날 밤이었고 그곳에서는 성인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루터의 95개 조항은 잠정적인 견해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루터 자신도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교황의 정책을 암시적으로 비판하기는 했지만 면죄부에 관한 교황의 특권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연옥의 교리와 같은 기존의 교설들도 공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영적·내적 성격을 강조했다. 참회는 그리스도교도의 전인적 삶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첫째 조항과,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가장 거룩하고 영광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한 62번째 조항은 루터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통해 하늘에 들어가는 일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짓 평화, '평안'을 공격했다. 젊은 교수인 루터는 이 '평안'을 자주 공격한 바 있다. 루터는 명제들의 사본을 마인츠의 대주교와 자신의 주교에게 보냈다.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95개 조항 사본들은 먼 지역까지 널리 유포되었고, 그리하여 단순한 국지적 문제일 수도 있었던 그의 주장은 점점 더 넓은 범위에서 논의되어 공개적인 쟁점으로 되었다.
95개 조항에 대한 반작용
마인츠의 대주교는 경악과 분노를 느끼며 1517년 12월 이 문서를 로마로 보냈고, 동시에 루터의 성직을 박탈하는 한편 지나친 주장을 일삼는 면죄부 판매자들을 견책하도록 요청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이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사이에 벌어진 사소한 분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신학자 콜라트 빔피나가 작성한 반명제들도 이같은 생각을 조장했고, 1518년 1월말 프랑크푸르트의 테첼은 도미니크스 수도회의 청중들 앞에서 이 반명제들을 변호했다. 이 반명제들의 사본이 그해 3월 비텐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흥분한 학생들은 이 사본을 공개적으로 불살라버렸다. 로마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총대리인 가브리엘 델라 볼타에게 슈타우피츠를 통해 반항적인 수사 루터 문제를 처리하라는 간단한 교령을 내렸다. 루터는 95개 조항들을 해명하는 라틴어로 된 장문의 글을 준비했는데, 이 글은 1518년 가을까지 출판이 유예되었다. 이 글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서로서 루터의 최초의 저항이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518년 4월 25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전독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참사회가 열렸다. 여기서 루터는 교구 보좌신부라는 별도의 책무를 면제받았다.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은 루터에게 커다란 짐을 벗게 해주었으며, 실제로 그런 의도에서 강구된 조치였다. 그는 친구들의 지지에 큰 위로를 얻었으며,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 마르틴 부처와 테오도르 미블리안더를 얻고 매우 기뻐했다.
이 시기에 루터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신학' 즉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를 강조하는 신학이었다. 루터에 따르면 '십자가의 신학'은 세상의 지혜에서는 어리석음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강조하여 그가 스콜라적인 '영광의 신학'이라고 공격한 자연 신학과는 정반대된다. 이 무렵 그에게 중요한 것은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요한 타울러가 설교한 내적인 종교와, 14세기 신비주의의 소책자인 〈독일신학 Theologia Germanica〉이었다. 루터는 이 책자를 직접 편집·출판했다(1516~18).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 루터는 그리스도교도들이 고난과 유혹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질 필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점들은 그후 계속 발전한 루터 신학의 배후로 물러서고 말았지만 급진적 종교개혁을 위해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독일 신학〉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문서였다.
요한 에크의 참여
루터가 부재중인 동안 선배이며 동료인 카를슈타트는 논쟁의 범위와 대중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를 했다. 잉골슈타트의 학자 요한 에크(1486~1543)가 이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는데, 그는 학식이 깊고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친구를 통해 루터는 그와 이미 친교를 나누고 있던 사이였다. 그는 아이히슈테트의 주교인 친구를 위해 95개 조항에 대한 소견서를 작성했다. 이 소견서 원고(이른바 오벨리스크)는 루터가 하이델베르크 총회 참석차 길을 떠나기 직전에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루터는 몇 개의 '별표'를 찍어 이 원고에 답했다. 그러나 카를슈타트는 비텐베르크 프로그램을 변호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379개의 명제를 작성하여 논쟁에 뛰어들었고, 이 명제들을 출판하기 전에 26개의 명제들을 추가했다. 이 가운데는 에크를 비난하는 내용도 있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루터를 고발하라고 계속해서 압력을 가했고, 루터를 이단으로 몰기 위한 절차가 로마에서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루터는 파문권에 관한 대담한 설교문을 출판했으나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이 설교문은 루터가 무제한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교황이 어떻게 결정하든 그것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기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우크스부르크 면담(1518)
카예탄 앞에 선 루터
루터를 로마로 불러들이라는 교황의 소환장이 저명한 토마스주의자인 아우크스부르크의 카예탄 추기경(1468~1534)에게 발송되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정치가 개입한 것은 어쩌면 숙명적인 일이었고, 교회에 광범위한 재앙을 초래하지 않고 루터 사건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정책적인 고려에 의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7선제후들 가운데 하나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새로운 황제 선출이 임박했기 때문에 교황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교황은 프리드리히를 적대시할 수 없었다. 그결과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카예탄 추기경과 개인적으로 면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제국의 안전통행권을 가지고 10월 7일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토론은 면죄부로부터 시작하여 신앙과 성사 은총(세례와 성만찬 때 공로를 묻지 않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두 신학자는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그리스도가 획득했다고 정의한 공로의 '보물'이 갖는 의미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격노한 카예탄 추기경은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무조건 철회하지 않으려면 자리를 뜨라고 일갈하면서 루터를 몰아냈다.
아우크스부르크로부터 도피
루터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작센의 추밀원 의원들은 루터가 로마로 압송되리라는 소문을 전했다. 마침내 루터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뒷문을 통해 아우크스부르크를 탈출했다. 그는 교황과 에큐메니컬 공의회에 호소문을 내고 영주(프리드리히)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장문의 글을 보냈다. 한편 카예탄은 지체없이 루터를 프리드리히에게 고발했다. 루터는 선제후의 비서인 인문주의자 게오르크 슈팔라틴과 훌륭한 우정관계를 맺고 있어 이것이 커다란 힘이 되었지만 프리드리히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때에도 비텐베르크대학교 신학부는 루터에게 불명예를 줄 경우 신학부의 운명과 명성에 손실을 가져 올 것을 들어 루터 편에 서서 선제후에게 호소했다. 한때 루터가 프랑스나 보헤미아로 떠나야 할 것처럼 생각되던 때도 있었다. 그때 교황의 특사인 칼 폰 밀티츠가 비텐베르크에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에게 '채찍과 당근'의 전술을 구사해 그 앞에서 루터에게 집요하게 위협하기도 하고, 교황이 크게 칭찬하고 훌륭하다고 인정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황금 장미를 주어 경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1519년 1월 알텐부르크에서 교황의 특사와 면담을 마친 루터는 특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했음을 간파했으며,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카예탄의 요청서에 표현된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주장은 루터가 몇 가지 치명적인 모호성을 지적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라이프치히 논쟁(1519)
루터와 에크의 논쟁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는 에크와 접촉하여 여름에 라이프치히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기로 약속했다. 물론 에크의 최종 적수는 루터였지만 이 논쟁은 원래 에크와 카를슈타트 사이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작센의 공작 게오르게(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친사촌)가 루터에 대해 적대감을 품었기 때문에 루터가 이 논쟁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결국 에크는 7월말에 라이프치히의 프라이센부르크 성에서 비텐베르크의 두 신학자들과 차례로 논쟁을 벌이도록 준비했다. 처음에는 팜플렛을 통한 예비 논쟁이 벌어졌다. 에크와 카를슈타트 사이의 논쟁점은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였고, 카를슈타트는 면죄부나 교황의 권위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비 논쟁점들 가운데 교황권의 기원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루터는 논쟁이 있기 이전 운명적인 수주일 동안 교회사와 교회법 연구에 몰두했다. 비텐베르크로부터 파견된 많은 사람들이 논쟁이 벌어지는 곳에 참석했고, 두 대학교의 신학자들, 게오르게 공작, 교회와 국가의 고위직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논쟁은 시작되었다. 에크는 교묘한 책략을 써서 루터가 위대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8)의 권위를 의심하며,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선고받고 말뚝에 매여 화형당한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의 전제들 가운데 몇 가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라이프치히는 보헤미아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 지방이어서 그곳에서 논쟁을 갖게 된 것은 루터에게 크게 불리했다. 에크는 논쟁에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큰소리로 자랑했다. 이미 이 논쟁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루터는 에크의 교묘한 책략에 충격을 받았고 혼란한 마음으로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권위에 대한 문제 제기
에크는 루터에 대한 공식적인 정죄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는 새로운 명성을 얻고 로마로 떠났다. 이제 루터는 그때까지 그가 취했던 행동에 함축되어 있는 또다른 의미들을 교회와 공의회, 성서의 권위와 관련하여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서신들을 보면 교황의 권위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일종의 위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에도 팜플렛을 통해 계속된 소규모 논쟁은 루터가 독일과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루터는 라이프치히의 여러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고 점차 맹렬한 논조의 독일어로 글을 썼다. 그의 논쟁적인 글들은 그 자신과 당시 신학 사이의 논쟁점들을 그가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통의 보루였던 가톨릭의 두 대학교, 곧 쾰른대학교와 루뱅대학교는 뒤이어 루터의 교설을 정죄했다. 그러나 루터의 주된 관심사는 논쟁이 아니었다. 1520년 6월에 간행된 〈선행에 대한 설교 Sermon von den guten Werken〉는 의인에 대한 윤리적 함의(含義)를 설명한 중요한 글이다. 이 논문은 몇 달 후에 발간된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관한 논문과 연관시켜볼 만하나, 루터의 교설 가운데 41개조에 반대하는 교황의 교서 〈주여 내쫓으소서 Exsurge, Domine〉가 1520년 6월 15일 공포되었고 곧이어 루터의 저작물들은 로마에서 불태워졌다. 에크와 전권대사인 인문주의자 지롤라모 알레안드로 추기경(1480~1542)이 교황의 교서를 독일의 도시에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종교개혁 논문들(1520)
에크와 알레안드로는 독일의 여론이 매우 빠르게 루터 편에 서는 것을 알고는 경악했다. 1년 전에 받은 대접과는 정반대로 에크는 물리적인 폭력을 피하기 위해 라이프치히에 도피처를 찾아야 했다. 알레안드로는 선동적인 편지를 써서 교황청(Curia)으로 하여금 독일 교회가 직면한 엄청난 위험을 깨닫고 충격에 빠지게 했다. 루터가 직면한 위험에 대해서 잘 아는 친구들은 루터의 격렬함을 완화시키고자 했지만 루터는 듣지 않았다. 루터는 오히려 자신이 교회의 온갖 위선과 공격에 대해 너무나도 온건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520년 여름에 도전적인 논문들이 씌어졌다. 첫번째 논문은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교도 귀족들에게 보내는 연설 Anden Christiichen Adei deutscher Nation〉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언문이었으며, 젊은 황제 카를 5세 치하의 독일 통치자, 제후, 기사, 도시들을 향해 한 연설이었다. 이 연설문에서 루터는 교회의 회개와 종종 표출되어왔던 로마에 대한 독일 민족의 불만을 영적인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이 위기의 시대에는 세속적인 힘이 개입하여 개혁적인 공의회를 소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짜임새가 엉성하고 끝 부분은 잘려나갔지만 독일 민족의 일부에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몇 개월 동안 루터는 로마에 대한 민족적인 반감의 조류를 타게 되었다.
그의 2번째 논문은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 관한 서곡 De captivitate Babyionica ecciesiae praeiudium〉이었다. 성직자와 학자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 이 논문은 교회의 혁명을 위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많은 중도적인 인문주의자들로 하여금 루터와 거리를 두게 만든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논문에서 루터는 교회의 7성사를 3성사(세례, 성만찬, 고백성사)로 축소하고, 미사를 부정하고, 화체설(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교리)을 공격하고, 교황의 권위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성서의 절대성과 개인 양심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교황에게 헌정된 3번째 작품은 교화(敎化)에 관한 작은 고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대하여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루터는 신앙인의 윤리적 함의를 명확히 밝히고 자신의 사상과 공적인 행위는 일관성있는 신학의 핵심과 연관된 것임을 분명히 했다. 1520년 12월 10일 학생들이 비텐베르크의 엘스터 문 앞에 화톳불을 밝히고 교회법 절대론자들의 책들을 불 속에 집어던졌을 때 루터는 그에 대한 교황의 교서 〈주여, 내쫓으소서〉를 추가로 던져넣었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더럽혔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이 불로 멸망시키기를 기원한다"는 적절한 암시를 담은 행동이었다.
1521년 1월 교황은 공식적인 파문 교서(Decet Romanum Pontificem)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선고가 독일 전역에 두루 알려지는 데는 수개월이 걸렸다. 한편 보름스에서는 제국의회가 열렸고, 이때 루터를 옹호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은 각각 상당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황제로부터 청문회 없이 루터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의회에 출석하도록 루터를 소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같은 조치는 알레안드로를 진노하게 했다. 그는 교황의 정죄로 모든 것은 충분하며 세속적인 기관은 교서의 명령을 집행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루터의 친구들을 경악케 했다. 그들은 루터를 설득해 보름스 제국의회 출석을 단념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보름스로 가겠다는 루터의 결심은 단호했고 그는 1521년 4월 여행에 나섰다. 도중에 황제가 그의 책들을 불살라버리라고 명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는 여행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단자를 안전하게 가두어두고자 했던 것이 승리의 행진처럼 되었고, 루터가 4월 16일 보름스에 입성했을 때 독일 기사들의 기마행렬이 그를 맞이했고 거리에는 그의 적들을 격노하게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521년의 보름스 제국의회와 칙령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도전
1521년 4월 17일 초저녁 루터는 교회와 국가의 고위직 인사들, 그에 대해 냉담하고 적대감을 지니고 있던 젊은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했다. 루터 앞에는 한 묶음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 책들을 그대로 인정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루터의 법률 고문은 책들의 제목을 밝히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이 거세다는 것을 깨달은 루터는 생각할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그의 적들을 방심하게 했을 수도 있는 요청이었다. 하루의 말미가 허락되었다. 다음날 오후 루터는 보다 큰 홀에 훨씬 더 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다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그가 긴 연설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의 글들을 구별해 설명했다. 즉 교화를 위해 쓴 저작들에 대해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필요도 없고 철회해서도 안된다고 했지만 그의 과격한 논쟁에 대해서는 기꺼이 사과했다. 그러나 그 나머지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이유를 설명하자 분명하고 간단히 대답하라는 퉁명스러운 요구를 해왔다. 그는 성서나 분명한 이성에 의해 자신의 오류를 확신하게 될 경우 기꺼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어 있는 양심을 거스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결론, 즉 "이것이 내 입장입니다. 나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루터 자신의 말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유럽의 관심을 송두리째 사로잡은 바로 그 순간에 루터가 대답한 말은 바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답변을 마친 다음 에크와 루터가 큰소리로 설전을 벌이자 황제는 회의를 중단시켰다. 루터는 안도와 승리의 몸짓으로 팔을 높이 들고 운집한 적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그의 친구들에게 갔다.
그후 외교상의 동요가 일어났다. 루터에게는 세력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를 지지하는 일부 기사들이 호위했고 농민 휘장이 거리에 등장하기도 했다. 루터는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황제의 생명이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자랑한 적이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들도 있다. 훗날 급진적인 종교개혁자이자 사회혁명가인 토마스 뮌처는 만일 루터가 주장을 철회했다면 성난 기사들이 그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루터에게는 그가 오랫동안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청문회를 트리어의 대주교에게 친절한 대접을 받으면서 편파적이지 않은 판관들 앞에서 하게 되었다. 그때 루터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토론은 공의회의 오류 가능성 문제에 이르러 벽에 부딪혔다. 그는 공식적으로 추방당했고 호위를 받으며 회의장을 나갔다.
그가 엄청난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루터의 적들은 잔여 의회가 보름스 칙령을 통과시키는 순간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보름스 칙령은 루터의 법익 박탈을 선고하고 그의 저작들을 판매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이 칙령은 일생 동안 루터에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루터의 운동에 족쇄를 채웠으므로 그의 편을 든 제후가 한동안 루터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루터는 납치당한 것으로 가장해 아이제나흐 인근의 바르트부르크의 낭만적인 성채에 은둔하게 되었다.
바르트부르크에서의 루터
나무들 사이에 높이 솟아 있는 이 성채에 루터는 1522년 3월까지 머물렀다. 융커 게오르크 혹은 기사 게오르게로 변신한 루터는 평신도 복장을 했고 수염을 길렀으며 뚱뚱해졌다. 운동 부족과 익숙하지 않은 풍족한 식사로 인해 육체는 괴로웠으나 위기의 몇 달이 지난 후 평정을 되찾았으며, 루터는 극심한 우울에 시달리는 동안 자신의 반응이 너무 격렬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결코 게으르지는 않았다. 그는 마리아 찬가(Magnificat:예배 때 부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래)에 대한 아름다운 주석을 완성했고, 미사에 쓸 서신서와 복음서에 대한 설교 원고를 편집해 발간할 준비를 했다. 그는 이 설교들이 그가 쓴 글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 논쟁적인 글을 썼다. 〈루뱅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라토무스의 주장을 논박함 Rationis Latomianae pro Incendiariis Lovaniensis Scholae sophistis redditae Lutheriana confutatio〉이라는 글은 인의론에 대한 주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상어, 성서 번역). 그는 한 사람이 이 일을 도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즉각 멜란히톤을 비롯하여 동료들을 참여시켰다. 루터는 일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천재였다. 그 결과로 나온 〈신약성서〉(1522. 9)는 그후 히브리어를 번역한 〈구약성서〉(1534)와 마찬가지로 기념비적인 역작이 되었고 독일 민족의 언어, 생활, 종교에 지속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루터는 그가 일으킨 반란의 구체적인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다루어야 했다. 개인적인 미사, 성직자의 독신생활, 종교적인 서원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 자체는 법·재정·전례 문제들과 얽혀 있었다. 그는 이 문제들에 관해 솔직한 글을 썼다. 슈팔라틴이 이 글의 출판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의 제후, 대학교, 성당의 참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슈팔라틴에게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 소요(1521~22)
급진적 개혁
비텐베르크의 주민과 대학생들은 개혁을 빠르게 진행하도록 단호하게 요구했고, 1521년 10월 거리와 교회에서는 폭력시위도 있었다. 그렇지만 12월초에 친구들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돌아온 루터는 이에 놀라지 않았다. 1522년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때 2명의 급진적인 지도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구제불능의 사고뭉치인 카를슈타트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열정적인 연설가 가브리엘 츠빌링이었다. 카를슈타트는 16세의 소녀와 약혼하겠다고 선언하고, 크리스마스에 평신도 복장으로 2종류의 영성체(빵과 포도주)를 집전하고, 신학 논문을 통해 우상들을 공격하고, 무수한 명제들을 내세워 서원과 미사를 거부하고, 모국어 전례문을 요구했다. 그가 원하는 개혁의 시기와 방법은 루터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더 나아가 카를슈타트는 성서를 문자주의적으로 활용하여 루터가 그리스도교도의 자유 선택에 맡겨두었던 것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새해가 되자 시의회는 종교, 공중 도덕, 빈민 구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선구적인 조례를 공포했다. 이 조례는 대부분 루터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일부만이 카를슈타트의 주도로 제정된 것 같다. 1521년 말에 이른바 츠비카우 예언자들이 도착하면서 혼돈은 더욱 심해졌다. 그들은 츠비카우에서 달려온 급진파로서 꿈과 환상을 통해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를 감명깊게 이야기했으며,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고 모든 사제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모(智謨)가 뛰어난 멜란히톤 같은 사람도 이에 당황하여 황급히 루터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현명하고도 온건한 조언을 보내주었다.
균형잡힌 개혁의 회복
그 다음 몇 달 동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522년 3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되돌아와 그의 군주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그가 교황의 교서들에 복종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후 루터는 일부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복장을 하고 비텐베르크 시의 설교단에 서서 설득력있는 일련의 설교를 통해 개혁의 불균형을 바로잡았다. 이 설교는 루터의 개혁과 급진적인 개혁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다. 루터는 폭력의 사용에 대해 한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혁의 추진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반란은 파괴와 순수한 피를 흘리게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진정한 우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사람의 마음이 변하면 교회 벽에 걸린 성상화들도 폐기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더 나아가 개혁의 속도는 회심하지 않은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때부터 루터는 줄곧 가톨릭교도와, 루터가 '광신자들'(Schwarmer)이라고 지칭한 사람들과 대항해 싸워야 했다. 비텐베르크 위기의 결과 실제적인 개혁의 속도를 늦추게 되었고, 루터는 개혁된 전례를 도입하기는 했으나(〈미사 경본 Formula Missae〉, 1523) 152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국어로 씌어진 전례문 〈독일어 미사문 Deutsche Messe〉을 내놓았다. 독일 전역에서 복음파 운동은 계속 성장했으며, 보름스 칙령은 어느 곳에서도 시행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1522~23년에 열린 뉘른베르크 제국의회는 복음파 설교자들에 대한 탄압을 거부했고 전독일에 걸쳐 개혁적인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듬해 가톨릭의 압력이 더 커졌음에도 제국의회는 다시 한번 공의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칙령을 '가능한 범위에서' 시행하겠다고 합의했다.
농민전쟁
급진적 개혁가들의 활동
보름스를 여행하는 길에서 루터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소요를 보고 당황했다. 그후 몇 달 동안 루터는 작센의 통치자들과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도시의 의회에 새로운 급진적 교설이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는 공개 편지를 썼다. 1523년 루터는 〈세속 정부에 관하여 Von weltlicher Obrigkeit〉라는 중요한 저술에서 세속 정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교회와 국가). 그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법 안에서 세속 정부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그리스도교도 군주의 의무를 단호하게 주장했고, 영적인 정부와 세속적인 정부의 두 영역을 구별했다. 그는 이 두 정부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집행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시민적 복종의 의무와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반란이 죄임을 강조했다.
작센 지방에서 급진적인 개혁가들은 신학의 소양이 없는 통치자들에게 문제를 일으켰다. 비텐베르크에서 비난을 받은 후 카를슈타트는 오를라뮌데로 가서 그 도시를 자신의 계파에 속하는 신비적 정적주의로 개종시켰다. 루터는 영주의 요청에 따라 작센 지방으로 설교 여행을 했고, 가는 곳마다 적대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루터는 고리대금업과 같은 사회악을 비난했으나 열렬한 설교자 야코프 슈트라우스는 아이제나흐에서 고리대금업과 십일조에 대한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장벽은 천재였으나 무법자였던 토마스 뮌처가 알슈테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 자신이 만들어낸 전례 개혁을 성전(聖戰) 프로그램과 결합시킨 것이었다. 한때 '마르틴주의자'(마르틴 루터의 추종자)였던 토마스 뮌처는 신비주의에 대한 카를슈타트의 열정을 공유했고, 아울러 폭발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요소는 후스의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성향을 가장 두려워했다. 뮌처는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수치스러운 것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터의 경고와 그 당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통치자들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24년 여름 뮌처는 도망쳤고 카를슈타트는 유배당했다. 뮌처는 한 팜플렛에서 루터가 '음란과 음주'에 빠져 있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사라고 썼고, 그를 거짓말쟁이 박사라고 불렀다. 또한 카를슈타트는 그의 옛 동료들을 공격하는 일련의 소논문을 썼고, 성찬식 때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루터는 〈우상과 성사의 문제에 대해 천상의 예언자들을 공박함 Wider die himmlischen Propheten, von den Bildern und Sakrament〉이라는 방대하고도 심오한 논문을 써서 이에 응답했다. 루터는 급진적인 개혁자들이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는 영광과 영예를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반응
1524년 여름 슈바르츠발트 지역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전쟁은 동기가 다양했다. 그들은 수렵법·산림법·십일조 등과 결부된 구체적인 중세적 자유를 요구했다.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가톨릭의 가르침에, 일부는 츠빙글리와 루터의 신학에 의존했다. 루터는 위엄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권위에 도전하여 성공한 실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와 만인사제직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두 왕국에 대한 그의 미묘한 구별에 비해 명확했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루터를 제대로 이해했건 잘못 이해했건 간에 루터는 농민전쟁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1525년 5월 루터는 슈바벤 농민들의 '12개조 요구'를 분석한 〈평화를 위한 권면 Ermahnung zum Frieden〉을 발표했다. 그는 농민들의 정당한 불만에 동정을 나타냈고 제후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른바 그리스도교도의 반역이라는 개념은 거부했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리스도교도는 폭도로 무리를 지을 만큼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했으며, 세속적인 왕국은 불평등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525년 봄 튀링겐의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토마스 뮌처가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튀링겐의 농민들은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위급한 정치적 혼돈에 직면한 루터는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의 무리에 대항하여 Wider die rauberischen und morderischen Rotten der andern Bauern〉라는 거칠고 독설적인 글을 썼다. 이 글은 뮌처의 히스테릭한 성명서보다는 덜했지만 대단히 신랄했다. 그렇지만 이 글은 '12개조 요구'에 대한 자신의 온건한 논문을 보완하는 부록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농민들이 최고의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씌어진 이 문장은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농민군이 붕괴하고 그뒤를 이어 피의 복수가 진행되었을 때는 매우 다르게 해석되었다. 루터는 굴복하기를 거부했고 잃어버린 평판을 만회할 것도 바라지 않았으므로 그후나 어느 때든지 누구도 루터가 통치자들에게 맹종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때 기사들의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했듯이 농민들의 주장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농민들이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이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는 곧 재세례파 운동에서 보다 평화스러운 형태로 일관성있게 추구되었다.
분수령의 해(1525)
루터와 에라스무스
1525년은 여러 의미에서 루터 생애의 분수령이었다. 1525년 6월 농민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루터는 '악에 앙갚음하기 위해' 과거에 수녀였던 카테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확실히 루터는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녀는 훌륭한 아내였고 사업 수완이 있는 여성이었다. 가정은 루터에게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루터는 가정을 그리스도교적 소명의 한 귀감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정생활을 정치 및 교회 생활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3가지 위계질서(혹은 '창조질서')에 포함시켰다. 같은 해 루터와 인문주의의 대가 에라스무스 사이에 공개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은 오래 전부터 분명했는데,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자신이 혐오했던 격정적인 탁발 신학자의 유형으로 보았고 개혁은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공동의 찬양자 및 친구들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마지못해 논쟁에 임했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1524)이라는 글에서 루터의 교리를 노예상태의 의지라고 공격했다. 루터는 〈노예 의지에 관하여 De servo arbitrio〉(1525)라는 글로 이에 대응했다. 이 글은 격정적이기도 했으나 오늘날까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심오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바로 그해 현명공 프리드리히가 죽었다. 루터와 프리드리히는 단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나 루터는 그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새로운 선제후 요한과 그의 후계자 요한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열렬한 후원자였고 다른 제후들, 특히 헤센의 영주 필리프 및 알베르트 폰 브란덴부르크와 더불어 제국의회에서 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슈파이어 제국의회
카를 5세는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가톨릭 신앙에 대한 헌신을 바꾸지 않았으나 정치적인 긴급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과 프랑스 왕의 불화,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한 지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그것이었다.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전독일의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보름스 칙령을 일시 중단하고 전독일 공의회 소집을 연기했다. 그 동안 모든 제후는 하나님과 황제에 응답하는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규약을 세웠다. 루터는 이제 더이상 공포도 시련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작센 교회를 재조직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며, 법률가들과 신학자들의 방문이 이루어졌다(1527~28). 일부 학자들은 멜란히톤의 〈심방(尋訪)에 대한 교시 Instruktion fur die Visitatoren〉(1528)와 영적인 일에 세속 권력이 개입하는 데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이는 루터의 생각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보았다. 루터는 복음파 지방 교회들(Landeskirchen)의 발전을 철저하게 인정했는데도 루터의 신학적 특성을 반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모호하게 한 몇 가지 측면이 나타나고 말았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는 가톨릭의 압력이 다시 드세어져 과거에 합의했던 사항을 번복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복음파 제후들과 많은 도시들이 저항(프로테스트)해 이때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찬식 논쟁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교리적 차이
성찬식에 대한 교리적 차이는 복음파의 공동전선을 깨뜨렸다. 종교개혁자들이 미사를 희생시키는 데는 모두 반대했지만 신의 임재의 본질에 대해서는 심각한 분열을 보였다. 성서주의를 표방한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문맥이 분명하게 요구하지 않는 한 성서를 해석하는 데 알레고리를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를슈타트의 주장("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실제로 주의 몸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곧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이다'를 '의미한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츠빙글리의 견해는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학식이 깊은 츠빙글리의 친구요 인문주의자인 요한 오이콜람파디우스는 초기 교부들로부터 영적인 임재를 뒷받침하는 사상을 끌어내었으며, '몸'은 '몸의 표징'을 의미한다는 2세기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초기의 논쟁은 성찬식에 관한 말씀의 해석 원리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성서에 대한 논증은 〈요한의 복음서〉(예컨대, 6장 54절의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옮겨졌다.
논쟁은 난해한 그리스도론으로 바뀌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차이를 주장했다. 그는 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 신체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루터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 인격의 불가분리적 통일성을 강조했다. 그는 '편재'(ubiquity: 이 교리는 다른 루터파에 의해 발전되었음)라는 형이상학적 교리를 설명하지 않았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있으며, 우리는 그를 '둥우리 속의 황새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르틴 부처와 스트라스부르의 신학자들은 츠빙글리의 보다 적극적인 강조점에 공감했고, 부처는 참된 영적 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초기 교부들의 실재론적 언어를 활용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광신주의자들과 단호히 맞선다 Dass diese Worte Christi "Das ist mein Leib" noch fest stehen wider die Schwarmgeister〉(1527)라는 루터의 논문은 3년에 걸친 논쟁에서 그의 입장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츠빙글리의 라틴어 논문 〈우정어린 주석 Amica exegesis〉(1527)은 제목만큼 우정어린 것은 아니어서 루터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고백 Vom Abendmahl Christi, Bekenntnis〉(1528)이라는 설득력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로 인해 부처는 자신이 루터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는 국지적으로 제한된 임재를 염두에 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부처는 평화를 이루려는 선한 의도로 어색하게 노력했다.
마르부르크 회담과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공동전선의 정치적 장점은 분명했다. 그것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츠빙글리와 헤센의 영주 필리프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후들은 두 진영의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서 사적인 자유토론을 열었다. 루터는 자기 생각으로는 츠빙글리가 복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츠빙글리가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그리스도교도에게 허용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루터는 만일 그리스도가 돌능금과 똥을 먹으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그것을 먹어야 하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3일간의 논쟁 후에도 성찬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지만 많은 오해는 사라졌다. 비록 이 회담은 실패했지만 다른 논쟁점들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만일 차기 제국의회에서 비텐베르크의 신학자들이 츠빙글리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지 않았다면 이 합의점들은 풍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법익을 박탈당한 루터는 운명적인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참석할 수 없어 복음에 대한 해석을 멜란히톤에게 맡긴 채 코부르크 성채에서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멜란히톤은 훌륭하게 일을 해냈으며, 종교개혁의 위대한 문서일 뿐만 아니라 루터교의 규범을 세운 신앙고백문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Augsburg Confession〉(1530)을 작성했다.
루터는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선제후로 하여금 타협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그후 그는 슈말칼덴 동맹에서 점차 군사적 형태를 취했던 정치적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슈말칼덴 진영은 가톨릭의 공격에 무장하여 저항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 의해서 구축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갑자기 바뀌었다. 투르크의 침공에 직면한 황제는 뉘른베르크 종교강화회의(1532)에서 프로테스탄트 교도들과 휴전하는 데 동의했다. 이것은 숨을 돌릴 수 있는 귀중한 기간이었다. 이 몇 년 동안 루터는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이제 루터는 멜란히톤에게 점점 더 많은 일을 맡겨 처리하도록 했다. 적들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을 갈라놓기 위해 애썼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루터는 만일 멜란히톤이 적들에게 져주었다면 "그는 손쉽게 추기경이 될 수 있었을 것이고 부인과 자식도 거느릴 수 있었을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교의 발전(1530~46)
멜란히톤의 지도력
루터는 1536년 승리를 구가하는 부처와 멜란히톤이 성찬식에 관해 체결한 합의(비텐베르크 협약)를 묵인했다. 남부 독일인들은 이 협약에 의거하여 성찬식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지만 부처는 이 합의를 확산시키고 스위스인들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영국 왕 헨리 8세의 특사가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왔을 때 멜란히톤은 루터가 의인론에 관해 쓴 모호한 문장, "이것은 우리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로 시작되는 논제(비텐베르크 조항, 1535)를 작성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이 교황권에 대해 너무 유화적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한 루터는 그의 입장을 따르지 않고 교황이 소집한 공의회가 임박했을 때 자신의 비타협적인 슈말칼덴 조항을 썼다(1537).
교육 분야에서 이룩한 멜란히톤의 위대한 업적은 그에게 독일의 교사라는 이름을 얻게 해주었다. 이 분야에서는 루터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종교교육). 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독일 추밀원 의원들에게 보낸 공개서신(1524)과 〈학생들을 학교에 있게 하는 일에 관하여 Dass man Kinder zur Schulen halten solle〉(1530)라는 설교문은 교육에 대한 루터의 관심이 얼마나 현명하고 앞선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루터는 2편의 중요한 교리문답집을 작성했다. 훌륭한 고전인 〈소교리문답 Kleiner Kathechismus〉과 〈대교리문답 Grosser Kathechismus〉(1529)이 그것이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은 유수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겐, 펠릭스 크르치자크(크루시저라고도 불림)이었다. 많은 도시에서 루터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루터교적 유형의 교회생활을 형성하는 복음주의적인 가르침을 확산시켰다. 루터는 탁월한 전례론자는 아니었지만 예배 양식을 제시했고, 다른 많은 교회에 관한 지침(Kirchenordnungen)이 여기서 파생되었다. 루터가 쓴 저작의 영향력은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 전역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루터파 교회는 매우 깊이 뿌리를 내렸고 거의 완벽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루터파 교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찬송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의 친구들에게 찬송가를 쓰도록 권했으며, 그도 여러 곡을 썼고 그중 4편은 1524년에 발간된 프로테스탄트 찬송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이라는 유명한 찬송가는 유럽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루터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장 칼뱅(1509~64)이 스위스에서 떠오르는 탁월한 인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의 개인적인 접촉은 가벼운 것이었고 그는 계속해서 광신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나중에는 재세례파 이외에 카스파르 슈벵크펠트와 같은 급진주의자들도 공격했다. 카스파르 슈벵크펠트는 다양한 집단들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루터는 끝까지 오직 말씀에 의해서만 오류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견해를 간직했지만 재세례파의 징벌개념을 수용하게 되었다.
헤센의 필리프 사건
1540년 부처와 멜란히톤은 필리프의 개탄스러운 중혼을 묵인하는 데 앞장섰으나 루터가 이에 개입했다. 만일 하려고만 들었다면 루터는 필리프의 중혼을 중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필리프가 선도할 수 없는 음란죄(정부를 둠으로써)를 치유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죄를 의식하는 양심 때문에 성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고안된 것은 2번째 부인을 맞이하도록 비밀 면장을 그에게 교부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공개되자 루터는 격노해서 사건의 전모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도덕의 기준을 낮출 수 없었고, 따라서 몇 년 동안 비텐베르크를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비텐베르크는 공중도덕에 대한 복음파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던 도시이므로 부끄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537년 중병을 앓고난 후 루터는 거의 만성환자가 되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몹시 늙어버렸다. 몸이 불편하지 않은 때가 매우 드물었고 고통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는 〈창세기〉에 대한 강의를 끝으로 교수생활을 끝냈다. 마지막 10년 동안 루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교황권은 회복되었다. 교황청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63)를 준비했고, 가톨릭의 군대로 위협을 가중시켰다. 루터 최후의 탁월한 논쟁적인 저작은 〈공의회와 교회에 관하여 Von den Conciliis und Kirchen〉(1539)이다. 그의 마지막 저술들은 〈재세례파를 논박함 Against the Anabaptists〉·〈유대인을 논박함 Against the Jews〉·〈마귀가 세운 로마 교황권을 논박함 Against the Papacy at Rome, Founded by the Devil〉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신랄한 것은 마지막 저술이다. 이 저술은 거친 말투와 격노를 담고 있으며 여전히 도발적이다.
루터의 마지막 활동
1546년초에 루터는 거만한 두 젊은 제후들, 곧 알프레히트 백작과 겝하르트 폰 만스펠트의 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아이슬레벤으로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늙고 병들었으나 두 제후는 루터가 복종해야 할 상전이었다. 그는 눈보라치는 겨울에 길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부인에게 보낸 루터의 편지는 그녀를 안달하게 만들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부인에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기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과로했고 몇 시간 후에 죽음의 냉기가 그를 덮쳤다. 그는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1546년 2월 18일 사망했다. 그의 주검은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로 운구되었다. 그를 잘 알고 있던 부겐하겐과 멜란히톤의 장엄한 장례 연설은 단지 입에 발린 칭찬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루터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참으로 위대한 인물로 존경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루터가 삶과 증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앞으로도 계속 정복할 예언자들과 교회박사들의 반열에 속한다고 증언했다.
[신학자 루터]
루터는 멜란히톤이나 칼뱅처럼 체계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루터 사후에 루터교 신학자들은 루터 사상의 어느 한 면에 호소하면서 의견의 차이를 보였는데, 이것은 루터 사상이 광대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정교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루터 신학의 기초는 성서였다. 루터의 사상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의 정신에 영향을 준 요소들을 가늠해 볼 때 루터는 성서 다음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비중을 두었던 것 같다. 구원론은 루터에게 가장 중요했으며, 여기에는 말씀과 신앙이라는 두 위대한 개념이 나온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여러 면에서 복합성을 띠고 있다. 시민의 복종에 관한 교리는 미묘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의 후계자들은 언제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도들이 받은 소명과 인간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루터의 교리는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의 유산의 일부분이 되었다. 다른 주제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허용된 여지, 그리스도교도의 삶에서 율법의 역할에 대한 이해, 성찬식에서의 참된 임재에 대한 주장에서 루터의 신학은 다양한 유형을 보인다. 이 유형들은 개혁교회(장로회), 청교도, 재세례파와 같은 종파에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