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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주어진 은혜.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또 기회를 가지시고 요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째 요나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일어나라 그랬습니다. 오늘 이 같은 회복되는 역사가 우리 마음에도 일어나고 지난 한 주일 동안 아니면 또 최근 또 금년 들어서 작정된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또 실패했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회를 꼭 붙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의 이력서를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누군가 짐작이 갈 줄 압니다만은 추측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1931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주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또 그 다음 해에는 새로운 사업엘 손을 댔지만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다행히 주하원의원에 당선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그가 사랑하던 약혼자가 죽었습니다. 또 그 다음 해에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졌습니다. 또 2년 후에는 주하원의장에 입후보했다가 쓴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1840년 2년 후에는 또 선거인단에 출마했다가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했는데 또 낙선했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다행히 연방하원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또 2년 후에는 연방하원의원에 재출마 했다가 또다시 낙선했습니다. 또 그리고 2년 후에는 미국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선이 되고 또 2년 후에는 연방상원의원에 또다시 출마했다가 역시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1860년에는 당당히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자. 누구일까요? 예. 대답하지 않는 줄은 화장실 청소해야 됩니다. 누구입니까?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이력서를 보는 것처럼 수많은 실패를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때마다 더 큰 것에 도전해오는 여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미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대통령 그 자리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은 그러나 그는 역대 미국의 어느 대통령보다도 온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미국의 긍지로 여기는 훌륭한 업적을 남기며 그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남달리 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역경을 실패를 이기고 오늘 이런 아름다운 자리에 이르렀습니까 했을 때 그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말씀하신 대로 저는 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마귀는 내게 속삭였습니다. 너는 끝장이다. 너는 끝장이야. 너는 포기해라.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 성경을 읽고 말씀을 통하여 오는 성령님께서는 내 마음에 언제나 똑같이 말씀했습니다. 포기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 그리고 더 큰 것에 너 자신을 던져서 도전하라. 가만히 보면은 하원의원에 하원의장에 그 다음에 상원의원에 상원의장에 이런 거 다 실패 했지만은 계속 더 큰 것에 도전했다 그랬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기 속에 절망을 가지고 오는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단호히 내주 하신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공 비결이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위인전의 이야기 또 요즘 보도나 또 방송을 통해서 수많은 성공 스토리 한 두개쯤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또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나 또 우리 친지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은 또 나름대로 그렇게 야 누구도 이랬더라. 힘내라. 그렇게 말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날 또 그리고 어떤 나의 지금 영적 상태를 돌이켜보면 내가 실패를 당할 때 내가 사업에 실패하고 내가 가정에 실패하고 내가 또 영적인 삶에 실패하여 어이없이 베드로처럼 넘어지고 또 요나처럼 사명을 포기하고 좌절할 때 그 때는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자포자기로 좌절로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싶은 그러면서 까짓 거 그만 죽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도 스쳐지나가고 때로는 그 생각이 나를 꽉 붙들면서 얼마나 나를 무겁게 하고 또 나를 침체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드는 그런 시간들 그런 기회들이 대단히 많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아마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이 부정적인 생각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 마음 속에 어둡게 사망으로 가는 그런 무게가 마치 자석이 나를 당기는 것처럼 그렇게 기울어지는 인간의 연약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냥 내버려두면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우리는 죄로 또 그리고 타락으로 또 그리고 계속해서 좌절로 자포자기로 마지막에는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가지고 장난질 치려는 그런 유혹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밭을 깊이 갈아엎고 풀을 뽑고 돌을 가려내며 그리고 거기에 깊은 기경을 통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이 됩니다. 마음이 굳어집니다. 쉽게 주저앉아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좌절할 때가 참 많습니다. 조그마한 말 한마디 조그마한 인간 관계 갈등 또 그리고 넘어지는 어떤 범죄한 것 때문에 죄의식 때문에 하나님과 또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그냥 마음이 자꾸 흔들려버리고 믿음에서조차 떠나가려고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불신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정직하게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좌절과 자포자기가 끊임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요나서를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 오늘 물고기 신학교를 삼일만에 졸업했고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제2의 기회를 가졌던 그였지만은 또다시 하나님 앞에 좌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4장 가까이 있으니까 제가 찾아 읽겠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말씀은 안 따라해도 되요. 4장 3절입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뭐한다고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습니다. 그리고 또 박넝쿨이 나서 그 뜨거운 그 햇빛을 착 가리워주니까 너무 기뻐하고 좋다가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 가지고 그 박넝쿨을 씹어버립니다. 넝쿨이 바싹 말라서 햇빛이 그 머리에 콱 쬐이니까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어떻게 했다고요? 혼곤하여. 정신 못 차리는 거예요. 헤롱헤롱 몽롱한 거예요.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뭐라 그랬지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그랬어요.
어쩌면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몸에 베여있는 습관이 있습니다. 살겠다는 의지보다도 죽겠다는 무의식적인 발로가 더 많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리의 언어구조상 살펴보면 지금 설교가 지겨워 뭐하겠다? 죽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아이고 설교 지겨워 죽겠다. 또 좋으면 좋아서 죽겠다. 배고프면 배고파서 죽겠다. 배가 좀 부르면 배가 불러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그저 아침에 눈만 뜨면 죽겠다 소리부터 시작해서 저녁에 계속 죽지도 않으면서 계속 죽겠다 그러는데 이게 우리들이 의지가 우리의 그 마음의 자세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가가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툭 툭 나나오는 것이 바로 죽겠다는 거예요. 자포자기 좌절 깊이 잘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음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별 수 없어요. 저도 여러분도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책망과 위로와 권면과 교훈을 받지 아니하면 그냥 우리는 쉽게 낙심하는 거예요. 가끔 신문지상에 죽는 사람들 자살하는 사람 욕할 거 하나도 없이 그들이 못 배운 사람도 아니고 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은 그 마음을 그저 기울어지는 대로 내버려두면 어둠의 세력이 자석이 끄는 것처럼 그렇게 끄는 대로 가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나 다행히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기에 잠깐 스쳐 가지만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밀어내고 이런 기회가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가 되는 줄 믿습니다.
보세요.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면서 바알 선지자 400여명을 일거의 불로 태우고 쫓아냈던 그 불의 사자 삼년 반 동안 가물었던 그 하늘에 비를 내려오며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능력의 이 사자 엘리야도 로뎀나무라고 하는 조그마한 광야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 가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완전히 탈진하고 지진하고 완전히 번 아웃 완전히 탈진되었다는 거예요. 다 타버리고 마음에 소망도 기쁨도 바짝 말라서 여름 가뭄처럼 되어서 살아있으나 마치 죽은 사람 마치 그림자가 흐느적거리며 다니는 것처럼 혼이 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엘리야는 그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고 비를 가져왔던 그 능력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더 바라보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실패는 축복이요 좌절 또한 우리에게 큰 겸손을 깨닫게 하는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앞서간 많은 믿음의 사람 다윗도 다 범죄 하여 넘어졌고 삼손도 여성 문제로 인하여 좌절했고 아간도 물질 문제로 주저앉았고 얼마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그렇게 무너진 모습들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갔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이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다시 한번 일어나라. 그리고 실패했던 요나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고 나아갔던 그에게 주님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다면 오늘 우리도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곧잘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오늘이 오늘은 오늘 그렇게 지금 생각하는 경우라고 한다면 한번 영상해 보십시오. 어젯밤에도 부산 시내에 수많은 병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떼고 영안실로 내려가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하루가 바로 오늘 우리가 쉽게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오늘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많은 날 시간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루만 더 살았으면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해 줄 수 있는데. 몇 년을 더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내가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받을 사람에게 용서를 받으며 그리고 내가 축복할 사람에게 축복할 수 있을 텐데 그 하루를 살지 못해서 숨을 몰아쉬며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살았던 기대했던 간절히 원했던 그 하루가 바로 오늘이에요. 12시 어젯밤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도 바랬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 소중한 시간에 대해서 우리 모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나 죽었으면 좋겠다는 사람. 까짓 거. 옆에 사람 혹시 봐요. 그런 인상 관상을 한번 보시고 그런 사람은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적어도 예수를 믿고 천국을 믿는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아침 들어오면서 여러분을 환하게 웃고 맞이하신 분이 계셨을 거예요. 저희 교회 입구의 안내 위원들 인사하느라고 또 못보고 오신 분도 더러 있을 텐데 우리 입구에 예수님이 화환대소하면서 할렐루야하고 이제 맞이하시는 그 모습 밑에 보면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림이 있는데 그 중에 예수님이 웃는 모습. 할렐루야. 좀 웃으며 살자 이거예요. 아멘. 예수님이 매일 우는 줄 아는데 아니요. 성경에 웃는 말은 없어요. 울었다는 말은 있어도 웃는다는 말은 없는데 그 말은 왜냐? 늘 웃으셨기 때문에 쓸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식사했다고 매일 기록하고 화장실 갔다는 거 기록했어요? 그건 당연한 거니까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늘 만면에 미소를 띄고 계시고 웃으시며 기뻐하시며 늘 즐거움으로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 예수님 만나는 사람마다 기분이 확 피어지는 그런 기쁨의 주님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못 보신 분은 예배 마치고 나가서 그 앞에 가서 이렇게 한번 합장하십시오. 주님 나 이제 웃으며 살겠습니다. 아멘.
그 밑에 이렇게 글을 써놨지 않습니까? 따라서 합시다. 더 좋은 날은 지금 오고 있습니다. 아멘 입니까? 우리 주보에도 늘 위에 이렇게 기록해 논 좋은 또 격려의 말이 있는데 우리 옆에 분에게 우리 한번 축복해 줍시다. 위대한 기회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말을 확신 있게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남에게 전하기 전에 내가 정말 그것이 그래 맞다. 나는 기대와 믿음이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희망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내 생애 속에 신령한 은혜 기쁨 감격 사랑 충만케 하시고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온 소명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고 우리 자녀들에게 던져 또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조금 소외됨을 느낄는지 모르지만 그분 믿음 없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호화호식 아무리 좋은 영광 다 누려도 우리가 장차 너를 하나님 아버지의 집의 영광에 비교할 수 없는 좋은 날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걸 믿고 오늘 더 열심히 헌신하고 희생하면 저 1층도 아니고 2층도 아니고 3층에까지 그 바울이 가서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을 누렸던 거기의 영광의 자리에도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이 희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제2의 기회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더 좋은 날은 누구에게 하나님이 주시느냐?
먼저 첫째로 실패한 요나에게 주어집니다.
두 번째 찾아온 주의 말씀은 성공한 요나가 아니라 실패한 요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 니느웨 성으로 가서 말씀을 회개의 영을 전하라고 했지만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판단대로 자기 철학대로 도망쳐서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제비가 뽑혔습니다. 드디어 자기 탓으로 풍랑이 이는 줄 알고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큰 물고기를 예비해서 그를 삼켜버렸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는 엄청난 좌절과 사망의 음침한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3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아멘. 두 번째 찾아오신 주님. 이것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있고 이 믿음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실패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할 때 그는 망한다 그랬습니다. 어떠한 인생의 실패가 있다 할지라도 특별히 영적인 실패 범죄 하여 넘어졌을 때 주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치 아니함으로 우리가 사업과 가정과 많은 부분에 직장 생활에 사업에 나름대로 실패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분이신 걸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무지한 자에게 교사가 필요한 것처럼 가난한 자에게 부요하신 주님이 필요했던 것처럼 주님은 연약한 자 가난한 자 실패했다고 자기의 실패를 인정할 때 주님은 항상 그 곁에서 지켜보고 돕는 길을 가지고 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 따르다가 실패했습니다. 또 그리고 고기나 잡아먹으러 가겠다고 했지만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물었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누군지도 모르지만 고기가 없나이다 라고 솔직히 인정했을 때 주님은 배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므로 그들의 실패와 죄의식을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말합니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의인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의인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 일어나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이 믿음 붙드시고 우리가 어떠한 좌절의 환경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기회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어지는 이 기회의 조건은 무엇이냐? 누구에게 이 두 번째 은혜 두 번째 기회를 주실까요?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처절하게 깊이 깨어지며 회개했습니다. 자기의 사고방식 자기의 철학 자기의 고집 아집 생각을 깨트렸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명을 우습게 여긴 것을 통분히 여기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가는 것이 내 인생에 성공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깊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찾아와 주었습니다. 유가에서는 일일삼성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도덕적 반성을 강조합니다. 하루 세 번 자기를 반성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난날 과거의 어제의 나에 대한 뉘우침과 더불어 장차 오는 미래에 대한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란 불순종이지만은 의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두 가지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거를 눈물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미래에 믿음으로 시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과거를 눈물어린 눈으로 본다는 것은 후회합니다. 회개합니다. 깊이 반성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성령을 슬프게 한 것 이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을까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눈물어린 눈으로 과거를 응시하며 또 한 눈은 미래를 응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그 좋은 날을 믿음의 눈으로 즉시 하라 이것입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윗 왕을 보십시오. 참 부끄러운 많은 범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도 돌이키고 그를 붙들어주신 것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앞서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찾아오신 주님을 붙들고 넘어질 때마다 좌절하며 자기 양심도 스스로 정죄하고 고통할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성공한 인생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였는가의 간증이라고 믿으셔도 좋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 회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뭐냐? 데이빗 제이 리브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에겐 분명히 문제가 있다. 몇 가지로 추렸느냐 하니까 모두 77가지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랬는데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니까 이런 거예요. 다른 사람이 실패할 때 은근히 나는 즐거워한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너무 허를 찔렀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래요. 은근히 그놈 잘 됐다. 그 모가지 빳빳하고 교만하더니만은 잘 됐어. 이게 문제예요. 이게 나예요. 이게 내 속에 숨어있는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니까 77가지 다 할 필요 없고 마지막 77번째는 뭐냐 하니까 이렇게 했어요. 따라서 합시다.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주장을 바꾸지 않는다. 이게 77번째 내 속에 있는 문제점이라는 거예요. 잘못된 걸 압니다. 이건 분명히 말씀의 원리에 또 상식에 덕을 세우는 일에 내가 분명히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는 거지요. 왜요? 익숙한 것에 매여서 자기 습관에 매여서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다는 거지요.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뭐라고요? 망조라는 것입니다. 망조가 뭐냐? 망할 징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렇게 가면 내가 건강을 망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하면 우리 가정이 깨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유치원 때부터 다 배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돌이키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회개가 온전한 회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된 회개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이처럼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 마음 밭을 두들기며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기도 하고 권면과 위로를 받기도 하고 내 속에 일어나는 어떤 영적인 동기 부여가 될 때에 돌아서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새봄과 함께 집안 청소를 싹 하고 분위기를 바꾸는 것처럼 또 이렇게 세례 학습을 받을 때 내 신앙이 한 단계 새로운 결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아니면 예수 안 믿다가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을 시작할 때 아니면 장가를 새로 갔을 때 아니면 첫 아기가 태어났을 때 아니면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이런 인생의 전환점도 중요합니다. 아니면 또 실패했을 때 그 자리를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리고 이것이 나의 아름다운 습관이 되어서 내 삶을 바르게 가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기도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성공하고 싶지 않고 누가 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좀더 경건하게 살고 싶은 믿음의 마음들이 있지만은 이것 가지고만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은 마음은 부패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끊임없이 주어져야 되는 줄 알고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저 하루에 1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입니다. 밥 먹을 때 다 세 번 합쳐야 1분 될까 말까 입니다. 하루에 5분 10분 이래가지고는 영적 생활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1시간 드리는 이것으로 전부가 되어 가지고는 이름뿐인 그래서 전혀 삶의 현장에는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 가지고는 우리는 늘 좌절합니다. 우리 마음이 언제 한번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와 찬송의 시간이 가져질 수가 없습니다. 골방에서 가정에서 기도하시고 특별히 교회가 저녁예배 저녁기도회 매일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조금 더 잠자고 오라고 2부 새벽기도까지 있습니다. 수요기도회 있습니다. 그리고 한 주일에 한번씩 부르짖고 기도하라고 또 우리 금요성령대망기도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직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줄 아세요? 교만하지 마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뻔합니다. 속이지 마세요. 다 알아요. 그 속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지 결심은 많지만은 아는 건 많지만은 오히려 더 갈등이 많은 것 하나님이 아시고 내가 알잖아요. 기도해야 됩니다. 토해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솔직히 인정하시고 신앙 생활이나 영적인 생활이나 경건의 생활이나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직장과 산업에 문제가 생길 때 사람은 자기 탓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원인을 찾지만은 하나님의 사람은 회개합니다. 왜요? 하나님과 관계가 내가 바로 되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끝으로 이 놀라운 회개의 결과는 아름다운 부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두 번째의 기회는 성공으로 우리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요나가 나가서 회개했을 때 큰 도시라서 3일을 돌아다니는데 하루를 외쳤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왕이 포고문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어린 아이까지도 다 금식을 하게 하고 심지어는 말 못하는 소 돼지 짐승들도 다 금식을 시키며 물도 마시지 말고 부르짖어 하나님께 회개를 해라. 다시 돌이키라고 그렇게 왕이 나서서 일을 다 해줬습니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부활하면 십자가에 내가 죽고 깨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나면 고난과 연단을 통하여서든지 믿음으로든지 깊이 깨어지고 나면 내 자아가 고집과 아집과 내 생각이 다 깨어지고 나면 일이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 쉬워진다는 거예요.
그저 억지로 어렵고 꼬이고 그렇게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서 하면서 슬슬 외쳤어요. 요나가 나처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겠어요? 이 도성이 잘되는 것이 자기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좋으니까 그저 그냥 억지로 안 하면 또 물고기 뱃속에 이번에는 어디다 처넣을지 모르니까 너희들 회개해야 된다. 그저 한마디하고 그저 그렇게만 떠들었어요. 힘써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그 뒤에 자세를 보면 회개 해 가지고 은혜를 백성들이 이제 징계를 받지 않고 이러니까 요나가 심술이 나서 입이 닷발이 빠져 가지고 불평하는 걸 보면 그냥 힘써 외치지도 않았어요. 너 회개해야 된다. 그 정도예요. 그런데도 뒤집어졌습니다. 온 성이 난리가 났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더 좋은 결과가 나는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부활한 요나 거듭난 요나 그리고 그 연단과 시련을 통해서 자아가 다 부서지고 나서 그의 인생은 많은 것을 회복했습니다. 원래 니느웨까지 갈려면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텐데 저 다시스로 갔다가 시간이 인생이 망가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물고기 배를 태워 가지고 3일만에 그 니느웨 성에 도착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자기가 가는 것보다 다시스로 갔다가 돌아오는 것보다 또 그 배를 탄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시간을 회복시켜 주었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단축해 주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백합니다. 정말 예수 믿으면 지나간 날 너무 후회스럽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지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부활하면 우리의 삶이 쉬워질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물질 잃어버린 건강 다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회복케 해주신 모든 것들입니다. 심지어는 그의 인격까지도 회복시켜 주었고 그의 모든 삶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자리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삶이 실패하라고 한 건 아닙니다. 실패는 그러나 결코 그것 때문에 죽을 일은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늘 우리 곁에 오셔서 물고기가 있느냐? 너 나를 떠나서 잘 되더냐?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떠나서는 참 얼마나 행복하더냐? 네가 나를 버리고 나서 정말 너 삶에 기쁨과 희망과 소망이 있더냐? 물으시면서 항상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그런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시고 또 말씀 앞에 겸손하셔서 다시 한번 일어나서 사명과 축복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