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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
우표로 본 오늘~ 10/1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6 - 유관순 열사 새 영정 완성
유관순(1902~1920) 열사 표준 영정이 청순미와 기개가 서린 모습으로 고쳐졌다.
유 열사 영정 제작을 맡고 있는 윤여환(53·충남대 미대) 교수는 13일 유 열사 얼굴 등 상반신 그림이 지난달 문화관광부 표준동상영정심의위 소위원회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새로 제작된 유 열사 얼굴(오른쪽)은 조선후기 초상화 기법인 육리문법으로 그려져 19살 안팎의 청순하고 진취적인 항일 민족 소녀의 기개가 살아있다. 기존 영정(왼쪽)은 1986년 장우성 화백이 제작했으나 옥중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있는 수형자 기록표 사진을 참고해 나이 들고 수심이 깊어 보인다는 지적과 작가의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였었다. 윤 교수는 “새 영정은 정면상이 특징으로 자료사진을 분석해 속쌍꺼풀 등도 그렸다”며 “유 열사 전체 모습을 그린 새 영정은 다음달 초 최종 심의를 거쳐 내년 초 추모각에 봉안될 예정”이라고 했다.
한편 육리문법은 얼굴 근육 조직과 살결을 따라 선과 점을 표현해 피부 질감 등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초상화 기법이다.
대전/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한겨레 2006-10-13 오후 09:51:0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64288.html
2000 -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2000년 10월 13일 오슬로 소재 노르웨이 노벨연구소에서 가진 수상자 발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됐으며, 1901년 처음으로 앙리 뒤낭과 프레데리크파시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이래 81번째의 수상자이자 아시아인으로는 일곱 번째로 노벨평화상을 타게 됐다. 김 대통령에 대한 노벨평화상 시상은 12월10일 오슬로에서 열렸으며, 김 대통령은 90만 스웨덴크로나(약 96만달러·약 10억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번 노벨평화상 후보에는 개인과 단체를 합쳐 모두 150명이 올랐으며,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도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 덕분"이라면서, "이 영광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한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조선
1999 - 탤런트 서갑숙 자전 에세이집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출간
탤런트 서갑숙씨의 자전 에세이집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가 출간되자마자 사회적인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여자친구와 함께 남자 1명과 성관계를 맺은 이야기를 비롯, 동성애, 강간 등 자신의 성체험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책이 출간되자 교보문고는 처음에는 이 책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 책을 전량 출판사에 돌려보냈다가 이후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스티커와 함께 책에 랩을 씌워 판매했다. 한편 KBS는 서씨가 출연중인 `학교2`프로에서 그녀를 출연정지시켰으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26일 청소년유해간행물로 결정했다. 그러나 서울지검은 음란성내사결과 책내용에 문제없다며 27일 내사를 종결했다. /조선
1994 - 북아일랜드 신교도 휴전선언
1994년 오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 무장조직들이 IRA, 즉 아일랜드공화국군에 대한 휴전을 선언한다.
IRA가 신교도에 대해 휴전을 선포한 지 6주 만의 일이다.
'로얄리스트'로 불리는 신교도 무장단체들은 이때까지 25년 동안 3천2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아일랜드 유혈사태 가운데 4분의 1이상에 개입해왔다.
영국 정부도 8일 뒤인 같은 달 21일 IRA의 휴전선언을 항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IRA의 정치조직인 '신페인당'과의본격적인 평화회담을 개최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YTN
1990 - 노태우 대통령, 범죄와의 전쟁 선포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盧泰愚, 1932~ ) 대통령이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범죄소탕을 위해 강력한 전면전에 들어 갈 것을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6공당시 가장 문제가 됐던 가정파괴범이 사회적인 분노를 일으키자 '범죄와의 전쟁'를 결심했고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 범위안에서 가장 강력한 대책을 수립했다.
전쟁선포 1년동안 전국 2백53개 폭력조직에서 8백39명의 폭력배를 검거해 그중 7백62명을 구속했다. 여기에는 두목급 20명과 행동대장 83명이 포함돼 있어 대부분의 폭력조직이 사실상 와해됐다. 이에따라 범죄발생건수가 1989년도에 비해 2.7% 감소하고, 범죄자 검거율은 7.4% 증가했다. 특히 마약사범 발생률은 1989년도에 비해 13.4%가 감소했다. /조선
1987 -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대통령, 노벨평화상에 선정
1987년 오늘 노벨상 위원회는 코스타리카의 대통령 아리아스 산체스(Arias Sanchez, Oscar, 1940~ )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1년 전인 1986년 45살의 나이로 코스타리카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된 아리아스 산체스!
좌우익의 치열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미지역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평화정착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혔다.
그는 특히 앞서 같은 해 8월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의 내전을 즉각 중단하는 것을 뼈대로 한 45개국 평화안, 즉 '아리아스 플랜'을 제의해 중미 5개국의 평화협정을 실현시켰다. /YTN
- NATO 35th anniv.
1967 - NATO본부 파리 철수. 16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서 개소
1967년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사령부로부터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주둔 미군은 철수해야 했고 당시 파리에 있던 나토 본부도 부랴부랴 브뤼셀로 옮겨야 했다. 드골의 나토 탈퇴 이유는 “프랑스가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드골의 논리를 뒤집어보면 “나토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으며 자주성을 가지지 못하는 군사방위기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Google
(1967년 3월 30일, 파리의 NATO사령부 폐쇄, 10월에 벨기에의 에베르로 이전)
1965 - 맹호부대 인천항 출발
"한국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 특히 "맹호"를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장비 등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라!" - 호치민(胡志明)
맹호부대 (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 /Google
맹호부대 파월일지
1965.06.14 - 정부, 월남공화국 수상에게서 한국군 1개 전투사단 지원요청서 접수
1965.06.23 - 한국군 1개 전투사단 파월에 관한 대미 합의각서 수교
1965.08.29 - 맹호부대는 육군소장 채명신(蔡命新)을 지휘관으로 파월부대 편성에 착수, 4주 동안의 국내 훈련을 실시
1965.09.01 - 국방부 일반명령 제31호에 따라 맹호부대 예하에 육군준장 이범준을 지휘관으로 하여 군수지원사령부인 십자성부대 창설
1965.09.25 - 주월 한국군사령부 창설(대통령령 제2226호, 초대 사령관에는 당시 맹호부대장인 채명신이 겸임)
1965.10.12 - 여의도공항에서 대통령 박정희를 비롯한 3부 요인과 한·미 고위장성, 외교사절 및 20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맹호부대 환송식
1965.10.13 - 맹호부대 주력전투부대 인천항 출발
1965.10.16 - 맹호부대 본대 부산항에서 출국
1965.10.20 - 주월 한국군사령관겸 맹호부대장인 채명신 소장과 본부요원들 김포공항에서 환송식 후 월남으로 출발
1965.10.22 - 맹호부대 본대 퀴논항에 도착
1965.11.03 - 미 제1공수사단으로부터 전술 책임지역을 인수
1938 - 연재만화 <뽀빠이 Popeye>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시가(Segar, Elzie) 사망
시가 [Segar, Elzie (Crisler), 1894.12.8~1938.10.13]
미국의 시사만화가, 연재만화 〈뽀빠이 Popeye〉의 작가.
시금치를 먹으면 엄청난 힘이 솟는 우락부락한 선원 뽀빠이는 세계에 알려져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
청년시절에 시가는 주택 도장, 간판 그림, 영사기사 등의 일을 했다. 자신이 그린 만화가 숱하게 거절당하자 그는 통신교육을 통해 시사만화 과정을 거친 후 시카고로 갔다. 그곳에서 시사만화가 리처드 F. 아우트콜트의 도움으로 〈헤럴드 Herald〉지에 일거리를 얻어 〈찰리 채플린의 희극적 장난 Charlie Chaplin's Comic Capers〉을 그렸다. 이 신문이 1917년에 발행을 중단하게 되자 그는 뉴욕으로 가서 킹피처스신디케이트사(社)를 설득하여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연재만화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에 〈팀블 극장 Thimble Theatre〉이 등장했다. 이 만화는 처음에는... /브리태니커
1921 - 프랑스의 샹송가수, 영화배우 이브 몽탕(Montand, Yves) 출생
몽탕 [Montand, Yves, 1921.10.13~1991.11.9]
몽탕은 매력 있는 프랑스인의 전형으로 널리 간주되던 프랑스의 배우이며 대중가수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유대계 출신으로, 청년기 힘겨운 밤무대 가수생활 끝에 유명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후원 아래 1945년 영화 <어두운 별 Etoile sans lumiere>로 비로소 본격 데뷔했다. 1951년 여배우 시몬 시뇨레와 결혼했으며 부부가 함께 미국 민간인 최초의 간첩 혐의 사형수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과 베트남 전쟁, 프랑스의 알제리 독립운동 탄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 <제트 Z>(1968)·<계엄령 Etat de siege>(1973)과 <마농의 샘 Manon des Sources>(1987)이 있으며, 그가 부른 대표적인 샹송 <고엽 Les Feuilles Mortes>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99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언론은 엄청난 애도와 경의를 표했다. 프랑스의 모든 방송사에서는 몽탕의 추모 특집 방송을 1주일 이상 방영했다. /브리태니커
하지만 삶은, 슬며시 소리도 없이 /
서로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세우고 /
바다는 지워버린다, 모래 위, 갈라선 연인의 발자욱마저..."
- 자크 프레베르의 시 <고엽 Les Feuilles Mortes>에서
1895 - 독일의 정치가 슈마허(Schmacher, Kurt) 출생
슈마허 [Schmacher, Kurt, 1895.10.13~1953.8.20]
쿨름 출생. 할레 ·라이프치히 ·베를린 대학에서 수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오른팔을 잃었다. 사회민주당(SPP)에 입당하여 1920년에 당 기관지《Schw bische Tagwacht》의 편집자가 되었고, 뷔르템베르크주(州)의회 의원을 거쳐 1930∼1933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나치스 정권이 수립되자 그들을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가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져 패전 때까지 수용소를 전전했다(1933∼194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사회민주당을 재건하여 그 당수가 되었다(1946∼1952). 서독 국회의원(1949∼1952)으로서 수상 K.아데나워의 서방에의 통합정책, 유럽 방위공동체 구상 등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여 그의 정치적 호적수로 활약하였다. /naver
1887 - 슬로바키아의 정치가, 대통령 티소(Tiso, Jozef) 출생
티소 [Tiso, Jozef, 1887.10.13~1947.4.18]
슬로바키아의 성직자·정치가.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내 슬로바키아의 자치권을 위해 싸웠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적군(赤軍)과 체코슬로바키아 빨치산에 의해 체제가 전복될 때까지 독일의 괴뢰국가인 독립 슬로바키아(1939~45)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안드레이 흘링카가 이끄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저명한 인물이 된 티소는 1927~29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각료를 지냈고, 1938년 흘링카에 이어 당수가 되었다. 1938년 10월 6일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내 슬로바키아 자치국의 총리가 되었으며 헝가리에 합병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1939년 아돌프 히틀러의 후원 아래 독립을 선언한 뒤 대통령에 취임했다. 티소의 독재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세세한 간섭 속에서도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1945년 4월 적군이 들어오자 붕괴했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자유억압·반인도죄(反人道罪)로 처형되었다. /브리태니커
- Antonio Canova - 'The Three Graces' - 'Princess Maria Leopoldine'
- 'Canova' - 'Hercules and Lichas' - 'Pius VII'
- 'Paulina Borghese as Venus'
- 'Cupid and Psyche' - 'Bust of Napoleon'
- Galleria Nazionale 'Borghese'
1822 - 이탈리아의 조각가 카노바(Canova, Antonio) 사망
카노바 [Canova, Antonio, 1757.11.1~1822.10.13]
신고전주의의 대표자이다. 일찍부터 석공 밑에서 일하다가 재능이 인정되어 베네치아의 조각가 토레티의 공방에 입문하였으며, 이때 고대조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79년 22세에 로마로 갔는데, 당시에는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반발로 고전주의적 풍조가 일기 시작, 폼페이와 엘코라노의 고대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빙켈만과 레싱의 저술을 참작하여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여서, 로마는 신고전주의운동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고대조각을 열심히 연구하고 모방하였다.
우선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를 제작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비》(1787, 산티아포스토리성당). 《클레멘스 13세의 묘비》(1792, 산피에트로대성당) 등이 있으며, 루브르에 있는 《아모르와 프시케》의 군상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바티칸미술관에 있는 《페르세우스》 《두 명의 권투자(拳鬪者)》 등을 제작한 후, 1802년에는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갔으나, 그 해 로마로 돌아와서 명사 ·귀족의 묘비와 초상을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거대한 나상(裸像:1810, 밀라노 브레라미술관)과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이 긴 의자에 기댄 반나상(로마 보르게세미술관)을 고대양식으로 제작하였다. 그 후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였으며, 만년에도 쉬지 않고 일을 계속하여, 과로로 휴양하려고 베네치아로 귀향, 그 곳에서 죽었다. /naver
1821 - 독일의 병리학자 피르호(Virchow, Rudolf) 출생
1713 - 영국의 초상화가 램지(Ramsay, Allan) 출생
552 - 백제, 일본에 불교 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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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