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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Holbein the Younger between 1520–22.
무덤에있는 죽은 그리스도의 몸은 1520-22 년 사이 독일 예술가 Hans Holbein the Young이 만든 석회나무그림의 기름과 재질이다. 이 작품은 죽은 뒤에 무덤에 누워있는 예수그리스도의 평범하고 부자연스럽게 야윈 몸을 묘사 한 실물 크기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죽음과 시신의 묘사다.
홀베인은 인간의 몸으로 나서 인간으로 살다가 평범한 인간의 운명을 겪은 후에 죽은 하나님의 아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에 매료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홀베인에서 자신의 주요 문학적 집착 중 하나와 비슷한 충동을 보았다. 기독교 신앙과 그것을 부정하는 모든 것, 이 경우 자연의 법칙과 죽음의 뚜렷한 현실에 맞서려는 경건한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에 가까운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그림에 대한 오랜 철학적 토론에 참여하여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존재조차도 포함하여 모든 것에 대한 '맹목적인 자연'의 승리를 보여준다.
승리로 가는 통로 ‘그리스도의 죽음’
죽음을 소재로 한 여러 그림들이 있지만,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화집에서 보는 순간 그 자체로도 큰 충격이었다. 마치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은 듯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 그림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림을 보는 순간 한참동안 말을 잃고, 간질 발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10대 초반의 나이에 이제하임 제단화를 볼 기회를 접했다. 그 참담하여 고통받은 그리스도상에서 받았던 어린 시절의 깊은 감명이 훗날 그가 무덤 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이토록 충일한 사실감으로 그리게 한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대 유럽 최고의 휴머니스트 지성인인 에라스무스의 저서<우신예찬>의 삽화를 그린 것이 특별한 인연이 되어 에라스무스의 사상적 영향이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홀바인은 무덤에 누운 그리스도를 그리는데, 다른 인물이나 장치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30.6x200cm의 긴 화폭에 일직선으로 굳은 시신을 눕히고, 이를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수평의 세마포가 깔린 시체 지지대가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뻣뻣이 누운 한 시체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눈은 멍하니 뜬 채로 정지되어 있고, 입은 열친 채로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산발한 듯한 머리와 수염은 살아서 길게 자랄 것 같다. 초록으로 변한 굳은 손등 위에 못 박힌 흔적이 뚜렷하고, 발도 검게 타 있는데, 발목 밑의 못 자국이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다. 참담하게, 영락없이 버려진 보통 사람일 뿐인데 옆구리의 창 찔린 흔적과 손과 발의 못 자국만이 그가 예수님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도 미심쩍었는지 관 상단에‘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새겨 놓았다. 거기에 절제된 색이 긴장감을 더해 준다.
이런 참혹성 때문이었는지 홀바인이 무신론자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물론 무신론자가 보면 자기 자신도 구원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참담함에 담긴 한없는 경건과 경외 그리고 넘치는 감사와 겸손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더럽고 독하고 악한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주검으로 누워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 정도라면 오히려 우아한 승리자의 모습이 아닌가.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기의 일이다. 엄숙한 리얼리티 앞에서 그림자와 같은 인생의 본질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엄정성을 생각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동정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인 도발이다.
하늘만 쳐다봐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햇빛이 가득한 정적의 골목길을 가노라면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죄인이다. 죄의 그늘에서 해방되고, 모든 고통과 삶의 무거운 짐, 불확실성들을 저 제단 위의 예수님처럼 모두 내려놓고 싶다. 죽음을 이겨낼 수 있으며 집착할 소유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이석우 교수<경희대 사학과?서양사 전공> 2006/02/09 글 출처 : 크리스찬투데이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리스도의 주검
바젤 미술관은 세계 어떤 미술관보다도 홀바인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덤 속의 그리스도 주검>이란 그림이 특히 유명한데, 이 그림은 당시 신성시되었던 그리스도의 육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는데, 이토록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린 그리스도의 주검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에는 흰 천이 깔린 바닥 위에 시신이 길게 누워 있습니다.
바짝 마르고 굳어버린 몸뚱이와 검게 변해버린 얼굴과 손발, 그리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상처와 손등에 못에 박힌 흔적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힘없이 열린 입술과 이미 초점을 잃고 풀려버린 눈동자를 한 이 주검은 그 참혹한 모습으로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여기에는 신의 아들로서의 위엄이나 권위를 어느 한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의 주검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이런 모습은 이전의 다른 화가들이 묘사한 그리스도의 주검과는 너무나도 대조를 이룹니다.
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검게 변한 죽은 그리스도의 얼굴은 옆으로 조금 기울었고, 빳빳하고 메마른 머리카락은 하얀 수의가 덮여 있은 관의 바닥 위로 아무렇게 흩어져 있으며, 턱수염은 관의 덮개 쪽을 향해 뻗쳐 있고, 검게 변한 발은 돌로 만든 관의 벽 가까이에 놓여 있습니다. 오른손은 구겨진 시트의 가장자리에 힘없이 놓여 있고, 허리에 두른 천을 제외하고는 알몸인 채로 있습니다. 뼈와, 그리고 힘줄이 드러난 근육들이 힘없이 내려앉은 피부를 통해 드러나 보입니다.
이처럼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그린 그림이란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미술관 벽에 안치된 시체 바로 그 자체와도 같이 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느낌이 화가에 의해 만들어진 착시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처럼 이 그림은 실제로 시체를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게 합니다. 그러니 이 그림을 그린 홀바인의 그림 솜씨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림의 형태도 관의 모양과 같이 기다란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있어 큰 효과가 있습니다. 폐쇄공포감마저 자아내는 이런 형태의 그림에서 홀베인은 창에 찔린 상처에 있는 검은 피딱지나 갈비뼈 부분의 돌출, 그리고 작고 초점을 잃은 눈 등 주검 자체를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이 주검에서 보편적으로 보아왔던 그리스도의 죽음을 연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일반적인 주검의 모습일 뿐입니다. 홀바인은 마치 병원 영안실에 보관된 사고로 죽은 어느 희생자의 모습처럼 그리스도의 주검을 묘사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한 예술가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홀바인은 왜 이토록 인간적인 모습을 한 그리스도의 주검을 그려야만 했을까요? 이런 의문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죽음에 대한 홀베인의 견해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꽤 가치 있는 일입니다. 비록 그것이 두렵고 우울한 일이긴 하겠지만 결코 의미없는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글 출처 : Pleasure from Emptiness [2009/09/19]
실패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1867년 8월 12일 바덴바덴에서 제네바로 가는 도중에 들른 바젤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16세기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를 직접 보기 위해 바젤 미술관을 방문했다.
“그 그림은 남편을 압도했다. 그는 그림 앞에서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나는 너무나 참혹한 느낌이 들어 다른 전시실로 갔다. 15분인가 20분 쯤 후에 돌아와 보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그 그림 앞에 붙박인 듯 계속 서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홀바인을 “놀라운 예술가이자 시인”이라 부르며 열광했다. 도스토옙스키 사전에서 ‘시인’이란 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를 지칭하는 찬사다. “남편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의자에 올라서서 그림을 보았다. 나는 벌금을 물게 될까봐 조마조마했다.” (중략)
그의 그림은 도전이자 시험이다. 마치 “이래도 믿을 테냐”라고 묻는 듯하다. 미슈킨의 말처럼 그런 그림을 보고 있다가는 “있던 신앙심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신앙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폰비지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강해질수록 신을 믿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강력하게 자라난다”고 썼다. “불행 속에서 진리는 더욱더 밝게 빛난다”고도 했다.
-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33> '바젤: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 ' 중에서
그러고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참 탁월한 미술 감상자였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한 것도 그의 소설들이 드라마틱한 회화나 연극같은 면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는 그림들에서 인간을, 이미지의 표면과 그 아래의 심연, 이미지가 정지된 전후의 시간을 아우르며 펼쳐지는 인간의 심리를 읽어낸다.
한스홀바인은 독일의 화가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 이젠하임에서 사망했다. 그의 화풍 형성에는 네덜란드 회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지만, 그곳을 여행한 확증은 없다. 1494~1515년 주로 생지에서 일했으며, 1516년 알사스의 이젠하임으로 이전했다. 그뤼네발트와 견주는 색채가(色彩家)이며, 그뤼네발트의 스승으로 보는 설도 있다. 카이스하임 제단화(1502,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외 종교화가 많으며, 또한 뛰어난 소묘가로서도 알려졌다. 조수인 지그문트(Sigmund, 1475경~1540)는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