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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28구간(대관령-진고개)산행기
고속버스터미널에서 11시 차를 탈 생각으로 짐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에 내려 택시를 이용하면 바로 대관령 들머리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야간 산행에 나설 채비를 하면서 문득 예전과 퍽 달라진 내가 느껴졌다. 거리가 먼 강원도로 밤에 걷기 위해 가는 것이 퍽 특별한 일일 것이다. 처음엔 그런 일이 참으로 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어느 덧 대간길이 내가 살던 고향처럼 친근해진 까닭일 것 같았다.
이번 산행은 일행이 이미 마친 대관령-진고개 구간을 땜빵하고자 가는 길이다. 지난번 진고개 구룡령 구간을 함께 한 다음 이튼날 연이어 할 때 먼저 올라오느라 함께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사실 구간 거리만으로 보면 아침에 출발해서 해질 무렵까지 마칠 수도 있어서 이렇게 잠을 안자고 나설 것까지야 없다. 그런데도 굳이 나서야 하는 이유는 소황병산에서 국립공원 구간을 지키는 사람이 출근하기 전에 통과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 일행은 적발되지 않으려고 거꾸로 진고개에서 시작해 대관령으로 내려갔었다. 소황병산이 진고개 가까이 있어 조금 일찍 통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처럼 대관령에서 시작해 그 곳을 통과하려면 더 일찍 출발해야 될 것 같았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밤 11시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자마자 잠에 빠져 1시 30분 강릉에 도착할 때야 잠이 깨었다. 차가 서서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이른 시각이라 바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지 찜질방 같은데서 조금이라도 자다 가는 것이 좋을지 망설여졌다. 시간이 다소 애매해서 우선 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을 자다 다시 일어나 새로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 택시를 타고 대관령으로 출발했다.
택시가 도착하는 동안 눈을 부치려는데 기사가 이런 시간에 꼭 산에 가야만 하느냐며 궁금한 듯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가 나보다 더 걱정이 되는 듯 했다. 지난번 짙은 안개 쏟아지는 빗속에 당도했던 것에 비하면 조건이 매우 좋은 샘이지만 밤에 산행을 나서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런 일임에 틀임 없었다.
2시 30분 대관령에 도착했다. 우측에 예전의 고속도로 휴게소를 전용(轉用)해 쓰고 있는 대관령 모텔 휴게소가 보였다. 택시 기사가 기억을 더듬듯 하며 우측으로 이동해 차를 세웠다. 내려서 주위를 돌아보니 안내표지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대간 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들머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다 우측에서 차가 내려오고 있어 손을 들고 물어 보니 운전하시는 분이 조금 올라간 곳에 국사당 입구 표지가 있는데 그 곳 같다고 했다. 택시 기사가 그 곳까지 친절히 태워주었다. 그 곳에 이르니 길 입구에 평창의 명산 선자령 등산로 입구라는 표지판이 보여 안심이 되었다.
2시 40분 산행을 시작했다. 완만한 계단 길을 올라 2시 45분 삼거리 도착하니 선자령 4.7km 대관령 0.3km 표지가 보였다. 이정표에 선자령 정상 방향을 가르키는 좌측길로 걸어갔다. 느린 계단길을 걷다 잠시후 평평한 길을 걸었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걸으며” 라는 노래 가사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뒤에서는 대관령 국도를 지나는 차소리가 들렸다. 2시 52분 장애물을 지나 임도와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만났다.
완만한 길을 가다보니 2시 59분 통신소 건물이 보였다. 그 시설 철조망에 무수히 많은 리본이 메달려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대간 산행하는 나를 응원하려는 듯이 보였다. 울타리 좌측으로 걸어가며 보니 주변으로 완만하고 느린 산세가 보였다. 좌측에서 불빛이 보였다. 소리 없이 비추고 있는 가로등에서 뭔가 형광 불빛을 뿌리며 날아갔다. 새라면 소리가 들렸어야 하는데 혼불 나가듯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서 의아해 생각해보니 큰 나방인 것 같았다.
그 시설을 지나 뒤돌아보니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이 달밤에 그윽이 보였다. 그 모습이 대관령을 넘어갈 때 느끼던 이 곳에 대한 인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전에 옛길을 걸을 때도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옛 길들은 삶의 자취로서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다. 그리고 고을과 고을을 있는 길들은 험준함 가운데서도 살가움이 베어 있다. 그와 함께 언어로서의 옛 길 지명들은 그 고을의 삶터로서의 분위기가 베어잇을 때가 많다. rfo서 그를 통해 각 지역 특유의 인심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옛날에는 강원도 전체가 오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지나며 보니 모든 곳이 다 삶의 품이 되어 보였다. 이 곳으로 삶을 시작하고자 찾아드는 사람만 있으면 품에 안아서 베풀어 주었던 듯 했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소통을 하면서 길이 생겼을 것이다.
어느 지역에 대한 인상은 처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속도로가 난 것은 옛길의 형성에 비해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그것을 통해 강원도를 인식해옴으로써 다른 것을 더 생각지 못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지역을 이해하고 체험하기에는 걷기가 가장 좋을 것 같다. 걷기는 땅과의 만남이고 어느 고장의 체취는 땅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산지식이다. 그리고 땅은 나에게 감동의 다른 이름으로 의식되고 있다.
점차 앞으로 나아가니 능선이 펼쳐 보이는 능선이 큰 맥놀이를 하는 것처럼 같이 느껴졌다. 전에 고속버스를 타고 넘어가던 대관령의 기억은 굽이굽이 아슬아슬하게 급경사 길을 휘어 돌아가서 험난하게만 기억되어 있다. 고속버스를 타고 속초 등지로 갈 때 지난 대관령은 빠르게 그냥 지나가서 다른 목적지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 길은 단지 거리를 의식하는 과정일 뿐이어서 빨리 지날수록 좋다고 여겨지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걷지 않고 지나는 땅은 내가 느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날씨가 맑아서 별과 달이 밝게 보였다. 지난번 구간에서 대관령으로 올 때는 어두운 밤에 비가 오고 안개가 끼어 아무 것도 분간 할 수 없었는데 이번엔 밤인데도 길은 달빛만으로도 잘 분간 할 수 있어 보였다. 그리고 멀리 여러 개의 풍력 발전기도 보였다. 선자령 4.1km 남은 표지를 보며 좌로 접어들었다. 맑은 날씨에 여전히 지나온 능경봉이 보였다.
3시 11분 좌측 국사성황당 1.17km 표지가 보였다. 그 곳에서는 신라 후기 구산선문 개산조 중의 하나인 범일국사를 서당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여서당신은 범일이 장가들려 했다는 전설속의 정씨를 모셨다고 한다. 이처럼 이 곳은 이야기와 풍습이 어우러져 왔다. 그런데 이야기의 본질은 모셔진 대상이 어떤 신이냐가 아니라 빌고 소원하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민속 신앙은 삶의 애환과 함께 해 왔다. 국사당 같은 기도하는 곳은 삶이 척박할수록 많이 발견된다. 강릉은 동해 지역에서 가장 너른 삶터를 갖고 있는데, 그런 형국은 대간 마루금의 지형과 관계가 깊을 듯 하다. 즉 큰 지형이 강릉 방향에서 뚝 떨어지며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너른 고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 여건 때문인지 이 곳의 역사도 오래전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강릉 인근에는 굴산사지 등 옛 고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동해에 면해 어업과 농업이 섞여 있어 풍속도 다른 지역보다 다양한 편이다. 그래서 정말 입지 조건 속에서의 삶의 존재 의미를 느끼게 되는 곳이다. 분수를 알고 생산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며 살아가는 느낌이다.
전에는 강원도를 척박한 산세의 품에서 자족하며 살아오는 곳으로 느껴왔다. 그런데 강원도의 옛 고을가운데서도 강릉의 분위기는 조금 다르게 인식되어 있었다. 즉 지역 중심으로써 번창한 느낌이 떠오르는 지역으로 여겨왔다. 내가 그러한 인식을 갖는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살림집인 선교장이 있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 될 것 같았다. 선교장의 재산을 일구고 건축을 시작한 것은 첩살이를 하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된 여인이었다. 남편이 죽자 친정 가까이 와서 조금씩 돈을 벌어 사들인 후 후대로 가며 계속 번창하게 된. 그 집은 가족이 모두 모여 살도록 하면서 커다란 장원 구조의 가옥이 되었다.
강원도는 오지로서의 지리와 드문 넉넉함의 상반됨이 공존하는 곳이다. 함한 곳은 험한데로 기원하고 얻은 것은 얻은 대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에서 생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기원 의식은 오지일수록 크다. 그래서 깊은 고개에 성황당 등이 많이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데 오지뿐만 아니라 때로는 풍요한 곳에서 기원의식이 더 성할 수도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나는 것은 스스로의 힘만이 아니라 하늘의 도움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땅에서 얻은 것에 감사하고 다시 안정된 생산을 기원하며 비는 의식을 가져 왔다. 가까운 바다도 험하여 빌고 험지로서 주는 것에 감사해서 빌었다.
우측에 강릉 시대의 많은 불빛이 보였다. 낯이라면 바다가 보일 것 같았다. 3시 8분 포장도로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멀리 좌우측에 다시 도시 불빛이 보였다. 횡계나 진부일 것 같았다. 그리고 대간길은 정상부 시설을 지나 좌측능선을 지나갈 것 같았다. 700万 평창 우리의 자랑 이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며 하나로 똘똘 뭉쳐진 분위기이다. 그 때 아쉽게 탈락하자 평창 군민 뿐 아니라 국민 모두 아쉬움을 느꼈었다.
선자령 정상이 3.2km, 대관령 1.8km인 지점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3시 15분 약간 내리막길을 걸었다. 뉴밀레니엄 기념식수 표지가 보였다. 선자령 2.7km 오름 돌계단 길을 걸었다. 거기서도 멀리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이 보였다. 3시 25분 시설물이 있는 봉우리를 근처 전망대서 강릉 야경이 보였다. 그리고 앞에 크지않은 봉우리가 보였다.
앞에 보이던 새봉에 도착했다. 새봉은 선자령과 발왕산 사이의 봉우리로서 강릉과 동해가 조망되었다. 송신탑 부근에서 선자령 2.5km 표지가 보였다. 완만한 길만 걷다 봉우리에 오르니 기분이 새로워졌다. 다시 출발해 내림길을 걸었다. 나무사이로 지그재그 길이 보였다. 3시 30분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그리고 3시 35분 다시 완만한 안부에 도착했다. 길 옆 숲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벌레 소리가 들리고 별이 뒤척이듯 느껴졌다.
다시 에둘러가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앞쪽 능선 뒤로 다시 느린 능선이 펼쳐진 모습이 보였다. 3시 40분 완만한 안부를 지났다. 풍력발전기에 전등 불빛이 보였다.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갈대 길을 걸었다. 완만했다. 소슬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곁에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서 있었다. 프로펠러는 안돌고 소리만 났다. 오름길을 걷다보니 앞에 선자령 방향 풍력 발전기에 걸치듯 북두칠성이 보였다. 대관령 4.6km, 선자령 0.4km 거리의 지점에 닿았다. 너른 밭 같은 고지대였다. 다시 선자령 0.1km 남은 이정표를 보면서 숲 길로 올라갔다. 가까워지는 선자령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정점인 듯 했다.
4시 7분 선자령에 도착했다. 산봉우리인데 거개를 뜻하는 령(嶺)이라고 부르는 것이 걸맞지 않게 느껴졌다. 주위가 드넓게 트여 보여 마음도 가뿐하였다. 우측으로는 강릉 시내 불빛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휴식을 취하다 4시 11분 출발했다. 숲속 내림길을 걸어가는 동안 숲에서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가다보니 지나온 풍경이 보여 길을 잘 못 든 것을 알고 뒤돌아 정상석을 뒤로 돌아보며 내리막 길을 걸어 내려갔다.
앞 쪽으로도 풍력 발전기가 많이 보였다. 우측 벼랑 길을 접어들어 숲길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4시 32분 다시 임도로 들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시 선자령을 0.9km 지나고 곤신봉이 1.6km 남은 지점을 지났다. 그리고 다시 우측으로 오르막 산길을 걸어 4시 42분 다시 초지로 나온 다음 우측 길로 걸어갔다. 길 가에 리본이 별로 보이지 않는 곳을 자나가기도 했다. 4시 50분 우측 숲길을 가다 다시 초지길로 나와 소나무 한 그루에서 다시 저쪽에 떨어져 보이는 한그루 나무로 이어진 길로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우측에 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들어갔다.
내림길을 걸어가다 리본이 보이지 않아 되돌아 나와 초지 언저리 오름길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도 우측에 강릉 지역이 보였다. 길게 이어진 임도에서 좌측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측 숲 속에서 큰 짐승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공격을 당하라 염려되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랜턴 불빛을 비췄다. 그리고 이어진 임도를 걸었다.
5시 10분 곤신봉(1131m)에 도착하였다. 길옆에 표지석이 보였다. 계속해서 우측 숲 속에서 짐승 기척이 들려 왔다. 혹시 자극이 될까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지나갔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계속해서 풍력발전기가 보였다. 좌로 너르고 완만한 공간이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쌍둥이 별자리 같은 불빛을 내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5시 22분 숲길로 접어들면서 헤매게 될까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금새 다시 도로로 내려섰다. 뒤에서 다시 짐승 소리가 들렸다.
풍력 발전기가 인공적 풍경을 띠고 있었다. 기존 풍경을 다르게 변화시켜 놓았다. 5시 30분 선자령을 5.0km 지나온 표지가 보였다. 동해 전망대와 갈림길이다. 좌측으로 삼양목장이 3.6km로 되어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촬영소라고 되어 있었다. 리본이 없어 망설이다. 지도에 나타난 동해 전망대 쪽으로 갔다. 0.4km 거리였다. 5시 38분 셔틀버스 있는 곳에 닿았다. 그리고 조금 발길을 옮겨 동해 전망대(1140m)에 닿았다.
다시 리본 한 개가 보여 반가웠다. 풍력발전기 돌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 5시 40분 동해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하다 출발했다. 우측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졸려서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다 5시 53분 출발했다. 달빛이 교교해 랜턴을 꺼 보니 그래도 길이 휜이 보였다. 길을 가다보니 갑자기 우측에서 냉장고를 열 때처럼 냉기가 올라와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지나갔다. 그러나 길은 마치 고향산천 길을 걷는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6시 임도에서 다시 우측 초지길로 접어드는 동안 점차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구릉에 풍차처럼 생긴 풍력발전기가 나열되어 있었다. 조용하고 완만한 초지 풍경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초지의 구릉이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우측 풍력발전기 불빛은 점멸이 되고 있었다. 내림길을 걸어가다 보 풍력발전기 3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매봉이 보였다.
6시 10분 날이 밝았다. 랜턴을 껐다. 이제 걷는 부담이 적다. 표지판에 앞으로 500m 이후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매봉으로 다가서는 길이다. 완만한 숲길, 오름길을 걸었다. 잡목길에 거미줄이 얼굴에 닿았다. 6시 33분 출입금지 글씨와 줄을 쳐 놓은 곳을 지났다.
매봉 정상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걸어갔다. 우측 능선 너머로 해가 떠 올랐다. 계속해서 에둘러진 길을 걸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천문대가 있는 봉우리가 황병산일 것 같았다. 목장과 숲의 경계에 난 길 따라 갔다. 좌로 에둘러 이어진 길을 걸었다. 소황병산 방향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길을 빙 둘러 가고 있었다. 좌측에 지나온 풍령 발전기 모습이 계속 보였다.
6시 35분 매봉으로 생각한 봉우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상석은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리본을 확인하며 길을 걸었다. 6시 41분 다시 출입금지 글씨와 울타리 쳐 놓은 곳을 지났다. 6시 44분 내리막길을 걸었다. 길가에 노랑리본 한 개가 보였다. 6시 46분 잡목숲길을 걷다 다시 초지로 나왔다. 우측 철조망 언저리였다.
표지가 별로 없고 리본도 적어서 길을 가늠하기가 불안하였다. 거리도 알 수 없었다. 울타리 철기둥이 좌측에 서 있었다. 좌측 목장 건물 보이고 그 안에서 공장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우측 봉우리 너머로 해가 올라온 모습이 보였다. 다시 앞에 작은 능선이 보인다. 6시 59분 그 능선을 지나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시 안부를 지나 7시 10분 오르막 길을 걷다 휴식을 취하다 7시 15분 출발했다. 좌측 숲 너머로 간밤에 지나온 곳들이 보였다. 햇살을 받은 숲이 영롱했다. 나무들은 점차 단풍잎이 바래서 맑은 태양빛에 낙옆이 스르르 지고 있었다. 마치 왕호장룡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새삼 시간을 의식하게 했다. 길을 걷다 지난번 백복령서 만난 일행을 다시 만났다. 인솔자로 보이는 임익수씨가 앞에서 인사를 했다.
목적지를 가늠하지 못한 채 걷는 것이 다소 답답하였다. 지도로 보면 소 황병산은 좌측에 있는 것 같았다. 7시 24분 안부에서 오름 길 올랐다. 7시 31분 다시 완만한 내림길을 걸었다. 낙엽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때마다 감각적으로 찾아 걷게 되었다.
7시 38분 길 옆에 나란히 울타리를 쳐 놓은 곳을 지났다. 그리고 옆에는 출금과 벌금 부과 안내 표지가 있었다. 길로만 지나 숲 안으로는 들어서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 같았다. 관리를 하려면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길은 다녀야 흔적이 남을 것이다. 대간 길이 초지로 무성해져 찾을 수 없게 되면 헤메게 되고 새로 길을 내느라 더 망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만큼은 자연에게 양보합시다“ 라고 써 있었다. 인간이 닫지 않는 지대로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들렸다. 그것도 좋을 수 있지만 대간 길만은 다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울이 나왔다. 울타리 너머로 지나 길을 따라 갔다. 낙옆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아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능선에 오르니 올라오는 길을 알리는 리본이 보였다.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아까 개울을 건너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기분으로 길을 찾았어야 했을 것 같았다.
정상부에서 좌측으로 계속 오름길을 걸으며 곧 봉우리에 도착하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지 사이에 쳐 놓은 울타리 너머로 초지가 나타났다. 그 곳을 지나 우측으로 행해 걸어가니 통행을 막는 초소가 보였다. 직원이 왔는지 돌아보다 가까이 다가가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대관령쪽으로 진행하는 3명의 등산객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고 8시 5분 초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안쪽으로 울타리가 쳐 있었다. 그 울타리를 넘어 내림길에 접어들었다.
초소를 지나고부터 통상의 산길이 연속되는 곳에 접어들었다. 상쾌한 산길의 느낌이 느껴졌다. 산행시 길 찾는 부담, 스트레스도 크다. 그런데 산길에서는 헤메일 염려가 적다. 길을 찾기 어려울 때는 변형되어 있을 때이다. 그런 곳에서 걱정이 되어 산행의 본질이 흐려진다. 그런 걱정 없는 길을 갈 때는 본연의 산을 대하는 기분이 된다.
내려가다 시장하여 8시 20분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마주보이는 노인봉을 스케치 하다, 8시 50분 출발했다. 아직도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고 가까이서 개울 소리도 들린다. 9시 2분 안부 지나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맷돼지 표시도 낙엽에 덮혀 있었다. 긴 안부를 지났다. 뒤돌아보니 소황병산과 황병산이 지나올 때 인식과 달리 높게 보였다. 매우 완만한 길을 걸었다. 오름길도 완만했다. 낙엽이 벌써 바스라지고 있었다. 가로수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우측 허공에 매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9시 16분 내림길을 걸었다. 에둘러진 길이었다.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9시 20분 빨강 마가목 열매가 선명히 메달린 모습을 보며 지났다. 오름길 완만했으나 다소 경사가 급하게 느껴지는 곳도 있었다.
점차 해가 높이 솟아 산에 햇살이 가득해졌다. 단풍은 빛깔이 바래가고 있지만, 파란 하늘과, 바랜 나무닢에 반사된 햇살이 빛깔을 영롱하게 보이게 했다. 안부 근처에서 다시 오를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완만한 길이 계속 에둘러 이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이어지던 길이 오름길이 되었다. 노인 봉 전에 잇는 봉우리를 올랐다. 멀리 노인봉 정상에서 내려오는 일행이 보였다. 우측에 노인봉 대피소가 보였는데 그 곳에서 다시 적발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염려 되었다. 노인봉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은 모두 소금강 쪽으로 갔다. 대피소에서 소 황병산 쪽에는 출입금지 표시를 해 둠‘ 사람들은 그 글을 읽고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9시 26분 오름길을 걸었다. 9시 30분 봉우리 위로 노인봉 정상이 건너 보였다. 9시 34분 헬기장 같은 공터를 지났다. 노인봉에 많은 사람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9시 35분 다시 공터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안부를 지나 9시 37분 오름길이 나왔다. 벌써 나목이 된 풍경이 보였다. 따뜻한 햇살이 있어 봄 풍경처럼 되어 있다. 9시 40분 노인봉대피소(1297m)에 도착했다. 진고개가 3.7km 노인봉 0.3km 거리인 곳이다. 소금강 분소 9.3km 남은 표지가 보였다. 돌계단 길을 오르는 동안 날씨가 덥게 느껴졌다.
9시 47분 노인봉 정상(1338m)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주변 경치가 좋은 걸 보니 이 산을 목적지 삼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지나올 때까지 산세를 의식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지나온 황병산 산세도 좋아 보여 스케치를 했다. 사람들의 명랑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싸인 듯 너무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10시 15분 출발했다. 10시 22분 노인봉 3거리에 도착했다. 진고개가 3.6km 거리였다. 좌로 완만하게 에우러진 곳을 돌아 지나가니. 10시 48분 2.2km 남은 표지가 보였다.
10시 52분 진고개가 2.0km 남은 표지가 보였다. 그리고 10시 52분 진고개가 1.8km 남은 표지가보였다. 10시 57분 다시 진고개가 1.5km 남은 표지가 보였다. 노인봉을 2.4km 지나온 곳이다. 11시 8분 진고개가 1,2km 남은 표지가 보였다. 긴 계단 길에 접어드니 반대편에서 많은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을 정취를 느끼려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찾아 온 듯 했다. 11시 16분 진고개 0.9km, 노인봉 3.0km 지난 표지가 보였다. 앞에 개간해서 난 길 같았다. 앞쪽이 트여 바라보니 크게 에둘러 가는 길이 보였다. 우측으로는 깊은 계곡이 보였다. 맞은편에서 오던 아주머니가 “다와가능교” 하고 물었다. 이제 시작인 지점에서 그렇게 물으니 실소가 나왔다.
앞에 지난번 다녀간 동대산 보였다. 지난번에는 밤이어서 주변 풍광은 볼 수 없었던 곳이다. 뒤돌아본 노인봉의 단풍이 좋아 보였다. 계속개서 밀려오는 산행객들이 많았다. 문득 뒤돌아보니 사람들이 노인봉을 향해 들어서는 에둘러진 길이 기분 좋은 느낌을 자아냈다. 햇살과 파란 하늘, 단풍이 어우러진 좋은 광경이었다. 그 모습이 좋아 뒤돌아 멈춰서 스케치를 하고 내려갔다. 짐이 되어 있던 구간을 마치고 보니 홀가분한 기분이 느껴졌다.
11시 40분 진고개에 도착하니 너른 주차장에 차량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러나 서울로 갈 차로 갈아탈 수 있는 대중교통이 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운행되는 차가 있다 해도 간격이 디딜 것 같았다. 피곤해진 상태에서 마냥 기다린 다는 것 자체가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가는 차가 다가올 때마다 강릉이나 진부로 태워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그 곳으로 간다는 차가 없었다. 그러다 창가의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하니 안쪽 운전석의 남편에게 물어보더니 타라고 했다. 차에 타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니 강릉에 사시는 김보성씨라고 했다.
우측에 보이는 산이 동대산 맞느냐고 묻자 잘 모른다고 했다. 자기는 산행에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했다. 건축 설계를 하는 건축가라고 하니 갑자기 반색을 하면서 자기도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집을 짓는 조건 등을 이야기했다. 부부는 나의 말을 경청하면서 처음 탓을 때보다 더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진부에 닿았다. 내가 아무데나 내려달라고 하자 터미널 앞에 세워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강릉에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그분들과 작별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12시 20분 터미널에 들어서서 곧바로 차 시간을 물어보니 12시 35분에 동서울 터미널로 가는 좌석표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잘 맞아 기문이 편안해지고 마음에 여유도 생겨서 옆 상점으로 가 시원한 맥주를 한 켄을 마시고 버스에 탔다.
이번에도 차에 타자마자 곤히 잠이 들었다가 버스가 중부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에 당도하면서 잠이 깨었다. 비교적 이른 시각에 서울로 들어오면서 주변 풍경을 대하게 되었다. 2시 50분 동서울터미널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나오면서 무사히 다녀온데 대한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3시 20분 서울 디자인 올림픽 부스를 찾아가 방명록에 쓴 글들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곳을 돌아보다 뜻 밖에 충북 진천의 최동철 건축사를 만나 함께 내 부스로 가서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전체 전시를 돌아보는 사이 우연히 몇 분의 아는 사람을 더 만났다. 4시 40분 전시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지나온 백두대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11월 1일 예정된 산행에 한번만 더 나서면 우리 일행과 함께 해온 백두대간 종주도 막을 내리게 된다. 우리 일행은 11월1일과 2일 연속해서 한계령에서 진부령까지 마치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얽메인 느낌도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곧 끝나게 될 것 같았다. 이번에 시간 내기가 어려우면서도 억지로 다녀 온 것은 과정을 다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종주를 마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다음의 마지막 산행은 홀가분함보다 아쉬움 속에 걷게 될 것 같았다.
(081018)
첫댓글 11월이면 봇짐을 메고가다 벗어놓은 홀가분 그자체이시겠네유...전시부스를 보고 자신감을 느꼈습니다...앞으로 많은 성취이루시길...
전시장서 만나뵐 줄은 몰랐는데 반가웠습니다. 정말 마지막 산행에서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합니다. 제 작업을 갖고 제 자신이 뭐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부족함이 많은데 자신감으로 비춰졌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다만 열심히 하려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마지막 대간길에 참여는 하고 싶으나 선약이 있어서 아쉽네요. 막바지에라도 함께 산행했으면 했는데. 산을 사랑하는 님들의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무탈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시길 기원합니다.
마음으로 함께해주시니 반갑습니다. 대간길에 함께 한 시간들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데간 종주를 하는데 있어 무탈하게 마치는 것이 역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구간은 더 조심하며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