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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곤소곤願♧ 스크랩 극락강 이름의 유래
향토지기 추천 0 조회 19 09.03.27 23: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 여관 '극락원(極樂院)'서 유래 

 

극락교는 서구 신촌동과 광산구 벽진동 사이, 이른바 `공항 가는 길’에 걸려 있는 다리다.


활주로처럼 넓디넓은 무진로(일명 평동산단 진입로)가 개통되면서 그 비중이 줄긴 했다지만 지금도 광주와 송정리를 잇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란 사실에 토를 다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광주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개의 생활권으로 나뉘어왔다. 특히 광산지역 대부분은 지난 2000년 동안 광주가 아닌 나주에 속한 땅이었고, 광산에 편입된 건 겨우 57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광산 사람들에게 시내는 송정리를 의미했고, 광주는 마치 타골처럼 느껴져 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처럼 역사의 기억이 전혀 다른 사람들을 광주라는 하나의 도시공동체로 묶어준 것은 다름 아닌 이 다리였다.

▲ 광주 서구 신촌동과 광산구 벽진동 사이, 이른바 `공항 가는 길’에 걸린 극락교. ⓒ 안현주 기자 
 
이곳에 현재와 같은 다리가 놓인 것은 1970년대 말. 물론 이전에도 다리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 다리를 일러 `장암교’ 또는 `장애비다리’라고 불렀다. 장암이니 장애비이니 하는 말은 모두 이 다리 옆에 있던 장암이란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한편, 극락교란 이름을 곱씹어 보면 왠지 불교적인 색채가 완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의 기억으론 충남 공주의 마곡사 입구에도 같은 이름의 다리가 걸려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왜 하필 다리 이름이 극락이었을까?
 
조선시대까지 이 근처엔 극락원(極樂院)이란 여관이 있었다. 문평의 고막원처럼 큰 강을 마주한 나루터에 여관이 있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여관의 이름에 불교용어가 붙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장성 진원면에 있었던 선원(禪院), 석불로 유명한 장성 북이면 원덕리의 미륵원(彌勒院), 옛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길을 함께 떠났다가 친형인 정약전과 헤어졌다는 나주 대호동 율정마을의 연화원(蓮花院)이 모두 이런 예다.
 
따지고 보면, 극락원도 그런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우리네 여관들이 본디 불교 순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목적으로 세워진 데서 비롯된 흔적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모든 게 유교적인 것으로 바뀌었지만 이름에 대한 애착은 얼른 사라지지 않았다. 이 일대에 있던 조창(일종의 정부미 보관 창고)을 일러 `극락창’이라 한 것이 그렇다. 또 낙동강이 경북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洛陽)에서, 금강이 공주를 이르는 옛 말인 곰나루에서 생겨났듯 영산강을 일러 `극락강’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곳 여관과 나루에서 생겨난 말이란 점도 흥미롭다.
 
하지만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극락교나 나루의 위치는 일정치 않다. 조선후기에 김정호가 펴낸 《대동지지》엔 극락교(장암교)의 옛 이름을 `벽진’이라 했다. 벽진은 극락교 근처에 있던 마을이므로 옛 극락교의 위치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한말 때 그린 지형도에는 극락교에서 훨씬 하류쪽, 오늘날 영산강과 황룡강이 깔때기처럼 한 곳에 모이는 지점에 극락나루가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극락나루의 위치가 여러 번 바뀌었을 것이란 인상을 주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강줄기를 따라 나루를 놓았다 지웠다를 반복했던 것을 생각하면 되레 그 번잡함이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극락교 일대를 광주~송정리를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여겼을까? 오늘날 서해안을 잇는 국도 1호선은 목포를 출발해 나주 남평면과 광주를 거쳐 서울로 이어 달린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좀 달랐다. 서남해안에서 나주시내를 거쳐 바로 장성 황룡면으로 넘어가는 길이 여러모로 더 빠르고 쉬운 길, 일종의 간선도로였다. 그 결과, 나주와 장성을 잇는 선암나루(호남대 앞 황룡강가에 있었다)가 광주 지역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여울이었다. 이에 비하면 극락나루는 광주시내와 선암나루 사이를 이어주는 보조간선도로 쯤으로 여겨졌다.
 
이곳의 공간적 의미가 확 바뀐 것은 옛 황룡강의 수로를 대신해 호남선 철도가 놓이고 열차가 송정리를 통과한 뒤부터였다. 광주시내에서 이곳을 거쳐 송정리역에 이르는 길은 12km 남짓. 1910년대 아직 광주에 철도가 들어오기 전, 근거리 교통의 총아는 단연 자동차였고, 특히 광주의 현관 구실을 하게 된 송정리와 시내를 잇는 도로에 영구적인 철근 콘크리트 다리를 놓을 필요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다.
 
오늘도 예전과 다름없이 극락교 위로는 무수한 사람들이 넘나든다. 그 단조로운 모양새, 그리고 다리가 도로의 볼품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한 세태 탓에 다리를 건너는 정취는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극락교란 이름 때문일까? 이 다리를 가로질러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널 때마다 영락(榮樂)의 세계로 인도되는 듯한 느낌에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다리임에는 늘 변함이 없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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