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미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독립에 대한 희망이 더욱 밝아 오자 미주한인들은 미주한인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미국 국방공채를 매입하거나 한인경위대를 설립해 미국 국방을 후원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것은 미일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돕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하루빨리 앞당길 수 있다는 미주한인들의 절박한 희망이기도 했다. 이런 독립의 염원을 갖고 미주한인사회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미군에 자원 입대하기 시작했다. 1944년 12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북미 한인청년의 경우 195명이 입대하였다.
선생은 미일전쟁 이후 한인청년들의 미군 입대가 증가하고 또 자신의 아들도 1942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자 1943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결성했다. 그가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설립한 것은 미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인 청년들을 돕고 이들 가운데 특별히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함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 국방을 후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로 참전 자녀의 부모들과 그 친족들을 결속시켜 참전 한인청년들의 안전과 미군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재미한인들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드러내려 하였고 미국 정부로부터 임정승인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영문잡지 를 매월 손수 편집, 제작하여 미국의 정치, 종교, 지식계층에 배포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널리 알렸고 한인 2세 청년들에게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했다. 이처럼 그의 한족출정군인친족회의 설립은 전쟁 중인 미국사회에 한미간의 가교를 잇는 뜻 깊은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이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어 가자 1945년 4월 25일 50여개의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회의(1945.4.25∼6.26)가 개최되었다. 전쟁 종결을 앞두고 열린 대규모 국제대회를 대비해 중경의 임시정부와 미주한인들은 대회 참가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은 중경 임정의 훈령에 의지하여 7명의 임정대표단을 조직했는데 선생을 임정대표단의 교제부장과 재정검사원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미주의 한인들도 스스로 해외한족대표단을 조직하였다. 샌프란시스코회의를 둘러싸고 한인 대표가 둘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임정대표단과 해외한족대표단은 합동을 추진하지만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유포 등의 문제로 인해 공동활동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때문에 임정대표단이나 해외한족대표단 모두 대외선전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없었다. 임정대표단에 합류한 선생의 활동영역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임정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을 정리하면서, ‘비록 참가권을 얻지 못했으나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우리 한인의 형편을 널리 선전한 것만은 성공한 것으로 본다’고 그 결과를 자평했다(<북미시보>, 1945.7.15). 그리고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유포에 대해 한인들끼리 비방하는 것은 민족의 수치라 하여 이승만을 적극 변호하였고 향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선생이 광복직전 임정대표단에 합류해 이승만을 도와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한 일은 필생의 숙원인 한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마지막 헌신이었다.
한미협약 초안 작성 도중 세상을 떠나다
광복 후, 1949년 3월 14일 선생은 고국을 떠난 지 4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종군목사로서 조용히 활동하기를 희망했으나 이승만은 선생을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이라는 중책에 임명해 자신의 정치활동을 돕도록 했다. 이승만은 선생으로 하여금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해외 한인들을 격려하고 중남미의 각국을 비롯해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한 유엔의 48개국 우방국을 방문해 감사하는 친선외교를 부탁했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맡은 것 외에 선생은 한미 간에 새로운 협약이 필요함을 깨닫고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밤새도록 이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다 6월 20일 아침 갑자기 쓰러진 뒤 그 날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갑작스런 죽음은 한국정부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장례는 1949년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로 치러졌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러한 애도는 일생을 한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해 왔던 선생이 신생 대한민국정부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역량을 다 바친 삶에 대한 온 국민의 슬픔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