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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새31/영적갈증의 해소/요7:37~8:1/말씀: 조정민 목사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때로는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밤에 잠이 안와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니고, 사역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 <그래도 목마르다>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영적갈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보면서 "<영적갈증>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상태>를 체크하는 기회로 삼으세요.
요한복음 7장 37~38절을 보십시오.
"초막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나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마다
성경의 말씀대로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나올 것이다."(요 7:37~38)
여기를 보면, 가장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누구든지>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초청을 하십니다. 성경은 [초청장]이므로 <누구든지>초청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누구든지 초청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가려가며 초대하고, 아무나 초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지,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교회에 가면 "97%는 편하지 않다"는 연구 조사가 있어요.
교회는 누구든지 와야 하지만,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1:28~29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로 와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요15:28~29)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는 거예요.
오늘 예수님이 그렇게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초청을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누구든지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겉으로 보면 <목마를 이유가 없지만>, 속 마음을 들여다 보면, 목마른 사람이 많아요.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이 목마른 것은 이해하지만, 예수믿는 사람들도 <목마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어요.
초청하신 예수님은 무슨 말을 하십니까?
첫째로, <다 내게로 오라>고 했어요. 교회에 나오는데 예수님께는 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기도원 까지는 가는데, 예수님께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서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나를 떠나야, 예수님께 갈 수 있어요. 나를 포기해야 갈 수 있어요.
나를 <그 모양 그 대로> 들고서는 갈수 없어요.
예수님께 가려면 <나를 버리고, 나를 포기해야> 예수님께 갈 수 있어요.
나를 조금 바꾸어서 고쳐 쓰면 될 것 같아도,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 쓸모가 없어요. 나는 고쳐쓸 수 없는 존재예요.
우리는 부품 일부만 갈아 끼워서, 쓸 수 있는 그런게 아니예요.
우리는 모두를 버리고, <다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나를 <몽땅>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에게 갈 수 없어요. 내가 교회를 다녀도 소용이 없어요.
제 얘기로 간증하겠어요.
저는 MBC 9시 <뉴스 앵커>로 잘나가던 시절에 "술집에서 그동안 은혜를 받다가, 온누리교회에 와서, <속세의 인연을 모두 다 끊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제가 교회 다닌지 1년 6개월 쯤 됐을 때, 제 아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술을 끊고 당신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제가 이말을 듣고 너무나 놀랐어요. 제 생각에는 술집에 안가고, 주일마다 교회에 꼬박꼬박다녔는데,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니,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기도를 했어요. "아버지 이 말이 아버지의 음성입니까? 사탄의 소리입니까?"
"세상사람들은 나보고 다 달라졌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달라진게 없었어요.
껍데기는 변한 것 같은데, 실제로 알맹이는 변한게 없었어요.
여전히 <내 중심>이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 아니예요.
여전히 <내가 주인> 이지, <하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아니예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께 간게 아니지요.
나는 <예수님에게 갔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에게 간게 아니예요.
<모태 신앙>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같은 사람은 죄를 많이 졌으니까, 회개하면 확실히 회개하지만,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은 너무 오래 믿다가 보니까, 별로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나를 포기하고, 나를 떠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을 하지 못해요.
하기야 어려서 부터 예수를 믿었으니, 저 어린 나이에 무슨 죄가 있겠어요.
<2,000원 헌금하라>는데, 1,000원 떼 먹고 1,000원 만 낸 것이 무슨 죄가 되겠어요.
예수님은 <내게 와서, 먹고, 마시라>고 해요.
<신앙 생활>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생생활>이 되어야 해요.
<먹고 마시라>는 것은 일상샐활의 기본이예요. 우리의 삶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먹고 마시라>는 것은 음식이 내 안에 들어와서 영양분을 취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뜻이예요.
그렇게 먹고 마셔서, 내안으로 들어올 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와 에수님이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예수님이 <주어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셔야> 내가 받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내게 성령을 부어 줄 테니까 "<와서, 먹으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예수늘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성령을 주시지 않았던 것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요7:39)
예수님은 <나를 오라>고 말씀하신 것도 성령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예수가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내게 성령을 주기 위함 이요.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내게 성령을 주기 위함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40~43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말씀을 듣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말했습니다.<이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어떤 사람들은 <이분은 그리스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갈릴리에서 나온단 말인가? 성경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실 것이며, 다윗의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 서로 편이 갈리게 됐습니다.(요7:40~43)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달라요.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다. 그리스도다, 아니다"라고 말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아직은 영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7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53절의 결론은 "제각각 <집으로> 돌아갑니다."라는 결론입니다.
그분이 선지자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알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성령을 받아야,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것이고요.
그 전에는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그냥 각각 따로 따로 사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차에 태우고 다니는데>,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예수님을 <뒷 자리>에 태우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뒤에 그냥 계세요!>
<오늘 운전은 제가 하니까, 잠자코 계세요>라고 불평을 해요.
예수님은 <운전석>에 모셔놓고 핸들을 잡도록 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옆자리>에 모시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트렁크에 싣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다 주일 날이면 잠시 내려놓고, 예배드리고 나가면서 에배가 끝나면 다시 트렁크에 넣고 다녀요.
45절 이하를 보면, <영적 갈증>을 진단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를 잡아 오지 않았느냐?(요7:45)
<영적 갈증>을 진단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첫째로, 목이 마르면, <내 맘대로 합니다>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얘기하는 것은 끌고 오라는 <강제구인>의 방법입니다.
목이 마르면, 사람을 섬기지 못해요.
사랑이 식으면, 그 사람을 맘대로 부리게 돼요.
사랑이 있을 때는 섬기는 마음을 갖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섬기지 않아요.
여러분! 사람을 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사역도 사람을 통제하고, <내 뜻대로> 하면 안되요.
목마르면 <권력적인 행동>이 나오는데, 그건 아니예요.
"성질난다"고 아내를 때리면, 가정이 파탄납니다.
2. 두번째 싸인은 목이 마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46~47절을 보십시오. "경비병들이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경비병에게 말했어요. <너희도 미혹된 것 아니냐?>(요7:46~47)
경비병이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어요.
<영적 갈증>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말이 여론입니다. 그 여론을 들어야 합니다.
들어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데, 영적으로 목마르면 <남의 얘기를 듣지> 않습니다.
3. 세번째 싸인은 목이 마르면,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요>
48~49절을 보십시오. "유대관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 그를 믿는 사람이 있더냐? 율법도 모르는 이 군중들은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다(요7:48~49)
바리새인들은 <율법도 모른다>는 편견을 갖고 있어요.
그 당시 율법을 모르면, 짐승과 같이 취급하는 시대이므로 싹 무시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서, 막말을 했어요.
자기 생각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4. 네번째 싸인은 영적으로 목마르면, <편을 가릅니다>
50~52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 한사람으로 전에 예수를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율법에는 사람을 판결하기 전에, 먼저 행한 일을 알아보도록, 돼 있지 않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요7:50~52)
목마른 곳에 가면, 편을 갈라요.
당장 니고네모가 <우리 율법에는 사람을 판결하기 전에,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그가 한 일을 알아보도록 되어 있지 않소?> 라고 말하자, <그들은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라고 물으며, 편을 가릅니다.
선거 때가 되면, 서로 편을 가르고, 어느 쪽에든 서게 되는 강요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립>을 지키기가 아주 어려워요.
교회에서 <편을 가르면> 안 됩니다. <중립>을 표방하면, 양쪽에서 다 욕을 먹어요.
5. 다섯 번째 싸인은 <내가 안다는 함정에 빠지지 마세요>
<앎>이란 함정에 빠져 있어요. 전문가가 <앎의 함정>에 빠져 있으면, <재난>입니다.
<안다>는 것 때문에 알지 못하고, 본다는 것 때문에 보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영적 갈증>의 상태를 진단을 해 봅시다.
첫째, 내 맘대로 하지 마세요.
둘째,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셋째, 편견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넷째, 편을 가르지 마세요.
다섯 째, <내가 안다>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런 영적 갈등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론은 53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 5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요7:53)
우리가 예배가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올리브 산으로 올라 가도록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왜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나요?
그것은 아무도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다.
각자 집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각자 일터로 모시고 가십시오.
각자 삶의 자리로 예수님을 모시고 가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라는 예수님을
우리는 모시고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새32/원죄와 간음죄/요8:2~11/말씀:조정민 목사님
오늘 본문은 <간음한 여인>의 얘기로, 너무나 익숙한 본문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몇번씩 읽은 본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에 대한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주제는 <타락>에서 <구원>의 얘기입니다.
창세기 1~2장은 <창조>의 얘기이지만, 창세기 3장부터 바로 타락하는 <죄>의 얘기로 부터 시작됩니다. 성경 전체 <죄>로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결코 <죄>로 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상은 <죄>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죄를 가지고 장난하고, 돈을 벌기도 해요.
종교는 자칫 잘못 해석하면, <죄를 가지고 비지니스한다>고 오해할 수 도 있어요.
세상은 <죄>와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삼기도 해요.
그러나 우리는 죄와 불안으로부터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죄가 해결된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죄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런 <돌발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생의 뜻밖에 일어나는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모습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가시자, 많은 백성들이 예수께 나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끌고 와서 사람들 앞에 세우고(요8:2~3)
여기에 <이른아침>이란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고, <이른 새벽>에 우리같이 성전에 나왔습니다.
거기에도 우리같이 새벽기도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았다>고 성전안으로 난입을 했어요. 이건 <돌발상황>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배중에 몇몇 사람이 <도둑을 잡았다>고 침입해서 성전안으로 들어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도둑을 잡았으면, 경찰서로 가야지 "왜 성전 안으로 들어 옵니까?"
그건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하기위해 그런 것입니다.
악한 세력은 예배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이런 <원치않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합니까?
1. 첫째, 이런 갑작스런 상황을 그냥 받아 들이세요. 그냥 피하지 마세요.
인생의 답은 <고요함>에 있지 않고, 인생은 어차피 평안하지 않고, 풍파속을 헤쳐가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중에 이런 <돌발상황>을 자주 만났어요.
열 두해 동안 혈루병에 걸린 환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을 때에도 피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그냥 받아 들였고, 거지 소경, 바디메오가 길거리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함을 쳐도,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피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 거예요.
이런 돌발상황을 만나도 그냥 받아들이면, 그속에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여,
<거기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2. 둘째, 침묵하고 땅에 무엇인가를 썻어요.
이것은 <시간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보세요. 율법에서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들의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시험해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입니다.(요8:4~6)
이들은 감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았다"는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율법에는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니 율법대로 한다면, 정확하게 <남녀, 모두를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없고, 여인만 끌고 왔어요.
예수님은 이런 돌발상황에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 했어요.
처음에 예수님은 침묵했어요. 그리고 땅에 뭔가를 썼어요.
여러분! 무엇을 썼습니까? 그건 모르지요. 그것은 예수님만 아늘 것이지요.
3. 셋째, 그 상황을 <객관화 시켜야> 합니다.
그 상황을 냉정하게 관철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아침 일찍이 성전에서 예배를 보는데, 예배 방해 행위를 하는 상황인데,
첫째로, 예수님은 먼저 그 상황을 받아들였고
둘째로, 땅에 뭔가를 쓰셨고,
셋째로, 그 상황을 냉정히 관찰 하시고, 객관화 시켰어요.
우리 인생도 이런 상황이 자주 일어나요.
직접 너무 성급하게 반응하시지 마시고, 한 템포 늦춰서 반응하세요.
<삼자 대질하자>고 소리 높이지 말고, 참으세요.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럴 때는 늦게 반응하세요.
좀 들어보면, "그저 안좋은 그런 얘기예요." 들어보면, 별게 아닌 그저 그런 얘기예요.
그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도 <땅에 뭔가를 쓰십시오>. 그러면 해결됩니다.
7절을 보세요. "그들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요8:7)
그들이 계속 질문을 하자, 예수는 침묵을 깨시고, 예수님은 딱 한마디 했어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얘기 했어요.
예수님은 첫째, 모세의 율법도 존중했고,
둘째, 로마 법도 존중했어요.
셋째, <하지말라>고 부정적인 말이 아니고, <하라>는 긍정적인 얘기를 하셨어요.
여러분! 이것은 사람의 지혜가 이니고<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지혜>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자가 돌로 치라>고 얘기하니까, 상황이 반전 되었어요.
이건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낸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간음죄>입니까? <원초적인 원죄>입니까?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원죄>는 무엇입니까?
일차적인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들은 <대역죄>와 <반역죄>입니다.
그 [죄]로 부터 시작하여, 나머지는 <파생된 죄>이니까, 그건 2차적인 [죄]이지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사탄이 그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잘못된 메세지>가 전달 되었어요.
그것은 "정말 먹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고
거짓된 메세지를 부축였기 때문에 <타락된 죄>가 성립된 것이예요.
<타락>이 가장 큰 [죄] 입니다.
죄의 뿌리는 자기를 주장한 [죄] 예요.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 예요.
죄의 뿌리는 하나님보다 나를 높인 [죄] 예요.
하나님은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어기면 [죄]를 진 것이지요.
여기서 <죄 없는자>는 누구입니까?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대적한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여러분 <간음죄>가 큽니까? <살인죄>가 큽니까?
예수님은 본질적인 [죄]에 관해서 얘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죄인>인데, 누가 <간음죄를 지었다>고 [죄인]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죄 없는자가 돌로 쳐라>고 얘기할 때, "어느 누구도 <돌을 들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죄]는 <들킨죄>와 <안들킨 죄>가 있어요.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죄만 보이지만, 또 <드러나지 않는 죄>도 있어요.
우리들은 어찌보면,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가는 <곡예사>와 같아요.
걷다가 잘못하면 교도소 쪽으로 떨어지면 교도소 신세를 지는 것이고,
반대로 잘 걸은 사람은 교도소 밖으로 떨어져서 <죄짓지 않는 사람>처럼, 예배당에 와서 점잖케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제일 나이든 사람부터, 하나 둘 씩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예수와 거기 홀로 서 있던 여인만 남게 됐습니다."(요8:8~9)
이 <돌발적인 상황>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첫째, 문제를 먼저 받아 들이고,
둘째, 그 상황을 객관화 시키고,
셋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코너로 몰지 않았어요.
교회는 은혜스러워요.
교회는 나이든 사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사라질 때에는 먼저 사라 집니다.
라준석 목사님은 [흥] 해야하고, 나는 [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라준석 목사님은 [나]보다 먼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은 꼭 그대로 되지도 않아요.
인생의 묘미는 꼭 <나이순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도 있는 거예요.
이 모든 돌발상황의 결론은 10~11절에 나와요.
예수께서 일어나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그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제 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마라>(요8:10~11)
이 모든 <돌발상황>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한 여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여인은 당연히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습니다.
종교는 죄를 가지고 돈을 벌지만, 추악한 종교인들은 <불안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있어요.
그러나 신앙은 죄와 불안을 해결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윈이 목적이고, 사람을 살리는데 촛점을 맞추는 분이예요.
내가 너희에게 주려는 것은 <재앙>이 아니고, <평안>입니다.
우리를 부르는 것은<구원>이지 <심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손길>을 잡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돌발상황>을 미리 예견하시고, 지혜롭게 이 상황을 해결했어요.
우리도 이런 돌발상황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원의 드라마>를 우리에게도 서사시로 써 나갈 것 입니다.
당신은 왜 그 집에 시집를 가셨나요.? 왜 그런 남자를 만났나요.?
왜 그런 자녀를 나에게 맡기셨나요?
기도하다보면 그런 <하나님의 참뜻>을 알게됩니다.
이런 거창한 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많이 벌어져요.
예배 도중에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오늘 말씀을 적용해서 서로 이 문제를 나누어 보세요.
첫째, 그냥 그 상황을 받아 들이세요.
둘째, 뭔가 땅에 써야지요.
셋째, 그가 핸드폰을 꺼내서 끄면, 나도 핸드폰을 한번 보세요. 내것도 그냥 꺼내서 끄세요.
그리고 예배드리고 나가면서 "아까 당황스러우셨죠?. 실은 나도 끄지 않았는데, 당신 덕분에 나도 핸드폰을 껏어요. 고마워요."라고 인사해 보세요.
그분이 얼마나 고마워 하겠어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세요.
특새33/나는 누구의 자녀인가/요8:31~47/말씀:하용조목사
오늘의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사도행전 1장 1~5절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1:1~3절을 먼저보십시오.
"레오빌로님, 제가 먼저 쓴글에는 예수께서 일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 곧 예수께서 선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명령하신 후, 하늘로 들려 올라 가신 날까지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당하신 후에, 자신이 살아 계심을 여러가지 확실한 증거로 사도들에게 직접 보여 주셨고, 40일 동안 그들에게 나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1~3)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직접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있었어요.
<예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제자들과 혼란스러운 제자들에게, 개인적인 심방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일대 일>로 만나고, <소그룹 미팅>으로 만나고, 같이 음식도 먹고, 상처를 치유해 주기도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렇게 <중요한 일>들을 하셨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요. "그들과 함께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 들은대로, 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1: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선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시며 하신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1.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2. 둘째,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라>,
3. 셋째, 그러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겠다>고 말씀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했어요.
그러니까 40일을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10일을 다락방에서 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십일>이 되는 <오순절 날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예언했어요.
다락방은 120명 정도 들어가는 방이니까, 그리 큰 방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은 10일동안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베드로가 예언을 받았고, 설교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40일 기도하고, <+10일>을 더 기도하니까, 오십일 째되는 날에 성령이 임했어요.
<성령>을 받아야 능력이 생기고, <능력>을 받아야 사역을 하지요.
<능력>을 받아야 봉사도 하고,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능력을 받은 후에 방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어서, 다락방을 뛰쳐 나가서,
예수를 전도하기 시작했어요.
제 생각에, 교회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하는 사람>이예요.
이런 <영적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예요.
[일대일]은 <나와 너의 문제>이고, [순모임]은 나와 우리의 문제요.
[큐티]는 개인적인 일이고, [성경통독]은 교회 전체적인 일이예요.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 공동체는 서로 <나눔>을 갖고, 그렇게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월요일 본문의 내용은 요한복음 8장 31~3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게 된 유대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 말대로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성경은 아무 생각없이 읽을 때는 잘 보이지 않다가, 좀 자세히 읽으면,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 것 중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며,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어요.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이 세상에 태어 났는데, 사탄이 찾아와서 이브를 통해 아담에게 죄를 짓게 했어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죄>가 들어옴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쉽게 말하면 <아버지>가 바뀐 거예요.
그동안 아담의 주인은 하나님이었는데, 갑자기 죄를 지으며 <마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어요.
우리도 <내 주인이 하나님인데, 갑자기 마귀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신 분은 없으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지으면, 마귀가 내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을 잃고, 마귀가 주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후 부터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불안하게 되고, 우울하게 되고, 갈등이 오고, 죽음이 찾아 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사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탄의 시험을 이긴 사건> 이었어요.
여기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던지면, <서로 갈등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들은 평소에 배운 율법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나를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자주 바꿔요. 전통에 무게를 두지않고, 성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자꾸 바꿔요.
옛날부터 하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새롭게 일 <하기> 위해서, 자꾸 바꾸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다른 교회에 다니던 장로님들이 오게 되면, 무척 당황을 해요.
나는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해, 전통 방식을 무시하고, 교파를 초월하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제도를 만들며, 목회를 해요. 그러다 보니까, 충격을 받으시는 분들도 있어요.
예수님은 <신성>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해야만, 이해가 가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에 살기에 세상이 익숙해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얘기가 나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거예요.
또 "어떤 교인이 제일 힘드냐?"고 물으신다면, 항상 <변하지않고, 그냥 다니는사람>이예요.
이들은 은혜받는 자리는 나오지 않고, 예배가 끝날 때 쯤이면 그때 나타나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성격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안주하는 사람>들 이예요.
이런 사람중에서 어떤 사람은 <내성격, 알지?>라고 자기 성격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사람들은 설교시간에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해요.
그러다가 설교가 끝나면 눈뜨고, 시간만 보고 세월만 보내요.
이런 분들은 <교회에 10년을 다니면> 뭐해요. 변하지 않는데.....
33절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어느 누구의 종이 된 적도 없는데, <당신은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짓는 사람마다 <죄의종>이다. 종은 집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수 없지만, 이들은 영원히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것이다" (요8:33~36)
계속해서 예수님과 그들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유대 종교에 깊이 빠진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이해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돌맹이을 뒤집으면,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아요.
지렁이는 햇빛을 보면 싫어하니까, 꿈틀 거리느라고 난리가 나요.
이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방식>이 변해야 해요.
우리의 사고가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변해야 해요.
새는 껍데기를 스스로 깨고 알에서 나와야, <생명>이 시작되는 거예요.
알에서 튀어 나오지 않으면, <생명>이 태어날 수 없어요.
알의 껍데기가 강하면, 나올수 없어요.
여기서 "껍데기가 강하다"는 것은 <자아가 강하다>는 것과 같아요.
오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논쟁이 계속되고, 계속 서로 갈등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네 안에 있으면 진리를 줄 것이고, 진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데오로기의 해방이 아니고, <죄>에서 부터 해방입니다.
우리는 <삶의 노예>가 아니예요.
<쌍>하고 소리지르고, 싸우는 것은 <마귀의 종>이지요.
나는 의롭게 행동하고 싶으나, 나는 어쩔수 없이 마귀의 조종을 받는 종이 되었으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그걸 이해 못해요.
성경을 읽으면, 죄에서 자유를 찾고, <진리를 알 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된다>는 말이 이해가 가고,
성질이 유해지고, 부드러운 말로 바꿔서 말하게 되요.
성경을 자주 읽게 되면, 말이 약이 되고, 살리는 말을 해요.
나는 오늘 <빛>이 여러분에게 임하길 바라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진정한 자유>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특새34/예수님의 3가지 대답/요8:48~59/말씀:하용조목사님
우리는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더군다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어딘가로 떠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잘 떠나야하고, 바르게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지낸 <40일>이 지나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너는 예루살렘을 떠나지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도, <예수님이 기다리라>는 의미를 잘 몰랐어요.
그래도 예수님의 부탁이니까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 10일동안, <진심으로> 기도했더니,
<2가지 사건>이 일어 났어요.
첫째는, 예수님의 첫 공동체에 어두움의 세력들이 들어나게 되었어요.
나도 모르게 믿음 파괴하는 세력들과 교회를 분열 시키는 세력들이 기도하니까, 드러 났어요.
둘째는, 기도하면 성령이 임하셨어요.
50일 째 되는 오순절 날,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거기 앉아 있는 각 사람의 머리위에 불같이 임하셔서 <성령충만>을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40일 특새>를 끝내지만, 여러분들도 이자리를 떠나지 말고, 비록 구절명절이 온다해도, 10일동안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유대사람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며, 귀신들렸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옳지않소?"(요8:48)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2가지로 규정했어요.
하나는, 예수님은 <사기꾼>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지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비하하면서 <사기꾼> 취급을 했어요.
또 다른 것은, 예수님은 <정신병자>다. 예수님을 귀신들린 <정신병자>라고 매도했어요.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단>을 따져보면 <귀신>하고 연결되어 있어요.
<이단>은 능력도 행하고, 열정도 남보다 뚜렷해요.
새벽기도하면서 신천지 세력들이 <교회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이 나타났어요.
기도하면, 그런 불순세력들이 분리가 됩니다.
기도하면, 내 안에 위선과 거짓이 드러나고,
기도하면, 내 집안의 어두움의 세력들이 물러나요.
그런 것들이 제거가 되어야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은 서로 너무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취급하고,
정신병자로 몰고 갑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귀신들린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너희는 나를 멸시하는구나"(요8:49)
어두움의 세력들은 우리보다 더 열심이고, 더 정열적으로 일해요.
원래 <짝퉁>은 진짜보다도 더 진짜 같아요.
귀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귀신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귀신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에 <능력>을 잃어버려요.
예수님은 <사기꾼>이고, <정신병자>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에수님의 답변은 3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1.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은, 내가 귀신 들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결국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내 세웁니다.
촛점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돌려요.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내 세우지 않고, 하나님 이름을 내세웁니다.
마귀와 싸울 때에도 예수님 자신이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되기를...>이라고 말씀하면서 말씀을 선포했어요.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특징은, <이단>은 예수 안 믿는사람에게는 접근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만 접근해요.
두 번째 특징은 <돈>을 벌수있게 해 준다거나, <스켄들>을 조작해서 접근하고 연관시켜요.
2.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위해 영광을 구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심판자이시다.(요8:50)
예수님의 생애는 오해 투성이 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했어요.
3. 예수님의 세 번째 대답은,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했어요.
5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8:51)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번 강조한 것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강조하는 말씀이예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무슨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고,
예수님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말하니까 서로 맞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생각이 달라서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는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알아 들으니까, 서로 충돌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거듭난 사람>이예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신이 무익하니라."(요6:63)
이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니, 인간의 육체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영적인 생명>에 관한 말씀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알아 듣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사건이 생겨요.
사람은 자기의 치부는 숨길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야 해요.
암이 있으면, 그 곳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수술해서 도려내야 해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어두운 부분을 도려내야 살아요.
자기의 치부를 드러 내려 하니까,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감추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그 치부는 도려내야 살아요.
말은 <인격>이예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므로, 더러운 말하지 말고, 과장하지 마세요.
[팔복]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우선 마음이 깨끗하면, 정직한 말을 해요. 마음이 더러우면, 이중적인 말을해요.
기계가 아무리 좋아도 테이프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내 안에 들어있는 <옛 테이프>는 버려 버리고, <새 테이프>로 바꿔 끼워야 해요.
그 기계에는 <새 테이프>가 들어가야 <하나님 음악>이 흘러 나오는 거예요.
<말>이 달리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 성품이 달라지고, 비전이 달라져요.
우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여러분의 과거가 <황충이가 먹어 버렸다>고 해도, 그것을 잊어 버리고, <새 비전>을 가지세요.
하나님은 과거를 가지고 따지거나, 우리를 평가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자 삼을 때에도, 베드로의 과거나 현재를 보고 그를 선택하지 않았고,
베드로의 미래를 보고 제자로 삼은 거예요.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이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고 읽으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서 움직이게 되요.
<성령을 받으면> 그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을 알면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어느 날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예수님의 치욕적인 수치의 <십자가>를 보는 눈이 생기면,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걸 모르니까, 말씀을 들으며 졸고 있는 거예요.
진짜 변한 사람은 <인격>이 변해야 해요.
인격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변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 사람은 변한 것처럼, <쇼를 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를 기다려 주는지 아세요?
그것은 우리가 못 알아 들으니까, 우리가 알아 들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모른다>고 나무라지 않고,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려요.
언덕이 있는 비탈 길에 마차를 세우려면, 바퀴 밑에 돌로 받쳐놓아야, 미끄러지지 않아요.
그 마차가 버티고 있는 것을 <마차의 힘>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고, <막아논 돌> 때문이예요.
그 <돌>을 빼내면, 순식간에 언덕 밑으로 굴러서 쏜살같이 내려가요.
믿음에는 단계가 있어요. 첫번째 단계는 <어린아이의 단계>예요.
믿음의 첫번째 단계는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어린이는 뭘 모르니까, 지각이 없고, 스스로 할줄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안해 주면 삐지니까, 하나님도 금방 응답을 해 줘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 <그렇게 빨리 응답이 빨리 온다>고 좋아할게 없어요.
그것은 내가 마치 <어린 아이 단계의 신앙>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믿음이 성장하면, <응답이 없어도> 서운하게 생각을 하지 읺아요.
어릴적 단계는 우유와 미움만 먹지만, 믿음이 장성하면 딱딱한 음식도 먹게 되지요.
여러분! 무슨 일을 할 때에 내게 이익이 되면, <뭔가 잘못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나 내게 손해가 되면,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왜냐구요? 그게 <좁은 길> 이예요.
사람들은 <넓은 길>을 찾아요. 부자가 되기를 원해요. 성공을 하기를 원해요.
그러나 내가 직장을 다니다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면, 아내는 속상해 해요.
그렇게 "<직장을 그만 두는 일>이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들은 그럴 경우에 <흑백논리>만 내 세워요.
잘되면 하나님의 축복이고, 잘 안되면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이분법>으로 생각해요.
인생은 그런 <흑백논리> 대로만 되지 않아요.
고난이 내게 다가오면, 그 고난의 의미는 모르지만, 그 고난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기다리세요.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을 믿고 기다리세요.
내가 [할 일]은 <그냥 잘 견뎌 내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잘 견뎌 내다 보면>,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그 안에 있겠지!"라고 믿으세요.
그리고 <감사기도>를 하면서 기다리세요.
예수님이 오천명을 먹이실 때에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사기도>를 한 후에 기적을 행하셨어요.
신앙생황을 하면서 <자기 인격>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런 이유는 <이래뵈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써 품위를 지키세요.
그러니까 40일을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10일을 다락방에서 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십일>이 되는 <오순절 날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예언했어요.
<성령>을 받아야 능력이 생기고, <능력>을 받아야 사역을 하지요.
<능력>을 받아야 봉사도 하고,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그런 능력을 받은 후,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어서, 다락방을 뛰쳐 나가서,
예수를 전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그런 축복이 여러분에 항상 임하길 빕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요21;15~17/ 말씀:하용조 목사님
온누리 교회를 제가 25년간 목회를 했는데, 오늘 들려준 <칸타타>가 제일 좋았습니다.
<기쁨>은 내가 좋은 것이지만, 그 <기쁨의 가치>는 상대가 받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 출연한 사람들은 모두 보는 우리들 보다 더 기뻐했을 꺼예요.
사랑은 내가 사랑을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것입니다.
성경 (바이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일관된 메세지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이 두가지 기둥 위에 서 있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 기둥,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축에 존재하고 있는 단어가 <성령>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해 하려면,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면, <피>를 보는 눈이 <보혈>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들은 헌혈도 하고, 싸우다 보면 피를 흘리기도 하지만, 그때 나오는 <피>는 예수님의 <피>와 확실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 로마 군병은 다리를 꺽지 않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몸에서 <물>과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보는 순간에 그것이 <보통의 피>가 아니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보혈의 피>로 느껴 져야 합니다.
또 옆구리에서 나온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생수와 같은 성령>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는 누구나 쉽게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죽은자가 살아났다"는 <부활>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것은 아무 누구도 그런 <부활>을 경험했거나, 본 자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로마 군인들이 보았고, 제자들이 십자가 현장에서 보았어요.
그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에서 벗어나 <부활체의 몸>으로 다시 살아 나신 거예요.
우리는 똑똑해서 잘 아는 것 같아도 또 멍청하게 모르는게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 세상의 <시작>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 세상의 <끝>도 있고, <종말>도 있는 것입니다.
지구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끝이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털 깎는 양처럼> 잠잠히 침묵하면서 죽었어요.
그러나 <재림하는 예수님의 얼굴>은 털 깎는 양의 모습이 아니고,
햇볕과 같이 빛나는 <환한 모습으로>으로 다시 영광스런 <재림>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는 <어린양 예수>이지만, 재림하는 예수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카토릭은 <마리아의 품안에 있는 예수>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지구의 종말에 심판의 그날에 나타나는 예수는 <승리자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났을 때 누구도 예상한 사람은 없었고, 노아가 말했을 때에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홍수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심판했어요.
사람들은 전혀 상상하지 않았지만, 드디어 어느 날 갑자기 지하수가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서 샘물이 터지고, 폭포수와 같이 비가 쏟아 졌어요. 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을 상상도 못했지만, 그러나 그 심판은 이미 왔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그 중심에 계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은 부활하고 나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같이 있었어요.
그것은 <놀란 제자들을 먼저 위로하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을 잘 모르면서 3년을 따라 다녔어요.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도 그 <보혈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사랑이 많을수록 <더 외로운 법>이고, 소유가 많을수록 <더 고독해> 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의 왕들은 죽을 때에 자기 무덤으로 같이 끌고 들어 갔어요.
우리가 나누는 <성만찬의 피>는 포도주가 아니예요.
그 <피>는 "예수님의 보혈" 이예요.
그 <피>는 내 안 숨어있는 <귀신을 물러가게> 하고, 내 안에 <허무함을 없애주는> 거예요.
그 <피>는 나의 원죄를 없애 주는 <예수님의 보혈> 이예요.
그런 <보혈의 의미>를 모르니까, 어떤 사람은 "한잔 더 주세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을 아는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나의 가슴은 뛰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예수를 다 아는게 아니고, 그 <피>가 <보혈>로 보여야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모른다>고 세번을 부인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도 기쁘거나, 활기차지
못하고, 우울했어요.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죽으니까, 곧바로 옛날 직업으로 돌아 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이 왜 싸우나요?
서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니까, 싸우는 거지요.
우리들은 서로 결혼하고 살면서, 상대편의 <버릇을 고치려고> 시도해요.
제가 단정하기는 <절대로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고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만약에 고칠 것이 있으면, <당신이나 먼저 고치세요>
<사랑과 배신>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아서, 금방 달라질 수 있어요.
<사랑의 본질>은 이기적이므로, 자신만 위하게 되어 있어요.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느냐?>라고 신경질을 내지만, 어디 당신 말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게 하면, 소리지르는 당신만, 피곤해 지는 거예요.
진짜 사랑은 <내 맘대로>가 아니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배려해야> 하는 거예요.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해야 하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손해보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하세요.
제자들은 3년을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결국 <배신하는 사랑>을 한 거예요.
실제로 <부활>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엉성하게 예수님을 맞이 했어요.
<부활>이라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부활의 감동>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제자들을 회복시키고, 승천했어요.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고난을 받으면서 고난을 <고난>으로 느끼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서 뒤집어 쓰고 "참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첫번째 기도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어요.
우리들도 <사랑>을 하지만, <남친>도 사랑하고, <여친>도 사랑하지만, 인간은 <배반이 따라다니는 사랑>을 해요.
자기가 좋으면 사랑하고, 자기가 싫으면 서로 <배반>을 해요.
성도여러분,
남자나 여자나 "사랑한다"는 그 말에 속지 마세요. 결혼하고 3년만 살아 보세요.
그러면, 그 때 <그 말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지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면서 "베드로야,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어째서 나를 3번이나 배신했느냐?" 라고 묻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집사와 장로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배반한 때도 있어요.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의외의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예수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어린 양 떼를 먹여라"(요21:15)
또 한참을 참았다가 두번째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예,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쳐라"(요21:16)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서 3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근심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를 사랑 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요21:17)
이렇게 예수님은 3번에 걸쳐서 <네 어린 양 떼를 먹여라>, <네 양 떼를 쳐라>, <내 양 떼를 먹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요즘, 당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왜 베드로에게 또같은 질문을 3번이나 질문을 했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3번이나 배신했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용서예요. 사랑은 그냥 덮어 주는 거예요. 죄는 안보이게 덮어 주는 거예요.
진짜 사랑하는 것은 죄를 속여도 못 들은 척, 못본 척, 그것을 그냥 넘어 가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도마는 예수님을 의심했지만, <보지않고 믿는자는 복되도다> 라고 말씀했어요.
베드로는 전설에 의하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를 피해 도망가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 갔어요.
그의 직업을 버리고, 그 인생을 바꾸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왜 성공하려고 해요? 그것은 외로워서 그래요. 돈을 벌어도 외로워요.
왜 결혼하세요? 상대방을 위해 결혼하나요? 아니예요.
결국 <결혼은 나를 위해> 결혼하는 거예요.
성도여러분, 오늘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을 만나 보세요. 그분의 음성을 들으세요.
최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뭐예요?
1. 마태복음 28장 19~20절 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28:19~20)
2.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3.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것이다."(행1:8)
4. 요한 복음은 오늘 말씀인 "네 양 때를 먹이라 (21:16~17) 고 3번씩이나 강조했어요.
순장은 12명의 양을 먹이는 사람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을 지켜야 해요.
여러분이 근무하는 그 직장은 돈 버는 장소가 아니고, 그 직장에서 하나님이 부탁하신 <최후의 명령>을 이행하고, 실행하는 장소입니다.
온누리 교인들은 이런 <선교의 사명>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세요.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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