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28일 토요일]
『대동야승』 제13권 [權奸 김안로 용천담적기]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김안로(金安老) 찬(撰)
<김안로 自序>
내가 귀양살이한 이래로 과거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여 고치려고 스스로 뉘우치고 많이 조심을 하였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내가 둥근 구멍에 따라서 네모난 장부를 고치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부엌에 제사지낼 수는 없었다.
내 뜻으로는 본질을 지키며 충심을 다하여 험악한 일을 무릅쓰고 한 길로만 달리면서 거의 실낱 같은 충성을 바치려 하였으나 목을 움직여 말만하게 되면 남의 시기를 받게 되고 발을 들어 행동하기만 하면 함정에 빠져 당실(堂室 집안 식구)과 폐부(肺腑 일가 친척)가 모두 구기(鈎機)나 고가(鼓架)가 되었다.
한 사람이 제창하는 것이 마치 불을 부채질하는 것 같고 거기에 천 사람의 의심이 바람같이 호응하여 칼을 갈고 물을 끓이는 자가 용맹을 떨치며 나를 급히 밀어넣으려 하니, 어찌 나의 미치고 어리석은 성질이 힘을 돌아보고, 자신의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서 시대에 합당하지 못하였던 것을 요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구구한 내가 나라에 몸을 바친 죄가 만번 죽어도 속죄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임금께서 밝게 살펴주시고 당시의 여론이 특별히 용서하여 요행히 피 묻은 이빨에서 벗어나게 되어 형벌 받은 나머지 목숨을 잇게 되었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텁다.
죽을 뻔하다 남은 혼이 아직도 떨려서 진정되지 않는다. 외로운 몸뚱이가 떠돌아다니면서 엎치락뒤치락하여 습지와 더러운 것에서 발생하는 열병 등 백 가지 독을 받아 죽음과 이웃이 되어 있노라. 그러나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여 스스로 화를 밟으려고 결단하였으니, 비록 구렁텅에 빠져 죽더라도 또 후회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천지의 귀신들이 위에 벌려 있고 옆에 나열하여 있으니 나를 죄에 얽어매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횡액(橫厄)으로 당한 환난은 옛날 사람들도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조용히 조그마한 방을 쓸고 향을 피워 마음을 고요히 하면 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남은 생명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군자가 병폐로 생각하는 바라, 백번 귀양살이한 사람이 정신이 피로해서 성인의 글을 보아도 두어 줄을 읽지 못하고 마음이 심란하여 푸르고 붉은 색이 다르게 보여 문득 그 장(章)도 마치지 못하고 걷어 치워버렸다. 긴 밤과 기나긴 낮을 뜻 둘 곳이 없으면 때로 예전에 친구들이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농담하는 것에 대신하였다. 또한 새로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끝에 보충하여 번민을 덜고 적적함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비록 이런 것으로 마음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낮잠을 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패관소설(稗官小說)도 충분히 박식(博識)을 돕고 잃어버리거나 떨어진 것을 주워 모을 수 있어서 역사의 편집을 맡은 사람들이 반드시 참고하여야 할 것이 있으니 어찌 끝끝내 감추어 두어 사유물(私有物)로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아직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다만 책상 안에 두어서 나의 자손들로 하여금 오늘날의 나의 불우하고 고생스러운 상황을 알게 하여 자손들이 마땅히 힘쓰도록 할 뿐이다.” 하였다.
가정(嘉靖) 전몽(旃蒙) 작악(作噩), 즉 을유(乙酉 서기 1525년) 12월 상한(上澣)에 인성당(忍性堂)에서 적음.
<김시습>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이 어릴 때부터 이미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런데 번잡한 것을 벗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고 고쳤다.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법도 밖의 교우가 되어서 미친 듯이 시를 읊고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중이 되었으나 불법(佛法)은 받들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미친 중이라고 지목하였다.
저자 거리를 지나다가 혹은 응시(凝視)하느라 돌아갈 것도 잊어버리고, 한 곳에 잠자코 서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보며 여러 사람들이 보는 것도 꺼리지 않으니, 아이들이 욕하고 비웃으면서 기와나 자갈을 던져 쫓아버리기도 하였다.
자기의 종과 전택(田宅)을 남이 빼앗아 가는데도 내버려 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사람에게 돌려주기를 청하니 그 사람이 불응하자 설잠(雪岑) 자신이 곧 송사(訟事)를 하여 대면하여 싸우며 심문에 대답하는데 시끄럽기가 흡사 시정(市井)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끝내 변론해서, 승소하여 관가(官家) 문서가 다 이루어지자 품 안에 품고 문을 나와 하늘을 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끄집어내어 찢어 개천 속에 던져버렸다. 그가 남을 희롱하고 세속을 업수이 여김이 이와 같았다.
광묘(光廟 세조대왕(世祖大王))가 내전(內殿)에서 법회(法會)를 열 때, 설잠(雪岑) 또한 뽑혀 들어갔다가 갑자기 새벽에 도망쳐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일부러 길가 변소에 빠져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사미(沙彌 나이 어린 중) 한 사람이 목청이 청초하여 능히 상성(商聲)을 내에 길게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돌아서 슬프게 느껴졌다. 매번 달 밝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읊게 하고 번번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마시고 취하면 말하기를, “우리 영묘(英廟)를 뵐 수 없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모든 중들이 추대하여 신사(神師)라 하고 복종해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는데, 하루는 일제히 청하여 말하기를, “제자들이 대사(大師)님을 오랫동안 모셨는데 아직도 한 번 가르치시는 것도 아끼시니 대사님의 청정법안(淸淨法眼 고상한 사상)을 끝내 누구에게 전하려 하십니까. 이 중생들이 방향을 모르니 금비(金篦 금으로 된 긁어내는 칼)로 긁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더욱 간곡히 청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마.” 했다. 그래서 크게 법연(法筵)을 열고 설잠이 가사(袈裟)를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하자 중들이 에워싸고서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경청하였다.
설잠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야 한다.” 하니, 중들이 무엇에 쓸지 몰라서 소를 끌어다 뜰 밑에 매어두었다. 설잠이 또 말하기를, “꼴을 가져와서 소 뒤에 두라.” 하고는 크게 웃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니, 소는 짐승 가운데 가장 미련한 것이다. 무식한 사람을 속담에, ‘소 뒤에 꼴 둔 것이다.’라고 한다. 중들이 부끄러워서 모두 물러가고 말았다.
근대에 시 짓는 중들 중에서는 설잠이 으뜸이 되었다. 시가 정중하여 소순기(蔬荀氣)가 적었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글을 지어 석실(石室)에 감추어 두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은 대개 기이한 것을 우의법(寓意法)을 써서 기록하였는데, 《전등신화(剪燈新話 중국 명 나라 초년에 지어진 단편소설)》 등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한국고전종합DB]
* 김안로 金安老 (1481년(성종 12) ~ 1537년(중종 3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용천(龍泉)·퇴재(退齋).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6년(연산군 12)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11년 유운(柳雲)·이행(李荇)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직제학(直提學)·부제학·대사간 등을 거쳤으며 일시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몰락한 뒤 발탁되어 이조판서에 올랐다.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駙馬)가 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 영의정 남곤(南袞)·심정(沈貞), 대사간 이항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남곤이 죽자 1530년 유배 중이면서도 대사헌 김근사(金謹思)와 대사간 권예(權輗)를 움직여 심정의 탄핵에 성공하고,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서용되어 도총관(都摠管)·예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531년 다시 임용된 이후부터 동궁(東宮: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해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황사우(黃士佑) 등과 함께 정적(政敵)이나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다.
정광필(鄭光弼)·이언적(李彦迪)·나세찬(羅世纘)·이행(李荇)·최명창(崔命昌)·박소(朴紹) 등 많은 인물들이 이들에 의해 유배 또는 사사되었으며, 경빈 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미(李嵋) 등 종친도 죽음을 당했다. 또한 왕실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도 실각당하였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인(尹安仁)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되었다.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희락당고(希樂堂稿)』 등이 있다.
[daum.net백과사전]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김안로가 경기도로 유배 갔을 때인 1525년에 쓴 것이다.
모두 35가지의 이야기를 소개하였으나 따로 제목을 달지 않고 연속하여 서술하였고, 전개 순서도 일정한 기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전개하여 나갔다.
세종·문종·성종·연산군 등 군왕에 관한 이야기와 김시습(金時習)·성현(成俔)·허종(許琮) 등에 관한 인물담과 고금의 이름난 화가와 그림에 관한 이야기, 중국사신과 시를 주고받던 이야기 등의 김안로가 들은 이야기를 많이 옮겨 놓았다. 그리고 조수(潮水)의 출입과 지각의 변동에 관한 학설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등의 내용이 있어 여러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용천담적기』는 당시에 전승되던 야담을 기록한 문헌설화로서의 의의와 함께 자연과학 및 예술 전반에 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daum.net백과사전]
[팔경논주]
『용천담적기』는 45세인 1525년에 유배지인 경기도 풍덕(豊德)에서 지었다. 자서를 보면 고난의 시기를 만나 제법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관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1531년 해배된 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여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정적을 숙청함으로써 중종이 두려워할 정도로 권세를 누렸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 사사되었다. 결국 조선 최대의 權奸으로 지목되고,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역사에 낙인찍혔다.
중종 시대는 인종, 복성군, 중종 세 왕자 중에서 누가 미래 권력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신하들은 세 편으로 나누어 생사를 걸고 싸웠다. 김안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자인 인종을 옹호하였다. 그가 복성군과 경빈박씨를 제거하고 난 후에 문정왕후의 폐위를 기도한 이유는 세자인 인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김안로는 장원급제할 정도로 문재가 출중했다. 젊어서는 조광조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배를 겪으면서 권력의 중요성을 알고부터는 오로지 권세를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난신적자가 쓴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가 『대동야승』에 실릴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록 권간의 글이지만 당시의 풍습과 역사를 아는데 조금은 보탬이 되는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안로가 근본이 간신인 것을 自序의 구절과 행간에서도 볼 수 있지만, <김시습>에 관한 글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김시습은 천고의 역사에 남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김안로의 글에서는 좋은 면이나 칭찬보다는 못난 면, 실수와 괴벽을 주로 써놓았다. 김안로는 김시습을 재주는 있으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역작인 《금오신화 金鰲新話》 는 명나라의 《전등신화 剪燈新話》를 모방한 것이라 폄하하고 있다. 김시습의 충절과 정의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자기가 그렇지 못하다는 자격지심 때문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한국사에서 우뚝 선 봉우리이지만 희락당 김안로는 지하 깊숙이 음습한 오물웅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