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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개심사에 피어난 하얀색, 상아색, 분홍색 왕벚꽃은 이곳이 극락인지 속세인지 헷갈리게 한다. |
ⓒ 김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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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에게서 금쪽같은 5월 초순의 연휴를 맞아 어디로 떠나면 좋겠냐고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와 이런 저런 여행지 이야기를 하다가 퍼뜩 떠오른 곳이 서산의 개심사.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만발하는 왕벚꽃 혹은 겹벚꽃을 친구와 식구들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다. 서울에선 벌써 져버린 벚꽃이 서산에 아직도 피어있다구? 믿기 힘들다는 친구의 말에 그럼 직접 보여줄 테니 서산 개심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친구는 차를 타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서.
친구와 개심사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나의 이번 여행 최종 목적지는 드넓은 서산목장이다. 미국땅의 원래 주민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하루라도 평원의 한적한 곳을 거닐면서 마음을 침묵과 빛으로 채우지 않으면 갈증난 코요테와 같은 심정이 들었다고 한다. 내 몸속에도 그런 피가 흐르는지 연일 불어오는 뿌연 황사속에 5월의 눈부신 햇살과 푸르른 들판이 그립기만 했고, 그런 와중에 떠오른 곳이 소들이 풀을 뜯는 평화롭고 푸르른 서산 목장이었다.
서울 남부 버스 터미널에서 충남 서산시 해미행 버스에 애마 자전거를 싣고 떠났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도로는 온통 차들로 들어차 있다. 언제 서산에 도착할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한숨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차창으로 스며드는 오월의 햇살속에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버스는 서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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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들을 피부색별로 모아놓은 재미있는 닭장 - 해미면 오일장터 |
ⓒ 김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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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네, 해미면 오일장
동네 슈퍼가 버스 터미널 역할을 하는 서산시 해미면에 내리니 작은 동네에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왁자지껄하다. 가게에서 간식을 사먹으며 얘기하다보니 오늘이 오일장날이란다. 가는날이 장날이란 속담을 몸소 겪게 되다니 초장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내 외갓집이 충남 온양이라서 그런지 장터에서 들려오는 충청도 사투리가 정겹기만 하고, '다있슈'라고 쓰여 있는 어느 가게 간판을 발견하곤 안에 들어가면 최양락 아저씨가 앉아 있을 것 같아 풋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릴적 방학때 외갓집에 놀러 갔다가 자는 사이 오줌을 싸 바지에 적시면 뒤집어 쓰고 소금과 함께 이웃집을 돌았던 추억 속의 농기구 키를 파는 아저씨는 요즘 시골에서는 아직도 이걸 많이 쓴다며 이름이 치라고 알려 주신다. 흥겨운 뽕짝 노래가 흘러나오는 희망 사진관도 반갑고, 널따란 닭장에 황색·검은색·흰색의 피부색별로 모아놓은 닭파는 노점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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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 안에는 성곽을 따라 피어난 유채꽃길도 아름답고, 성곽길을 한바퀴 도는 개가 앉아있는 마차도 재미있다. |
ⓒ 김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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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면에는 해미읍성이라고 하는 조선시대 세종때 지은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수원화성처럼 아주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부담없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입장료는 따로 없으며 자전거와 함께 읍성에 들어서는 순간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분의 문지기 때문에 또 웃게 된다.
보통 공익근무요원등의 젊은 청년들이 서있는게 대부분인데 이곳은 나이드신 동네 주민들이 지키고 있다. 옛 병졸군복을 입고 긴 창을 든 50대의 아주머니 문지기는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바쁘고, 옆의 문지기 아저씨는 겸연쩍은지 까맣게 탄 얼굴이 동상처럼 굳어있다. 두 분에게 죄송한 얘기지만 그런 모습들이 참 귀여웠다.
해미읍성안에 들어서니 성곽길 아래로 샛노란 유채꽃이 산책로를 따라 아름답고 탐스럽게도 피어났다. 들판에 피어난 유채꽃도 예쁘지만 이렇게 돌담길따라 만발한 유채꽃은 더욱 돋보이고 성벽을 덜 삭막하게 해준다.
어린이날이라고 말이 끄는 마차가 아이들을 싣고 읍성을 한 바퀴 돌고 있다. "애들과 어르신은 공짜에유" 라고 정답게 말하는 마부 아저씨의 옆자리엔 애견 한 마리가 점잖게 앉아있다. 성곽길을 한바퀴 걸어다가다 뒤편의 소나무숲 사이 언덕위의 정자에 앉으니 해미읍성과 동네가 시원하게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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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향교 입구의 오래된 나무들이 참으로 신령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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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상아색, 분홍색의 왕겹벚꽃들...여기가 속세야, 극락이야!
해미읍성에서 나와 표지판을 따라 647번 국도를 타고 운산 방면의 개심사를 향해 달려간다. 2차선의 작은 국도 양 옆으로 푸름을 더해가는 논이 펼쳐져 있고 농부들이 따스한 봄볕 아래 밭을 돌보고 있다. 개심사를 향해 가는 것이 분명한 차량들외에 자전거 탄 사람은 나혼자 뿐이구나 했는데, 저 앞에서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이 반갑다.
자전거 짐받이에 길쭉한 농기구를 묶어 놓은 것을 보니 밭으로 출근하시나보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골풍경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해미향교' 입구의 수백년은 살았을 듯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너무도 신령스러워 한동안 멈춰 서서 넋을 놓고 쳐다보기도 했다. 지금껏 여행을 하면서 가장 흔히 만나는 것은 나무였고 기억과 인상에 가장 많이 남는 것도 나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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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벚꽃이라고도 하고 겹벚꽃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방문객은 부케같다고 하며 다들 감탄해 마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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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의 정체로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개심사에 들어간다. 보통 절은 산이 먼저 맞아주는데 개심사는 특이하게 큰 저수지가 맞이한다. 연두색과 녹색으로 치장한 주변 산들에 비춰 녹색이 된 저수지를 시원하게 감상하며 둥글게 돌아가다보니 어느새 길은 사람과 차들로 북적북적하다. 개심사 초입은 주차한 차들 말고도 각종 약초와 산나물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다. 서산시 운산면이라는 주소명에서 보듯 주변에 봉우리며 작은 산들이 많다보니 이렇게 다양한 풀들이 나오나보다.
당진에서 식구들은 차를 타고 본인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대단한 자전거 사랑 아저씨를 만났는데 개심사 초입 옆으로 절까지 올라가는 작은 아스팔트 찻길이 있다고 해 따라갔다. 입구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걸어 올라갈껄 하고 후회할만큼 구불구불 오르막길의 연속인 길이다. 절 마당에 감로수라고 쓰여 있는 살짝 단맛이 나는 약수물을 벌컥벌컥 마시니 올라오느라 지쳤던 다리에 힘이 좀 난다.
게다가 스님들이 피안앵(彼岸櫻, 고단한 현실의 강 저쪽에 존재한다는 안락한 고향, 즉 극락을 생각하게 하는 꽃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는 하얀색, 상아색, 분홍색의 화사한 왕벚꽃들이 반겨주니 여기가 속세인지 극락(피안)의 세계인지 황홀하기만 하다.
작고 아담한 절 마당 여기저기에서 방문객들의 탄성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저런 감동과 웃음을 주었던가. 나무들이 다시 보이고 무슨 위대한 위인보다 저 나무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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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면의 동산위 푸르른 목장은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하고, 구제역으로 보기 힘든 소들까지 만나니 더욱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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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3경의 진수,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상
나오기 싫었던 개심사를 겨우 빠져나와 다시 운산면을 향해가는 국도에 들어서면 드디어 바라던 푸르른 초원의 넓은 목장이 눈앞에 나타난다. 국도변으로 나있는 작은 마을들과 동산위의 목장들이 한폭의 그림이고,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작은 시골 버스는 낭만을 더해준다. 버스 정류장 팻말과 함께 '소중1리'라고 써 있는 마을 표지석을 만났다. 이렇게 정다운 이름을 가진 동네를 그냥 지나칠 순 없지.
동네 초입의 언덕길을 올라서니 운산면의 너른 목장이 발 밑으로 푸르게 펼쳐지고 내가 달려온 가느다란 S자 길이 목장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으로 나타난다. 아! 좋다, 산은 아니지만 야호~ 하고 크게 외치고 싶다. 푸른 동산위에 꾸물꾸물 뭔가 움직이는것 같더니 구제역 파동으로 보기 힘들었던 소들이 나타났다. 이상한 금속말을 타고 다가오는 내가 멀리서도 느껴지는지 음매~하고 소리를 치는데 그 목소리가 참 건강하고 우렁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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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입구 관광안내소의 문화해설사 아저씨를 닮았던 서산삼존마애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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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온 운산면 방향 국도변에서 유명한 문화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에 서산 3경중의 하나로 나오는 곳이다. 이렇게 만났는데 안가볼 수 없지 하고 힘을 내어 마애삼존불상이 있다는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을 향해 달려간다. 산 절벽에 깎아 만든 마애삼존불상 가는 길은 다행히 험준하지 않고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반겨줘 포근했다.
가야산 입구에 있는 관광 안내소의 나이 지긋한 아저씨 한 분이 자전거 탄 여행자가 반가운지 녹차나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말을 붙인다. 문화 관광 해설사인 아저씨에게서 새로 만들었다는 '서산 아라메길' 설명도 듣고, 마애삼존불상은 물론 인근의 수덕사와 개심사에 담긴 옛 이야기들을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들었다. 둥근 얼굴 윤곽하며 미소를 띤 입, 편안한 눈매등 여러모로 마애삼존불상을 닮은 분이었다.
편의점이 있는 운산면 시내로 들어와서 서울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곳으로 갔다. 버스 매표소를 겸한 차부슈퍼에서 추천하는 순댓국집에서 저녁밥을 배부르게 먹고 슈퍼 앞 그늘 진 나무 평상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지팡이를 들고 옆에 앉은 꼬부랑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해미에서 개심사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고 하자, "하이고, 조심해서 운동 댕겨~" 하신다. 저녁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는 동네 풍경이 할아버지의 말투처럼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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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면 해미읍성에서 개심사를 지나 서산목장과 마애삼존불상을 가는 서산 3경 자전거 여행 |
ⓒ N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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