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내 청춘이 언제였는지, 어떻게 지나갔는지…
나에게도 청춘이 있었는지조차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 곳 갈 수 있는 이 순간,
어쩌면 지금이 나의 청춘이 아닐까 하고요.
그러면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1948년, 가평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잣나무와 밤나무가 무성하던 그곳은
전쟁과 함께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1950년, 전쟁 속에서
마을 어르신들은 총살당했고,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끌려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업고
목숨을 걸고 트럭을 얻어 타고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방공호에 숨어 지내며
댑싸리 죽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시절이었습니다.
전쟁이 지나간 뒤,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마을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아이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등살에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서울로 재혼을 하셨습니다.
나는 뒷산에 올라
서울 쪽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울고 또 울었습니다.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서울로 달려갈 때면
그 모습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1년에 한두 번 다녀가셨습니다.
말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기차역까지 쫓아가
목 놓아 울곤 했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새아버지는 밤마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셨고,
나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빨래도 하고, 동생도 보고, 물도 길어 나르며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집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새아버지의 친구를 따라
아무 연고도 없이 철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아기도 돌보고 가게 일도 도우며 살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조용히 밥을 먹을 수 있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다시 불려가
가족을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교복 입은 동생들을 보며
골목에 숨어 울기도 했지만
차마 학교 가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스물한 살, 나는 시집을 갔습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탈출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알게 된 사실,
남편은 환자였습니다.
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정성을 다했고, 결국 완쾌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계속된 실패와 좌절 속에서
39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른다섯,
나는 아무것도 없이
두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일하며
아이들과 살아갈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작은아들이 병원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웃음을 잃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어떤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72세에 도서관 문학반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백 번을 고쳐 쓰며
내 삶을 다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방송 통신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결석 한 번 없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마쳤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필로 전국 대회에서 은상도 받았습니다.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지금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과거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이
지금의 공부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압니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다는 것을요.
왕복 5~6시간이 걸리는 등굣길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남 앞에서 말도 잘합니다.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청춘이라고.
지금의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픔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에게
작은 힘이 되는 사람으로
끝까지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남아있는 나의 청춘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