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대 문호 도스또옙스끼가 서거한 지도 벌써 백 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날이 가고 해가 거듭될수록 쉴새 없이 우리 면전에서 성장해 가며 수많은 문제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실, 동서 고금의 작가 치고 도스또옙스끼 만큼 난해한 평가와 새로운 문제점을 제시해주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흔히 도스또옙스끼를 위대한 선각자, 또는 예언자라고 부르는가 하면, 실존과 자학의 작가, 분열과 부조리의 작가라 부르기도 하고, 인간의 비밀과 곡절을 투시한 복음의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스또예브끼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평가는 그의 문학 세계의 난해성과 다면성, 불열적인 이원성, 강렬무비한 그의 독창적인 사상성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토록 기구한 운명 속에서도 러시아문학의 신화를 창조해 낸 도스또옙스끼는 일생을 괴롭혔던 불치의 간질병, 사형집행 직전의 극적인 특사, 기나긴 시베리아 유형생활, 그리고 끝없는 궁핍 속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었던 최대의 고난을 다 겪으면서도, 한쪽에서는 인간의 잔인성, 악마성을 규명하고, 또 한쪽에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선성과 신성을 투시한 작가였다.
이와 같이, 도스또 예스끼의 전작품을 통해서 그의 이상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상호 모순하는 2대 원리―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광명의 복음원리와 암흑의 악의 요소와의 대결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감한 예술가로서, 인간들 사이에서 완전하고도 고상한 이상의 실현을 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어떠한 죄인이라도 구제 불능한 철두철미한 악인은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인생에서의 이 2대 원리의 투쟁을 연구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인간을 이상으로 접근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선·악 두 요소의 대결은 이미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에서 시작하여,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미성년》을 거쳐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 와서 완성의 극치에 달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그의 최고작 《가라마조프네 형제들》을 고찰하기에 앞서, 우선 그의 기구한 운명이 점철된 생애를 통해 그의 문학적인 발전 도정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옙스끼는 1812년 10월 30일,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근무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마리인스까야 빈민 병원의 별관에서 출생했다. 그는 7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나중에 그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형 미하일과는 한 살 차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몰락한 지방 귀족 출신의 몰인정한 구두쇠였고, 그의 어머니는 선량하고 애정이 깊은 여자로 보수적인 상인계급 출신이었다.
1834년, 그의 아버지는 뚤라 현에 조그만 영지를 하나 샀고, 어머니와 아이들은 여름마다 이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전원 생활을 보냈다. 도스또옙스끼는 이때의 추억을 《농부 마레이》속에 잘 묘사하고 있다. 1837년, 도스또옙스끼의 어머니는 페결핵으로 사망했다.
도스또엡스끼는 그 해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보내져 이듬해 그곳 기숙생이 되었다. 뻬쩨르부르그의 생활은 고독하고 불행했지만, 그는 문학에 심취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 러시아에 밀려든 낭만주의 문학의 파도는 그의 젊은 마음을 셰익스피어, 쉴러, 호프만, 발자끄에 도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1839년 여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젊은 도스또옙스끼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농노를 학대했기 때문에 자기 농노들에게 무참히 타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스또옙스끼는 아버지의 면모를 나중에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속에서 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842년 21세 되던 해에 그는 소위로 임관했으나 곧 퇴역하고 문학과 빈궁 속에 온몸을 내맡겼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그의 유명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소설은 비평계의 거두 벨린스끼의 절찬을 받았고 도스또옙스끼는 익약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이 빛나는 성공에 뒤이어 그는 《주부》, 《백야》등 10여 편의 작품을 썼으나, 이 작품들은 그의 처녀작 만큼의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1849년 4월,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서어클인 〈뻬뜨라솁스끼 비밀결사〉에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뻬뜨로 빠블롭스끼 감옥에 8개월간 감금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집행 직전에 형장에서 황제의 특사를 받아 죽음을 모면했다. 이 당시의 가공할 만한 체험은 그의 《서간》, 《작가 일기》, 그리고 《백치》의 주인공 므이쉬낀을 통해 실감나게 전해지고 있다.
도스또옙스끼는 사형 대신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다시 4년간의 병졸생활의 판결을 받았다. 시베리아의 옴스끄 감옥에서의 4년간, 그는 〈죽음의 집〉에서 말할 수 없이 가혹한 시련과 속박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 이때 그가 어떤 체험을 하고 무엇을 관찰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성서를 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간질병 발작은 더둑더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친 후, 다시 쎄미파라친스끄 수비대로 호송되어, 여기서도 4년간의 병졸 생활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1857년 그는 마리야 이사예바라는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1858년, 도스또옙스끼는 10년만에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이때 뻬쩨르부르그는 농노해방 전야의 열광으로 들끓고 있었다. 도스또옙스끼는 다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을 발표했다. 특히《죽음의 집의 기록》은 사실적인 v폭로와 러시아 민중에 대한 신뢰로 거국적인 문단의 극찬을 받았다.
이 무렵 도스또옙스끼는 형 미하일과 함께 월간지 〈시대〉를 발간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문학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똘스또이나 뚜르게네프와 달리 도스또옙스끼는 문자 그대로 직업 작가였다. 쓴다는 것은 그의 나날의 일이었고 또한 생활의 근거이기도 했다. 그 당시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예술가는 인생에 대해서 쓰고 동시대의 사건에 호응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성한 창작욕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간질병 발작은 더욱 잦아졌다. 일단 발작이 일어나면 2,3일 병상에 눕지만. 이러한 발작은 매주, 혹은 며칠 건너 일어나곤 했다.
1862년 여름, 드스또옙스끼는 처음으로 유럽 여행에 올랐다. 그는 이때의 인상을 《겨울에 쓴 여름의 인상》속에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문명에 대한 작자의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1863년, 성공을 거듭하던 그의 잡지 〈시대〉가 갑자기 발행 정지를 당했다. 그 후 다시 〈세기〉라는 평론잡지를 발간했으나, 이미 옛날의 인기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이 무렵 도스또옙스끼는 새로운 열정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것은 아뽈리나야 수슬로바라는 젊은 처녀와의 연애 사건이었다. 42세으 도스또옙스끼가 20세의 경박한 미녀 수슬로바에게 미칠듯한 사랑을 느낀 것이다. 그는 이 처녀돠 함게 파리, 스위스, 로마로 두 번째의 외국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한 실연으로 끝났다. 도스또옙스끼 자신이 《지옥적》인 여자라고 말한 바 있는 오만한 수슬로바는 그 후 《도박자》의 뽈리나, 《악령》의 리자베따, 《백치》의 나스따샤 등 많은 등장인물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도박에 열중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의 나이 43세가 되는 1864년은 가공할 만한 액운의 해였다. 그의 아내 마리야가 오랜 벙고 끝에 사망하고, 두이어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미하일 형이 세상을 떠났다. 잡지〈세기〉도 막대한 부채 때문에 폐간의 운명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무서운 호나경 속에 채권자와 출판사으 강청에 시달리면서, 그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 《쥐와 벌》(1866), 《도박자》(1866) 등의 걸작을 완성했던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그 당시의 청년들을 매혹시키고 있던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항의였고,《쥐와 벌》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기주의적 합리주의 원리와 종교적· 기독교적 원리를 대립시킨 야심적인 최초의 실험소설이었다. 한편《도박자》는 출판사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속기사안나 스니뜨끼나에게 구술을 하여 26일만에 오나성한 소설이다. 그는 한 달 후 안나에게 구혼을 하고 그 이듬해인 1867년 결혼했다. 안나는 남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쳤다. 도스또옙스끼는 이때 비로소 가정의 안정을 되찾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던 것이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채권자들을 피해 외국으로 떠났다. 그는 왕성한 창작력을 되찾아 제 2의 장편 《백치》(1868)를 쓰고, 뒤이어 혁명가와 니힐리스트를 공격한 《악령》(1871∼72)을 완성했다.
1871년에서 1881년에 이르는 마지막 10년간은 도스또엡스끼의 생애 중에서도 가장 평온 무사한 시기였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얻고, 일류 작가로서의 명성을 러시아 방방곡곡에 떨쳤다. 그는 1876년부터 81년까지 개인 잡지 <작가 일기>를 발간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875년에는 장편 《미성년》을, 그리고 1880년에는 그의 필생의 대작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을 탈고했다.
1880년 도스또엡스끼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1880년, 6월 8일 그는 뿌쉬낀 기념비의 제막식에서 러시아의 위대한 운명과 러시아민족의 범인류적 사명을 역설하여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도스또옙스끼의 최후의 성공이었다. 1881년 1월 28일, 그는 폐동맥 파열이 악화되어, 유해는 고나을 따르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도스또옙스끼의 문학세계
도스또옙스끼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된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선과 악, 악덕과 자유의지, 인간과 신의 문제이다. 이러한 우주적인 이원성을 다룸에 있어서 도스또옙스끼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분신>의 개념이다.따라서 그의 대부분의 주인공은 각각 그 자신으 분신을 갖는다. (라스꼴리니꼬프 대 스비드리가일로프, 이반 까라마조프 대 스메르쟈꼬프 등).그리고 사건의 주역은 대부분의 경우 쌍생아 내지 대조적인 한 쌍의 인물이 연출한다.(라스꼴리니꼬프 대 쏘냐, 이반 대 조시마, 므이쉬낀 대 로고진 등).도스또옙스끼의 우주는 이른바 대생적인 이분된 우주이다. "왜 형님은 우리의 이원성을 이상하게 생각하십니까?"하고 그는 형에게 쓴다. "그것은 인간의 특징 중에서 가장 평범한 것입니다. 나의 이원성은 나의 일생을 통해 가장 큰 괴로움이기도 했거니와 가장 큰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신과 인간, 이론과 감정적 자아, 결백한 인간과 잔혹한 사회 ―도스또옙스끼의 모든 주인공의 비극은 바로 이 이원성에 있는 것이다.
도스또옙스끼의 심리적인 관념소설에는 특수한 구성 ―즉 탐정소설적인 구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으레 범죄사건이, 특히 살인죄가 구성상의 중심을 이룬다. 도스또옙스끼는 독자에게 충격을 주어 독자를 놀라게 하고 당화케 하기를 좋아하면서, 예기치 않는 탈선이나 극적 클라이맥스에 자기 자신을 잃고 붓을 휘둘렀다. 도스또옙스끼가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은 그의 극단적인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스또옙스끼는 60년대에 자기가 왜 범죄의 기록에 그토록 흥미를 느꼈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법정의 기록은 어떤 소설보다도 드릴이 풍부하다. 왜냐하면 예술이 손을 대기를 피하거나, 혹은 표면적으로만 손을 대지 않는 인간의 영혼의 암흑면에 빛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다음은 도스또옙스끼의 문학이 갖는 희소성이다. 여기에선 특히 대화와 독백이 크나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소설에서는 고백이 독립된 장으로 삽입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백치》의 이뽈리뜨의 고백). 특히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서는 주인공들의 내적 생활이 작자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제시되고 대화로 논의된다. 디 규칙의 예외는 원고와 피고의 진술뿐이다. 그러나 법정의 경우도 도스또옙스끼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의 모든 소설은 연속되는 많은 장면으로 분해할 수가 있고, 더욱이 그 개개의 부분은 하나의 극의 일막 일막에 해당한다. 그리고 개개의 장이 주요 인물의 등장, 퇴장, 새로운 사건 등으로 시작된다. 급격하고도 놀랄 만한 장면으 변화가 독자에게 서스펜스를 준다. 매순간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저 대화만이 이 사건의 무서운 속도를 늦추어 줄 뿐이다. 이와 같이 도스또옙스끼의 대화는 일상생활의 평범한 대화가 아니라, 언제나 극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생활의 평범한 대화가 아니라, 언제나 극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