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 유하]
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
뼈가 있는 연체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뼈 있는 물음 한마디
시적인 순간들로 빛나는 삶
수도권 지하철 4호선에는 ‘대야미’란 역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지나다 알게 된 그 역의 이름은 생소하면서도 신기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한자를 찾아보니 '大夜'라고 적혀 있더군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큰 밤의 맛'이라는 뜻입니다. 한자에 포함된 함축적인 뜻을 고려해도 지명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운 이름이었습니다.
서울지하철공사의 설명에 따르면, 역 주변은 산간 지역이라 대체로 논밭이 협소한데 그 사이에 큰 논이 하나 있어서 '한배미' 또는 '큰배미'라 불렸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더 찾아보니 배미는 '두렁으로 둘러싸인 논 하나하나의 구역'을 세는 단위였고, 그 배미를 한자로 적으면 '夜味(미)'가 되었죠. 즉, 대야미는 '커다란 논 한 구역'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설명을 들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긴 하는데 어쩐지 맥이 빠졌습니다. '밤에 즐기는 큰 재미', '긴 밤에 즐기는 재미', '긴 밤처럼 진한 맛' 정도의 의미를 기대했는데 전혀 다른 뜻이었으니까요. 밤과 재미, 또는 밤과 맛이 어울릴 때의 묘한 느낌. '야미'라는 발음의 느낌은 어쩐지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서울지하철공사의 친절한 설명은 그런 매력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어쩐지 제게 대야미는 '논 한 배미'보다 '밤이 새도록 불타는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대야미라는 말이 제가 과거에 경험했던 가장 떠들썩한 장면들을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보름달 아래서 술래잡기를 했던 일, 백열전구를 켜 놓은 마당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어른들 틈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취했던 기억, 무리 속에 끼어 집집마다 들러 인사를 하고 음식을 얻어먹던 풍경 등이 대야미라는 말을 통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하나의 단어일 뿐이지만 제게 대야미는 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음미할 만한 말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현실과는 다른 공간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노래하고 춤추던 날의 기쁨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맥신 그린(Maxine Greene) 교수는 '널리 깨어 있음'이야말로 예술 작품과의 미적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널리 깨어 있음’이란 현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취 상태에서 깨어나 스스로 더 나은 삶을 향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야미'라는 말은 저를 '널리 깨어 있게' 했으니 충분히 시적이고 예술적이었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도 시적인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20대 후반 무렵의 일입니다. 버스에서 대학 동기를 만났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 했죠. 여전히 대학 다닐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꾸밀 줄을 몰랐습니다. 화장을 했던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항상 바지에 점퍼 차림이었습니다.
말투와 표정도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느릿느릿한 말투를 좋아했습니다. 한 박자 느린 어눌한 말투에 약간 톤이 높으면서도 비음이 섞인 그윽한 목소리, 그 친구는 성격도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난 사람 가운데 누구한테도 미움을 받지 않거나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저는 반드시 그 친구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엉뚱한 면도 있었습니다.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평소엔 어눌하지만 가끔씩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그 친구와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고시 공부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성격도 말투도 여전했지만, 세월의 무게와 고시 공부로 인한 피로가 전보다 야윈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그 친구는 웃고 있었지만, 그가 겪었을 신산한 세월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시렸습니다.
정류장 세 개를 지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내리려 할 때 그 친구가 건넨 엉뚱한 인사말이 저를 또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안녕", "잘 가" 등의 흔한 말 대신 "잘해"라고 말했습니다. 헤어질 때 하는 얘기치곤 무척 낯선 그 말에 저는 답례를 건네지 못하고 빙그레 웃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그때 제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자세히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잘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말을 들으니 문득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잘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누군가와 헤어질 때 그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잘해, 잘하세요, 잘해 왔어요, 잘하던데요, 잘해야 해요, 잘할 거라 믿어요, 잘할 수 있죠, 잘할 거죠, 잘할 거면서, 그리고 잘할게요.
시인을 가르치는 사람들
그 친구의 한마디로 인해 저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저를 생각해 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저 역시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저를 '널리 깨어 있게' 만든 그 친구 역시 제게는 충분히 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시적인 것들은 가까이 있습니다. 기존 체계와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했던 다다이즘의 선구자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는 시의 특성을 '정신의 활동'에서 찾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시를 사물의 표현 수단으로서 분류하고자 한 것은 오류였다는 사실을 시급히 선언하자. 외형에 의해서 비로소 소설과 구별되는 시는 아무의 흥미도 끌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시에 대하여 '정신의 활동'으로서의 시라는 것을 대립시킨다. (중략) 지금은 비록 한 행의 시구를 쓰지 않더라도 시인이 될 수 있으며 거리에서나 시장의 구경거리에 있어서도, 즉 어디서나 시적인 특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물론 '정신의 활동'만을 두고 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시로서 존재하게 하는 시정신이 있으며, '시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정신이야말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앞 장에서 소개한 유하 시인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또한 다다이즘을 주장했던 시인들처럼 시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대조를 통해 시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징어와 낙지, 떡장수 어머니와 명필 아들, 회를 치는 할머니와 시인, 어스름의 해변가와 환한 조명 속의 안락의자, 할머니의 손놀림과 기술 등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때 대립항의 앞쪽에 있는 것은 모두 긍정의 대상입니다. 해변가에서 회를 치는 할머니와 연관된 그것들은 화자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 성찰로 나아가도록 유도합니다. 그것들이 시인인 화자에게 '시란 무엇인지'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회를 치는 할머니의 손놀림은 기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주로 '기술'로 번역되는 ‘technic’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입니다. 그리스에서 테크네는 창조적인 기술 전반을 의미하는 단어이자 예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남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경구에서 '예술'이 바로 테크네를 번역한 말입니다. 기술은 어떤 이론을 실제로 만드는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창조성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그와 달리 예술의 핵심은 상상력과 창조성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생활의 달인》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떠오릅니다. <생활의 달인》에 등장하는 달인들은 오랜 세월 노력한 끝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오른 인물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장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일은 때로 사소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물건에서는 숙련된 기술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정성, 완벽에 대한 고집,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감각 등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물건들은 명품이나 예술 작품 대우를 받으며, 장인은 예술가를 두루 이르는 말로도 쓰입니다. 화자가 보기에 죽도 할머니는 달인이자 장인이고, 그녀의 손놀림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시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어야 합니다. 환한 조명 아래 안락의자에 앉아서 글쓰기 기술로 만들어 내는 것을 시라고 부르기는 머쓱합니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재료에 “자로 잰 듯” 썰어 내는 손놀림이 가미되어야만 “뼈 있는 물음”을 던지는 시가 탄생합니다. 시인으로 하여금 그런 사실을 깨닫게 했으니, 죽도 할머니 역시 시인입니다. 참으로 시적인 사람입니다.
널리 깨어 있는 법
황지우 시인의 「시에게」라는 작품에도 시인에게 시를 가르쳐 주는 시적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화자는 자신의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피가 돌고 끓는 시란 아마도 감정의 극한에서 터져 나오는 시일 것입니다. 그런 시는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에 나오는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시와 비슷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뛰어난 손놀림이 가미되어야만 온전한 시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시가 사람을 해치거나 재료를 난도질할 수도 있습니다. 서투른 요리사가 연장을 다루다 상처를 입거나 재료를 망쳐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화자가 바라는 것은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시입니다. 다시 요리에 비유하자면, 여러 재료의 독특한 맛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한데 모아 또 다른 맛을 만들어 낸 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고민에 빠진 화자에게 답을 가르쳐 준 것은 동백 숲이 장관인 골짜기에서 목격한 평범한 장면입니다. 동백꽃은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며 지지 않고 어느 순간 꽃 전체가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동백꽃이 떨어진 풍경은 붉은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떨어진 동백꽃을 주우러 만삭인 여자가 걸어갑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뱃속에 있는 생명을 보듬듯 동백꽃을 주워 들었을 것입니다.
떨어진 동백꽃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 소중하게 보듬는 여자 후배의 모습에서 화자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시를 발견합니다. 그 후배가 집어 든 동백꽃은 곧 죽도 할머니가 회를 친 오징어와 같습니다. 그것은 모두 대상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손놀림에 의해 완성된 것들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시가 바로 ’온전한 시‘이고, 그럴 때 비로소 시는 기술을 넘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오탁번 시인의 「시인」이란 작품에도 시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아이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가을이 되면 감이 빨갛게 익는다고 가르쳐 주자, 아이는 엄마에게 달님이 빨갛게 익었다고 가르쳐 줍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과학적 진실을 가르쳐 주지만, 아이는 엄마에게 은유와 시적 진실을 가르쳐 줍니다. 다시 엄마가 아이에게 똑바른 걸음걸이를 가르쳐 주자, 아이는 엄마에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걸음걸이를 가르쳐 줍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지만, 아이는 엄마에게 ’널리 깨어 있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적인 것들이 무엇인지,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 따르자면 우리가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시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시적인 것으로 빛나지는 않습니다. 평범한 것을 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시적인 것이 탄생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이처럼 대상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달 또한 익을 수 있고, 개미 또한 우리처럼 소중한 생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널리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결국 우리 삶을 시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은 시인이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못 되면 또 어떻습니까. 시인 엄마나 시인 친구라도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시적인 것들로 빛날 것입니다.
소래섭 교수와 함께 읽는 일상 속 이야기
『우리 앞에 시적인 순간』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