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인생은 모두 힘들다
쇼펜하우어는 일평생 열한 권의 책을 썼다. 그중 생전에 출판된 저서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의지와 표상을 세계’를 포함해서 여덟 권이 전부라고 한다. 그 외에는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만 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남겼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글에 대해 편저자는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롯해서 미간행 원고와 편지, 일기 등을 토대로 새롭게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글은 수필집처럼 구성해 놓아 천천히 읽으면서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독자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각 글의 꼬리에 출처를 달아놓지 않아 그 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 배려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한다면 글은 꽤 가슴을 파고든다.
어떻든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수많은 글 중에 쇼펜하우어를 잘 드러내는데 공을 들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쇼펜하우어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글을 전부 내 것으로 주워 담기에는 역부족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쇼펜하우어, 출처 : 다음 이미지
내가 이 책을 집어들은 것은 순전히 책 제목 탓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것은 저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모두 다 힘들다. 그저 힘듦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어떻든 이 책 행간에 담긴 쇼펜하우어를 전부 드러내는 것은 역부족인지라 특히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을 중심으로 더듬어 보았다.
나. 쇼펜하우어의 단상들 : 나의 존재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를 중심으로 나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비망록처럼 엮여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꺼번에 읽기보다는 조금씩 그날의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 음미하며 읽을 때 제 맛이 난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책을 펼쳐든 날의 기분을 조금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글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솔직히 말해 이 책을 관통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역불급이기 때문이다. 읽는 중에도 자주 행간을 놓치기도 했으니 더욱 그렇다.
책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출발로 한다. 자칫 자만으로 비추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구절 하나하나는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그는 세상에 대해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당당해 보인다. 나는 그런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의 문제고, 내가 존재한다는 건 오직 나만의 문제다. 나는 이 세상에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를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실 누구나 죽고 나면 그저 한 줌의 재일뿐이다. 혹자는 영혼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옛 조상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저고리를 흔들며 그 있을지도 모르는 영혼은 떠나보냈다. 거기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떠나간 영혼이 지금의 나를 기억할 리도 없다. 완전히 다른 개체이고 생명인 것이다. 혹시 뭔가 아쉬움이 있다면 그건 자식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산자들의 몫일 것이다.
다. 쇼펜하우어의 단상들 : 우울과 열광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진단 결과 ‘우울’과 ‘열광’을 들추어냈다. 당시에는 기계 공업의 발달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지만 터무니없는 임금으로 인해 삶은 피폐해졌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지쳤을 것이고, 우울증이 만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롭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정신질환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바로 우울이다. 그리고 우울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의 발달 때문이라고 한다. 기술의 발달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였던 모양이다.
우울증은 판단력을 흐리게 할 것인바, 이는 하나의 불감증이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서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한다“는 망령에 사로 집히는 것이다. 우울은 분노를 불러오지만, 우울의 끝에서 열광이 태어나는 것이다.
열광은 기존의 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불씨가 지속된다. 오늘을 있게 한 세계관이 마치 거짓인 양, 모두를 위해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열광이 산불처럼 번지다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꺼져버린다.
이유 없이 열기가 사그라지고, 또 별 것도 아닌 사건에 광적인 집착이 일순간에 집중되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등, 우울과 열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마치 오늘의 한국 정치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라. 쇼펜하우어의 단상들 : 낙원에 대한 환상
절망은 우리가 이 진흙탕 같은 구차한 세계에서 빠져나와도 더렵혀지니 시간은 깨끗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세계외(世界外)’의 절대적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창조한 절대자를 의지하려고 한다. 이것은 욕망에서 비롯된 환상이다.
우리는 낙원을 그리워한다는 이유로 낙원의 실체를 믿고 싶어 하는데, 그리움은 떠나온 곳에 대한, 떠나간 자들에 대한 향수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움은 욕망의 절정으로 인간의 망상은 때로는 체험하지 못한 미지에 구애받을 때가 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실재하는 낙원을 거닐어본 적이 없음에도 어딘가에(혹은 죽은 뒤에라도)낙원이 실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에 기대어 이 비참한 시간과 맞서 싸워보지만, 막상 기대했던 낙원의 구성 요소들이 모두 채워진 환경이 주어지면 인간은 또 다른 요구조건을 내세워 그곳을 피로 물든 전쟁터로 변모시키고 새롭게 낙원을 개척하려 한다.
마. 쇼펜하우어의 단상들 : 행복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에 매달리는 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지혜의 시작이다. 인생의 지혜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 중용의 미덕이다.
행복이 인간의 목표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살아야 하는데, 잘사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의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잘산다는 말은 인간성이 원활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성이야말로 인간 행복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인간성이란 인간다운 기능이다. 인간의 기능은 생식, 감각, 사유로 나뉜다. 생식은 식물도 하는 일이며, 감각은 동물에게도 있다. 하지만 사유는 오직 인간에게만 내재된 기능이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사유를 본질로 삼았을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따라서 행복은 사유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선한 삶이고, 삶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런가 하면 나보다 비참한 자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보았다.
사. 쇼펜하우어의 단상들 : 죽음
“죽음이 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 말은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후회하는 쇼펜하우어의 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태어났으면 빨리 죽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인생의 가장 애처로운 시간은 먼 훗날, 관속에 누울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을 때, 일생을 헛된 욕망을 좇느라 세월을 탕진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는 한 번 더 시간이 주어지기를 가만히 소망해보는 때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려면 마흔 살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른여섯을 경계로 삼아 서른여섯 이전을 청춘의 시간으로, 그 시기를 넘어서면 노화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생명은 서른여섯 살까지는 시간의 이자로 살아가고, 서른여섯 이후부터는 시간 그 자체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젊었을 땐 적자가 발생해도 미미해 보인다. 어차피 이자일 뿐임으로 지출이 과해도 걱정되지 않는다,”
“시간이 베푼 이자가 중단되고 원금을 사용하는 때가 오면 사라진 시간의 이자가 아쉽게 다가온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라는 생명의 원금은 계속 빠져나간다. 나이가 들어 젊은 시절보다 욕심내는 것은 시간을 상실했다는, 생명이라는 원금이 얼마 안 남았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아. 쇼펜하우어의 단상들 : 의지의 상실
의지를 상실한 인간, 다시 말해 성숙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은 축적된 의지를 허비하며 하루살이처럼 연명한다. 그 결과 의지의 활력은 세월이 흐를수록 부족해지고, 심신의 불안정으로 미풍에도 인생은 부표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사소한 일을 목전에 두었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조차 사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소해지는 원인이다. 하찮은 것들은 비뚤어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자신을 비뚤어지게 만드는 추진력이다. 비록 하찮은 실천이라도 그 마음만큼은 존귀하다
부처는 하다못해 밥을 지을 때에도 정성을 다 쏟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가 부처에게 물었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무슨 수로 그 모든 일에 열심을 다 하단 말입니까?” 그러자 부처는 “사람으로 태어난 나의 처지가 미천하여 천한 일도 마다할 수 없기에 마다하지 않는 것뿐이요.” 라고 대답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부처도 그리하였거늘 보통 사람에 불과한 우리의 삶이 경중을 따져 의지도 경중을 나눈다는 것은 마음의 병, 다시 말해 의지가 병들었다는 것이 된다.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것은 말이 좋아 비축이지 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언뜻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잠언록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떻든 글들을 일기처럼 앞뒤의 이야기가 어떤 연관을 자기고 있지는 않다. 작은 글들은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드러내고 있어 삶을 되돌아보기에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