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음을 만나다
관음(觀音)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수행자들은 소리법문을 득하면 그 즉시 깨침이 온다고 믿고 있다. 더구나 관음을 주창하는 단체들의 수장까지 본인은 물론 5대조 조상까지 일세해탈 할 것임을 무조건 약속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깨달음; ‘깨달음이란 자아(自我)의 형태로 제한된 의식이, 비자아적(非自我)적인 자기 자신으로 돌입하는 것이며, 자아가 불성(佛性)으로 교체되는 것이다’라고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정신의학분야의 개척자인 칼 융(Carl Gustav Jung)은 깨침과 선(禪)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또 그는 이어 설명하기를, ‘선(禪)에서의 깨달음이란, 모든 종류의 상 (相)을 비우는 동시에 모든 의식의 전제를 배제한 상태에서 무의식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의 화답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소리법문을 구체적으로나 혹은 어떤 부분을 확실하게 언급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경전(經典) 상으로나 혹은 필자의 경험적으로나 명백한 사실이며, 그 깨침의 과정을 선(禪)의 개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dhyana를 음역한 선나(禪那)의 줄인 말로 안으로 혼란치 아니한 것을 정(定) 또는 삼매(三昧)라 하고, 밖으로는 ‘상(相)을 여읨’과 동시에 ‘흔들림이 없는 우리의 품성’을 깨닫는 것을 덧붙인다.
‘흔들림이 없는 우리의 품성’이란 대자연의 본성인, 불성(佛性)과 연결된 순수의식(自性)을 의미한다. 깨침이란 우리의 자성(自性)과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깨달아 성불(成佛)함을 뜻한다. 성불이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불과(佛果)를 얻는 것으로 현실적인 표현은 창조의 법력을 의미한다. 부연하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은 첫 번째는 상(相)을 여윈 무위법이요, 두 번째는 삼매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마음의 편안을 얻기 위한 서구식 명상과는 달리 깨침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선(禪)이 추구하는 그 지향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선(禪)이란 어디까지나 각자의 체험이며 그 어떤 교설이나 수행방법도 득도(得道)의 깨달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행의 방법론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누어지는 대별론보다는 일상적인 경험을 설명해보자. 관음(觀音)을 득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생명존중사상이나 스승의 가피가 전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구하지 말고 의지하지 말며 상(相)을 짓지 말라’는 무위의 명상법(수식관)과 ‘마음을 내려놓는 방하(放下)’다.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방하(放下)’를 강조하다 보면 염려되는 것이 무기공(無記空)이다. 선(禪)이 길을 잘못 들면 삼매가 아니고 무기와 혼침에 빠질 수 있다.
이는 “좌선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마조의 스승 남악회양 선사의 법어(法語)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마음을 내려놓는’ 정신집중은 마치 삼매인양 착각할 수도 있는 침묵의 흐름에 빠지게 하며, 잠이 든 혼침이나 돌과 나무와 같은 무정물의 무기(無記)의 상태와 같다.
조사들의 사자후 중에 ‘사법(邪法)의 경계도 중요하지만 그들보다도 무서운 무기공을 조심하라’는 법어는 수행자들의 귀감이 된다. 하지만 무기공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으니 단연코 유위법(有爲法)이다. ‘구하고 의지하고 상(相)을 짓는’ 명상은 수행자들을 본인도 모르게 마구니의 추종자로 스스로 변신케 한다.
또한 오랜시간 기(氣)수련에 매진한 이들은 유별나게 호흡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1분 동안의 호흡수를 3번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깨침을 위한 서두가 아니요, 무기공(無記空)을 타파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행의 호흡법은 결코 아니다.
호흡도 하나의 상(相)이 될 수 있으니 수식관(數息觀)에서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숫자(종국에는 숫자조차도 내려놓기 위한 명상)의 집중만이 무위법(無爲法)이 된다. 그 후 등장하는 것이 관음(觀音)이며, 그리고 관음을 통한 삼매일 것이다.
삼매(三昧)
인류의 조상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베어 먹는 순간,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신체의 일부를 가린다. 이것은 곧 자아(自我)의 발견을 뜻하며 현실 속 상대계의 의미를 말한다.
어쩌면 실낙원은 인류에게 상대계로의 추락과 함께 또 다른 차원계인 절대계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질병에 걸렸을 때 비로소 건강의 고마움을 인식하듯 곧 자아(自我)를 극복한다는 것은 바로 절대계의 회귀(回歸)를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아(自我)란 무엇인가? 자아는(ego)는 개인주의와는 결이 다른 인간의 자유의지를 뜻한다. 탁자 위에 있는 컵의 물을 마시고 안 마시고의 선택은 본인의 결정이다. 이것은 신(神)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지칭하는 인간본연의 의지다.
불교의 관점에서 자아(自我)는 외형적인 개체에 대한 관념적 이름일 뿐이다. 이는 실재에 있어서 실체가 없는 가상(假相)적 개체는 순간순간 변하는 물리적 또는 정신적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것으로, 자아(自我)란 자신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착각을 의미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사람들의 집착의 대상인 나(自我)라는 개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대자연의 본성(本性)이 우리 몸에 내린 순수의식인 자성(自性)과 전혀 다른, 허깨비 같은 육체인 나, 자아(自我)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아는 오직 오온(五蘊색수상행식)과 사대(四大지수화풍)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주장한다.
“자아(自我)는 오온(五蘊)이란 단지 허깨비일 뿐일 진데
그 허깨비에 어찌 실체가 있으리.” <六祖檀經>
그럼 절대계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은 어떻게 이룰 수가 있는가? 그 해답은 단지 자아(自我)의 초월뿐이다. 나라는 존재의 초월만이 이성과 감성을 벗어날 수 있기에, 깨달음은 언제나 내가 없음(沒我)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많은 수행자들이 ‘나라는 육신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나를 없애고 초월할 것인가?’를 두고 각기 그 방법을 내세운다.
그들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이 자기 최면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를 ‘내가 없다’라고 최면을 유도한다 해서 과연 없어지는 것일까? ‘자아(自我)를 정복한다! 정복한다!’며 최면을 걸어 자아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무아(無我)는 진통의 효과며 환각의 그림이다. 결론적으로 최면상태의 트랜스가 자아를 진정 초월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 떠오르는 생각을 한 점(點)에다 던진다고 생각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탱크의 캐터필러로 깔아뭉갠다는 상상으로 자아(自我)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뭐꼬!’의 화두는 어떨까? 화두는 일반적 집중의 명상과는 다르게 의증(疑症)이 은산철벽을 만날 때 깨달음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이 과연 어딘지는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자아를 초월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현실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자연계의 어떤 방식으로도 자아와 생사(生死)를 초월할 수는 없다. 단지 길이 있다면 오직 깊은 침묵의 명상만이 초자연계를 진입할 수 있어 초월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따라서 비행기가 이륙(離陸)을 위하여 활주로를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듯이 깊은 침묵의 시간만이 삼매의 공간인 절대계로 진입할 수 있다.
삼매(三昧)는 무엇인가? 잠이 든 상태나 최면이 걸린 상태의 트랜스와는 전혀 다르다. 삼매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된 상태를 말한다. 독서삼매란 책을 읽는 자기와 책이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음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산스크리트의 사마디samadhi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요지부동하며 고요하다 해서 정정(正定)이라고 번역하고 또는 삼매에 들어야 진리를 꿰뚫어서 바르게 본다고 정견(正見)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아(自我)의 의식을 작게 또 작게 줄일 때, 현실을 초월하는 깊은 침묵의 삼매를 만날 수 있다. 자아(自我)의 초월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성경(聖經)의 의미와 같다. 성령의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맑음’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비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
또 불경(佛經)의 계정혜(戒定慧)는 선정의 핵심이다. 계(戒)를 확실히 지킨 집중의 선정(禪定)만이 맑음의 지혜(知慧)를 가져온다. 그리고 부연한다면,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구하지 말며 의지하지 말며 상(相)을 짓지 않는’ 집중만이 삼매에 들 수 있다.
이러한 깊은 삼매가 아니라도 일반적인 수행자는 수식관의 명상에서 초자연계의 첫걸음인 묘한 촉감(妙觸)인 기(氣)를 느낄 수 있다. 기(氣)라는 것은 에너지의 어떤 현상으로 상상 속의 물질인 에테르와는 다르다.
그것은 철학적인 이기론(理氣論)이 아닌 초자연적인 묘한 촉감이며 묘한 작용의 느낌이다. 물론 나만이 체험할 수 있지만 그 수준의 맑음을 보유한 수행자라면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교감을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기(氣)를 수행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기(氣)수행은 그것 자체가 상(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된다.
초심자의 삼매는 처음에는 졸음과 같이 동행하여 언뜻 잠을 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정진의 시간이 쌓이면 진정한 삼매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니, 관음(觀音)은 그 때마다 소리의 밀도가 점점 치밀어지면서 두정의 백회혈에서 이마 앞 제3의 눈을 향하여 자리를 옮기게 된다.
곧 이어서 제3의 눈과 뒷머리 옥침혈과 연결되는 원통터널은 두정의 백회혈과 조우하면서 관음의 위력을 더 한층 발휘하며 다음의 깨달음의 과정을 속속들이 들어낼 것이다. 이처럼 무위법의 명상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용맹정진만이 자아를 초월할 수 있어 수행의 단계를 한 차원 높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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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선 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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