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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예수를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짐으로써, 그가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일 1:1-2),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의 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짐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영혼 속에 직접 수혈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성경을 펴고, 읽고,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는 것이 기독교적 계시의 정상적 소통방식이라면, 성경에 담긴 다양한 저자들의 작품을 읽어내는 일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의 구체적인 양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복음서와 히브리서가 그려 보이는 인간 예수의 면모는 그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발상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밝히려는 시도들이었다. 이 진술이 옳다면, 성경의 인간적 성격에 주목하고 이를 자세히 규명하려는 노력 역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적 권위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간주해야 마땅하다. 성경의 저자들이 예수의 인간적 면모에 당황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성경의 인간적 면모에 당황스러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마태복음의 시작 부분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한다. 누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께 이르는 긴 족보를 14대가 세 번 반복되는 깔끔한 패턴으로 정리하고 있다. 물론 마태가 소개하는 예수의 족보는 실제 우리가 구약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위에서 말한 패턴 만들기 위해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몇몇 왕의 이름을 생략 했기 때문이다. 마태는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라 했지만, 사실 요람(여호람)과 웃시야 사이에는 아하시야, 요아스 및 아마샤 등의 세 왕이 누락되었다(왕하 8:24-25; 11:2, 21: 14:1), 그러니까 실제로 요람은 웃시야의 아버지가 아니며, 따라서 다윗과 바벨론 포로 사이의 실제 예수의 족보는 마태가 제시하는 14대를 넘어간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실제 예수의 조상들 중 몇 사람의 이름을 생략함으로써 14+14+14-42가 되도록 맞추었다. (히브리어 글자에는 숫자가 부여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처음에 예수의 조상으로 제시된 다윗의 이름 음가를 합하면 14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태가 예수의 족보를 "편집"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이 전해주는 예수의 족보를 있는 그대로 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편집" 이 마태의 손에 의한 것인지 마태가 입수하고 활용했던 자료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지금 언급한 사례는 구약의 역사서와 마태복음을 함께 읽으면 드러나는 자연스런 차이점을 관찰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본문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보고할 뿐, 본문을 두고 어떤 신학적 해석" 을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마태가 보고하는 예수의 족보는 구약이 보고하는 족보와 차이가 난다"는 사실 관찰을 놓고도 그것이 성경의 무오설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성경의 무오설을 유지하려 한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마태가 예수의 족보를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마태가 보고하는 “진실"은 구약 성경이 보고하는 “진실과 어긋난다. 그렇다고 구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구약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이 동시에 사실일 수는 없다. 마태복음에는 보이지 않는 유다 왕들의 이름이 동시에 실제 예수의 조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자주 나타난다.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 이후 바울이 회고하는 바울 일행의 행로(살전 3:1-2)와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행로(행 18:5) 사이에는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보가 나타난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디모데가 아테네에 이를 때까지 바울과 동행한 것처럼 묘사된 데 반해(살전 3:1-2),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서야 디모데와 실라가 합세한 것으로 나타난다(행 17:14-16; 18:5). 물론 우리는 이 두 정보를 서로 조화시키려고 시도해 볼 수 있고, 상당한 정도의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이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나 다른 자료로는 검증할 도리가 없는 가상적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고린도에서 만났다고 말한다. 이 말이 바울의 말과 조화되려면 베뢰아에 남아 있던 디모데 역시 아테네로 가 거기 먼저 와 있던 바울과 만났고, 바울의 파송을 받아 다시 데살로니가로 갔어야 한다. 그럴 경우 사도행전이 말하는 기다림은 바로 이 두 번째 상봉이 된다. 그렇게 되면 바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아테네에 머물렀다는 말이 되는데, 물론 이것은 사도행전의 본문을 자연스럽게 읽어서 발견 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사도행전 자체를 자연스럽게 읽으면 디모데와 실라 모두 베뢰아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의 예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 혹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사이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짜를 두고 다소 상이한 정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동반했던 나귀가 한 마리인지(마가와 누가) 아니면 두 마리인지(마태) 에 관해서도 물을 수 있다. 창세기를 읽으며 아직 해와 달이 창조되기도 전에 어떻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수 있는지 묻거나(창 1:6), 아벨이 죽어 가인이 아담과 하와의 유일한 아들로 남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이려고 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아내는 어디서 온 것인지 물을 수 도 있다(창 4:14, 17). 본문을 읽으면서 생겨나는 이러한 의문들 자체는 모두 본문을 철저하게 읽고 제대로 "이해하려는" 과정의 자연스런 산물일 뿐, 본문의 가르침을 두고 나름의 신학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질문하는 노력이 성경에 대한 신앙 고백과 혼동되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많은 성도들이 이런 식의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성경읽기가 얼마나 “대충" 인가를 역설적으로 확인해 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서도 “신앙 없다고 욕먹을까봐”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현실은 우리의 성경읽기가 정직한 진리 탐구를 벗어나는 무언가 다른 감시체제에 의해 비틀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이런 현상들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에는 나름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교리적으로 어렵거나 위험하다고 해서 이런 현상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무시하는 것이지 그 본문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닌 것이다.
만일 성경의 객관적 사실들 자체가 나의 무오” 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내가 가진 무오 교리가 애초부터 내가 가진 실제의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자체를 택해야 할까 아니면 특정한 무오설 교리를 옹호해야 할까? 이런 성경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말한다면, 애초부터 우리의 고백은 그 목표를 잘못 잡고 있던 셈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이 들려주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그저 우리가 제대로 된 역사적 상식을 갖추기 바라시는가? 아니면 거기서 본받을 바를 찾으라는 것인가? 사실 대부분의 설교는 이런 “모범적 관점을 따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본받아야 할 모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 자신의 도덕적 감수성인가? 야곱 기사처럼 모호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시편의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할 때(시 22:1), 이 절규는 어떻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 이 되는가? 시인의 입을 빙자한 하나님 자신의 절규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인간적 절규는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욥기에 나오는 네 친구들의 대화는 어떤가? 욥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생각이며, 친구들의 발언은 다 거짓에 속하는가(욥 42:7-8)? 아니면 욥의 말조차 엉터리라고 간주해야 하는가(욥 38:2, 42:3)? 혹은 욥에게 잘못 적용되기는 했지만 친구들의 진술 역시 하나님의 영감을 반영할 수 있는가? 그래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고, 마음껏 축복해도 좋은 것인가? 또한 "할례 받으면 끝장” 이라는 바울의 위협(갈 5:2.4)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힐 수 있는가? 무조건 할례는 안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할례 받은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은 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갈라디아인들만 그렇다는 뜻인가? 바울 자신이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연결해야하나(행 16:3)? 또 여자는 잠잠하라고 하는 바울의 말에는 목숨을 걸면서도 머리에 무언가를 쓰라는 명령에는 콧방귀도 안 뀌는 우리의 태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우리의 고백과 어떻게 관계되는가?
위의 질문들을 곰곰이 음미해 보면, 우리는 우리에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해석의 지침이 마련되지 않는 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고백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사실 위험하기조차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사사기의 구절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제대로 된 해석의 "왕'이 없을 때 사람들은 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하면서 실상 나의 해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강단에서는 목사 자신의 저급한 사상과 가치관이 혹은 목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말씀 선포” 라는 거룩한 미명 아래 부지런히 선전되고 있다. 성도들 역시 말씀 “적용" 이라는 이름 아래 성경의 돌들을 이리저리 쌓아 올려 내가 원하는 탑을 만든다. 성경 내용을 배우는 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그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은 마치 좋은 재료들을 앞에 두고서도 정작 그 조리법을 모르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모두 나름의 확신을 갖고 마음껏 “성경" 이라는 재료를 요리해 먹는다. 내 입맛에 맞게 "요리" 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경건한 만족을 누리면서 말이다. 우리의 현실이 이에 가깝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교회의 건강을 위해 더 시급한 것은 성경에 관한 교리적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을 위한 실제적 원칙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하는 일은 성경 읽기의 중요한 전제이지만, 이런 원론적 진실을 강변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실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읽을 줄 알고 말씀으로서의 유익을 십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성경 무오설 주장에 열심이면서도 말씀의 올바른 해석에는 무관심한 현실은, 우리의 열정의 원천이 말씀에 의한 실제적 유익 때문인지, 나 자신의 정치적인 욕구인지 되묻게 한다. 인간적 해석 없이는 말씀 전달이 가능하지 않다면,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참된 태도는 성경의 건전한 해석과 철저한 순종을 위한 실제적 노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신학교에서도 성경 해석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많은 목회자들의 불만이나, 그토록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성경을 어떻게 읽을지 막막하다는 성도들의 하소연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우리의 열정에 짙은 의심의 그림자를 던진다. 성경통독, 성경백독 같은 말은 무성하지만 정작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는 무관심한 우리들은 성경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성경을 학대하는가, 아니면 내 마음에 맞게 도용하는가?
*우리에겐 교리적 논쟁의 이슈가 되어버렸지만, 본래 성경의 영감 개념은 교회의 형적 유익을 의도한 것이었다. 애초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구약) 성경의 영감에 대해 말했던 것은 (딤후 3:16-17). “성경이 제공하는 실천적 유익함"을 잘 깨닫고 이를 부지런히 활용하라는 권면의 문맥에서였다. 바울은 이 유익함을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 이라는 실천적 덕목들로 풀어내고 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이 이런 실천적 덕목들을 함양하는 데 매우 유익하므로 이를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감동” 에 관한 언급은 성경의 목회적 · 실천적 유익함을 강조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것이니 얼마나 효과적이고 유익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감동하신 성경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구비하는 것”이었다(17절), 바로 여기서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는 고백의 실제적 의미가 설명된다(15절), 중요한 것은 정통적인 성경관 확립 자체가 아니라, 이처럼 영감된 성경을 실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부지런히 활용하는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건 우리는 교회의 영적유익이라는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을 무오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무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거기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다. 우리의 멋진 성경관이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신실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고상한 교리가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어떤 이들은 신학이나 교리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리를 치지만, 건강한 신앙을 돕지 못하는 신학, 복음적 생명을 발산하지 못하는 신학은 가장 교묘한 형태의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경에 대한 교리를 두고 시시콜콜 시간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읽을 수 있는 구체적 해석의 지침들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더 시급하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큰 소리쳐 놓고는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나의 정략적 사설을 들어놓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교회의 건강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말씀의 권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권위 있는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목적으로 써먹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일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실제 해석의 과정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해석학적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이 “세상이기에(요 3:16), 애초부터 복음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을 겨냥한다. 그래서 “하늘나라 의 이야기는 먼 하늘의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늘의 나라를 선포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 福音)인 것은 이 소식이 그저 먼 “천상의 소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디딘 이 땅을 바꾸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려주는 천국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닮았다. 공중에는 새들이 날고 들에 꽃들이 피는 세계, 농부가 씨를 뿌리고, 어부가 밤새 고기를 잡으며, 장사가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는 세계, 아들 결혼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고, 들러리들이 늦은 밤 신랑을 기다리다 졸고 있는 세계, 혹은 때 아닌 손님 접대를 위해 집주인이 실례를 무릅쓰고 밤늦게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거나,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아버지가 잠을 설치는 그런 세계, 뇌물에 눈이 먼 재판장이 억울한 과부의 불행에 애써 눈을 감고, 이런저런 핑계로 도움 안 되는 잔치를 피해보기도 하는,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 그대로의 세계다.
*하지만 하늘나라가 이 땅의 나라와 다르듯, 천상의 복음은 지상
의 삶과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삶의 묘사(description)를 넘어선다. 복음이 묘사하는 현실이 정확하겠지만, 사실 복음의 핵심은 정확한 삶의 묘사에 있지 않다. 가령 토마스 하디가 귀향」(The Reurm of the Native)이라는 소설의 첫 머리에
서 그려내는 영국의 자연, 혹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포착해 내는 인간의 심리는 성경의 어느 이야기 못지않게 절묘하며 또 흥미롭다. 또한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정치한 삶의 풍경들 역시 우리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문학은 본시 삶의 묘사에서 멈춘다. 삶을 멋지게 그려낼 수는 있지만, 그 삶에 손을 대지는 못한다.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복된" 이야기가 되지는 못한다. 반면 복음은 단순한 묘사를 넘는 선포요, 말씀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의 현실 속으로 도래하는, 혹은 침입해 오는 하늘의 이야기다. 복음은 우리 삶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에
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물론 복음 역시 우리 삶의 실상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일상적 가시광선에 포착된 세상이 아니라 천상의 빛에 의해 드러난 실상이다. 복음은 우리 밖에서 들어와 천국의 빛을 쏘이고, 이 빛으로 우리 삶의 한계 혹은 우리 죄와 죽음의 실상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복음은 또한 그 한계 너머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이상한 나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복음은 두 얼굴을 가졌다. 익숙한 선물 꾸러미 속의 비수처럼, 트로이 목마 속의 적병들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그림 속에 이 일상을 비트는 긴장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은 친숙하면서 또한 낯설며, 반가우면서도 또한 두렵다.
*예수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 비유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비유기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까지 말한다(마 13:34: 막 4:33), 말하자면 비유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하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천국에 관한 예수의 비유에 일상적 친숙함과 천상적 낯섦이 함께 엉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라 익숙하기 짝이 없지만, 그 익숙함 속에는 동시에 원가 "말도 안 되는 비틀림이 존재한다. 우리의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일상과는 다르며, 그래서 복음 속의 이야기들은 일상의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상황들로 새워진다. 아니 일상의 논리로는 터무니없는 장면들이다. 바로 이 낯선 일그러짐이 전국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이다.
천국은 어떤 나라일까? 어느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다(눅 15:1-7), 자연 그는 그 양을 찾아 나선다.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들판을 헤매는 목자의 안타까움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 한 마리를 찾자고, 그는 99마리의 양을 들짐승이 출몰하는 “광야" (한글개역은 들”로 번역했다)에 버려둔다. 1보단 99가 더 큰 우리들의 세계에서 목자의 이런 행동은 분명 어리석다. 잃어버린 양을 향한 목자의 집착은 이처럼 인간적 상식의 도식을 벗어난다. 하지만 이런 어긋남 사이로 하늘의 빛이 스며든다. 우리 일상의 계산과 천국의 계산이 달라지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신이나 돌아온다. 참 흐뭇한 그림이다. 그리고 그는 잔치를 벌인다. 순전히 추측이지만, “친구들과 이웃들이 신나게 즐기자면 양 한 마리 값 이상의 돈이 들 것이다. “내 잃은 양을 찾았다”는 기쁨에 그는 양 한 마리론 어림도 없는 엄청난 비용을 마다하지 않는다. 천국은 의인 99 명보다는 회개한 죄인 하나에게서 더 큰 기쁨을 누리는 그런 왕의 나라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비상식의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음에서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한다.
*천국을 묘사하는 그림에서 우리들은 상속을 미리 요구함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는 둘째 아들(눅 15:12) 아니면 아버지의 은혜로운 처사에 화가 나 씩씩거리는 큰 아들로 등장한다( 15:28). 혹은 일만 달란트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친구가 빌려간 백 데나리온을 받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 냉혈한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마 18:21-35), 아니면 멋진 혼인 잔치에 초대 받고서도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주인을 모욕하는 손님이거나(눅 14:15-24), 과분한 초대를 받았으면서도 예복을 거부할 만큼 뻔뻔스런 존재일 수도 있다(마 22:11-14). 이런 터무니없는, 혹은 진솔한 그림에 실소하면서, 우리는 이 비틀림 속에 드러나는 “우리들의 초상'을 발견한다. 마치 죄를 지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죄가 많은 곳에 더 큰 은혜가 넘치는 법이다(롬 5:20), 과장된 죄악은 더 과장된 은혜로 응수된다. 천국의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목을 껴안는다. 당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물론 그의 자애는 턱없는 편애와는 다르다. 둘째 아들을 껴안는 아버지는 또한 몸소 집 밖으로 나가 밖에서 화를 내고 있는 큰 아들을 달래는 분이기도 하다. 이 역시 당시의 감수성과 어긋나기는 마찬가지다.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은 신하를 다시금 감옥에 던질 만큼 엄한 분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는 무한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는 일상적 상식이 침묵한다. 하루 종일 땀 흘린 사람이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일당을 받는 나라(마 20:1-16), 일상적 공평함이 초월되고, 용서와 사랑의 “구부러진 저울이 쉽게 통용되는 나라다. 주인이 종 앞에 무릎을 꿇고 종의 발을 씻는 나라(요 13:1-17), 천국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그림으로 밖에는 그릴 수 없는 "이상한 나라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한 나라 속으로 빠져든 앨리스들이 아닌가.
*로마제국의 백성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일종의 입양으
로 설명했다. 한글개역성경의 표현으로 하자면, “양자됨" 이다(롬 8:15; 갈 4:5),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나중에 조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입양해 양자로 삼았던 것처럼, 로마제국의 유력 인사들은 남자 아이를 입양해 자신의 후계자와 상속자로 삼곤 했다. 바울의 설명은 바로 이런 일상적 경험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입양은 그 절차가 수상하다. 아들 아닌 종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기 위해 본래 아들이 종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당시 십자가 죽음은 주로 노예들 아니면 흉악범들에게 적용되었다). 본래 아들을 종으로 만들고 죽임으로써 다른 종들을 해방시켜 아들들로 입양하는, 정말 "이상한 나라" 의 입양법이다. 혹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께서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는 일종의 결혼과도 같다. 여기서도 결혼의 절차는 비틀린다. 아름다운 신부 대신 더러운 여인이 신부로 정해진다. 물론 결혼을 위해 신부는 당연히 티 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갖출 것이다. 그런 볼품없는 우리를 신부처럼 깨끗하게 단장하기 위해 신랑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린다(엡 5:25-27), 일상에서 겪을 수 없는 "이상한 나라" 의 청혼 방식이다.
*죄의 전횡이 유대인의 성경인 “율법에만 해당된다고 믿는 것은 무지한 자살행위일 것이다. 기독교인인 우리 역시 옛날 유대인들이 빠졌던 위선적 착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어도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삶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랑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교회는 언제나 자기방어에 급급하지만, 화려한 모양을 자랑하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온갖 욕을 먹고 있는 현실을 보면, 우리의 실상 역시 “고백적 신앙과 실천적 불신앙”이 편리하게 결합된 모양처럼 보인다. 그래서 바울의 성경(율법)처럼, 우리의 성경 역시 정치적 장난에 노출되어 있다. “의문(=문자)”으로 남아 우리를 죽음에로 내몰 수도 있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어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 죄인 된 우리의 삶을 숨기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오용될 수도 있고, 죄인 된 우리의 삶을 심판하며 거기서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새 창조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이 공허한 일이었듯, 오늘 우리들에게도 성경을 자랑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성경에 호소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의 칼날에 우리 삶을 갖다 대는 일이다.(히 4:12-13).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의문" 으로 전락시키는 재주는 유대인만 가진 것은 아니다. 복음의 말씀을 가진 우리 역시 그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광야의 놋뱀이 느후스단이라 불리며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처럼(왕하 18:4), 성경 역시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뱀을 숭배할 것이 아니라 놋뱀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열심 또한 성경책이나 이런저런 신학체계가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조준되어야 한다. 또한 놋뱀을 향한 열심이 결국 자신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우상숭배였던 것처럼, 우리는 성경과 신학(전통)에 대한 우리의 열심이 실제로는 현재 나의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움직임이 아닌지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성경의 어떤 부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은 성경과 신학체계를 숭배하느라 하나님을 잊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일종의 안전장치일 지도 모른다. 끝으로 사본학자 신현우 교수의 말을 인용해 본다.
우리에게 성경의 원문은 없다. 그리고 사본학을 통해 100% 원문을 복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끝없이 원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100% 원문이 있어도 성경을 다 해석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석학을 통해 성경을 100% 다 알 수는 없다. 한 걸음씩 평생 성경을 좀 더 알아갈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을 다 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다. 저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이 창조주 하나님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안내판이다. 우리는 안내판을 신뢰하지만 그 안내판을 믿음의 궁극적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 안내판을 좀 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하려는 노력은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현일 뿐이며, 안내판을 보고 따라가는 성도들과 그 안내판을 곧 접하게 될 인류에 대한 작은 봉사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과 봉사로서의 사본학이 안내판을 닦는 청소에 불과한 일일지라도, 바로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한글개역에는 명백한 오역이 종종 발견된다. 물론 이런 오역은 본문의 의미를 교란한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시종일관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이 가르침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결론으로 끝난다(34절).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사람들이야 무슨 문제냐 하겠지만, 본문의 흐름에 민감한 독자들은 혼란을 느낀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것은 오늘엔 오늘 일을 염려하고, 내일이 되면 내일 일을 염려하라"는 말씀이 되는데, 이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지금까지의 일관된 논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님의 진의는 무엇인가? 34절에서처럼 내일 일을 앞당겨서 염려하지 말고 그 날의 일들만 염려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 앞에서 줄곧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이고 내일이고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혼란은 그저 잘못된 번역 탓에 지나지 않는다. 이 구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이다. NIV는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라고 깔끔하게 옮기고 있다. 그러니까 내일 일은 내일 자기가 알아서 염려할
것이므로 너희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염려는 내일에 대한 것들이다( 당장 발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지 걱정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의 대상인 내일 일은 내일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므로 우리는 아무 염려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구절은 지금까지 이어온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을 재차 강조하는 말씀이다. 다행히 개역개정판은 이를 제대로 수정하여 훨씬 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을 사용하면서도 이 부분이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 현실이 갑갑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혹은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마태복음 5장 13절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고 묻는다. 자연스럽게 읽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짜게 한다”는 말을 (소금이 음식을) “짜게 한다"는 말, 곧 소금이 음식에게 맛을 낸다는 말로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의미가 이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말뜻이 아니라는데 동의한다. 그러니까 실제 이 단어의 의미는 "짠맛을 회복한다”는 것으로, 소금 자신이 잃어버린 "짠맛을 회복하겠느냐”는 물음인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부정적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 문문으로, 당연히 "절대로 짜게 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번역이 모호하다보니 소금 자체가 짠맛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소금이 음식을 짜게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곡해된 것이다. 실제로 이 오역은 주님의 가르침에 관한 큰 오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혹은 성찬에 관한 교훈의 일부인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을 보자, 여기서 바울은 파행적인 방식으로 성찬을 거행하는 성도들을 비판하면서,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 라고 말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비록 파행적이긴 하지만 지금 고린도의 성도들은 부지런히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고 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함께 모여 성찬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 역시 번역상의 오류다. 바울의 말을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너희가 함께 모여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니" 라는 뜻이다. 비록 열심히 주의 만찬을 먹는다고 먹고 있지만, 지금처럼 파행적인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먹어봐야 그것을 제대로 된 주의 만찬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주의 만찬을 먹기 때문에 실상 자기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그런 식사가 될 뿐이다( 29절, 한글개역에는 “죄'를 먹고 마신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모임은, 상업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모일수록 이윤이 남는 모임이 아니라 모일수록 "손해가 나는 모임이 될 것이다(17절).
같은 구절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번역이 보인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하는 대목이다(28절), 이 번역에 의하면 자기를 살피는 일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선결 조건에 해당한다.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곧 자기 검증에 통과한 후에라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찬 시 많은 목회자들은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참여하지 말라"는 권고를 내리며, 실제로 많은 민감한 성도들은 성찬을 거절하는 “겸손함”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역이다. “그 후에야' 라는 시간적 접속사로 번역된 이 단어는 정확히 "그렇게” 혹은 "그런 식으로" 라는 양태의 접속사다. 따라서 바울의 권고는 사람이 자기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곧 자기를 살피는 방식으로 성찬을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성찬 참여의 방법 혹은 태도에 관한 것이지 성찬 참여의 전제 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십자가의 대속을 상징하는 성찬을 먹고 마시는데 무슨 선결 조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일정 조건을 만족시킨 후에라야 성찬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은총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는 행위 자체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성경은 결코 구술책이 아니다. 이디오피아 내시의 성경읽기 처럼,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성경 읽기는 무의미하다(행 8:10-31), 우리들 대부분은 번역 성경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지만, 이 번역은 동시에 번역으로서의 한계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번역이 온전치 하므로, 정확한 말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번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판적 거리가 요구된다. 번역 성경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특정한 하나의 번역을 신봉하는 것은 구원의 말씀 자체와 말씀의 전달 수단을 혼동하는 것이다. …
우리는 분위기 있는 말투와 말씀에 대한 감동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전달하는 구체적인 의미, 그리고 그 언어적 의미가 지칭하고 있는 복음의 실체다. 은혜의 원천은 한글개역의 “거룩한 어투”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이다. 바울이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도 고착된 텍스트(의문/문자)가 되었을 때는 생명 아닌 죽음의 도구가 되었다. 우리의 성경도 그런 위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주님은 말씀에 생기를 주는 "영" 이시며, 성령의 자유 안에서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말씀 속에 담긴 영광의 빛을 주목할 수 있다. 그리고 말씀과의 그런 만남은 주님의 모습에 가깝도록 우리를 바꾸어 간다.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옛날 번역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한글개역은 유려한 문장이 일품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 또한 많다. “왜냐하면 이나 “그러나"(롬3:21)와 같은 접속사를 자주 무시하는 것이 그 아쉬움 중 하나다. 특히 논리적인 논증이 주조를 이루는 바울서신에서 접속사의 생략은 바울이 전개하고 있는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
그러니까 로마서 15-17절에서 바울의 생각은 각 진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양상을 보인다. 바울의 생각을 풀어 쓰면 대략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이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유대의 율법이나 헬라의 지혜가 아니라) 바로 이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경의 생각을 이해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복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행 8:26-40), 중요한 것은 무작정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깨달음은 순종으로 나아간다. 깨닫지 못한 말씀을 순종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어떨까?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왜 성경 100독" 이라는 숫자에 난리를 치는 것일까? 잘 모르는 책이라도 백번을 읽으면 뜻이 통한다는 선조의 지혜를 믿고 백번을 읽어 말씀의 의미를 발견해 보겠다는 시도일까? 의미를 모르는 구절이 태반이라면, 모르는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런 모습이 아닐까? 알거나 모르거나 무작정 읽겠다는 가상한 열정은 순종을 향한 노력의 표현일까, 말씀의 도전이 반갑지 않은 우리들의 종교적 몸짓일까? 심판의 기준이 들음"이 아니라 "행함”이라면, 그리고 그 행함이 정확한 말씀의 전달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성경은 무릎 꿇고 들어야 할 말씀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도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일까? 우리가 성경 읽느라 들이는 시간 중에서, 우리가 말씀 자체의 논리 앞에 마주하여 그 위력을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성경책 자체를 애지중지 하는가, 아니면 그 속에 담긴 생각에 감동을 받는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로운 양날 칼에 비유한다(히 4:12;계 19:15), 그래서 말씀과 우리의 만남은 말씀의 칼이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것, 곧 드러나지 않은 우리의 존재를 속속들이 해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히 4:13). 말씀은 우리 속을 까발려 숨은 본질을 드러내며, 우리는 말씀에 의해 심판받는다. 물론 말씀은 감격스럽게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씀의 이런 건설적 기능은 우리의 이기적 자기방어 체계를 부수는 파괴적 과정을 전제한다. 우리가 말씀의 칼을 피하고자 자아의 방패를 내밀고 있는 한, 말씀은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심판의 칼날로 남을 것이다. 물론 “믿음이 좋은 우리는 대놓고 말씀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말씀의 칼날은 위협적이며 또한 거북하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의 날카로움을 해소할 방도를 찾는다. 온갖 방법으로 말씀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그럼으로써 다치지 않고서도 말씀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말씀“이라는 명분과 ”욖심“이라는 실리를 한꺼번에 챙긴다.
*통상적 해석의 석연찮음은 우선 직설법이 명령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서술(직설법)이지 권유(명령법)가 아니다. “소금이 되라"는
명령이 아니라 “소금이다"라는 진술이다. 물론 사람이 문자적으로 소금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는 ”내 마음은 호수요"와 같은 일종의 비유법이 된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떤 면에서 호수와 통하는 데가 있다는 말처럼, “제자들인 너희는 어떤 점에서 소금과 통하는 면이 있다"는 의미의 말씀이다. …
방금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하신 마당에, 소금의 속성에 관한 이런 적나라한 설명은 그대로 제자들에 관한 설명이 된다. 마치 소금처럼, 제자들이란 한 번 제자다운 맛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할 수 없어 버려지게 되는 존재들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제자들이 세상의 방부제와 조미료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제자다운 맛을 잃고 버림받는 상황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소금처럼 제자들 역시 한 번 잃은 맛을 회복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신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권면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마치 소금처럼 제자란 한 번 제자다운 맛을 잃으면 다시 그 맛을 회복할 도리가 없고 버림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경고다. 그런 점에서 13절은, 제자들이 세상에 “드러나 보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14-16절의 가르침과 더불어 제자도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맛을 잃어버릴 위험,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숨어버릴 위험에 관한 경고는 이 말씀이 핍박에 관한 말씀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로 쉽게 설명된다. 물론 제자들의 맛” 혹은 "빛"이란 앞서 팔복말씀에서 큰 필치로 그려진 그런 삶의 자태를 말한다(마 5:2-10), 팔복 말
씀이 핍박에 관한 말씀으로 끝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마 5:10-12), 세상 속에서 이런 삶은 핍박을 자초하는 삶이다. 물론 제자들은 그 핍박을 기뻐하라는 말씀을 듣는다(마 5:11), 그러나 제자의 삶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늘 유혹에 직면한다. 천국 시민으로서의 맛을 포기함으로써 핍박을 벗어나려는 유혹, 혹은 드러나기를 거부함으로써 핍박을 피해보려는 유혹을 받는다. “소금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이런 상황을 겨냥한다. 곧 예수님의 의도는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대신 제자다운 맛을 포기함으로써 핍박을 면하려는 자들은 다시 그 맛을 회복할 수 없이 버려지고 심판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제자들을 경고하시려는 것이다.
*정확한 관찰의 중요성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소금의 경우와 같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진술이다. 곧 "세상의 빛이 되라”는 명령 혹은 권유가 아니라, “(말하자면) 너희는 세상의 빛과 같다”는 일종의 비유법인 것이다. 소금의 속성을 들어 제자도의 본질을 설명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주님은 빛이라는 물질의 속성을 들어 제자도의 본질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진술에 대한 청중의 일차적 반응은 “우리가 빛이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가 빛과 같다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이 된다. 처음 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로서는 갑자기 “제자=빛”이라는 등식을 설정하는 주님의 의도를 짐작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는다. 이어지는 설명은 바로 이런 의문을 겨냥하면서 “제자=빛”이라는 비교를 통해 주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주님은 산 위의 동네와 "켜진 등불” 이라는 두 개의 추가적인 그림 언어를 소개한다. 이 두 가지의 그림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제자를 빛에 비교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그림은 산 위에 지어진 도시의 그림이다. “세상의 빛' 이라는 말에 이어 뜬금없이 등장하는 산 위의 동네는 얼핏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인상을 준다. 사실 주님의 말씀을 ”빛이 되자” 라는 권면으로 이해해 버리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알 도리가 없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과 산 위의 동네가 숨길 수 없다는 두 생각이 잘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위의 동네" 라는 이 재미있는 그림은 빛에 관한 말씀을 “세상의 빛이 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 구절에 대한 대부분의 설교가 이 말씀을 슬쩍 생략하고 넘어간다는 사실은 이런 당혹감을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산 위의 동네"라는 그림은 빛이 되라는 권면 속에 뜬금없이 끼어든 불청객이 아니다. 이 이미지는 사실 제자들을 빛에 비교하시는 주님의 의도에 대한 매우 절묘한 설명에 해당한다. 산 위에 지어진 동네는 정확히 말하면 산 위에 건설된 도시를 의미한다.…
일단 “산 위에 있는 도시'가 드러남의 차원을 강조하는 그림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빛에 관한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일견 ”산 위의 도시" 라는 이미지는 빛에 관한 말씀과 무관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단 “드러남" 이라는 주제에 생각이 미치면 빛과 산 위의 도시라는 두 그림 사이의 유사성이 금방 드러난다. 산 위에 건설된 도시는 사람들에게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본연의 의도를 완수하는 것처럼, 빛 역시 사람들에게 노출되었을 때라야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빛이다. 곧 마치 빛이 드러남을 통해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 역시 드러남을 통해 제자들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는 명령이기 이전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핵심이 드러남 혹은 보여줌에 있다는 말씀이 된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숨겨질 수 없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생겨난 존재다. 등불을 켜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등대 위에 놓는 것처럼,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공동체를 이 세상의 등대 위에 놓아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도록 하셨다. 다시금 이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권고"가 아니다. 오히려 제자로서의 본질 자체가 “보여주는” 역할에 있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빛으로 기능하지 않는 교회란 품질 나쁜 교회가 아니라, 아예 교회이기를 그만 둔 모임이다. 보여주지 못하는 교회란 말 아래 숨은 등불처럼 무의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제자들의 공동체가 빛과 같은 존재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린다. 미국의 신화학자 캠벨은 「신화의 힘』이라는 책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의 어리석음을 두고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을 어렵게 말로 전달하려고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한 마디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지금 모습이, 보여줄 수 있는데 말이 더 효과적인 줄 알고 말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보여줄 것은 없으면서 애써 말로 때워보려는 안타까운 몸짓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이 문제점을 고발하는 방송국을 향해 실력행사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보수 기독교회의 대응은 바로 이런 가난함을 토로하는 역설적 자술서로 들린다. 교회 안이건 밖이건, 오늘 교회의 실상은 한 마디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확인되지 않는 이상함, 혹은 우리의 말을 우리의 삶이 부인하는 이율배반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상업용어로 표현하면 과대광고에 해당한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자기도 누리고 있지 못한 복음을 남에게 팔겠다고 나서는 일종의 "사기죄”다. 종종 “그래도 아직은 믿지 않는 단체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런 식의 변명은 오히려 교회의 죽음을 알리는 확인사살의 총성으로 들릴 것이다.
*. “하나님보고 민지 사람보고 믿나"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표현은 비성경적이다. 주님은 우리더러 "보여주라”고 하셨는데 “우리 말고 주님만 쳐다보라"고 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제자로서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현대석인 비유로 바꾸자면, 제자들의 공동체는 복음을 파는 백화점의 진열장과 같다. 진열장 속에 전시된 우리 물건들의 품질에 따라 주님의 메시아적 장사"는 성공할 수도 있고 고전할 수도 있다. 진열장 속의 우리가 제대로 전시 역할을 잘 못하면 주님의 복음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사업이 망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장사를 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진열장 속의 도움 안 되는 물건들은 눈길을 끌 만한 다른 상품들로 교체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쓰자면, 우리에게 놓였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다(계 2:5). 촛대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니, 이 말씀은 우리는 포기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 승부를 걸겠다는 말씀과 같다. 애초부터 드러냄의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그 드러냄의 사역에 실패한다면, 더 이상 제자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학 시절 동성애적 입장의 성경해석에 관한 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실제 동성애자였던 한 남학생이 발제자로 나섰었다. 물론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호의적 논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닌지라, 그의 발제 역시 갈라디아서 3장 28 절의 성의 구별을 상대화
하는 듯한 구절들처럼 간접적인 “증거”에 집중되어 있었다.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동성애를 정죄하는 구절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냥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최종적 권위를 갖는 것 아니냐는 추궁에 그는 "굳이 그렇게 말하겠다면 그렇다고 생각하라”는 답변을 내어 놓았다.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어차피 성경보다 내 입장이 우선이라면 내 입장이 성경적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순종이라기보다는 정치에 가까울 터였다.
*그 유명한 빌립보서 4장 13절 역시 쉽게 오해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흔히 믿음의 위력에 관한 선언으로 이해된다. …
13절은 이 비결의 출처를 밝히는 대목이다. 바울이 "모든 것/모두를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다. 물론 이 "모든 것 모두'는 11-12절에서 세 번 반복된 "모두" 와 같은 단어로 가난 혹은 풍부 두 가지 다 라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능력 주심 또한 현 문맥에서는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이 된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은 내가 가난하건 풍족하건 모든 상황에서 자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에게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주님만으로 나는 만족해” 하고 노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단 이렇게 오해의 소지를 없앤 뒤(11-13절), 바울은 후원에 대한 감사의 말을 계속한다(14-20절).
따라서 13절은 소위 믿음의 위력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가진 자족의 능력에 관한 고백이다. 얼핏 김이 새는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더 시시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에 관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소유한 십자가적 영성의 실제적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 믿음이 구원의 열쇠라면 잘 믿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 기독교가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에 관심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열성이 “제대로 보다는 확실히" 에 더 쏠린다는 것이다. 순도보다는 강도(强度)가 더 중요해 보인다. 사람을 깨우치기보단 현혹하는 설교에서 그러기가 쉽지만, 때론 내용도 무시한 채 거의 자동적으로 믿습니다”를 외치기도 한다. “믿습니까?" 라는 유도 심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설교의 새로운 풍경 같기도 하다. 이런 식의 상황에서는 믿음의 내용은 아예 사라지고, 설교자와 청중이 정해진 표현을 서로 주고받는 행위 자체만이 하나의 강력한 종교적 의식으로 기능한다. 그런 자리에 앉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안전이 아니라 당장의 안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착각도 있다. 그녀는 자기가 공주라 "믿지만, 나는 착각은 자유" 하고 중얼거린다. 착각이 깊어진다고 믿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철석같은 믿음은 내게는 “대책 없는 착각일 뿐이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만, 착각은 우리를 안락사 시킨다. 착각은 자유일지 모르지만, 그 자유란 '까불다 죽을 자유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팔은 나를 향해 굽고 내 시선은 늘 나에게서 출발한다. 믿음은 쉽지 않고, 그래서 나는 믿음의 모양에만 욕심을 낸다. 쇠 젓가락 꺾는 일은 어렵지만, 젓가락을 물에 담가 꺾인 것처럼 속일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삶을 죄의 물속에 넣어 장난을 친다.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착각을 진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죄의 물이 현실로 남는 한, 내 삶은 늘 믿음과 착각 사이의 눈치 살피기다. 자주 말씀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은 것은, 말씀이 나의 그런 양다리 전술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아닌 듯하지만, 성경은 착각에 대해 관심이 많다. 믿음을 강조하는 만큼 착각에 대한 경고 역시 엄중하다. 구약과 신약 가릴 것 없이, 착각이 가능한 데서는 늘 이런 경고가 사라지지 않는다.
* 이스라엘의 착각 - 이스라엘은 선민(選民)이었다. 그래서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이런 자부심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죄인들의 믿음은 쉽게 착각으로 타락한다. 선민 된 특권은 고맙지만, 선민답게 제대로 살라는 요구는 반갑지 않다. 그들은 특권에는 민감하지만 의무에는 애매했다. 선민의 권리는 몸으로 누렸지만, 선민의 의무는 입으로만 섬겼다. 이처럼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라는 역동적 기반을 상실한 채 형식적 정체성에 고착된 심각한 착각으로 변형되어 갔다. 믿음이 편리해지는 순간, 믿음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었다. 불순종이나 교만 같은 단어들은 모두 이런 일그러진 믿음에 붙은 이름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겐 착각을 믿음으로 만드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것
이 바로 “종교였다. 할례를 받고, 제사에 부지런을 떨며 그들은 스스로의 믿음을 믿었다. 십일조와 금식과 구제행위 같은 모든 좋은 것들이 그들의 착각을 믿음으로 분장시키는 소품으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믿음이 철석같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점입가경의 착각을 보았다.
예언자들의 싸움은 착각과의 전쟁이었다. 백성들은 믿음이라 말했지만, 하나님은 착각이라 말했다. 백성들은 축복을 노래했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예고하였다. 선지자들 또한 그 나름이 싸움을 벌였다. 믿음을 착각이라 비난하기도 하고, 착각을 믿음이라 위로하기도 했다. 말라기에 기록된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대화 아닌 대화는 착각은 정말 자유라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착각이 그럴듯한 “경건의 모양을 갖추면 위선이 된다. 한글개역식으로 말하면 “외식(飾)이다. 종종 뒤집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기독교는 이런 착각에 시비를 걸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할례라는 표지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핏줄에 희망을 걸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세례요한은 “착각은 자유"라 외쳤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문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할례나 핏줄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 였다. 열매 없는 이들은 그들의 "아멘”과 “주여!"를 비명으로 삼아 심판의 불로 떨어질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마 7장), 달리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바울의 복음 역시 세례요한이나 예수의 비판과 동일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롬 2장), 하나님은 각 사람을 행한 대로 보응하시며, 따라서 할례자건 아니건,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롬 1:18; 2:6-11),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회개를 요구한다. 문 앞에 서면 맞는 열쇠를 가려야 하는 것처럼, 천국의 복음은 믿음과 착각을 가리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심판 역시 진짜 알곡들과 알곡이라 착각하는 “가라지" 를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마 13:36-43). 혹은 알곡인지 자신이 없었던 알곡들과 알곡인줄 알았던 가라지들을 분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마 25:31 46).
* 신약이 말하는 착각 - 예수 믿는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불순종이 심판으로 이어지는 구약적 논리는 우리에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에겐 십자가가 있고, 우린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구절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롬3:21-26; 5:1; 8:1)?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수시로 먹고 마시는 우리들이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혹자는 이를 믿음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신약은 이것을 착각이라 부른다. 흔히 말하는 구원의 확신이, 많은 경우 구원의 착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보다 진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선언하는 신약은 동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베드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야고보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믿음과 은혜의 화신이라 불리는 바울 역시 그런 경고에 인색하지 않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만, 믿음이 구원이라는 등식은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있다(고전 15:2).
바울의 전략적 구약읽기가 드러내는 것처럼, 불순종에서 멸망에 이른 광야의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못한 체험을 가졌다는 기독교의 "편견"은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착각과 다르지 않은 착각의 한 증세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시시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사태를 한참 잘못 짚었다는 증거다. 바울이 역설하는 것처럼, 광야 이스라엘이 누린 은총은 우리가 누린 은총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그들도 그랬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신다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해를 건너고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은 세례와 다르지 않고(고전 10:2), 그들이 마신 물은 그리스도라는 바위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고전 10:3-4), 하지만 그 은총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출애굽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 누렸 지만,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그들 대부분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했다” (고전 10:5). 바울은 이것이 우리를 위한 "거울" 이라고 말한다(고전 10:6, 11절에 “경계로" 라고 번역된 단어도 같은 뜻이다). 악을 행하다가 멸망당했던 그들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고인 셈이다(고전 10:6-11), 굳게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철석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전 10:12), 나는 안전하다”는 믿음은 곧잘 아무런 근거 없는 착각으로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지만 바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시험을 이기고 인내하려는 이들의 소망이지(고전 10:12-13), "커닝'으로 시험을 넘겨보려는 자들의 보험은 아니다. 이방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이 원래 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들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라는 바울의 경고는 믿음과 착각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는다(롬 11:21).
고린도후서를 맺으며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시험해 보라"고 권고한다(고후 13:5).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우리가 실격한 자가 아니라면”이라는 단서가 달린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믿음이 착각이 아닌 것은, 내가 믿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믿음에 어울리는 열매를 보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스스로에 대해 자신하는 것처럼(고후 13:6.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가리킨다),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 역시 참된 믿음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
*누가복음 18장에는 억울한 과부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18:1-8).누가는 이 비유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가르침을 위한 것이라고 일러준다. 기도에 대한 열심이 특심한 우리들에게 이 말씀 역시 인기가 좋다. 마음에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떠올리며 매달린다. 아들의 서울대 입학일 수도 있고, 남편의 승진일 수도 있다. 조건에 꼭 맞는 사윗감일 수도 있고, 옆의 핸드폰 점포가 망해 나가서 우리 교회가 거기까지 넓혀 쓸 수
있게 되는 "축복일 수도 있다. 가끔은 들어주실 때까지 단식투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를 금식"이라 부른다), 아예 40일이니 100일이니 시한을 정해놓고 하나님을 협박하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믿음의 표현이니 말이다.
여기에 사탄의 장난이 있다. 부지런히 기도하라는 말씀에 밑줄을 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는 잊게 만든다. 매달리는 모습만 전면에 부각시키며, 억울한 과부와 우리 사이의 차이는 뒤로 감춘다. 사실 우리의 기도란 욕심 가득한 투정일 뿐인데, 우리의 생떼가 과부의 끈질김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우리의 태도가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사실 우리 주님은 무조건 매달리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구할지 조심하라고,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 필요를 다 아신다고 권하시지만(마 6:7-8, 31-34), 우리는 그런 가르침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무조건 우리가 원하는 제목(조건?)을 내걸고,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린다. 이런 억지를 위해 예수의 말씀을 써먹는 것이다.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주님의 권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훈계가 된다. 무엇이든 달라고 떼를 쓰면 주신다는 약속도, 안 주면 줄 때까지 울고불고 매달리라는 충고도 아니다. 억울한 핍박이 불가피한 제자의 길이지만, 우리들은 그 좁은 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낙망하여” 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대신, 우리는 인자가 오셔서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밤낮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 속히 우리 억울함을 풀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서 말이다. 결국 주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욕심을 차리라는 부추김이 아니라, 제자다운 자태를 잃지 말라는 권고인 셈이다. 팔복 말씀에 빗대자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는 약속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주님은 현실적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8절 하), 재림의 상황에서 믿는 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판단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무조건 떼를 쓰는 “그런 믿음" 이 아니다. 그런 "믿음" 이야 지금도 차고 넘치지 않는가? 주님의 비관적 전망은 낙망치 않고 제자의 삶을 지켜가는 그런 믿음에 관한 것이다. 핍박에 직면해서도 “죽기까지 신실함을 지키는” 자들, 그리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계 2:10), 주님의 재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은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선 과부의 상황과 통하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그런 “희망 없는 상황 앞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은 과부의 끈질김은 (cf. 롬 4:18),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를 위한 절묘한 비유가 된다. 하지만 재림의 때가 가까울 때 이런 믿음이 얼마나 남을 것인가? 오히려 오늘의 우리는 “구원의 현재성" 이라는 술에 취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겸허한 성경읽기가 필요하다. - 믿음을 잃지 말라는 권고가 세속적 욕심에 대한 면죄부로 둔갑했다면, 사탄의 전략은 성공이다. 주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읽은 결과, 이기적 욕심이 믿음으로 치부되고, 신실한 인내가 오히려 “축복받지 못한 삶으로 매도된다면, 사탄은 우리의 성경읽기를 부추길까 방해할까?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큰 권위가 붙은 것일수록 더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들의 삶은 사탄의 공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욕심으로 말씀을 확대하지 않으려면, 말씀 앞에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괄호 치는 , 일종의 현상학적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품 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칼날 앞에 나 자신의 삶을 순순히 내어놓는 것이다. 이것이 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말씀의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용서는 죄를 덮는 것이다(롬 4:7-9), 죄가 아무 상관없어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회개니 용서니 부산을 떨 것도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존재는 사정이 이와 다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와 용서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를 깨닫는다. 십자가는 우리의 죽음이며, 이 죽음은 바로 죄에 대한 것이다(롬 6:4, 10). 십자가의 피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 허물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이다. 그래서 용서는 종종 “지나간” 죄에 대한 용서라 불린다(롬 5:25; 히 9:15), 새 언약에 들어와 지은 죄는 용서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새로운 삶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어법이다. 우리의 회개가 용서를 가져다주는 것은, 용서가 손쉬운 일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때때로 우리를 타락시킨다. 마치 마음 좋은 부모 아래 버릇없는 자식이 자라는 것처럼 말이다. “품꾼"을 기대하던 탕자의 뉘우침에 “아들의 은총”으로 응수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거기서 우리를 기다린다. 잘못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사랑은 기댈 언덕이요 피할 요새가 된다. 하지만 기댈 수 있는 강력한 요새의 존재는 우리의 자세를 해이하게 할 수 있다. 회개가 항상 용서로 응답된다면, 우리에게 죄는 더 이상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아버지께는 언제나 큰 상처겠지만, 이것을 절실히 느끼기엔 우린 너무 이기적이다. 첫 실수의 아픈 회한은 갈수록 무디어지고, 우린 쉽게 용서의 응답을 듣는다. 죄가 사소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그만큼 커서 우릴 용서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의식은 금방 용서의 편리함에 마비되어 간다. 죄를 끊기 위한 처방이던 것이, 이젠 죄의 전횡을 돕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은 죄를 끊기 위해 우리를 용서하지만, 우리는 확실한 용서 때문에 손쉽게 죄를 저지른다.
*섬뜩한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죄 용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한다(마 6:15). 이건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이 간구에 붙은 수식어다. 죄를 무조건 사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다.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는 과거시제에서 알 수 있듯, 기도의 시점은 이미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난 때다. 이미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 뒤 바로 이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그러니까 우리의 죄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말씀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라고 적고 있다. 과거형을 현재로 바꾸어 의미가 다소 약해진 듯도 하지만, 누가는 여기에 “모든” 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오히려 그 조건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 기도가 무서운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뻔한 사실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도는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정죄를 자초하는 독소조항이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지 마옵시고 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만 달란트의 용서가 백 데나리온의 용서에 앞서는 것처럼,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앞선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님의 강조점은,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용서를 몸소 우리의 동료들에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먼저 받은 하나님의 용서가 무익해진다는 것이 된다. 통속적 견인교리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여기서 우리는 용서하지 않은 종이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는 “진노의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 용서라는 주제를 벗어나도 이런 식의 경고는 드물지 않다. 초대를 받아 잔치를 즐기던 사람이라도 예복을 입지 않았을 경우 추방을 면치 못하며(마 22:10-14), 등불을 밝히며 신랑을 애타게 기다렸어도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혼인잔치에서 배제된다(마 25:1-13). “주여 주여"를 외치는 자라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7:21-23).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는 지혜로운 건축자요.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건축자에 비유된다(마17:24-27), 주님의 명령대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
은 천국을 상속받지만, 사랑 베풀기에 무관심했던 성도들은 지옥의 고통으로 떨어진다. 그들 모두가 주님을 섬긴다고 믿던 사람들이었다(마 25:31-46), 아마 예수님이 오늘 한국 교회에서 이런 가르침을 선포했다면,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당장 이를 두고 비성경적 행위구원론으로 정죄했을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두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읽고도 안 읽은 척 함으로써 혹은 읽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애써 문제를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사람들인가? 주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에 드는 “내가복음" 인가?
* 은총은 악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하나님의 의지다(롬 6:1 2, 14). 그래서 우리 삶으로 들어오는 은총의 관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양심”, 곧 우리의 삶의 태도를 죽은 행실로부터 돌이키는 사건으로 규정된다(히 9:14).
용서의 은총이 필요한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 때문이다(엡 2:10; 1:4-5), 그래서 우리 존재의 바닥을 흔드는 은총의 지진은 우리 삶의 해변을 쓸어가는 쓰나미가 된다. 우리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은 그대로 우리의 삶에 용서의 파장을 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또한 우리 용서의 본보기이기도 하다(엡 4:32-572, 히 3.1, 12:2; 13:12-13; 벧전 2.21).
용서하지 않는 악한 종의 비유는 바울의 말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는 일이 드물지 않음을 보여준다(고후 6:1). 이런 현실에서 용서에 관한 주님의 무서운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린 용서이기를 요구하며, 이로써 용서가 공허한 말의 장난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용서의 몸짓들은 하늘에서 시작된 놀라운 용서의 파장들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치 않는다는 말은 속임수에 능한 우리를 겨냥한 직설적 경고이지만, 결국 이 경고의 핵심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신적 은총의 근원적 울림을 회복하라는 말씀과 같다. 그래서 이 경고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은총을 향한 초대가 된다. 쓰나미의 폐허를 어루만지며 바다 속 지진의 위력을 실감하듯, 우리 삶에 일어나는 작은 흔들림을 체감하며 우리 존재의 뿌리를 흔드신 하나님의 지진을 느끼라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무서운 말씀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위력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복음이 엄중한 경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 자기기만에 익숙한 우리들의 역설이라면 역설일 것이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두신 맞춤양복”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적어 둔 글들의 모음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글에 얽힌 저자들과 독자들의 문화상과 세계관, 그리고 그 글이 기록되어야 했던 특수한 상황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님에 의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며 읽는다. 애초에 다른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 될 때, 그 대화가 단도직입적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남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도출해 내게 하는, 굳이 말하자면 간접적 대화의 방식이다.
* 비유를 달리 하자면, 우리가 “경험” 해야 할 “의의 말씀은 우리가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되는 단답형 답안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수능시험은 답 자체를 외우기보단 답이 도출되는 원리를 알기 원하고, 기계적인 공식 암기보다는 문제해결 능력을 우선시한다. 이웃이 누구냐고 물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처럼, 당신의 뜻을 구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얼핏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이야기들을 건네주신다. 단순한 삶을 위한 단순한 답변이 필요한 다섯 살 꼬마에게는 당혹함이겠지만, 삶의 새로운 상황은 언제나 “창조적 판단”을 요구하고, 그래서 우리에겐 상황을 대처할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스물다섯 청년에게는 오히려 불가피한 대화법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기초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만, 이는 무조건 외워서 우리 삶의 답안지 위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어른에 어울리는 영적 생활력과 영적 생활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끊임없는 적용과 실천을 통해 영적 감각을 익히게 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갈 수 있도록 돕는, 말하자면 일종의 훈련 지침서와 같다.
*구원의 확신이 하나의 신앙적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일견 당혹스럽다.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식의 주문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도 문제지만,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믿으려고 애쓴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긴 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없고 그래서 신앙의 힘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런 구원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물론 성경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향한 믿음을 가리킨다.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롬 8:24-25). 믿음은 우리가 장차 얻을 것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아직 실현되지 않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지(히11:1), 이미 갖고서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을 위한 심리적 단서는 아니다.
상식적으로 구원의 현재성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현재 삶의 실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한, 이를 두고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거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왔다고 떠들썩하는 성탄 무렵,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메시아가 왔다면 아직도 이럴 리가 없어” 하며 고개를 저었다는 한 랍비의 일화는 솔직함과 불신은 다르고, 믿음은 말장난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성경이 약속하는 구원의 세계는 분명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원이 현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는 구원이란 만질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하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믿어야 하는 어떤 것인가?
*구원의 미래적 성격은 바울서신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원이 미래적 기다림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 혹은 화목과는 구별된다. 바울은 현재의 칭의 혹은 화목함이 미래 구원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현재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미래에 확실하게 구원받을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롬 5:9-10).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더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구원이 이미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롬 13:12). 물론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고도 말할 수 있었다(롬 8:24). 하지만 여기서도 이 구원은 “소망으로" 라는 말의 제한을 받는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우리는 인내하며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권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롬 8:24-25),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오히려 구원의 미래성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표현에 가깝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즐거워하는 것은,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믿음의 마지막 결과가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벧전 1:9). 말하자면 구원은 우리 믿음의 현재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미래적 결과다. 구원 얻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장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롬 10:9). 믿음이 소망과 사실상 동의어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가령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모두 앞을 바라보는 소망과 구분되지 않는다).
* 바울이 회심의 상황을 두고 부활과 구원의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우리의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 이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과거와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현재 사이의 대조로 나타난다. 이 양자 간에는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에로의 부활 혹은 구원이라는 과격한 개념이 필요할 만큼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따라서 이런 불순종의 과거는 결코 신자들의 현재에 모습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단절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죄와 허물로 규정되는 우리의 “그 때” 와 새로운 창조로 규정되는 우리의 "지금"을 대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부활 혹은 구원은 “죄와 허물 속에서의 죽음으로부터” 살리심을 받는 것이며, 그러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여기 동원된 부활과 구원의 언어는 모두 우리의 현재를 과거의 삶과 단절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다. 과거의 죄와 죽음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의 삶은 분명 구원이요 부활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이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지르던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우리를 덮었던 죽음으로부터의 살아남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회심을 구원과 부활로 설명하는 것은 현재의 믿음과 과거 죄악된 삶의 대조를 통해 보다 확실한 순종의 삶을 격려 하려는 목회적 의도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러한 움직임은 미래의 부활과 구원을 현재로 당겨오려는 신학적 성급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미래는 신학적 말장난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미래에 이르는 과정이 “살아있는 믿음", 곧 행위와 함께 일하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시간을 우리가 조작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런 구원이 “이미”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미래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는 것은 현재에 매몰된 우리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천당 아래 분당” 이라는 농담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현재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이어진다. 물론 우리가 오늘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우리는 현재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관심 혹은 소망을 회복하자는 것은 현재로부터 눈을 돌리자는 주문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소망에 눈을 뜨자는 주문은 미래로부터 오는 소망의 빛을 회복함으로써 오늘의 삶을 보다 분명히 바라보자는 것이다. 현재가 비추는 빛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현 세대의 특징이라면, 임박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다시 보고, 이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의 특징일 것이다. 밤이 깊어도 아직 낮은 아니지만, 그래서 아직 “낮이 되었다”고 흥분할 수 없지만,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며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롬 13:12-13),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오늘에 미치는 미래의 충격일 것이다.
*희망, 오늘을 지탱하는 힘 -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물론 우리 의식 속에는 어제도 있고 내일도 있다. 어제는 내가 살았던 시간에 대한 추억이고 내일은 살게 될 시간에 대한 예측이다. 사실 과거나 미래는 의식의 산물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시간은 아니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나 미래는 모두 현재라는 노래를 더 구성지게 불러보려는 색다른 곡조들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제나 미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걷는 땅은 현재 뿐이지만, 우리의 걸음은 어제로부터 이어져 왔고 또 내일을 향해 열려져 있다. 뒤로는 과거와 얽히고, 앞으로는 미래와 얽히는 이 시간의 얽힘은 단순한 연속의 의미를 넘는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어제와 내일은 나의 오늘을 뒤흔든다. 어제의 넘어짐은 오늘의 상처가 되고, 내일의 어두움은 오늘 나의 자리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 우리는 분명 오늘을 걸어가지만, 오늘 내 걸음의 힘은 내일로부터 온다. 우리는 이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때로 내일에 대한 예감에 힘을 잃기도 한다. 여기에는 절망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붙는다. 오늘이 내일을 향해 열려진 공간이라면, 내일을 말하지 않고 오늘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현재가 “고난” 혹은 “핍박”의 파도에 휩쓸릴 때, 내일을 향한 희망은 오늘의 어둠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구명선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인생” 이야기는 곧 우리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믿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지만, 이 현재의 믿음은 과거 십자가에 대한 "추억"과 나누어질 수 없고, 또 미래 '영광'에 대한 기대와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소망과 나누어지지 않는다. 소망 하면 우리는 먼저 먼 미래를 떠올리지만, 실상 소망 역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린 또 하나의 초상에 해당한다. 우리의 오늘은 내일을 바라보는 오늘이다.
*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 이라 불린다. 전체가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증인들” 의 열전이다(히 12:1), 달리 증인이 아니라, 믿음의 속내를 삶으로 실증해 보인 믿음의 용사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부분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들의 삶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또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을 알게 된다. 사실 믿음이란 처음부터 미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을 현실로 보게 하는 확신이며, “눈에 드러나지 않은 미래"를 확실하게 해 주는 증거다(1절),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는 당연히 그가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또한 그 분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갚아주시는 분"이라는 신념을 포함한다(6절), 우리 믿음의 여정이 완성될 미래를 향해 뻗은 길이라면, 본질상 믿음이란 미래를 향한 믿음일 수 밖에 없다.
믿음이 좋았던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들”에 관한 경고를 받고 맑은 하늘 아래 방주를 준비했다(7절).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 지 알지도 못하면서 “장차 상속받을 땅”으로 순종하여 나갔다(8절). 그가 머문 땅은 “약속의 땅” 이었고, 그의 가족들은 “약속을 함께 상속할”, 공동상속자들이었다(9절). 그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설계자요 건축자이신 기초있는 도성을 바랐다/희망했다”는 것이었다( 10절). 이삭의 탄생에서도 드러나듯,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분”을 믿는 미래적 믿음이었다( 11절).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 죽었다. 그들은 모두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며, 주어진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12절), 이런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16절), 모세 역시 죄악의 즐거움보다는 의로운 고난을 더 낫게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비방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상해 주실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24-26절),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참고 견디는 믿음이기도 하다(27, 29절). 한 마디로 믿음의 용사들이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굳이 현재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소망의 사람들이었다(35절).
*미래의 약속이 견고할 때, 현재의 고난은 무의미한 고통을 넘어 미래를 향한 담금질이 된다. 현재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이런 고난에 처해 있다. 아직 죽음에 이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은 “죄와 싸우는 상황이다(히 12:4). 하지만 이것은 그저 막연한 고통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어려움은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훈육하는 교육적 징계에 해당한다(히 12:5-8), 따라서 현재의 고난은 우리로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게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히 12:9), 물론 현재의 징계는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히 12:11). 하지만 이런 징계를 통한 연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만들고 의로움과 평화의 열매를 맺도록 해 준다(히 12:10-11). 제대로 바라보면 현재의 고난은 미래를 가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미래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다. 바울의 말처럼,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낳으며, 이 연단된 인격은 우리의 소망을 현실로 만든다(롬 5:3-4).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삶을 인내한다면 또한 그와 더불어 미래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롬 8:17), 현재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곳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기에, 앞으로 주어질 새로운 도성을 우리는 바라본다(히 13:14). 이 소망을 마음에 품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치를 우리 어깨에 걸머지고 진영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히 13:13).
*굳이 복음이 필요 없을 만큼 살기 좋은 세상이다. 우리가 뱉는 온갖 불평들은 어찌 보면 행복에 겨운 교성에 가깝다. 이처럼 현재가 그럴듯할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은 위력을 잃는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기다리는 신앙은 일제 시대를 위한 것이지 국민소득 이만불의 시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교회 역시 이런 현재 속을 헤엄친다. 그 속에서 미래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또한 미래의 의미를 밝혀내고 그 미래에 승부를 걸기보단, 현재의 행복에 겨워 거기에 세례를 베풀기에 정신이 없다. 수백억을 들여 “장막을 짓는 우리들에게서 장래를 향한 소망을 읽기란 어렵지 않을까? 우리 교회의 몸짓 대부분은 내일의 영광보단 오히려 오늘의 승리를 위한 땀 흘림이 아닐까? 혹 오늘 우리 교회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오늘의 삶에 파묻혀, 구원과 심판이란 이름의 내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잊은 것은 아닐까? 오늘의 우리에게 장래의 소망은 찬물 끼얹는 훼방꾼일까, 오늘을 견디게 하는 복음일까?
*억울한 상황에서 시인이 희망을 거는 이 신적 헤세드의 본질은 그가 “모든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공평함에 있다.(12절). 대적들은 정직하지 못한 거짓으로 자신을 위협해 오지만,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바라본다. 여기서 시인의 소망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놓인다. 비록 자신의 입장이 더없이 불리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시인은 두렵지 않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들의 행위를 달아볼 것이며, 이 행위 심판의 저울 위에서 거짓된 인간들은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드러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9절), 바로 이것이 시인의 소망이 된다. 하나님이 시인의 구원이 되는 것은 그가 사람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는 고백은 복음성가로 널리 불리지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시인의 신념은 그 노래 속에 없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 이라는 외침은 계속 울리지만, 이 울림에 힘을 불어주던 하나님, 곧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신실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찬양 속에 없다. 대신 우리는 행위를 살피지 않고 “오직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새로운 하나님을 꿈꾼다. “하나님이 행위를 살피기에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구약적 희망은 "하나님이 행위를 살피신다면 우리는 끝장" 이라는 복음적 절망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시인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일까?
* 우리는 예수를 믿어 천국 간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제시한 천국의 열쇠는 말이 아닌 실천이었다. 말로 “주여, 주여”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 7:21), 사실 복음서들은 올바른 실천 없이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가르침과 경고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또한 그의 형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행위가 있어야 되는 일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약 2:24).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이런 가르침을 통해 아무런 “행위 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형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야고보 혹은 베드로의 가르침은 시편 62 편에서 보이는 구약적 행위심판의 사상과 다르지 않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히브리서나 요한계시록 역시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어두울 때 우리 신자들은 얼마나 밝을까?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라고 바울은 말했지만 빌 2:15), 우리는 이 대박 세상의 어둠에서 얼마나 밝은 빛을 내고 있을까? 사실 따져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적 가치를 들고 세상과 싸우는 데도 능했지만, 세상의 가치에 황급히 세례를 베풀고 마치 그것이 성경적 가치인 양 포장하는 데도 능했다. 세상이 대박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성경이 시종 복이라는 말로 도배되어 있으니, 복을 자주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더욱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군대의 “세례교인에 허수가 많은 것처럼,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 역시 엄청난 양의 허풍을 품고 있다. “하나님" 이라는 수식을 떼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복된 인생은 세상이 추구하는 대박 인생과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우리 입에서 “축복받았다”고 말하는 순간은 세상에서 대박 났네”라고 말하는 순간들과 얼마나 다를까? 혹 우리가 목청껏 부르는 복의 노래 역시 이 세대가 지어낸 탐욕의 곡조를 표절한 것은 아닐까?
*문제는 성경이 우리에게 복에 대한 패러다임 시프트 (paradigm
shift)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시편 128편을 보면 시인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복을 축약한다(시
128:2). 그의 시는 복으로 시작해 복으로 끝날 만금 온통 복 투성이지만, 그가 말하는 대박 인생은 결코 “수고한 만큼 거둔다"는 신의 원칙을 넘지 않는다. 심판의 종결과 축복의 도래를 선포하는 예언자의 메시지 역시 우리 보기엔 대박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 가깝다(가령, 욜 2:18-27 절을 보라), 사람들이 흥분하는 세상은 꿈
한 번 잘 꾸고 숫자 한 번 잘 골라 팔자 고치는 (혹은 망치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그런 동네다(갈 6:8).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네 손으로 수고하여 먹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며(살전 4:11-12),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자족할 줄 알라"고 깨우친다(딤전 6:8). 태어날 때 가져온 것이 없는 것처럼, 죽을 때 역시 가져갈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사는 나라(딤전 6:7), 돈에 대한 욕심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믿는 (딤전 6:9) 하나님의 나라는 대박증후군을 앓는 우리들에겐 더
없이 실망스런 나라다. 세상 사람들을 비난할 것도 없다. 복음을 믿는다는 우리 역시 자기 손으로 수고한 만큼 먹고 사는 수많은 사
람들을 “지지리도 박복한” 사람들로 멸시하고, 수고한 것 이상의 호위를 누리는 이들이라야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불러준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에게도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으라”는 선언은 덕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담에 가깝다.
*수고한 만큼 먹을 수 있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시인의 축복은 “여호와를 경의하고 그 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고대의 이스라엘이건, 신약의 교회건, 혹은 오늘 우리의 경우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은 늘 “위험한” 삶인 수가 많다. 악인의 형통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하나님을 생각하며 근신하는 이들의 삶은 언제나 힘겨운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었다(시179), 이런 삶의 본질은 현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위기의 인생들에게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다”는 한 마디는 그 어떤 대박의 소식보다도 더 값진 것임에 틀림없다. 시인의 이 한 마디가 축복 아닌 실망으로 다가온다면, 이는 나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 의 방정식이 아닌 다른 계산식을 따르는 삶, 자신의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방인의 삶에 가깝다는 말이 될 것이다(마 6:33; 빌 3:19).
*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복에 관한 것이었다. 그 복의 내용은 가
난과 눈물이었다(마 5:3-4, 눅 6:20-21), 가난과 눈물의 삶에서 복
을 생각해 내는 일은 대단한 신앙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대박난 부
자를 보며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는 사고방식 또한 마찬가지다(눅 12:20).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쪽박과 대박의 개념을 해체한다. 우리가 고대하는 세상은 부자는 지옥불로 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세상이다(눅 16:19-26). 마리아의 노래에서처럼, 복음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주린 자
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고,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는” 그런 나라다(눅 1:53). 부자들에게 “너희에게 닥칠 고생을 생각하며 울고 통곡
하라"고 말하며, 우리의 “금과 은에 슬은 녹이 우리의 살을 먹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세상이다(약 5:3). 그러니까 성경의 증거는 선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도 껌뻑하지 않는다. 성경 10독 혹은 100 독하며 난리를 치면서도, 내 마음에 안 들 땐 매몰차기 그지없다. 많은 경우 성경이란 “하나님의 말씀” 이라 떠받들고 그냥 읽기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자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야고보의 경고를 듣고서도(약 5:3), 여전히 세상의 제물에 “하나님의 축복” 이란 상표를 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말세를 지나온 것일까? 많은 돈을 두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설명하는 구절이 전체 신약 속에 어디 한 구절이라도 있는 것일까? 옛날 부르던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왜 우리 눈은 이리 어두울까?" 이런 이중성이 비단 성도들의 전유물이랴? 일전에 방송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처럼,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심은 차라리 상식에 가깝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가짜 박사 명단의 많은 부분은 목회자들의 이름으로 채워진다. “성공한 목회라는 말이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여기서의 "성공"은 세속적 의미의 성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목회의 질과 무관하게, 교인의 숫자나 건물의 숫자가 증가하지 않으면 여전히 ”어렵게 목회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신실함에 대한 존경 대신 불운에 대한 측은함을 받을 때가 많다. 이런 우리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바울의 권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기에 성경 해석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입장" 이다. 내
게는 내가 원하는 “복”이 있으며, 성경의 복이 그것과 다를 때는 조용히 이를 무시한다. 하지만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믿음은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는 거래가 아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좋은 옷 나쁜 옷 다 벗기를 요구한다. 그러니까 하늘 계단의 첫 층계는 자기 부정이다. 나의 입장을 포기하고 마치 더 잃을 것이 없는 인생처럼 주를 만나는 것이다. 물론 잃을 게 많은 우리 “부자들은 그 요구를 따를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거래를 시도한다. 괴로워하며 예수를 떠났던 성경의 그 청년과 우리가 다른 게 있다면, 그러고도 우리는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한다. 먼저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은 그런 우리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해부용 메스로 묘사된다(히 4:12). 심판은 드러냄이다. 이 드러냄은 늘 고통스럽고 또한 무섭지만, 말씀의 심판 앞에 우리의 실상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은 하늘을 향한 여정에서 빠질 수 없는 의식이다. 낙타를 바늘귀로 집어넣는 주님의 방법은 비둔한 낙타도 넉넉히 들어갈 “바늘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바늘귀라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낙타를 비우는 것이었다. 곧 모든 것을 다 버린 후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을 적으로 쳐서 복종시킨다는 바울의 말(고전 9:27)이 우리의 고백이 된다면, 우리는 그리 "천국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막 12:34).
*황무지에 돈을 버리듯, 바보에게 자기 인생을 낭비하듯,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내려오심에 관해 말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에,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내려 오셨다(롬 5:6, 8, 10), 하나님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그 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삶을 원치 않으시고, 자기의 삶을 비워 우리들이 사는 바보 온달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고, 죽음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히 2:15)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하셨다(빌 2:6-8). 한 번 발을 씻기 위해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듯, 고귀한 신의 생명이 무가치한 우리들을 위해 희생 되셨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사랑이라 부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요 3:16).
*모든 기적 이야기가 그렇듯, 사랑 이야기에 언제나 은총의 차원
이 포함된다. 황무지가 스스로 초원이 되지 못하고, 온달이 스스로
장군으로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삶의 바깥에서(extra nos) 나의
삶에 찾아오는 은총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평강공주가 찾아와 온달의 아내가 되고, 설리반 선생님이 찾아와 헬렌의 선생님이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린다"(갈 2:20). 나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 삶은 결국 은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의 삶이 극복되어야 할 얽매임의 삶이기에, 우리의 삶을 함께 하는 이 나눔 속에는 불가불 대속의 차원이 포함된다. 온달이 사는 바보 인생은 평강 공주의 구걸 인생으로 확대되고, 앤이 겪는 어둠의 고통은 동시에 셜리반 선생님의 고통으로 확대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며, 나의 죄를 위해 죽음의 나락으로 대신 떨어져 내린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고 불렀다. 우리를 “위한” 이라는 헬라 말은 “우리 위해" 라는 단순한 의미와 “우리 대신” 이라는 보다 복잡한 의미 사이를 오간다. 이런 모호함이 우연일까? 내가 나 자신을 들어 올릴 수 없고, 하늘에서부터 내게로 내밀어진 은총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라면, 나를 대신함이 없이 나를 “위하는" 길이 달리 있을 것인가?
*하지만 대속이 구원의 전모는 아니다. 공주는 바보의 아내가 되
어야 하고, 앤은 헬렌의 삶을 함께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 하늘로 오를 수 없어 은총의 손길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지만, 이런 낮아짐의 몸짓은 그저 바보의 삶에 머물고 장애의 삶에 만족하겠다는 포기의 제스처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지만, 그가 감내하신 은총의 낮아짐은 우리를 함께 하늘로 올리기 위한 심오한 전략이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우리와 함께 땅을 딛고 선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 손을 잡고 하늘로 향한 길을 가리킨다. 혹은 우리 앞서 하늘 길을 개척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를 향해 새로 열린 길을 걸어 하늘로 오르라고 우리를 재촉한다.(히 10:19-25).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죄인됨을 공유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죄인을 향한 그의 낮아지심은 우리를 아들로 변모시키기 위한 위대한 포석이었다. 하나님이 꿈꾸는 미래는 죄인의 냄새를 풍기는 우리 가슴에 이름표만 “아들” 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냄새를 풍기던 우리들이 아들의 향기,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가 죄인의 삶을 청산하고,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 곧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었다(엡 1:4-5), 이 꿈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된다(롬 8:29). 이것이 바로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두신 꿈, 곧 하나님의 “예정” 이었다.
*그래서 은총은 우리를 괴롭힌다. 공주의 은총은 바보를 장군이라 부르며 다가와서, 그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온달을 그려 보인다. 그리고는 장군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온달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은 죄인이며 원수였던 우리를 “아들”이란 새 이름으로 부르며 다가와, 그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우리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리고는 그 아들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바보에겐 무식이 당연하지만, 장군에게 무식은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된다. 그래서 온달의 삶은 바빠지고, 많은 경우 더 피곤해진다. 무식의 벽을 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헬렌의 교육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기력한 장애아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더 분주하고 더 힘겹다. 장애의 벽은 가볍게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바보인 우리들에게 장군 연습은 간단치 않으며, 죄인인 우리들에게 아들 연습은 새로운 근육을 훈련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은총에 저항한다. 되지도 않을 허황된 꿈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공주를 향해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고 고함치는 온달의 모습에서, 눈멀고 귀먹은 자기에게 글자를 깨우치려는 선생님을 때리고 그녀의 이를 부러뜨리는 헬렌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인됨을 부인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으시는 하나님의 극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애벌레가 나비를 꿈꾸기 어렵듯, 나는 지금 내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 된 내 미래를 상상해 내지 못한다. 내 앞에 막힌 높은 벽 앞에서, 나는 차라리 죄인으로 머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은총의 개념을 바꾼다. 다시 올라감이 없이 내려오는 것에서 끝나고, 빈 무덤이 없이 십자가에서만 끝나는 “절반의 성공"을 전부라 믿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해서 은총은 하나의 픽션으로 변모한다. 나는 언제나 바보로 남지만, 공주는 나를 장군이라 속아주고, 나는 언제나 죄인과 원수로 살아가지만 그런 나를 아들인 척 해주는 것이 은총의 전말이라고 착각한다. 이처럼 은총의 모양새까지 비틀어 버릴 만큼 내 좌절의 골은 깊고 넓다.
하지만 죽음에서 끝나는 이야기는 비극이지 희극이 아니다. 바보의 아내로 끝나는 이야기는 감동스럽기는 하지만 감격스럽지는 않으며, 애절하기는 하지만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바보는 바보로 남고 공주는 평생 그 시중을 들어줄 수 있지만, 선생님이 글을 배워 헬렌 대신 모든 글을 읽어줄 수 있지만, 여기엔 우리를 흥분시킬 가슴 벅찬 이야기는 없다. 공주가 바보를 대신하면 할수록, 바보는 더욱 바보의 삶에 견고해져 가고, 앤이 헬렌을 대신하면 할수록 헬렌의 장애는 더 단단한 현실로 굳어져 간다. 애절한 사랑은 있지만 희망은 없는, 죽음을 향한 동반여행만 있을 뿐이다. 달라짐의 괴로움은 면할 수 있겠지만, 이 고동 없음이 우리의 희망이 되기는 어렵다. 나는 지금 이 모습으로 머물고, 나대신 그리스도를 내 해답이라 믿고 싶지만, 내 삶은 건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성공신화는 오히려 내 실패를 더 뼈저리게 만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죄의 종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 삶의 결과가 죽음 아닌 무엇이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롬 6:16; 갈 6:7-9)? 영생에 이르는 길을 걷지도 않으면서 영생이라는 종착역을 꿈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 13:4).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믿음을 한시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아들의 미래를 꿈꾸고 바라며, 그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견딘다(13:7). 그리고 이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에 우리 자신이 동참하도록 우리를 다그친다. 우리가 아들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우리의 불신과 싸우며,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독려한다. 오래 전 한 선지자는 이를 두고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불렀다(사 9: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이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요청한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에 우리 자신이 동참하기를 촉구하신다. 나는 나를 살릴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그 부활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다.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우리의 "죽음"과 "하나님의 능력” 사이에서 결단한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에 우리의 삶을 맡기며,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 어렵지만 가슴 벅찬 "올라감” 의 여정을 시작한다. 편안한 물러섬의 유혹을 뿌리치고서, 죄인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며(고전 9:27; 히 12:4), 이 싸움을 통해 영문 밖으로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걸음을 따라 하늘로 가는 길을 밟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그림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듣노라면, 우리는 집을 지키는 아들과 집을 나간 탕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탕자가 된 아들과 집을 나가 탕자가 된 아들을 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큰 아들은 격분한 음성으로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항변한다(29절), 의미심장하게도 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두고 “종으로 섬겼다”는 표현을 선택한다. 어쩌면 그는 아들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들됨을 누리지 못한, 아들이면서도 종의 모습에 가까운 그런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명을 어김이 없었다”는 계산 역시 부자의 관계보다는 주종의 관계에 더 어울린다. 아들의 모양은 있었지만, 아들됨의 알맹이는 사라진 껍질의 삶이다. 말하자면 그는 집안에서 스스로 탕자가 되었다. 귀가하는 그의 모습이 둘째의 귀향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 그런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오는” 큰 아들의 모습은 “들에서” 돼지를 치다가 “아버지에게 오는” 둘째 아들과 비슷해 보인다면 비유를 잘못 읽은 것일까(15, 20, 25절)?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었음을 망각하고 종처럼 행동하는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탕자가 되었던 아들과 그렇게 다를까?
* 문 밖에 서서 돌아올 때까지 둘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또 한 번 문 밖으로 나가 또 하나의 탕자와 질긴 대화를 나눈다(28절). 둘째를 끌어안고 기뻐 울었던 아버지의 은총은 불평하는 맏아들을 다독이며 설득하는 은총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땀 흘림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 아들의 부지런한 달음질이 은총의 손바닥 위를 달린 것임을 상기시킨다. 아버지의 전략은 은총의 구경꾼을 다시금 은총의 수혜자로 돌려놓는 것이다. 은총의 쓰라림은 은총의 감격 말고는 달리 치유할 도리가 없는 탓이다. 은총을 배 아파하다 탕자가 되어버린 이를 다시금 은총에 감격하는 아들로 바꾸어 놓는 일이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는 한 마디는 아들의 관심을 그의 숨찬 달음질에서 그가 선 은총의 손바닥으로 돌려놓는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아차!” 하며 잊었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 낸다. “아버지가 각각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는 그 사실 말이다(15:12), 동생의 은총을 보며 나는 “이건 아니잖아!”를 외치지만, 아버지를 향한 나의 태도 또한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 오히려 "이건 아니잖아!"를 외쳐야 할 사람은 그토록 끊임없는 은총을 베풀고 계시는 아버지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아버지는 인내로 기다리며 아들을 설득한다. 둘째를 향한 측은한 은총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은총이 아닌가!
* 마태복음의 “먼저 온 자들 역시 은총을 잊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루의 벌이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침 일찍 일거리를 얻었을 때에, 그들은 그 은총이 감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한 데나리온이면 결코 박한 대우가 아니다. 당연히 기꺼운 마음으로 일을 했을 것이다. 적어도 “동생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른 시간에 들어온 사람들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다섯 시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먼저 온 사람들과 사정이 달랐을 리 없다. 다행히 일감을 얻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하루 종일 일감을 못 구해 포기할 무렵, 한 시간 정도라도 일을 얻어 다만 몇 푼이라도 벌 수 있게 된 그런 사람들이다. 은총의 방식이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가 은총의 밭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은총의 밭에서도 비교는 이루어진다. 은총의 수혜자가 은총의 구경꾼 입장에 서고, 감사의 노래는 원망의 씩씩거림으로 바뀐다. 이처럼 남이 받는 은총은 나의 은총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 아버지와 아들 대신 고용주와 품꾼의 관계 탓일까, 마태복음의
주인은 누가복음의 아버지보다 한결 단호하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주인의 말은 우리가 인정하기 거부하는 중요한 진리를 깨우쳐 준다( 13절),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한다고 (너에게)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인의 물음은 수혜자이기를 그치고 구경꾼으로 전락한 우리의 가난함을 여실히 폭로한다. 이야기의 결말은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누가복음 식으로 하자면, 탕자가 아들이 되고, 큰 아들은 오히려 탕자가 된다.
이처럼 무서운 경고로 끝을 맺건, 아버지의 다감한 다독거림으로 끝을 맺건 사태의 본질은 동일하다. 이처럼 은혜는 어렵다. 내가 받은 은혜는 물에 새겨져 벌써 흘러가고, 남이 받는 은혜는 돌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셨음을 잊고, 아버지의 재산이 실은 다 나의 것이었음을 잊고, 주인과 나와 맺었던 그 고마운 계약도 곧잘 잊어 먹는다. 그래서 우리 역시 때론 마태복음의 경고를, 때론 누가복음의 다독거림을 듣는다. 은혜의 구경꾼 아닌 은혜의 수혜자 자리를 잃지 않도록 말이다. 우린 언제나 나의 은혜를 남의 은혜와 비교하다가 나의 은혜조차 잊어버리는 실수로부터 자유로울까?
*하지만 모든 것을 “대신 해주는 것이 은혜는 아니다. “대속"이
라는 우산 하나로 은혜의 소나기를 가리기는 어렵다. “대속에 대한 신뢰는 쉽게 은혜에 대한 경멸로 변질된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기에 우린 이제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으로 구원을 누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십자가의 굿을 보며 구원의 떡을 먹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이제 내 삶은 구원에 아무 여파를 미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은혜의 승리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는 이런 은혜의 논리에 끊임없이 반기를 든다. 구원이 아무리 “거저”라고 해도, 내 무기력한 삶이 내 구원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내 삶이 늘 고민스럽다. “오직 은혜” 라면 자동적이어야 할 구원의 확신조차 미꾸라지처럼 쉽게 내 삶의 틈새를 빠져 나간다. 이것이 믿음의 결핍일까? 나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무의미해지는 은혜의 정상에 아직도 못 오른 탓일 까? 내 삶에의 집착을 버리고 은혜만 의지하며 기뻐야 하는데,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불신앙의 발버둥일까? 한 없이 이기적이면서도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김 집사처럼, 그런 철판 같은 속편함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말일까? 하지만 구원이 지금 내 삶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로 하여금 오늘의 시간을 살게 만든 하나님의 구원이 정작 오늘 나의 삶과는 무관한 무엇이라면, 나는 그 소식을 복된 소식으로 느낄 수 있을까? 높이 솟은 나무일수록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버티는 것처럼, 영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소망 역시 내 오늘의 삶 깊이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내 삶에 아무런 공명이 없어도 천상의 음악이 여전히 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먹구름 뒤에도 태양은 빛날지 모르지만, 구름 밖으로 나오지 않는 태양만으로 빛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삶을 대신하기만 하는 구원이 과연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죄가 없었다”(히 4:15), 우리는 이 말을 해석하는데 있어 보다 신중해야 한다. 이 진술의 일차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순결이 아니라 그의 철저한 순종이다. 원래 죄가 없는 분이어서 시험을 다 이기고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았지만 철저히 순종하셨고, 그러기에 그에겐 “죄가 없다”는 것이다. 시험을 받아 실패했던 광야의 이스라엘이 나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시험을 받아 그 시험을 이겨내셨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아들이셨지만, “받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
함을 배웠고”, 이를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히 5:8-9). 말하자면 그는 나처럼 한계 속의 인생을 살면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여기서 구원의 가능성을 읽어 낸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데는 고난을 통해 순종의 배움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그는 구원자로서의 온전한 자격을 획득했다. 신적 온전함을 포기한 채, 인간의 고난을 겪으면서 온전함에 이르러야 했다(2:10). 이것이 구원의 방식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나 역시 고난 속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
를 얻는다. 그의 고통이 의미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죽음의 고통 아
래 있기 때문이며, 그의 시험이 흥미로운 소식인 것은 나 역시 동일한 시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길은 “대신” 가신 길이 아니라 “앞서” 가신 길이 된다(히 6:20).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 예수를 두고 내가 가야할 길을 만들어 내고, 그 길의 안내자가 되시는 분, 내 구원의 “개척자” 요 “선구자” 라는 칭호를 단다. 믿음의 길을 먼저 가며 우리를 부르시는 분, 순종으로 온전케 된 사람으로 우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 그래서 그는 우리 “믿음의 개척자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이다(히 12:2; 2:10: 이 구절들에서 “주”로 번역된 단어가 사실은 “개척자, 선구자” 라는 의미의 단어다).
* “그 후에야”로 번역된 "후토스" 라는 접속사는 바울서신에서만 해도 70회 이상 등장하는 매우 흔한 단어다. 이 단어는 “이와 같이” 혹은 “이처럼" 이라는 뜻인데, 어떤 두 가지 대상의 유사성을 포착하여 논증을 끌어가는 기능을 갖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고 살리신다. “이와 같이" 아들 또한 그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요 5:11), 곧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의 사역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 “이와 같이" 인자 또한 들려야 할 것이다(요 3:14), 여기서 광야에서 뱀의 들림과 인자의 (십자가) 들림 사이에는 모형론적 동일성이 존재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사신다. “이와 같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을 향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롬 6:11),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위 한 근거가 된다. 위의 예에서처럼, “이와 같이"는 어떤 두 대상 사이의 본질적 유사성 혹은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둘 사이의 시간적 선후관계는 전혀 암시되지 않는다. 물론 나중 일을 이전 일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여기서 시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라는 말의 기능은 오히려 이 시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동일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각자 자신을 살피게 하라. 그리고 이렇게 성찬을 먹게 하라" 보다 부드럽게 풀자면, “각자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자신을 살피면서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이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을 살피고 “이와 같이 성찬에 임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을 살피고 문제없는 것으로 확인된 후에야” 성찬에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 성찬에 임하되 “이와 같이” 곧 자신을 살피는 태도로 그리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권고는 성찬 참여를 위한 전제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할 때의 올바른 태도에 관한 것이다. 자격이 안 되면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먹을 때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 누가복음이 전해주는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자신의 불신을 후회하며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가족들을 믿게 하고 싶었던 부자의 “청탁”을 거부하며, 나사로를 품에 안은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언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저들에게 들으면 된다”(눅16:29), 그들을 일깨우기 위해 부활의 충격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부자를 향해 아브라함은 이렇게 잘라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찌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눅 16:31). 성경을 깨닫고 믿지 않은 상황이라면 부활이라는 기적조차도 그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 엠마오 이야기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이라도 이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말씀을 깨닫는 뜨거움이 없다면, 부활의 충격도 무의미할 수 있다.
누가의 부활절 이야기가 부활의 중요성을 깎으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역으로 누가의 관심은 말씀을 깨닫는 일의 중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부활은 우리의 인식을 뒤집는 혁명적 사건이지만,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외부적 충격도 사태의 근본을 바꾸지는 못한다. 나사로가 부활한다고 우리의 근본적 불신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며, 주님의 부활하여 나타나신다 해도 우리는 그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겐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그 말씀이 우리에게 불지피는 “뜨거움”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깨달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고, 이렇게 열린 눈으로 우리는 부활을 발견한다.
* 사태의 핵심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처음 복음이 선포되었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는 설득해야 할 메시지가 아니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부활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났고, 부활이라는 초월적 체험 앞에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으로 새롭게 이해되었고(행 2:24: 3:15; 롬 8:10-11 등),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없이는 설명될 수 없었다. 예수 역시 메시아일 뻔하다가 실패한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한 마디로 기독교라는 놀라운 현상은 이 부활 체험의 “역사적 파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구 철학의 전 역사가 플라톤에 관한 주석이라면, 기독교의 전 역사는 바로 이 부활 사건에 관한 “역사의 주석" 이다. 부활 없이는 아무 것도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순절 성령조차도 예수의 부활과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부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행 2:32-33).
* 예수의 생애에 있어
서 이 부활과 승천은 실상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신 사건,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적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여정이 전제되어 있다. 바울의 논리 속에서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 겸손한 자기비움의 직접적인 결과로 제시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2:9). 이처럼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의 본질을 밝혀준다. 뒤집어 말하면, 이렇게 십자가가 불발탄 아닌 의미 있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이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졌다는 깨달음에 근거한다.
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유독 십자가가 부각되는 것은 세상 지혜에 민감한 고린도인들, 또 율법에 현혹된 갈라디아인들의 행태와 관련된다. 예수께 대한 신앙은, 세상 지혜이건 유대 율법이건, “육체”에 속한 것들과의 단호한 결별을 요구한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 지혜를 폐하는 하나님의 "어리석음" 으로,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죽음" 으로 묘사된다. 바울은 이런 단호한 결별을 강조하는 한 방법으로 십자가라는 과격한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언제나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고전 15:12-20). 그리고 이 분은 지금 그를 믿는 자를 ”살리시는 영“으로 교회 공동체를 다스리신다(고전 15:45). 아무리 십자가를 강조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고백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에 속한다(갈 1:1; 고전 1:7).
*당연한 일이겠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바로 이 부활의 하나님
을 향한 믿음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4:17. 22). 그는 하나님에게서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는 창조주의 능력을 보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롬 4:23-24). 이 “우리"란 다름 아닌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들, 그래서 이 부활 신앙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우리들이다(롬 4:24).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고백하지만(롬 10:10), 여기서 믿고 고백하는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부활 신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롬 10:9),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만, 이는 우리가 헛되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헛되지 않은 신앙이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굳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부활신앙을 가리킨다(고전 15:1-11, 14, 17).
*성찬에 관한 글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눈물로 성찬을
먹지만 초대교회는 기쁨으로 성찬을 나누었다(행 2:42, 46), 그들에게도 성찬은 주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즐거운 기다림의 문맥에서였다(고전 11:26; 롬 5:1-2),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바라보는 십자가는 나를 대신한 “고통”에 대한 심리적 심취가 아니라, 죄에 대해 죽게 함으로써 새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한다(고후 5:14-15). 그래서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심" 혹은 우리 자신을 씻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십자가의 피는 “죽은 행실” 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여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든다(히 9:14; 10:22). 또한 우리를 씻어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혹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제물로 설 수 있도록 만든다(엡 5:26-27). 우리가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도 상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은총과 믿음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 바빴던 교회는 복음 공동체다운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힘은 쉽게 교회를 물들이지만, 복음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모습은 확인하기 쉽지 않다. 소위 “성공한” 교회와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소리겠지만, 참된 복음의 흔적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충격” 이 필요하다. 새로운 삶으로 이
어지지 않는 죽음은, 해답 없는 질문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졌고, 이 부활은 현재 우리 삶의 본래적 정황
이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새로움"(롬 6:4), 곧 ”영의 새로움“(롬 7:6)이다. 이 새로운 능력을 체험하며 드러내는 것이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참된 성찬의 방식이 될 것이다. 갈보리 언덕의 슬픔은 빈 무덤 앞에서의 놀라움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뜨거움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부활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성도들이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되도록 기도했던 바울의 간절함이 우리의 간절함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엡 1: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