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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체코->오스트리아->헝가리->루마니아->그리스->터키->인천 2013.6.21~7.6 | |
그리스 그리스의 공식명칭은 그리스공화국(Hellenic Republic) 면적 131,957km2에 인구 11,015,000명 수도는 아테네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공식언어는 그리스어, 화폐단위는 유로(euro), 수도는 아테네. 북쪽의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있으며 동쪽에 터키와 접한, 반도인 그리스의 본토는 남서쪽은 이오니아해, 남쪽은 지중해, 동쪽은 에게해로 둘러싸고 있다. 지중해에 이 나라 최대의 섬인 크레타(크리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 266km로 뻗어 있으며 섬과 반도 사이에는 크레타 해가 있다. 1,400개 섬들과 총길이 4,000km를 넘는 해안선을 가진 그리스의 경관은 바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러 하구의 작은 평야들과 비옥하고 좁은 산간분지 및 골짜기와. 내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핀두스 산맥은 북서쪽 국경에 있는 알바니아에서 그리스 중앙을 거쳐 펠로폰네소스까지 뻗어 있다. 올림포스 산은 최고봉으로 2,917m에 이른다. 그리스는 지질학적으로 활화산대에 속한며, 연평균 강우량은 대체로 서해안 지역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감소하여 코르푸 섬의 북서부는 1,320㎜이지만 아테네에서는 406㎜ 이하가 된다. 겨울은 전국에 걸쳐 온화해서 평균기온 6∼12℃이고 여름은 평균 26∼28℃이다. 국토의 약 1/5이 삼림이다. 특히 북부지방은 검은소나무 삼림이 대부분이고 중부와 남부지방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삼림인 관목 밀생지대이다. OLYMPIC항공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항에서 10시 45분에 이륙한 OA382기는 1시간 반정도 지나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였다. 잠시나마 기내에서 그리스와 아테네, 코린트, 메테오라등 우리의 여행지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리스 야산은 올리부나무로 가려져 있지만 건조하고 삭막해 보였다. 신화의 도시 아테네 시내가 보인다. 아테네 철학과 문명의 고장 신의도시 아테네는 무엇보다도 고대의 신전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하다. 그중 이 도시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위해 세운 직사각형의 원주식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 건축물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원래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전이었던 에렉테움과, 아크로폴리스의 벽을 통해 입구가 이어지는 프로필라이아 신전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슭 남쪽에는 헤로데스 극장과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고 북서쪽에는 고대 장터였던 아고라가 있고. 사도바울이 그의 2차 선교 기간 중에 헬라 철학파들과 한판대결을 펼쳤던 아레오바고 바위 언덕이 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아고라 부근에서 발굴된 거리들과 아크로폴리스 북쪽 사면의 화려한 플라카 지구에 고대 아테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국회의사당 건물 부근에는 국립공원과 신타그마(헌법) 광장이 있다. 특히 광장에는 고급 호텔과 카페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중요한 박물관으로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국립고고학 박물관, 비잔틴 박물관이 있고, 학술기관으로는 아테네대학교(1837 재설립), 그리스 아카데미, 국립도서관이 있다. 오래전부터 교통 중심지였던 아테네 시는 철도망을 통해 그리스 곳곳과 연결되며, 그리스의 주요항구인 피라이우스는 그리스 해운업의 중심지이고. 현대적인 도로들이 아테네시를 둘러싸고 있고, 엘리니콘 공항이 시 바로 남쪽에 있어 시에 접근성도 좋다. 귀빈식당 그동안 동유럽 일기는 시원하고 흐린 날씨였는데, 아테네 공항에 내리자 마자 뜨거움과 더위가 엄습해온다. 공항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나눠타고 찾아간 곳은 '귀빈식당'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일행중에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과 전에 한 교회에 교인이었다는데 10 여년 만에 집사님 하면서 반갑게 만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택의 창문엔 자외선 차단을 위한 차광막이 설치되어있고, 가로등은 건물과 건물을 로프로연결하여 도로 중앙 상공에 설치되어있는모습이다. 올리브나무 점심을 먹고 아테네의 상징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에 고대의 흔적들이 보인다. 올림픽 경기장도 볼 수 있었다.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이다. 별로 높지않은 산이다. 여름철이지만 가볍게 걸어서 올라간다. 그러나 철학과 문명의 높이를 따진다면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세계 정상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는지 대리석 돌들이 반질반질 하여 햇빛이 반사되어 뜨거움을 더하는데 고맙게도. 우거진 올리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준다. 아테네가 처음 생길 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올리브를 선물했다고한다. 사실 아테네는 건조한 도시다. 3개월간 비가 안 내리기도 하니. 이런 기후에서 그나마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올리브였다. 올리브 하면 보통 이탈리아를 생각하는데, 그리스 올리브는 이탈리아로 수출한다고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보통 사 먹는 올리브유는 정제유인데, 여기서는 제대로 짜낸 진짜 압착유를 사용한다며. 한 병 정도는 꼭 사가라는 가이드의 권유에 몇병인가 사왔는데 남은것은 한병도 없다.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의 고대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polis)에 '높다'는 뜻의 형용사 아크로(acros)가 합해진 말로서 고대 그리스 도시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신석기 시대부터 폴리스의 주거지가 발굴된 곳으로 미케네 시대의 성벽 유적이 남아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6,70m의 언덕에 동서 약 270m, 남북 약 150m 정도의 크기이며 이미 미케네 시대부터 그리스의 주요 신들을 섬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엽 페이스트라투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곳에 아테나 신전과 아르테미스 신전이 세워졌으며 도시의 수호신인 아데나 여신을 기리기 위한 축제도 열렸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에 페르샤의 침입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신성한 지역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페리클레스의 시대라 불리는 기원전461-429년에야 아크로폴리스는 전성시대를 맞는데, 이때에 파르테논 신전과 프로필레아, 에렉테움 신전, 니케 신전 등이 세워졌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아크로폴리스를 올라가다 남쪽아래로 보면 로마 집정관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세운 극장이 보인다. 헤로데스 아티코스는 2세기 사람으로 그리스 앗티카 지역의 마라톤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뛰어난 선생님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뛰어난 웅변가, 철학자, 작가로 성장했다. 그는 특히 로마의 귀족사회에서 인기가 많았고 평생 동안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143년에는 consul(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그는 또 후에 로마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치기도 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은 매년여름철 아테네 페스티벌을 비롯해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등이 열리는데, 음악제에 우리나라의 성악가 조수미씨가 찬조 출연했는데 조수미가 더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블레의 문(Boule Gate) 아크로폴리스 입구로 사용되는 방어용 성벽의 문으로 이 지역을 발굴한 에르네스토 블레(Ernesto Boule)의 이름을 딴 건축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는지 대리석 계단이 반질 반질 미끄러우니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아크로폴리스의 정문인 프로필라리아Propylaea를 지나면 2,400년 넘게 언덕 위에서 세상을 지켜본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움 신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리의여신 리케신전 블레의 문을 통과하니 우측에 리케신전이 있고 더 올라가니 오른쪽에 파르테논 신전이 왼쪽엔 에렉테움 신전이 먼저 들어온다. 바울이 선교할때는 신전과 신전사이 이 넓은 공간에 알수 없는 신까지 온갖 우상의 자리였던 곳이다. 에렉테움 신전(Erecthion Temple) 아테네의 전설적 왕 에레크테이온의 이름을 딴 신전으로 BC 421~406년에 건립되었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들 중에서 가장 신성하고 신화적인 에렉테움 신전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프로펠리아를 지나 왼쪽, 즉 파르테논 신전의 맞은 편에 있다. 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며 아테나 폴리아스 신전과 에렉테우스 신전, 그리고 님프 또는 판드로수스(케크롭스의 딸들 중 하나) 신전 등 여러 신을 모신 신전으로 구조가 복잡하다. 특히 이 신전에서 재미있는 것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올리브 나무를 주어 수호신이 되었다는 아테나 여신이 내려준 올리브 나무가 에렉테움 앞에 있었고 이 나무는 폭격을 맞고도 더 잘 자랐다고 한다. 동쪽에서 보면, 에렉테움은 주랑현관을 가진 이오니아식 신전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양쪽에 크기와 높이가 다른 주랑 2개가 튀어나와 있는 길다란 직사각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렉테움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몇 년 전에 복원된 카리아티드 주랑이다. 건물 남서쪽으로 돌출한 이 주랑은 아름다운 여인상 6개가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카리아티네스(Caryatines) 상으로 불리는 여섯 명의 상이 기둥을 대신해 주랑을 받치고 있는데 모두 모조품이다. 4개는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1개는 대영박물관, 1개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6명의 처녀는 이오니아 장식을 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Temple)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중심부에 위치한 아크로 폴리스 언덕에 위치한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된 신전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보통 도리스식은 34개의 기둥인 데 반해, 파르테논 신전은 46개로 귀한 신분을 증명한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건축물의 걸작이다. 약 2500여년 전에 건축된 건축물이지만 사진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교하게 건축된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세계적인 건축물이다.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주도로 피디아스와 익티노스가 설계를 맡아 기원전 447년부터 15년 정도 걸려 지어진 이 신전은 도리아 양식 기둥의 건축적인 아름다움은 물론이려니와 오늘날에는 대부분 없어져버린 신전의 조각작품들도 신전 건물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25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그리스의 신전들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 역시 신전 본래의 기능이 아닌 다른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기원후 6세기에는 기독교 교회로,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 당한 뒤에는 모스크로... 1687년 9월 26일에는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어.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의 지붕은 날아가고 남쪽 기둥 6개와 북쪽 기둥 8개가 파괴되었으며 내부공간과 아름다운 벽장식 조각 등이 크게 훼손되었다. 지금도 복원공사가 한참인 유적지에는 돌더미와 무너진 기둥 그리고 공사용 철구조물과 크레인 사이에서 신전의 모습을 상상해볼수이다. 신전의 규모는 31X70m인 기단 위에 정면 8개, 측면 17개의 기둥이 받침대 없이 직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둥 모양은 배흘림(기둥 부풀리기) 방식으로 시각적인 효과까지 고려하였다고 안내자는 힘주어 설명한다. 신전의 가운데에는 황금과 상아로 된 10m 높이의 아테나 여신상이 있었으며(로마제국 시대에 없어짐) 신전 내부의 벽면에는 신화의 장면들과 아테네와 연관된 역사적 전투 장면들이 있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 원형극장 아크로폴리스에서 남쪽으로 내려다 보면 원형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보인다. 술의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기 위하여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신전으로 직사각형의 초석은 지금도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Alkamenis에 의해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신상이 세워져 있었고. 신전 옆으로 원형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위치해 있다. 디이오니소스 원형극장은 문명의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아테나인들의 주 음악당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고대부터 근래까지 드라마 예술의 요람이 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곳에서 Aeschylus, Sophocles, Euripides의 비극과 Aristophanes와 Menandros의 희극들이 시연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모든 그리스 고전연극이 이곳에서 초연되었다고한다. 디오니소스 극장은 예술가이자 연설가, 동시에 집정관이기도 한 Lykourgos에 의해 복구가 이루어져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후 검투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로마인들에 의해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고한다. 헤파이토스 신전 아고라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유적이 또 하나 있다. BC 5세기 중엽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을 위해 지어진 신전으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신전 중의 하나이다. 헤파이토스는 올림포스 12신 중의 하나이다. 한 때 테세우스 신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신전의 내부와 외부의 조각이 테세우스 공적을 묘사한 것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도리아식의 신전 이지만 예술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주목을 못 받고 있다고 한다. 제우스 신전 아크로폴리스 전망대(Belvedere)에서 아테네 시가지를 바라보면 온통 하얀 집들이다. 적색의 기와지붕들. 너머로 제우스 신전이 보이고 근대올림픽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어서 제대로 식별이 되지는 않지만 제우스신전의 기둥은 가장 화려한 코린트 양식이다. 이 신전은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큰 규모로 기둥 수가 104개, 기둥의 높이가 17m에 이르러 파르테논 신전의 4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에 우뚝 선 파르테논 신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신화에 의하면 데칼리온이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대홍수 때 살아남았는데, 큰 물이 땅 밑으로 빠져나가는 틈을 보고 이 자리에 신전을 세웠고 이 후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이 신전 밑에 뚫린 구멍으로 벌꿀을 쏟아 부어 봉헌을 했다고 한다. 이 신전 공사는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는데, 완공되기까지 700여년이 걸렸다고 한다. 제우스가 그의 딸이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올려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뒤편으로 보이는 관중석이 올림픽 주경기장 이다. 1896년 제1회 올림픽이 열린 주경기장으로 약 4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특히 말발굽 형상의 트랙이 인상적인데. 2004년 올림픽 때 마라톤의 마지막 골인 지점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 문 제우스 신전을 완공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인지 하드리아누스 문이 앞쪽에 보이는데. 하드리아누스 문은 터키 에베소에서도 보았던 것과 같은 모형 같다. 아레오바고 (Areopagus) 아크로폴리스에서 북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레스 신의 언덕 또는 화성의 언덕" 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아레오바고 언덕이 보인다. 그 언덕에서 소집되었던 아테네 공회의 명청 이기도 한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재판관 들은 재판을 진행하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 하기도 하였으며,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동안에 그 당시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추종자들에게 붙들려 그 곳으로 끌려갔다. 이때 바울은 아레오바고 공회 앞에서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게 되고 그들과 변론하였다. 그 결과 공회원 가운데 한사람이였던 디오누시오(DIonysius)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AD51년경 제 2차 전도여행 때에 아테네(아덴)에 도착 하여. 아덴의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이는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당시 학자들에게 예수님이 구세주 이심을 전하고 부활을 증거 하였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느뇨 하기도 하고, 또한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당당하여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한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무엇이 부족한 것 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그들 중에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조롱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해여 다시 듣겠다 하며 믿는 자들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행:17:18-31)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온 우리는 버스로 아테네 시내를 돌고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여기가 바로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이다. 박물관 내에는 수많은 대리석 조각품과 청동제품, 도자기, 금은 장신구, 벽화 등등 그리스 전역에서 발굴된 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데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흑백 사진으로 볼 수 있었던 것들의 실체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이다. 1층에 48개의 전시실이 있고, 2층에는 그리스 각지에서 수집된 도자기 전시실이 49실부터~56실까지, 이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관람을 시작해 보자 도자기 상상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인 기원전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는 토기를 비롯하여 무덤에 비석처럼 사용했다는 항아리등 도자기들이 많이 보인다. BC 760-750년대 유물로 좀전에 올라갔던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는 케라메이코스 유적 묘지에서 나온 아티카식 항아리로 항아리 중앙부 그림에 매장하는 모습을 그려놨는데 죽은 사람을 안치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슬퍼하며 그를 애도하는 것 같은 모습이보인다. 석관 뚜껑부터 몸체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석관 황금그릇들 포세이돈 청동상 15전시실 중앙에는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의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완벽한 몸매의 ‘포세이돈 청동상’이 있는데 전나의 균형 잡힌 몸매에 무언가를 던지는 자세로 신과 같은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모습에 유실된 부분을 추정하면 바다를 다스리는 삼지창을 가진 포세이돈으로 추측할 수있다. 석상 뿐만 아니라 전시관에 있는 청동상들도 하나같이 팔등신 미남에 멋진 골격과 근육이 그 옛날에 예술가들의 예술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조각상 고대의 그리스 인들은 모두 조각처럼 생겼었나보다. 기원전 5백년대 제작된 쿠로스상은 크로이소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상적인 근육을 보여주는 조삭상으로 한때 탈취되어 프랑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은 나체로 운동을 하는 일이 흔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예술가들도 남성의 몸에 익숙하고 이를 이상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에는 이렇게 잘 생긴 조각상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거의 형태가 없는 조각상들부터 보존이 잘되어진 조각상들까지. 신들의 틈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인 장 고린도 고대 도시국가중에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가장 영화로운 삶을 누렸던 고린도는 발칸 반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노루목과 같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주전 5세기에 이미 30만 인구가 살았으며 에게해의 겐그레아 항과 이오니아해의 레헤온 항이 있어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고린도의 남쪽에 사도바울이 자주 이용했던 겐그레아 항구는 지진으로 대부분의 유적이 바다속에 잠겼으며 현재 부두의 일부분만 육지에 남아있고, 침수된 부분에서는 해벽과 등대와 항구 등이 발굴되었다고한다. 겐그레아에 대한 성경의 기록으로는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롬16:1)" 또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행18:18)" 고린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주전 1,800년 페니키아 인들과 왕래가 있었으며 미케네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이어 에올리안 민족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주전 1,200 년경부터 도리아 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약 900년 경에는 문화가 도리아 식으로 바뀌었다. 주전 8세기경부터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코르푸 섬과 시실리 섬의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확보했고, 주전 5세기 경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중의 하나였다. 주후 50~52년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러다 1858년의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현재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있는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뉘어져 있는데, 실제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에 복음전파를 했던 곳은 구 고린도이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여 바울의 본업이었던 장막을 만들며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지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1~4)" 고린도 운하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코린트는 아테네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코린트 유적지에 닿기 전에 만나는 곳이 칼로 싹둑 잘라낸 것과 같은 코린트 운하이다. 이오니아해의 코린트 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6.4km 길이의 운하로 수천 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폭은 25m(바닥은 21m), 수심 8~10m,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80m라고 한다. 작은배는 저렇게 혼자 지나가지만, 대형 선박은 운하의 폭이 좁은 관계로 스스로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인도하는 선박이 따로 있어 앞에서 끌어 운하를 지난다. 이 거대한 협곡을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파 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땅의 토질이 일단 삽을 대면 모래부스러기처럼 쉽게 파낼 수 있는데, 바람이 불고 비를 맞으면 쇠처럼 단단하게 변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저 아래가 배가 다니는 운하이다. 에게해와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이 운하는 세계 3대 운하 중 두 번째로 건설된 운하이다. 이 운하 덕분에 아테네에서 이탈리아까지의 항로가 320km나 단축되었다 한다. 폭25m의 운하가 우리의 발 아래에 쭉 펼쳐져 있다. 운하의 다리 위에서 보면 북쪽의 이오니아해의 고린도만과 남쪽 겐그리아(행18:18)가 있는 에게해의 사로니만이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의 운하이지만 바위를 깎아 내려간 그 깊이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것이 2000년전 작업이 중단되었던 이유를 알 만하다. 고린도 운하는 고대 고린도인 들로부터 만들기를 계획하였으나 기술과 재정문제로 실패하고, 주후 40년경에는 이집트인들이 고린도만의 수위가 사로니만의 수위보다 높아 운하를 만들 경우 에기나섬이 침수될 것이라하여 중단하기도 했다. 주후 67년에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수천명의 죄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 19세기말에 와서야 완성이 되었다. 오랜 기간을 두고 두번에 걸쳐 작업한 흔적이 절벽에 선명히 나타나 있다 1881~1893년까지 약 12년에 걸쳐 프랑스 기술진에 의해 완공되기 전에도 그리 크지 않은 배는 땅위로 올려 올꼬스네온(배를 견인하는 마차)를 이용하여 배를 옮겼으며 운하의 서쪽 끝에 가면 그 당시 이용했던 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이 길을 Diolkos라 하였으며 폭은 3~5.5m이고, 주로 선실이 없는 전함을 옮겼으며, 상선일 경우에는 겐그레아 부두에서 선내의 짐을 하역한 후에 배를 가볍게 하여 고린도만의 레헤온 항구로 옮겼다고한다. 고린도가 있는 필레폰네소스 반도는 본래 육지로 붙어 있었는데, 고린도 운하가 개통되면서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 되었다. 고린도 운하는 양안이 바위로 이뤄진 언덕을 칼로 자르듯 직선으로 파 내려가 운하를 만들었다. 잠수교 작은 배가 지난후 자동차와 사람들의 통행을 위하여 물속에서 잠겼다 올라온 잠수교 운하의 절벽 위쪽으로 교각이 없이 대단위 트러스로 제작된 두개의 다리가 있고. 남쪽의 인도와 자동차 길을 겸한 다리는 운하의 낮은 곳이어서 이쪽 저쪽이 잠수교로 연결되어. 배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다리가 잠기고 지나가고 나면 올라오기를 반복한다. 북쪽의 높은 곳은 배가 지나다니는데 불편이 없으므로 항시 있는 견고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길이가 약 7,80m로 운하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관계로 다리의 길이도 짧은 편이다. 고린도 아크폴리스 고린도 운하에서 고린도 유적지로 가는길 눈앞에 해발 566m의 돌로 된 언덕 도시인 고대 고린도 아크로고린도(고린도 아크로폴리스)가 웅장한 자태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 도시들은 대부분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보다 높고 위압적이다. 정상 부분에 성곽을 쌓았고 아프로디테 신전을 세웠던 흔적이 보인다. 신전 창녀만 1000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여사제들로 제의적인 매춘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린도스럽다'는 말은 '음탕하다'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고. 고린도식으로 산다는 건 도덕적 행실이 나쁘다라는 뜻의 의미였다.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린도는 상업적,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여 매우 부유한 도시였음을 알수있다. 성서에도 너무나 문란한 고린도를 나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 아크로폴리스 아래 자리잡은 고린도 유적지 안에는 고린도 박물관이 있다. 모든 유물들이 국보급으로 대부분 2천년을 넘긴 것들이다, 너무 흔해서 이렇게 노상에 방치하다시피한 것들도 있다. 머리는 어디 갔을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지진으로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이 떨어져 나가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실내에는 환자들의 수술 부위에 대한 형상, 환자를 수술하던 돌침대. 니케의 상, 네로의 상(독재자의 이미자로 각인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고린도 운하를 건설한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 상이라고 한다), 올빼미를 쥐고 있는 목이 없는 아테네 여신상, 도리아식 기둥, 모자이크 타일, 남자 성기 형태의 포도주잔, 각종 토기 및 도자기류 등이 있다. 고린도 항아리 아테네 박물관에서 처럼 많은 항아리들이 눈길을 끄는데, 고린도는 고령토가 풍부해서 질 좋은 특산품 항아리가 많았다고 한다. 환자수술용 돌침대 우리나라는 목조 유물이 많은 편인데. 그에 비해 그리스를 비롯해 유럽에는 돌 문화가 주를 이룬다. 거의 깨진 돌인 유물을 통해 그리스의 아픈 역사와 괴로움이 서려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찾을 수가 있다. 의료조형물 당시 고린도에 의료술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치료부위별 조형물을 보면 역시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젖가슴 부분이 많은것이나 또 성기 모형의 술잔들을 보면서 이 지역의 성적인 문란함이나 타락상을 성경에서 지적할 정도임을 짐작케 한다. 술 잔 당시 고린도인들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수호신으로 하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였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자랑하는 3가지 중의 하나인 비너스 상은 그리스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만 본다면 아프로디테의 완벽한 몸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신화에 나타난 아프로디테의 행실은 그리 정숙하지 못한 '사랑의 여신'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의 말씀과 같이 당시 고린도인들의 문란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음란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린도인'이란 은어가 있기도 했다. 청동거울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거울(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우리나라의 유물들이 기껏해야 3세기 이후의 삼국시대를 못 넘기는 것에 비교하면 이곳이 문명의 발상지임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인물과 신들을 새긴 조각들이 많다. 우상이니 뭐니 해도 이 시대가 인문주의 시대였음으 잘 보여준다. 실내 촬영은 허락하나 플래시는 터뜨리는 것을 금지하며 내 카메라로는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가 없다. 모자이크 인류 최초의 모자이크인 디오니소스 상. 제우스신의 아들이고 술의신인 디오니소스의 모자이크를 비스듬히 보면 그림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입체감이 살아난다. 고린도 회당 표지 고린도는 문명의 장소이자 종교의 장소이다. 사도바울이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또 편지로 지도한 곳으로 신약성경에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성지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사도바울이 우상이 판치는 헬라 땅에 와서 이성적 신을 전파했고. 그분의 족적이 아로새겨진 곳. 2천여 년 전에 네 번씩이나 사도바울이 찾아온 도시 고린도에 우리가 와있다. 당시에는 그만큼 문제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곳이다 아테네에서는 교회를 세울 수 없었던 바울. 교회는 그들의 신앙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테네에서는 철학을 애기하고 설교를 하였으나 교회를 세우지는 못하고 사도바울은 아테네보다 난잡한 도시인 고린도에와서 교회를 세웠다 신포도와 여우이야기 포도는 기독교. 사자는 로마로 표현하여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가는 상, 또는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형상이라고도 하며, 이솝우화에 나오는 신포도와 여우이야기라고도 하는데 이솝이 고린도 출생이라고 한다 고린도 아고라 박물관에서 나오니 넓은 유적지에 아고라가 보인다.아고라는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에 형성된 일종의 시장터 이다. 시민들이 모여 물자와 정보를 교환하고 공통 관심사에 대해 토론하는 공공 광장이자 상인들의 집결지이다. 흔히 기둥과 벽으로 이루어진 주랑이 아고라를 에워싸고 있는데 기후가 좋은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이 옥외생활을 많이 했으며 아고라에 모여 스토아의 그늘에서 대화, 뉴스교환, 정치를 논했는데 스토아 학파의 명칭은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에서 제논 강의를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울이 장막을 만들어 팔던 곳도 여기어디에 있었을 것인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폴로 신전 거의 폐허인 채로 남아잇는 아폴로 신전 BC 6세기께 건축된 것으로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신전 중의 하나라고한다. 본래 높이가 7.2m나 되는 원주기둥이 38개나 있었던 웅장한 규모였으나 지금은 7개만이 남아 있는데. 마음속으로 그 기둥 주위에 나머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고 보니 근사한 신전이 그려진다. 사도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해로 나아갈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고린도 유적지 부요한 도시, 건축의 고린도 양식의 기원이 되었던 고린도는 BC146년에 로마에 의해 패하면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근 100년 동안 폐허로 존재하다 줄리어스 시저에 의하여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바울 시대에는 아가야 지역의 총독이 거주할 정도로 큰 도시가 되어 바울이 방문했던 고린도는 이전의 고린도와는 다른 새로운 고린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는 그 후에도 여러 차래 지진으로 무너졌고, 지금은 이렇게 유적만 남긴 채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신 고린도시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AD50년경 쯤 와서 1년 6개월을 거주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 선교에서 고린도가 특별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보여준 천태만상의 세태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지혜를 자랑하고 서열을 다투던 교회였다. 사도바울이 개척하여 세웠는데도 그 중 일부가 바울의 사도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노선간 개층간 분열이 있었던 곳이며, 음란함이 있었고 성도간 법정다툼, 음식문제로 인한 갈등, 영지주의적 경향도 있는 고린도는 그 어떤 곳보다 애증이 실려 있던 곳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기 전에 이곳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유명한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고린도 유적지를 부지런히 밟고 돌아다니다 보면 그 중에 한 발자국이라도 사도 바울의 흔적에 닿을수 있을까? 고린도 유적지에는 유감스럽게도 갈리오 총독 앞에 섰던 베마 외에는 사도 바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바울이 끌려간 재판정 베마 베마(Bema)란 총독이 연설할 때나 재판할 때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돌로 만든 일종의 단으로 높이가 약 5m, 폭이 15m에 이른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때 자기를 찾아온 아굴라 부부와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기거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이곳에서 바울은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온 가족에게 세례를 줬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영접하게 하는 놀라운 전도의 성공을 거뒀다.(행 18:1∼11). 그러나 갈리오가 고린도를 비롯해 아가야 지역의 총독으로 있을 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율법을 어겼다고 재판정에 세웠고. 갈리오는 로마법과 상관이 없는 것을 알고 관여하지 않았다. 에라스도(Erastus)길 고린도 옛길 에라스도(Erastus)길이다 과거에는 이길이 바다까지 쭉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니 아마 아덴을 떠난 바울은 에라스도 길을 따라 이곳 고린도로 들어왔을 것이다. 터키에서 보았던 것 처럼 그리스에도 뽕나무 가로수가 많이 보이는데, 신약의 배경이었던 이 지역이 성경에도 나오는 뽕나무가 잘 자라며. 뽕나무는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아도 죽지 않기 때문에 뽕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은것 같다. 도로 가의 작은교회 그리스에서 도로를 달리다보면 심심찮게 이런 우체통같은 조그만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조금더 큰 교회모형도 있는데 자세히 보면 나무통위에 십자가가 달려있으며. 이는 교통사고 사망지점으로 유가족들이 설치하여 해마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작은 교회라고,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 인데 돈이 많은 사람은 크고 보기좋게 세우고, 가난한 사람은 그냥 십자가에 교회모형만 세운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은 교회를 제작해서 판매하는 공장도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사고다발지역 이라는 교통표지판 역활도 하는것 같은데, 그리스 사람들은 보통은 아주 느긋한 국민성을 지녔지만, 운전습관 만큼은 아주 급하다고 한다. 지중해 고린도에서 우리가 머문 리조트는 3층 건물 몇동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건물 주위로는 아름다운 꽂들과 각종 나무들이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자아내고, 리조트와 지중해(에게해) 사이에는 수영장이 있고, 도로를 건너 모래사장을 지나면 바로 코발트 빛 지중해에 몸을 담글 수 있다. 그리스는 12시 부터 오후 3시까지 오침시간으로 활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15시 이후에 지중해에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장기자랑 오늘은 고린도에서의 마지막 밤으로 호텔의 별관에서 조별 장기자랑이 있는 날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조별로 나름대로 분장을 하고 모이기 시작한다. 매일같이 바쁜일정 중에서도 언제들 준비했는지 조별로 연습하여 발표하는 내용들이 방송에 나가도 시청율이 높을것 같은 수준급 이었다. 우리조는 개개인의 특성에 마추어 지나온 여행일정을 도레미송에 마추어 표현했는데, 우리부부의 망가짐 때문인지 많은 웃음과 박수도 받고 누가 뭐래도 가장 잘한것 같아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12신중에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상을 받았다. 새벽명상 고린도를 떠나는 날 아침은 새벽명상으로 시작한다. 어제 오후에 물놀이 하던 지중해(에게해)변을 걸어가는. 겉기명상중에 일출을 맞이하는 명상의 시간이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파도와 조약돌의 속삭임이 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하고 엄숙한 한줄의 긴행렬이 지중해의 일출을 기다리며 걷는다. 긴 행렬의 묵언, 발소리까지도 자연의 그 엄숙함을 깨울까 조심스럽게 걷는다. 걸으면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면서 보이는 하나하나를 눈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전한다. 자신의 인생에 감사한 마음과 행복한 속삼임으로. 앞으로 한 걸음씩 걸으면서 마음에 담고있는 사랑하고 싶은 분을 부른다.(세번) 그분이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은분 일수도 있다. 그리고 한걸음 걸으면서 '사랑해' 하고 말한다. 그러다보면 그 분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명상에 초대하고 싶은 분을 차례로 불러와 반복한다. 중간에 징소리가 나면 그 자리에 서서 명상을 계속한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의 소리를 듣고. 또 명상을 하며 마음의 소리를 키운다. 지금 사랑해야 할 사람, 사랑하지 못해 괴롭게 느겨지는 사람도 초대한다. 걷기 명상 중간에 일출이 시작되었다. 해무리가 불그스름하게 일어나더니 드디어 일출의 장관이 펼쳐졌다. 에게해 너머 지중해에 막 떠오르는 해를 보며 저마다의 소망을 기원하며. 걷기 명상은 조금더 진행된 다음에 마무리 되었다. 파도에 모래가 쓸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는 명상이어서인지 그 울림이 아주 넓고 크게 퍼지는 듯했다. 어느 여행에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메테오라 가는길 다음 여행지는 이번 여행의 정점을 찍는 메테오라(Meteora)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이다. 메테오라는 코린트에서 450Km,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는 북으로 약 400Km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동네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고린도에서 출발하여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테살리야 평야와 도모꼬라는 멀리 보이는 산악지대를 달려 깔람바카 현의 메테오라까지 오는 길에 특이한 점은 고속도로를 오토바이가 달리는 모습과 아테네에서도 느꼈던 태양열 발전시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메테오라 호텔 그리스는 도처에 도특한 석조문화 유산이 널려 있다. 그러나 메테오라는 천혜의 자연석으로 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곳이다. 넓은 평야지대를 지나고 웅장한 바위산들이 나타나고. 목적지가 가까워질 수록 가슴이 설레인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담한 시골 모습에 작은 관광도시 칼람바카마을 그에 어울리는 호텔과 주위로 수백미터의 절벽을 이루는 바위들이 웅장한 절경을 이루어, 방에 짐을 정리할 여유도없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본다. 여기가 메테오라 이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밤에 수도원에 불을 밝히면 공중에 떠 있는 도시 같아 보이기도 하고, 높은 절벽 위에다 집을 지어 그렇게 불리워 지고 있는것 같다. 수백미터의 절벽을 이루는 바위들은 웅장하며 절경을 이루어 참 인상적이 경치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집들은 수도원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 작용으로 오늘날 모습으로 태어난것 같은데 이곳 메테오라는 옛날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다가 군사적인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고. 그 집들은 공동체 생활을 이루며 넓혀졌고 나중에는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60여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9세기에 수도사들이 바위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에 살다가, 14세기에 수도원을 건축하여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쿠르크 족이 수도원을 공격해 왔기 때문에 수도사들은 고립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 칼람바카 근처의 바위산에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다고한다. 그때는 로프로 된 그물을 늘어뜨리고 접을 수 있는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야 올라갈 수 있는 최상의 은둔처 이었다고 한다. 커다란 절벽위에 작은집처럼 보이는 수도원, 내일 새벽은 저 바위에서 새벽명상을 하고 메테오라를 둘러볼 수 있다. 절벽위의 수도원 저 바위 위를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일반인 출입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관람객을 위한 계단을 설치해서 올라갈수 있다고 하니 기대해보자. 새벽명상 아직 어둠이 가시기전 우리는 명상을 위하여 어제 보았던 수도원이 있는 바위 위로 이동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손전등을 들고 사다리를 이용하여 높은 바위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래로는 엄청난 절벽이다. 옛날 수도사들도 이런 곳에서 기도하였을까? 산아래 마을의 조명이 하나둘 꺼저가고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에 우리는 바위에 앉아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명상의 시간 아니 새벽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명상을 마칠때 쯤 주변이 확보되면서 불 빛만 보이던 수도원아래 칼람바카 마을의 작으면서 정겨운 모습이 보여진다. 메테오라는 세계에서 가장 영험한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특별한 기운이 흐르는 성스러운 곳에서. 맑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행했던 명상은 아주 특별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몰입하여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귀한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자신과 또는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사연, 그리고 그 사람과 만나며 흐믓해하는 사람,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 오열하는 사람, 내면을 청소하는 사람들의 느낌이 전해진다. 스테파노 수도원 새벽 명상은 스테파노 수도원을 등지고 앉아 이루어졌다. 교회에서 새벽기도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주님과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명상을 마치고 마음이 정돈된 후 눈에들어오는 바위들. 어둠에서 메테오라의 아침이 시작되고있다. 수도원의 모습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제 산 아래에서 볼때는 제비집 같았는데, 지금보니 거대한 성 같다 메테오라 일찍이 맥아더장군은 "이곳을 보지 않고는 그리스를 다녀왔다고 말하지 말라" 고 말했다고 한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메테오라를 오르는 길 기암괴석들이 기가 막힌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바위산 꼭대기 수도원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경치가 좋아서 수도원이 그곳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세상과 절연하고 오직 주님만을 묵상하고 수도하기 위해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을 선택했던 것이다 사다리나 밧줄이 없으면 올라가기 힘든 그 곳엣서 그들은 수도에만 전념했다. 덕분에 메테오라는 자연 환경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두손 모으고 기도하는 바위 메테오라의 해발 550m의 고지에 위치한 바위들에는 자연동굴이 많고. 기도할 수 있는 바위들이 많다. 그래서 정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은수자들이 찾아들었고.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다가 군사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이 곳 절벽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그 집들은 공동체 생활을 이루며 넓혀졌고 나중에는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건물 안에는 그들의 박해 역사 자료와 죽은 자들의 유물과 유골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수도원들은 기이한 봉우리 위에 마치 새 둥지를 틀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11세기초 메테오라 바위에서 아테나시우라는 수도사가 기도를 시작했고, 나중에 다른 수사들도 모여들어 수도원이 되었다고 한다. 발람 수도원 여기 수도원들은 전성기인 16세기에는 총 24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며, 이제 남은 수도원은 총 14개고 그중 수도사가 살고 있는 6개의 수도원만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변화산 수도원), 바클라암 수도원, 루사누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007시리즈 영화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던 홀리 트리니티 수도원, 성 스테파노 수도원 등이다. 트리니티 수도원 메테오라 수도원 건물 중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수도원이다. 이 곳에 가기 위해선 계곡을 지나 좁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데 지금도 물건을 옮길때 사용하는 로프가 바위 위로 지나는 것이 보인다. 트리니티 수도원은 1976년 제임스 코번 주연의 '7인의 독수리'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기도 하고, 1981년 제임스 본드 007의 영화 배경으로 나오기도 하여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고 그로인해 유명세를 탄다고 한다. 성 스테파노 수도원 이곳을 찾은 우리에게 메테오라는 새로운 삶과 신앙의 방식에 눈을 열 것을 말없이 부추긴다. 그러나 이 곳도 이제는 더 이상 메테오라가 아니게 되었다.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수도사들은 새로운 하늘에 뜨인곳(메테오라)를 찾아가야할 형편이 되었다. 좋은 풍경과 수도원을 엿볼 수 있어서 감사하지만 한편으론 수도사들의 생활에 방해꾼이란 생각도 든다. 노 수도승들의 바위 우리나라는 절경이 좋고, 풍수 좋은 곳에는 절이 있다. 이곳에는 수도원이나 성당이 있다. 르산느 수도원 수도원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땀을 내며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르사노 수도원은 시원한 오솔길을 내려가다 보면. 깎아지르듯 솟아오른 바위에 세워져 주위의 자연 경관과 더불어 많은 조명을 받고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르산느'는 설립자의 이름 혹은 로사나 마을로부터 온 수도사에 의해서 설립되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한다. 1288년 또는 1545년 즈음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이렇듯 정확한 시기나 유래가 추측되는 이유는 처음 설립자들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에 지금에 와서는 추측으로만 얘기할 뿐이다. 이런 절벽 수도원은 존재 자체로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속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결연하게 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 욕망과 욕정과 편리함과 소리로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고독과 단순함과 불편함과 침묵이 있는 이곳이 참된 행복과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보여준다. 바클라암 수도원 수도원의 건립은 돈의 힘도 아니고 권력의 힘도 아닌 수도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도의 힘이 이렇게 경이롭고 아름다운 대 수도원으로 탄생한 것이다. 대 메테오라 수도원(Megalo Meteora/Great Meteora) 6개의 수도원중 대메테오라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최초로 건설되었고, 수도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부유한 수도원으로 “메가로 메테로론" 즉 거대한 메테로라라 불리는 수도원으로 수도원에는 수많은 예술작품과 유물을 볼 수 있는 목수공방, 민속박물관, 부엌, 수도원 박물관, 성화 기념품상점, 예배당 등이 있으며. 지금도 몇 명의 수도사가 동방 정교의 오래된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수도원 올라가는길 대수도원은 올라가는 계단이 200개이다. 메테오라 즉 공중으로 솟아오른 바위 위의 수도원에 가기위해 원래는 입구가 없이 밧줄과 사다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도원이 개방되면서 절벽의 바위를 뚫어 터널을 만들고 바위를 깨서 계단을 확보해 조금은 가파르지만 관광객이나 외부인의 통행로가 확보된 것이다. 계단 길 우리는 줄을 지어 수도원까지 토굴도 지나고,(지질상 사암이나 역암이 싸여진것 같아 보인다) 많은 계단을 밟으며 호기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수도원 까지 올라갔다. 여행을 앞두고 운동으로 체력보강을 했는데도 힘드게 힘들게 수도원 입구에오르니 여자들은 치마를 둘러 아랫도리를 가려야 입장할 수 있다고 치마를 빌려준다. 촛불 예배당 앞에 촛불이 켜 있다. 초는 밀납으로 수도사들이 만들었다고한다. 그리스 정교회는 오감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예배실 앞에 밀랍 촛불향을 통하여 후각예배 예배실에 들어가기 전에 건물을 만지며 촉감예배. 손가락 세 개를 정확하게 찍어 성호를 그리고 성화 예배실에 들어가면 사방을 빙둘러 천정까지 그려진 성화를 보면서 시각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곳 대메테오라 수도원 예배실의 성화는 대부분이 순교와 관련되 성화들이다. 화형, 참수형, 매질형, 압사형, 사지절단형, 십자가형등 순교의 방법도 다양하게 40여가지 그림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박해와 핍박의 상황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라는 메시지도 있지만 이런 순교의 성화들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게하는 효과도 있는것 갔다. . 그중에 특별히 가이드가 힘주어 설명한 그림은 40명의 신앙인 들이 옷을 벗고 얼음판 위에 서 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로마군인의 상징인 붉은 망토만 두른 채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따뜻한 난로 통으로 뛰어들어가는 그림이다. 로마는 신앙인들을 배교시키기 위해 옷을 벗긴 채 얼음판 위에 세워놓고 배교만 하면 따뜻한 난로가 있는 통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유혹에 한 사람만이 추위를 못 견디고 배교하여 난로통에 뛰어들고(그도 결국에는 죽게 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군인중 한 사람이 이런 신앙인들의 모습에 감동받아 40명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대신 옷을 벗고 얼음판위에 섰다가. 함께 40명이 순교하였다 이 로마군인은 '셈프로니우스(Sempronius)'라 하고 이들은 '세바스테(Sedaste)의 40명의 순교자'라 부른다고 한다. 수도원 돔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비잔틴 양식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교회 안에 공통적으로 표현되는 세 가지가 있다. 돔은 하늘의 영역이며, 교회를 지탱하는 것은 4복음서, 그리고 구세주로 오셨던 분과 심판주로 오실 분을 표현하고 있다. 예배당은 구약에 나오는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 처럼 프레스코화로 성화가 그려진 나르텍스 에서 순교그림을 보고 마음을 정화한 후 지성소 같은 본당에 들어가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본당은 예배를 준비하는 성찬예식에 사용하는 성물을 준비하는 곳으로 보인다. 높이 솟은 돔의 안쪽이 예배당이고, 앞쪽에 약간 튀어난 부분이 본당 같은데 성전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박물관 돔 앞쪽 그리스 국기가 세워진 건물 들이 예배당 부속건물인 박물관으로 중앙부분이 아래3층까지 볼 수 있도록 뚤려있어 양로원에서 3층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위의 것만을 생각하겠다고 했던 수도사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박물관에서는 헬레나가 발견한 십자가와 600년 기념으로 동방정교를 알리는 문장과 복식을 볼수 있으며. 신성로마제국을 통일했다는 의미의 쌍독수리, 수도사가 지킬 것 순명, 청빈, 독신의 의미를 나타내며 수도사들이 입었던 수도복과 물통, 지팡이 등 이곳 수도사들이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당시의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경 필사본 12~13세기에 수도사들이 갑오징어의 먹물을 찍어서 썼다는 성경 필사본도 전시되어 있고, 어떤 수도사가 14년간 조각한 정교한 십자가도 있는데 개인시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포도주 통 수도사들이 빛었다는 포도주 통과 와인병들 그리고 기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와인 저장고 수도사들은 죽어서 해골이 되어도 성스러운 이곳을 지킨다고 한다. 유골저장소엔 하얀 유골들이 모여있는데 죽어서도 나가지 못하고 수도원의 역사로 남아있는 모습이다. 운반줄 건물 중앙에 매달려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기중기 같은 것에 그물망을 매달아 사람이나 물건을 도르래로 끌어 올리고 내리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유일한 통로로 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짐을 운반할때 사용했던 케이블카 형식의 줄이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계단을 만들고 그 계단을 통하여 방문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마지막밤 동유럽&지중해 배낭여행 15박 16일중 그리스 메테오라에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스텝들의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와함께 호텔의 강당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환호를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언제준비했는지 서울을 출발하면서부터 여행 내내 순간 순간의 모습들이 빔 프로젝트를 통하여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2부 순서로 반 달동안 함께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던 봉사상, 기록상, 의상상 등등 이어서, 특강시간에 정답을 맞춘 나는 지혜의 부엉이 상을 받았다. 조별 장기자랑 상도 받았다, 진행을 맡은 박실장님께서 우리 부부를 앞으로 불러세웠다.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이라고 소개하며 축하송에 축하박수에 기념품도 받았다. 여행에 대한 소감을 나누면서 이렇게 유럽에서 마지막 밤은 깊어간다. 데살로니키 이제 귀국하기 위하여 데살노니카 공항으로 가늘길. 시내 너머로 지중해가 보인다. 바울은 저 바다를 건너와 유럽 전도를 시작했을 것이다. 성경에 데살로니카로 알려진 데살로니키(Thessalonica) BC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도로스가 건설하였고, 그의 왕비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지었다고한다. BC 146년 이후 로마 시대에는 속령(屬領) 마케도니아의 제일 큰 도시로 번영하였다. 유럽 내륙의 출구에 해당하며 아드리아 해(海)와 비잔틴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 가도(街道) 중간에 있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번영하였다. 1세기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305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것을 기리기 위해 개선문을 건설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동로마 시대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다음 가는 도시로 번영하였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도 아테네 다음 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데살로니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고, 신약성서인 데살로니카 전서를 저술한 사도 바울의 초대교회 등 고대유적들이 많아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그리스와 터키에 있는 바울의 전도지를 따라 성지순례를 하는 코스 중의 한 도시이다. 데살로니키는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해 물류의 중심지로 성장했는데, 이것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터키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적 위치의 덕분일 것이다. 또한 부산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항구 도시이기도 하다. 학생들과 사도행전 공부할때 바울의 선교여행지로 나왔던 데살로니가 속속들이 들여다 보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어서 많이 아쉽다. 여행을 마치면서 동유럽 지중해 여행의 일정을 마치고 이제는 귀국하는 길. 그리스에서 우리나라로 가는 항공편은 없다. 버스로 데살로니키로 이동하여 비행기로 터키로 가서 이스탄불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게된다. 유럽에서는 버스로 국경을 넘어다닐 수 있었는데, 그동안 버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마니또" 라고 매일 버스를 탈 때면, 또 숙소에서 룸메이트도 바뀌게 된다. 많은 사람을 마나고 대화를 나누고 사귀게 하려는 여행의 특징이다. 부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을 쓰고 버스에서도 같은자리에 앉게 된다. 하지만 틈틈히 자리를 바꿔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 귀국해서도 모임을 가지고 함께 여행하자는 약속도 해본다. 중세 유럽과 현대 유럽 문명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그리스를 잇는 코스에 따라 프라하에서의 '아침마라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체스키크룸로프에서의 명상' 그냥 눈물이 흐르는 감격의 순간들, 얼마나 외쳤던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었던 '짤츠캄머굿'에서의 알프스 절경 감상, '쉔브룬궁전 정원'에서의 특별강연,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 야외온천 휴식, 고린도 지중해 물놀이, 조별 장기자랑, 수백년에 걸쳐 지어진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방문과 새벽 명상', 그리스의 유적들, 어느곳 하나 관광지로 꾸민곳이 아니라, 적어도 몇백년에서 몇천년의 역사를 가진 보물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라마다. 도시마다 확연히 차별된 그 곳만의 고유한 멋과 정취를 간직하고, 오래된 것을 소중히 지킬 줄 알고 또 그럴수 있도록 긴 안목을 가지고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문화적 전통, 우리가 많이 배우고 취해야 할 점이다. 언제 또 다시 이런 여행을 가질 수 있으며 다시 유럽을 찾을 수 있게될까? |
첫댓글 새롭게 다가가게 하는 자료입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