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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판서 김공 진구 신도비명 병서 - 이의현
(戶曹判書金公 鎭龜 神道碑銘 幷序)
상고해 보건대, 우리 숙종대왕(肅宗大王)이 46년간 치세하면서 인재를 양육하고 오랜 창도로 교화를 실현하니, 덕망과 재주가 있는 신하들이 조정에 즐비하여 좌우로 군주를 보좌하면서 국가의 태평을 이루게 되었다. 고(故) 판서 광은군(光恩君) 김공 역시 그러한 신하들 중 한 사람이다.
공은 숙종 6년인 경신년(16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공적을 쌓다가 숙종 30년인 갑신년(1704) 12월 24일에 집에서 별세하였다. 이에 숙종이 바로 은지(恩旨)를 내리고 추증하는 전례를 후하게 시행하였으니, 군신 간의 관계가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숙종이 승하하자 흉악한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서 구신(舊臣)들을 죄다 도륙하였는데, 공의 집안은 화를 당한 양상이 더욱 참담하여 두 아들 운택(雲澤)과 민택(民澤)이 모두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죽었고 나머지 자식들과 손자들도 멀리 떨어진 바닷가로 유배되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막혀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성상이 즉위한 뒤에 공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유감이 없이 하였다. 이에 공의 다섯째 아들 조택(祖澤)이 공의 신도비명을 지어줄 것을 나에게 부탁해왔는데, 나는 망설이면서 선뜻 이 일을 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혼자 생각해보니, 태사(太史)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세가(世家)의 훌륭한 대부의 공업을 멸실되도록 내버려두고 찬술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여겨졌다. 이에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서문을 짓고 명(銘)을 덧붙인다. 서문은 다음과 같다.
공은 휘가 진구(鎭龜)이고 자가 수보(守甫)이다. 사람됨이 풍채가 좋고 미간이 넓으며 풍모가 점잖았다. 성품은 침착하고 치밀하며 엄숙하고 공손하였으며,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면서도 친압(親狎)하지 않았다. 효성이 깊어 거상(居喪) 중에도 해이해지는 일이 없었고 몸가짐을 삼가고 검약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라비로서 더욱 겸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권요(權要)의 벼슬자리는 반드시 피하였다. 또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조 좌랑이 되었으나 숙배하지 않았다.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발탁되었을 때에는 급제한 지 채 2년도 안 된 처지라 더욱 안절부절못하였는데, 대신이 그 뜻을 알고 숙종에게 아뢰어 개차(改差)될 수 있게 하였다.
몇 년 뒤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역시 부임하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대신이 다시 아뢰어 체직되게 하였다. 그 뒤에 어영대장,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권(兵權)은 척신(戚臣)이 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모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으니, 이는 사람들의 트집 잡는 말이 많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정(邪正)과 시비(是非)를 구분하는 것과 사문(斯文)이 흥하고 폐하는 관건과 화이(華夷)와 역순(逆順)을 분변하는 것에 있어서는 단호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하고 처지를 핑계 대며 회피하지 않았다. 공의 오대조 황강공(黃岡公)과 선고 서석공(瑞石公)은 선(善)을 드날리고 악(惡)을 저지하자는 주장을 힘껏 내세웠고, 고조 문원공(文元公)은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증조 참판공은 청음(淸陰) 선생이 명나라를 높였던 의리를 드날렸고, 조고 생원공은 호란(胡亂)에 순절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선조의 발자취를 잇고 아름다움을 계승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어떤 이는 논란을 피하지 않고 나선다고 공을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공을 옳게 여겼다. 처음에 공이 지평이 되었을 때에, 조경(趙絅)이 윤선도(尹善道)를 구제하려 했으므로 그를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해서는 안 됨을 논하였고, 박태상(朴泰尙)이 현신을 등용하고 간신을 축출할 적에 줏대 없이 미적거렸던 것을 논하였으며, 윤지완(尹趾完)이 오시수(吳始壽)를 두둔하여 중대한 옥사에 혼란을 야기한 것을 논하였다.
또 강석빈(姜碩賓)과 유명천(柳命天)이 역신 허견(許堅)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과 김덕원(金德遠)이 붕당을 지어 흉악한 짓을 했다는 점을 들어 상소하여, 각각 죄를 감등(減等)해주는 명을 내린 것과 수용(收用)하는 명을 내린 것에 대해 반대하여 논하였다.
그리고 청대(請對)를 통해 오시수와 조경의 일에 관해 간쟁하여 오시수를 사사(賜死)하고 조경을 현종의 묘정에서 출향하게 하였다. 또 이지익(李之翼)이 부정한 논의를 견강부회한 것을 논하였다. 수찬이 되었을 때에는 박성의(朴性義)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선정(先正)을 비방하였으므로 마땅히 먼 변방으로 유배 보내야함을 논하였다.
사간이 되어서는 홍우원(洪宇遠)이 대비를 무함하고 비방하였으므로 가벼운 형률을 적용해서는 안 됨을 논하였다. 승지가 되어서는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신한 일을 아뢰고 그에게 내린 은전과 하사품을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였으며 윤증의 무리가 윤증을 위해 변론한 상소를 배척하여 물리쳤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합계(合啓)를 통해 정재숭(鄭載嵩), 최석정(崔錫鼎) 등이 청나라에 사행을 가서 왕명을 욕보인 죄를 논하여 군신 간의 의리를 밝혔다.
공이 급제하여 벼슬한 초기에 선발되어 사국(史局)에 들어갔는데, 전례상 사국에서는 사람을 천거할 때에 반드시 선배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공이 판서로 있을 때에 사국의 선배의 자격으로, 새로 천거된 자인 송정명(宋正明)을 등용되지 못하도록 막은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윤증을 불러들일 것을 청하고 송우암(宋尤菴) 선생을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동지성균관사가 되어서는 윤세현(尹世顯) 등이 유벌(儒罰)을 받는 것을 풀어주었는데, 이는 그들이 우암이 무함당한 일에 대해 변론하다가 윤증의 무리에 의해 벌을 받게 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조 판서가 되어서는 주자(朱子)와 우암을 비방한 박세당(朴世堂)의 설에 대해 변론하고 유신(儒臣)들을 시켜 박세당의 저술을 단락마다 논박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이 몇 가지 일들 때문에 더욱더 당시 집권자들의 분노를 샀지만, 공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후궁 장씨(張氏)가 중전을 저주한 일이 발각되자, 숙종이 장씨를 사사(賜死)하라는 명을 내렸다. 전 시상(時相) 남구만(南九萬)이 장씨와 결탁하여 부정한 논의를 제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남구만의 문인인 최석정이 장씨를 용서하여 은의(恩義)를 온전히 할 것을 강력히 청하였고, 그 무리들이 일제히 일어나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자 사류(士類) 중에도 이에 동요되는 자들이 생겨나니, 시종 바른 의리를 고수한 사람을 꼽자면 겨우 서너 공에 불과했다. 이때에도 공은 또 변함없이 뜻을 지켜 말하기를, “저위(儲位)가 불안해지면 응당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지만, 오늘날의 처분에 대해 어찌 감히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익수(李益壽)가 상소하여 춘궁(春宮)을 장씨의 상례(喪禮)에 참석하게 하거나 궁관(宮官)을 대신 보내어 상례를 관장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공이 복주(覆奏)하기를, “세자가 직접 상례에 참석하는 것은 이치상 불가하며, 호조와 예조의 관원이 담당하여 상례를 치르고 있는 이상 궁관이 이를 관장하는 것은 또한 전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씨의 소상일(小祥日)이 되자 또 세자가 망곡(望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공이 예(禮)에 의거하여 간쟁하기를,
“비록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가 있으나, 또한 백어(伯魚)가 출모(出母)를 위해 곡을 했던 경우와는 다릅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그만두게 하였다.
숙종이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은혜를 기려서 단을 세우고 은덕에 보답하는 제사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거조는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이란 모름지기 근본을 돈독히 해야 하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허명(虛名)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지금 이를 거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의례를 갖추고 예모를 엄정히 해야만 이 예(禮)에 걸맞게 될 것이니, 청나라에 누설되는 것을 염려하여 규모를 축소하는 데에만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들어 누워있을 때에도 차자를 올려서 단에 올릴 제례악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유사(有司)가 공의 집 바깥채에 있는 돌을 값을 치르고 사들여 단을 쌓는 데에 사용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대부는 진실로 국가를 상대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 단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어찌 대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공이 별세하였는데, 아우 죽천공(竹泉公)이 상소하여 공의 유지(遺志)를 아뢰니, 숙종이 공의 훌륭한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윤허하였다. 공은 직무를 수행할 때에 자잘한 일도 신중하게 처리하였는데, 도청 낭청이 되어 선조(先朝)의 실록을 개수(改修)하는 일에 참여하면서는 더욱 애를 쓰며 부지런히 노력하여 병가(病暇)를 낸 적이 없었다.
당시에 공은 한창 정언, 헌납, 교리, 응교, 집의의 직임을 옮겨 다녔는데, 실록의 개수를 주관하는 자가 공을 한직으로 옮겨 개수하는 일을 전담하게 할 것을 청하므로 결국 직강에 제수되었다. 또 병조 좌랑, 사복시 정이 되었으며, 마침내 실록을 개수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형조와 병조의 참의가 되었다.
은대(銀臺 승정원)에서 가장 오래 재직하였는데, 여러 번 승진하여 좌승지까지 올랐다. 공은 계획하고 사려하는 것이 심원(深遠)하여, 선고 서석공이 갑인년(1674, 현종15)의 일을 겪고 나서 곡역후(曲逆侯)가 집에서 쉴 때에 했던 근심이 있게 되자 공이 가까이에서 도운 공이 많았다.
이남(李柟)과 허견(許堅)이 처형당한 뒤에 서석공이 1등 공신에 책훈되었는데, 공은 자신의 공로에 대해 입을 닫고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우암이 장자방(張子房)보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등조한 뒤에는 더욱 공업을 세우리라는 기대를 받았으니, 앞서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 두 곳의 외관직을 통해 조정에서 공을 중요하게 여겨 천거하였던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얼마 안 되어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가 곧바로 천거되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정사를 잘한다는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서석공이 별세한 뒤에 이남의 무리가 다시 정권을 잡아 공신들을 모두 죽이고 역적의 죄안(罪案)을 뒤엎고는 공을 먼 바다에 있는 제주(濟州)에 유배시켰다. 그러나 장차 어떤 화를 입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공은 마치 평소처럼 태연하였다.
6년 뒤에 적신(賊臣) 민암(閔黯)이 무옥(誣獄)을 일으켜 사대부들을 도륙하려 하였는데, 숙종이 이를 간파하여 곧바로 민암을 처벌하고 그의 무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옛 신하들을 불러들여 등용하면서 특별히 공을 호조 참판으로 발탁하여 매우 후하게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나 당시에 공의 장자(長子)가 여론의 비난을 심하게 받았으므로 사람들은 공을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이 보았다.
정권을 잡은 자들이 청의(淸議)와 대립하게 된 뒤로 사류를 제거하려고 하여 번번이 공을 들먹이면서 연루시켜 함께 욕보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때문에 10여 년 동안 거의 해마다 빠짐없이 공의 이름이 논척하는 상소에 오르내렸다. 이는 왕실의 외척이란 이름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데다가, 공의 집안은 특히 세상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공은 한산직을 전전하면서 면직되는 일이 잦았고 승진하는 일은 드물었다. 병조ㆍ예조ㆍ형조의 참판, 한성부 좌ㆍ우윤(漢城府左右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은 공이 수년간 역임한 직책들인데 모두 특별히 선임(選任)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도승지가 되었으나 시배(時輩)들이 여전히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순무(巡撫)해야 한다는 구실로 공을 영남(嶺南)으로 나가게 하였다.
또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나갔으며, 세자가례부사(世子嘉禮副使)를 담당한 공으로 초자(超資)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여러 차례 한성부 판윤, 형조ㆍ공조ㆍ호조 판서, 지돈녕부사, 좌ㆍ우참찬에 제수되고, 도총관, 수어사, 좌빈객을 겸하였으며, 오랜 뒤에야 비로소 판의금부사로 승진하였다.
공은 시의(時議)에 가로막혀 재능을 다 발휘하지는 못하였으나, 형조와 호조의 판서로 있을 적에는 때로 다소 능력을 드러내었으며, 특히 군무(軍務)에 숙달하여 병사들의 신뢰를 깊이 받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명망이 더욱 높아져 거의 정승의 물망에 오르게 되었으나, 공을 싫어하는 자들이 배척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공이 그만 별세하고 말았다.
아, 선비는 시운(時運)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하고, 시운을 만나게 되면 또 군주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근심한다. 공의 경우에는 중간에 간흉들에게 핍박을 받아 유배되는 화를 당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부름을 받아 예전과 다름없는 은총을 받았다. 그러니 시운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군주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끝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과 똑같이 귀결되고 말았으니, 이는 아마도 천명일 것이다.
공이 한번은 꿈에서 “가을 해가 저무는 것도 모르고 다시 개와 닭을 찾아 나서네.〔不知秋日晩 猶復犬雞求〕”라는 한 시구(詩句)를 얻고는 ‘만구(晩求)’를 서실(書室)의 이름으로 삼고 자호(自號)로 정하였다. 이는 가학(家學)을 잇는 데에 뜻을 둔 것인데, 결국 그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그저 험난한 벼슬길에서 핍박을 당하다가 울울한 상태로 생을 마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관(棺)을 덮은 뒤에야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 한 때의 분분한 평판이야 어찌 심각하게 논의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공을 잘 아는 자와 잘 알지 못하는 자 모두가 공을 후덕한 어른이라 칭송하고 뜻을 달리했던 자들 역시 공의 청렴함과 신중함에 탄복을 한다.
그러니 공을 평가하는 공론(公論)이 정해지는 데에 백 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은 공로를 세우거나 업적을 이루어 사람들의 오랜 기대에 크게 부응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공의 행적을 살펴보건대, 그래도 충분히 우리나라의 흥성(興盛)하는 시운을 돕고 성왕(聖王)이 통치하는 것을 잘 보좌하였으며, 또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만약 지극히 슬기로우신 성상이 아니었다면, 어찌 공이 이렇게 온전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는 아마도 여한이 없다고 할 만할 것이다. 공은 광주인(光州人)으로, 신라(新羅)의 왕자 흥광(興光)의 후손이다. 고려(高麗) 시대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 가문이 내려올수록 더욱 혁혁해졌으니, 다른 성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황강공은 휘가 계휘(繼輝)로, 관직은 대사헌이었으며, 문원공은 휘가 장생(長生)으로, 세간에서 사계(沙溪) 선생이라 일컫는 분이다. 참판공은 휘가 반(槃)이고, 생원공은 휘가 익겸(益兼)이다. 서석공은 휘가 만기(萬基)로,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이며, 그 배위(配位)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한씨(韓氏)이니, 군수 유량(有良)의 딸이다.
공의 배위는 지평 이광직(李光稷)의 딸로, 규범(閨範)이 뛰어나 친족들이 모두 복종하였고, 명성대비(明星大妃)가 특히 공경스럽고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8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춘택(春澤), 관찰사 보택(普澤), 참판 운택(雲澤), 교리 민택(民澤), 대사간 조택(祖澤), 봉사 복택(福澤), 정택(廷澤), 연택(延澤)이며, 딸은 각각 교관 송무원(宋婺源), 장령 임징하(任徵夏), 사인(士人) 이광연(李廣淵)에게 출가하였다. 제택(濟澤)은 공의 서출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김씨 중에 망족으로는 / 維金之望
광주 김씨가 제일이라네 / 莫亢於光
그 복록을 기록해 보니 / 載其茀祿
팔대가 찬란하네 / 八葉辨章
후대에 이르러서 / 綿及後代
덕망이 더욱 빛나니 / 厥德彌卲
대사헌공은 세상을 바로잡았고 / 大憲匡世
문원공은 정도(正道)를 지켰네 / 文元董道
공의 선고는 / 維公考翼
존경받는 명신이니 / 寔爲宗臣
외척으로서 공신이 되었으나 / 褒紀帶礪
끝내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네 / 終莫緇磷
이분이 명경을 낳으니 / 是生名卿
선대의 공렬을 잘 계승하여 / 克嗣前烈
옥당에 들어가고 / 乃盛玉堂
승지를 맡았네 / 乃司喉舌
정도를 지키고 사도를 막으니 / 扶正遏邪
하는 말에 조리가 있었네 / 有脊其言
경기를 진무하고 호남을 맡았으며 / 畿鎭湖臬
다른 임지에서도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였네 / 餘地撥煩
저곳 탐라에 갇혀 / 纍彼乇羅
비운(否運)의 때를 만났으나 / 遘時斯屯
환난에 처하여 천명에 순응하니 / 素患安命
잠시 구부려졌으나 다시 펴졌도다 / 雖枉而伸
왕께서 아아! / 王曰噫歟
내가 징벌하리라 하시니 / 予惟其懲
간흉들이 쫓겨나고 / 姦諛旣屛
준걸들이 모여들었네 / 俊髦彙征
품계를 올려 부르시니 / 擢秩以召
은혜가 보통의 격식보다 더하였으나 / 恩出常格
육조에서 전전하고 / 流連列曹
때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도 하였네 / 或宣外服
세로가 험난하여 / 世路失平
명사들이 핍박당하나 / 荊棘名塲
명망이 절로 드높아 / 望實自茂
가릴수록 더욱 드러나니 / 掩而愈彰
육조와 삼군이 / 六尙三軍
마침내 아름답게 되었네 / 終焉允臧
향년 쉰넷에 / 年五十四
어찌 그리도 빨리 떠났는가 / 屣脫何忙
능력을 다 펼치진 못하였으나 / 其用未究
명성은 유구하리라 / 其聲則長
광주의 노치에 / 廣之蘆峙
봉분이 우뚝 솟아 있네 / 有崇堂阜
지혜로운 한산 이씨 / 韓山哲媛
배위로서 부장되었네 / 媲美同祔
큰 비석에 훌륭한 업적 기록하여 / 豐碑紀善
먼 후대에 보이노니 / 刻示茫茫
천년만년 지나도록 / 更千百載
감히 훼손치 말지어다 / 無敢毁傷
[脚註]
[주01] 숙종이 …… 도륙하였는데 :
1721년(경종 1)에 소론(少論) 김일경(金一鏡) 외 7인이 상소하여, 세제(世弟)를 옹립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에 찬성한 것을 문
제 삼아 사대신(四大臣)을 비롯한 노론(老論) 인사들을 조정에서 축출해 절도에 찬배시켰다.
또 이듬해에 지관(地官) 목호룡(睦虎龍)이 소론 편에 가담하여, 노론 자제들이 주축이 되어 경종(景宗)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 다는, 이른바 삼급수설(三急手說)을 고변(告變)하여 사대신과 노론 인사들을 처형하도록 만들었다.
[주02] 운택(雲澤) :
김운택(金雲澤, 1673~1722)으로, 자는 중행(仲行), 호는 백운헌(白雲軒),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699년(숙종 2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04년에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호조 참판,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신축옥사(辛丑獄事)에 연루되어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장살(杖殺)되었
다.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주03] 민택(民澤) :
김민택(金民澤, 1678~1722)으로,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719년(숙종 45)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獄死)하였고, 1741년(영조 17)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주04] 인경왕후(仁敬王后) :
1661~1680. 숙종(肅宗)의 첫 번째 비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자 김진귀(金
鎭龜)의 누이이다. 1670년(현종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 숙종이 즉위함에 따라 1676년(숙종2)에 정식으로 왕비의
책명(冊命)을 받았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의 증세를 보이다가 발병한 지 8일 만에 경덕궁(慶德宮)에서 승하하였다. 휘호(徽號)는 효장명현
(孝莊明顯)이고, 능은 익릉(翼陵)이다.
[주05] 황강공(黃岡公) :
김계휘(金繼輝, 1526~1582)로,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549년(명종4)에 식년 문과에 을과
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으며, 동부승지, 이조ㆍ예조 참의, 황해도ㆍ전라도ㆍ평안도 관찰사, 공조ㆍ형조ㆍ예조 참
판, 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1581년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고, 나주(羅州)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주06] 서석공(瑞石公) :
김만기(金萬基, 1633~1687)로,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ㆍ정관재(靜觀齋),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652년(효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ㆍ호조 참판, 홍문관 대제학,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딸이 숙종(肅
宗)의 정비가 됨에 따라 영돈녕부사에 제수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80년(숙종6)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훈련대장을 맡아 궁궐을 호위하였으며, 허견(許堅) 및 복창군(福昌君)ㆍ복선군
(福善君)ㆍ복평군(福平君) 형제의 역모를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
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저서로는 《서석집(瑞石集)》이 있다.
[주07] 문원공(文元公) :
김장생(金長生, 1548~1631)으로,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
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고,
정산 현감(定山縣監), 철원 부사(鐵原府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한 뒤에는 75세의 나
이로 조정에 나가 공조 참의, 동지중추부사,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 제수된 벼슬이 많았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고향에 은둔하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향리에서 있으면서도 서인(西
人)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대단하여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인으로는 아들 김집(金集)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정홍명
(鄭弘溟), 최명길(崔鳴吉)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들을 무수히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사계유고(沙溪遺稿)》 등이 있다.
[주08] 참판공 :
김반(金槃, 1580~1640)으로, 자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州),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605년(선조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
고,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낙향하여 10여 년간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
의 난에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행재(行在)에서 실시한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뒤에 대사성, 예조ㆍ병조 참판, 대사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대사간,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죽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
다.
[주09] 청음(淸陰) …… 드날렸고 :
청음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 본관
은 안동(安東)이다. 김상헌은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仁祖)를 호종하
여 청나라에 맞서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기울어 결국 청나라에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자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38년 7월에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박계영(朴啓榮)이 김상헌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계사(啓辭)를 올려, 자결에 실패한 이상 조
정에 나와 임금과 화복(禍福)을 함께 해야 하는데 혼자 절의를 지키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하고 있다고 논핵하면서 극변(極邊)으
로 위리안치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김반(金槃)이 김상헌에 대한 논의를 정지시키고 김상헌이 명나라에 절의를 지키는 것을 두둔하면서 유
석과 박계영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仁祖實錄 16年 7月 29日, 8月 5日》
[주10] 생원공 :
김익겸(金益兼, 1614~1636)으로, 자는 여남(汝南),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635년(인조 13)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江華)로 가서 항전에 참여하였는데, 전황이 불리해지자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
將)이었던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南門)에 화약궤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분신(焚身)하여 자결하였다. 뒤에 영의정
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주11] 조경(趙絅)이 …… 했으므로 :
조경(趙絅, 1586~1669)의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윤선도(尹善道, 1587~
1671)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ㆍ해옹(海翁),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1659년(효종10) 효종(孝宗)이 승하한 뒤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두고 벌어진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윤선
도를 비롯한 남인(南人)들은 삼년복을 주장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기년복이
채택됨에 따라 남인들은 조정에서 쫓겨나고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1661년(현종 2)에 가뭄이 들자 현종(顯宗)이 원옥(寃獄)을 심리(審理)하여 사면을 시행하였는데, 그 대상에서 윤선도가 제외되자,
조경이 상소하여 예송 시에 윤선도가 충심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던 점을 헤아려 사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이 논란이 되어
조경은 파직되었고, 처음에 양이(量移)의 명이 내려졌던 윤선도는 다시 삼수로 유배되었다. 《顯宗實錄 2年 4月 21日ㆍ23日, 5月
16日》
[주12] 박태상(朴泰尙)이 …… 논하였으며 :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때에 숙종(肅宗)이 철원(鐵原)에 유배되어 있던 김수항(金壽恒)을 불러들이는 일과 편당적
으로 인물을 등용한 이조 판서 이원정(李元禎)을 삭탈관직하는 일을 두고 승지들을 인견하여 의논하였는데, 당시 동부승지로 있던
박태상이 김수항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의견을 비치지 않고 이원정에 대해서는 부당한 조처임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이듬해에 박태상이 이조 참의에 제수되자, 김진귀(金鎭龜)는 김수항에 대한 하문에는 미적거리면서 눈치를 살피고 이원정에 대해서
는 구제하려는 계청에 동참하였던 점을 문제 삼아 박태상을 체차시킬 것을 청하였다.《肅宗實錄 6年 3月 30日, 7年 3月 26日, 4
月 5日》
[주13] 윤지완(尹趾完)이 …… 논하였다 :
1671년(현종 12)에 이남(李柟)이 연경(燕京)에 사행을 다녀와서 청나라 군주가 우리나라를 가리켜 ‘신하가 강성하다〔臣强〕’고
말하였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1674년에 오시수(吳始壽)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돌아와서는 청나
라 역관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거짓으로 인용하여 이남의 말을 증명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당시의 진상을 다시 조사하여 오시수가 거짓을 날조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시수를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내
리자 당시 대사간으로 있던 윤지완이 오시수를 용서하여 먼 곳에 위리안치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김진귀(金鎭龜)가 입시하여 윤
지완을 삭탈관직할 것을 청하였다.《顯宗改修實錄 12年 2月 20日》《肅宗實錄 7年 4月 21日, 22日》
[주14] 강석빈(姜碩賓)과 …… 논하였다 :
강석빈과 유명천(柳命天)은 남인(南人) 인사들로, 1680년(숙종 6)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남에 따라 둘 다 유배되었는데,
이듬해에 조정에서 지진을 계기로 죄인들을 감등(減等)해주면서 두 사람의 죄가 비교적 가볍고 노모(老母)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강석빈은 감등하고 유명천은 양이(量移)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진귀(金鎭龜)가 계사(啓辭)를 올려 강석빈이 역모를 꾀한 허견(許堅)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과 유명천이 오랫동안 인사
권을 쥐고 있으면서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점을 들어 죄를 감등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承政院日記 肅宗 7年 4月 28日》 김덕원(金德遠) 역시 남인 인사로, 1680년에 형조 판서로 있으면서《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개수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에 홍문관 관원들이 차자를 올려 김덕원이 붕당을 지어 흉악한 짓을 도모한다고 논핵하였으며, 김진구
또한 입대하여 같은 이유를 들며 수용(收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肅宗實錄 6年 7月 19日》《北軒居士集 卷11 初
年錄 行狀》
[주15] 오시수와 조경의 일 :
조경(趙絅, 1586~1669)의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윤선도(尹善道, 1587~
1671)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ㆍ해옹(海翁),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1659년(효종 10) 효종(孝宗)이 승하한 뒤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두고 벌어진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윤선
도를 비롯한 남인(南人)들은 삼년복을 주장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기년복이
채택됨에 따라 남인들은 조정에서 쫓겨나고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1661년(현종 2)에 가뭄이 들자 현종(顯宗)이 원옥(寃獄)을 심리(審理)하여 사면을 시행하였는데, 그 대상에서 윤선도가 제외되자,
조경이 상소하여 예송 시에 윤선도가 충심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던 점을 헤아려 사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이 논란이 되어
조경은 파직되었고, 처음에 양이(量移)의 명이 내려졌던 윤선도는 다시 삼수로 유배되었다. 《顯宗實錄 2年 4月 21日ㆍ23日, 5月
16日》
1671년(현종 12)에 이남(李柟)이 연경(燕京)에 사행을 다녀와서 청나라 군주가 우리나라를 가리켜 ‘신하가 강성하다〔臣强〕’고
말하였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1674년에 오시수(吳始壽)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돌아와서는 청나
라 역관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거짓으로 인용하여 이남의 말을 증명하였다.
1681년(숙종7)에 당시의 진상을 다시 조사하여 오시수가 거짓을 날조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시수를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내
리자 당시 대사간으로 있던 윤지완이 오시수를 용서하여 먼 곳에 위리안치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김진귀(金鎭龜)가 입시하여
윤지완을 삭탈관직할 것을 청하였다.《顯宗改修實錄 12年 2月 20日》《肅宗實錄 7年 4月 21日, 22日》
[주16] 이지익(李之翼)이 …… 논하였다 :
1674년(현종 15)에 송시열(宋時烈)이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남인(南人)에게 패하자 양사(兩司)에서 송시열의 죄를 물어 형률
을 적용할 것을 계속 주청하였는데, 이지익은 당시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에게 형률을 적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사직을 청하
였다.
그러나 사직을 청하면서, 양사가 합사(合辭)하여 송시열을 파직하도록 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논의이고 서인(西人) 관원들이 송
시열의 처벌에 반대하여 인피하고 물러나는 것은 편당(偏黨)의 폐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아뢰어 서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1681년(숙종 7)에 김진귀(金鎭龜)는 사헌부 관원들과 함께 이 일을 거론하여 이지익을 논핵하고 서용(敍用)하지 말 것을 청하였
다.《肅宗實錄 卽位年 12月 25日, 7年 11月 12日》
[주17] 수찬이 …… 논하였다 :
1681년(숙종 7)에 성균관 유생 박성의(朴性義) 등 60여 인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무함하고 비방하면서 이들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숙종(肅宗)이 박성의 등에게 유벌(儒罰)을 시행하는 것으로 처벌
을 그치자, 김진귀(金鎭龜)가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이이와 성혼이 무함을 받게 된 자초지종과 선왕들이 두 사람을 존
숭하고 기렸던 사실에 대해 아뢰고 박성의 등을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肅宗實錄 7年 9月 27日, 30日》
[주18] 사간이 …… 논하였다 :
대비는 숙종(肅宗)의 모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1675년(숙종 1)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상
소하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ㆍ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ㆍ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즉 이른바 삼복(三福) 형제의 비리
를 들추고 이들이 궁녀와 간통하였다고 논핵하였는데, 국문을 한 결과 무죄로 판결이 나자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가 개입해서 삼복
형제를 처벌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복창군과 복평군을 유배 보내게 되었다.
이를 두고 윤휴(尹鑴)는 숙종에게 대비를 단속할 것을 청하고 홍우원(洪宇遠)은《주역(周易)》가인괘(家人卦)를 거론하며 대비의
간섭을 비난한 일이 있었는데, 1680년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삼복 형제가 역모죄로 처형되고 남인이 모두 축출당하면서,
대비를 무함하였다는 죄목으로 윤휴는 사사되고 홍우원은 함경북도(咸鏡北道)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682년에 함경북도에 찬배되어 있는 자가 너무 많으므로 양이(量移)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수항(金壽恒)의 의견에 따라 홍
우원을 문천(文川)으로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진귀(金鎭龜)가 이에 반대하여 홍우원이 대비를 무함하였던 죄상을 들면서
이배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였다.《肅宗實錄 1年 3月 12日ㆍ14日ㆍ15日, 4月 1日, 6年 4月 25日, 8年 11月 23日, 12月 2
日》
[주19] 승지가 …… 물리쳤다 :
윤증(尹拯, 1629~1714)의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원래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으나,
1674년(현종 15)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짓는 문제로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졌다. 이후로 서인(西人)은 송시열을 주축으
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을 주축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었다.
윤증은 신유년(1681, 숙종 7)에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의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려다가 박세채(朴世采)의 만류로 보내지
않았는데, 이 편지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684년에 사옹원 직장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이 편지를 거
론하며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하였다고 논핵하자, 비안(比安)의 유생(幼生) 김도명(金道明)이 상소하여 윤증을 위해 변론하고
최신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김진구(金鎭龜)는 당시 승지로 있으면서 김도명의 상소가 윤상(倫常)에 어그러졌음을 이유로 들어 봉입되지 않도록 하였다.《肅宗
實錄 10年 4月 29日》《承政院日記 肅宗 10年 6月 6日》
[주20] 대사간이 …… 밝혔다 :
1685년(숙종 11)에 함경도(咸鏡道) 지역 백성들이 중국의 국경을 넘어가 청나라 사람을 창으로 찌른 일이 발생하자, 청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하여 직접 관련자들을 조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청나라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내어 사건 처리를 보고하고 사죄하였
다.
이때에 정재숭(鄭載嵩)이 진주사의 상사(上使)가 되고 최석정(崔錫鼎)이 부사(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갔는데, 청나라에서 이번 사
건의 잘못을 물어 벌금을 요구해오자 정재숭이 임의로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올렸다. 그러자 청나라에서 한낱 비천한 신하가 국왕
에게 아뢰지도 않고 함부로 먼저 정문을 올렸다고 힐책하며, 이는 모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청나라의
보호가 없었다면 신하가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는 등 모욕적인 내용으로 자문(咨文)을 작성하여 보
내왔다.
이에 김진귀(金鎭龜)가 양사(兩司)의 관원들과 합계(合啓)하여, 사명(使命)을 받든 자가 잘못을 저질러 군주에게 욕이 미치게 하고
도 이에 대해 힘껏 쟁변하지 않은 채 그저 사죄의 뜻만 보이고 돌아온 것을 문제 삼아 정재숭과 최석정 등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肅宗實錄 11年 10月 9日, 12年 閏4月 29日, 6月 6日》
[주21] 공이 판서로 …… 때문이었다 :
1699년(숙종 25) 8월에 예문관 검열 이태좌(李台佐) 등이 유봉휘(柳鳳輝), 홍중휴(洪重休), 이만견(李晩堅), 송정명(宋正明) 네
사람을 새로 천거하여 김진구(金鎭龜)를 비롯한 여러 선배들에게 알렸는데, 김진구는 송정명이 반임(泮任)을 맡았을 때에 조의상
(趙儀祥) 등과 함께 상소하여 윤증(尹拯)을 불러들일 것을 청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모욕하는 말을 했던 것을 이유로 그가 등용되
는 것에 반대하였다.《肅宗實錄 25年 8月 6日》
[주22] 동지성균관사가 …… 때문이었다 :
성균관 재임(成均館齋任) 박필우(朴弼禹)가, 송시열(宋時烈)의 일을 변론하면서 윤증(尹拯)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유생(儒生) 윤
세현(尹世顯) 등에게 유벌(儒罰)을 시행하였는데, 마침 증광과(增廣科)가 설행되자 대사성 민진주(閔鎭周)가 박필우에게 명하여
윤세현 등의 유벌을 풀어주게 하였다.
그러나 박필우가 이를 듣지 않자 민진주가 상소하여 이 일을 아뢰고 인혐하였다. 이에 숙종(肅宗)이 당시 예조 판서로 있던 김진구
(金鎭龜)에게 박필우를 설득하게 하였는데, 박필우가 끝내 고집을 부리자 김진귀에게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게 하여 박필우를 재임에
서 물러나게 하고 새 재임을 선출하여 윤세현 등의 유벌을 풀어주게 하였다.《肅宗實錄 25年 8月 12日》
[주23] 예조 판서가 …… 청하였다 :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ㆍ서계(西溪),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일찍이 사서(四書)와
《서경(書經)》,《시경(詩經)》에 대해《사변록(思辨錄)》이라는 주해서(註解書)를 저술하여 주희(朱熹)의 주해와는 다른 견해
를 제시하였으며,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던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이경석을 비난한 송시열(宋時烈)을,
정사를 어지럽혔던 노(魯)나라 대부 소정묘(少正卯)에 견주었다.
1703년(숙종 29) 4월에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 180명이 상소하여 박세당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논핵하자, 숙종이 예조에
이 사안을 내려 처리하게 하였다. 이에 당시 예조 판서로 있던 김진구(金鎭龜)는 박세당이 지은 주해서와 이경석의 비문을 모조리
거두어들여 없애버릴 것을 청하였으며, 특히《중용(中庸)》의 주해서에서 주희가 정한 장구(章句)를 기탄없이 마음대로 바꾸어 새
로운 설을 만들어내었다고 하여 유신(儒臣)에게 단락마다 변론하여 논박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肅宗實錄 29年 4月 17日》
《北軒居士集 卷11 初年錄 行狀》
[주24] 후궁 장씨(張氏) :
희빈(禧嬪) 장씨[張氏, 1659년(효종 10)~1701년(숙종 27)/향년 42세]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종친 동평군(東平君) 이항(李
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와 1686년(숙종 12)에 숙원(淑媛)이 되고 1688년에 소의(昭儀)가 되었으며, 이해에 경종(景宗)을 낳
고서 이듬해에 희빈으로 승격되었다가 왕비에 올랐다.
1694년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1701년에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
한 일이 발각되어 오라비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사사되었다.
[주25] 남구만(南九萬) :
1629~1711.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ㆍ미재(美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대표적인 소론(少論) 대신으로, 1651년
(효종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효종 7)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사간,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형조 판서, 병조 판서, 도승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84년(숙종 10)에 우의정, 이듬해에 좌의정, 1687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득세하자 강릉(江陵)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으며, 1694년 갑술환국
(甲戌換局)으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에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에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처벌을 두고 노론
(老論)에 맞서 가벼운 형을 내릴 것을 주장하다가 숙종(肅宗)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707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저서로는《약천집(藥泉集)》,《주역참동
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주26] 백어(伯魚)가 …… 경우 :
백어는 공자(孔子)의 아들 리(鯉)로, 출모(出母)가 죽고 기년(期年)이 지나서도 계속 곡을 하였는데, 이를 들은 공자가 너무 심하다
고 책망하자 그제야 곡을 그쳤다. 출모에게는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으므로 기년이 되면 곡을 하지 않는데, 백어가 여전히 곡을 하
므로 공자가 나무란 것이다.《禮記 檀弓上》
당시 경종(景宗)은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상에 시마복(緦麻服)을 입어 이미 복을 벗은 상태였으므로 백어와는 상황이 달랐으며,
희빈 장씨는 중죄(重罪)로 사약을 받고 죽었으므로 허물할 것이 없었던 백어의 출모와는 달랐다.
[주27] 숙종이 …… 하였는데 :
신종황제(神宗皇帝)는 명나라 제14대 황제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우리나라에 원군(援軍)을 보내주었다. 1704년(숙종 30)
에 숙종(肅宗)이 이 은혜를 기려 창덕궁(昌德宮) 금원(禁苑)의 서쪽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신종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3월
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肅宗實錄 30年 12月 21日, 31年 3月 9日》
[주28] 죽천공(竹泉公) :
김진규(金鎭圭, 165~1716)로,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682년(숙종8)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
격하고 1686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는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이후 대사성, 대제학, 예조 판서, 강화 유수(江華留守),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
는 문청(文淸)이며, 저서로는《죽천집(竹川集)》,《여문집성(儷文集成)》이 있다.
[주29] 선조(先朝)의 실록 :
《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가리킨다.《현종실록》은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민점(閔點) 등의 남인(南人)이 중심이 되어
1675년(숙종 1) 5월에 편찬을 시작해 1677년 2월에 완성하였는데, 1680년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축출되고 서
인(西人)이 집권하자, 실록에 예송(禮訟)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서인을 폄하한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개수를 추진하여 1683년 3월
에《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을 완성하였다.
[주30] 갑인년의 일 :
갑인년(1674, 현종 15)에 효종(孝宗)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어떤 복을 입을 것인지
를 두고 벌어졌던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간의 두 번째 예송(禮訟)을 가리킨다. 서인은 이 예송에서 남인에게 패하여 정계에서 물
러나게 되었다.
[주31] 곡역후(曲逆侯)가 …… 근심 :
곡역후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공신(功臣)인 진평(陳平)의 봉호(封號)이다. 한 고조가 죽은 뒤에 여 태후(呂太后)가 여씨(呂氏)
일가의 세력을 키워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는데, 진평이 이를 걱정하면서도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여 항상 집에서 쉴 때면 이를 깊
이 근심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재상과 장수가 협력해야 한다는 육가(陸賈)의 충고에 따라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주발(周勃)과 화해하고 협력하
여 여씨 일가를 주륙하는 데에 성공하였다.《史記 卷97 酈生陸賈列傳》김만기(金萬基)가 남인(南人)의 편에 서서 서인(西人)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김석주(金錫胄)와 협력하여 1680년(숙종 6)에 다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정권이 들어서게 했으므로, 이를
진평이 주발과 화해하고 협력했던 일에 견준 것이다.
[주32] 이남(李柟)과 …… 책훈되었는데 :
1680년(숙종 6)에 김만기(金萬基)는 복선군(福善君) 이남 등 삼복(三福) 형제와 허견(許堅)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보사공신(保
社功臣) 1등에 책훈되었다.《肅宗實錄 6年 5月 18日》
[주33] 장자방(張子房) :
한(漢)나라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으로, 자방(子房)은 그의 자이다. 장량은 뛰어난 계책을 내어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
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나, 천하가 평정된 뒤에 한 고조가 제(齊)나라 땅 3만 호(戶)를 봉해 주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고 유후(留侯)
에 봉해지는 것에 만족하였다.《史記 卷55 留侯世家》
[주34] 앞서 …… 외관직 :
앞에서 언급한 광주 부윤과 경상도 관찰사를 가리킨다.
[주35] 이남의 …… 뒤엎고는 :
1689년(숙종15)에 송시열(宋時烈)이 경종(景宗)의 원자정호(元子定號)를 반대하여 숙종(肅宗)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남인(南
人)이 이를 기회로 다시 정권을 잡아 송시열과 그를 지지하던 서인(西人) 일파를 모두 축출하였던,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
한다. 이로 인해 송시열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수많은 서인 인사들이 일제히 처벌되었으며, 인현왕후(仁顯王
后) 역시 폐출되었다.
[주36] 6년 …… 축출하였다 :
1694년(숙종20)에 김진귀(金鎭龜)의 장자 김춘택(金春澤) 등 서인(西人) 자제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黯)이 이 사건의 국문을 담당하면서 옥사를 확대하여 서인을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인(金寅) 등이 이 사건에 대해 남인(南人)의 무고임을 역고변하자, 숙종(肅宗)은 남인 인사들을 축출하고 남구만(南九
萬) 등의 서인 인사를 다시 등용하였다.
[주37] 다시 …… 나서네 :
개와 닭을 찾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마음〔放心〕’을 찾는다는 말이다.《맹자(孟子)》〈고자 상(告子上)〉에 “사람들은 닭이나 개
를 잃어버리면 찾을 줄을 알면서,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文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고 하였다.
[주38] 명성대비(明星大妃) :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로, 현종(顯宗)의 비이자 숙종(肅宗)의 모후이며,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1651년(효종2)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659년(현종 즉위년)에 왕비에 올랐으며, 1683년(숙종9) 12월 5일에 창경궁(昌慶
宮)의 저승전(儲承殿)에서 승하하였다. 당파적 입장이 강하여 서인 측에 서서 자주 정무에 관여하였다. 휘호(徽號)는 정헌문덕(貞
獻文德)이고, 능호(陵號)는 숭릉(崇陵)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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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戶曹判書金鎭龜 神道碑銘幷序 - 李宜顯 撰。
若稽我肅宗大王在宥四十有六年, 養育人材, 久道化成。 德望、才力之臣, 嬪然而列于朝, 克左右勵相, 以休寧邦家。 故判書光恩君金公亦其一也。 公以上之六年庚申, 擢文科, 歷中外官, 積其勞伐。 三十年甲申十二月二十四日, 卒于第。 上亟下恩旨, 追典有加, 君臣之際, 可謂至矣。 及上登遐, 凶徒竊枋, 誅鋤舊臣殆盡。 公家受禍尤酷, 二子雲澤、民澤俱死於淫刑, 諸子及孫流竄絶海。 行路爲之氣塞。 聖上嗣位, 雪冤解縣, 靡有餘憾。 於是公第五子祖澤以公牲繫之文屬不佞, 不佞逡巡不敢當。 而已又自念, 旣忝職太史, 滅世家賢大夫之業不述罪也。 遂受而敍之, 系以銘。 其敍曰。
公諱鎭龜, 字守甫。 爲人豐幹, 疎眉目, 風儀儼然。 性沈密肅恭, 與人寬厚而不狎。 篤於孝, 居戚不懈, 飭躬儉約, 事君誠愨。 以仁敬后兄, 益謙愼自持, 仕宦必避權要。 又不喜進取, 嘗爲吏曹郞, 不拜。 擢拜廣州府尹, 距登第未滿二朞, 尤蹙然不安。 大臣知其意, 啓改之。 後數年, 爲慶尙觀察使, 亦不欲赴, 大臣又陳白, 許遞。 後爲御營大將、兵曹判書, 以兵權非戚臣所可據皆不久居, 不特以人言之深也。 然於邪正是非之分, 斯文興廢之關, 華夷逆順之辨, 必矢口明言, 不以處地爲諉。 蓋以五代祖黃岡公、考瑞石公力主彰癉之論, 高祖文元公爲東方儒宗, 曾祖參判公颺淸陰尊周義, 祖生員公殉節虜難也, 故所以繩武嗣徽者然也。 人或以不避形迹誚公, 而識者是之。 始, 公以持平論趙絅營救尹善道, 不宜配食顯宗廟庭; 又論朴泰尙當進退賢邪之時, 有媕娿瞻顧之迹; 又論尹趾完救護吳始壽, 疑亂重獄。 又以姜碩賓・柳命天親密逆堅、金德遠黨惡投疏, 繳論減罪、收用之命。 又請對爭始壽、絅事, 命賜始壽死, 黜絅享。 又論李之翼傅會邪論。 以修撰論朴性義醜詆文成、文簡二先正, 宜屛遠裔。 以司諫論洪宇遠誣謗慈聖, 不當用寬典。 以承旨啓言尹拯背師, 請收恩例賜與, 斥却其徒伸白之疏。 以大司諫合辭論鄭載嵩、崔錫鼎等使虜辱命之罪, 以明君臣之義。 公於釋褐初, 卽選入史局。 古例史局薦人, 必問先進。 公在六卿, 遏新薦人宋正明, 以曾請召尹拯而侵侮宋尤菴先生也。 爲同知成均, 解尹世顯等儒罰, 以其辨尤菴誣而爲拯黨所罰也。 以禮曹判書辨朴世堂侵詆朱子、尤菴之說, 請令儒臣逐節攻破。 此數事, 尤爲時輩所怒, 而公不顧也。 後宮張氏咀厭中宮事覺, 上命賜死。 前時相臣南九萬附張氏倡邪論, 及是崔錫鼎以九萬客力請全恩, 其黨群起而和之。 士類或被掀撓, 終始守正僅三四公。 公又確守毋變曰: “脫儲位不安, 當以死爭, 今日處分, 豈敢間然?” 李益壽疏言“宜令春宮臨張氏喪, 或替送宮僚管攝”, 公覈奏曰 “世子親臨, 於理不可。 戶、禮官旣治喪, 宮僚管攝, 亦不合事例。” 及期, 又有謂世子當望哭者, 公據禮爭之曰 “雖有生育之恩, 亦異伯魚之母。” 乃止。 上追思神宗皇帝恩, 設壇報祀, 公曰 “此擧盛矣。 然事須敦本實, 不然, 徒聲名耳。 今旣爲之, 必備儀制嚴體貌, 乃稱斯禮, 不當慮煩洩務減削。” 寢疾, 猶箚論壇樂之謬。 有司價買公外第石, 爲築壇之用, 公辭曰 “大夫固不可與國爭利, 況爲玆壇乎 奚用價” 亡何, 公卒。 弟竹泉公疏陳遺意, 上特許以成其美。 公奉職謹少, 爲都廳郞, 與修先朝史, 益刻厲, 未嘗告病。 時公方出入正言、獻納、校理、應敎、執義, 主其事者請移閑職專屬史事, 遂拜直講。 又爲兵郞、僕正, 竟以勞陞通政, 貳刑、兵。 最久於銀臺, 屢遷至左。 公計慮深遠, 瑞石公當甲寅後, 有曲逆燕居之憂, 公密贊之力爲多。 曁柟、堅伏誅, 瑞石公策元功, 公絶口不言, 尤菴稱之以爲 “張子房不如”。 旣登朝, 尤以猷爲見期, 於其未赴二外職, 足可見廷推之重。 而未幾出鎭水原, 旋薦按湖南, 政聲益騰。 及瑞石公卒, 而柟黨復用事, 盡殺功臣, 翻逆案, 竄公濟州海島。 禍且不測, 公夷然如平日。 後六年, 賊臣黯起誣獄, 將魚肉搢紳。 上覺之, 極罪黯, 黜退其黨與, 召用舊臣, 特擢公戶曹參判, 眷毗至深。 而時公長子受國言甚, 人視之如膩。 柄人旣與淸議相角, 欲擠士類, 輒以公爲注, 爲牽連竝汚計。 十餘年間出入疏啓, 殆無虛歲。 蓋以戚里之名, 世所嫌避, 而公家尤爲世指目故也。 由是低徊宂散, 數免稀遷。 兵・禮・刑曹參判、漢城左・右尹、兼副摠管, 乃其數年所歷, 而皆非選也。 間爲都承旨, 猶忌公在朝, 托言巡撫而出公嶺南。 又出爲江華留守, 以世子嘉禮副使, 超階資憲。 屢拜判尹、刑・工・戶曹判書、知敦寧、左・右參贊、兼都摠管・守禦使・世子賓客, 旣久, 始陞判義禁。 公詘於時議, 才未能盡展。 然於司寇、度支, 時見一班, 尤練於戎政, 深得士心。 及至末年, 望實益隆, 駸駸乎金甌之覆, 而忌者不止, 公且卒矣。
嗚呼! 士患不逢時, 時逢矣, 而患不見知於君上。 若公者, 中雖厄於奸凶, 罹遷謫之禍, 而終被環召, 眷遇無替。 時不可謂不逢, 亦不可謂不得於君。 而卒與未究用者同歸, 其命也夫! 公嘗夢得一詩曰 “不知秋日晩, 猶復犬鷄求”, 仍以“晩求”名其室而自號。 蓋有意於尋理家學, 而竟不能如其志, 徒爲偪側危途, 壹鬱而終世, 可勝惜哉? 雖然, 蓋棺之後, 其人可見, 一時紛紛, 何足深論 至今知與不知莫不以厚德長者稱公, 異趣者亦歎其廉謹。 公議之定, 可謂不待百年矣。 公雖不得奮庸熙載, 以大副宿望。 就其所經履, 猶足以佑我興運, 裨補聖治, 而又以完名終焉。 苟非聖上之至明, 安得保全至此 此可以無恨也歟。 公, 光州人, 新羅王子興光之後。 自勝國至我朝, 赫舃愈盛, 他姓莫望。 黃岡公諱繼輝, 官大司憲 文元公諱長生, 世稱沙溪先生 參判公諱槃 生員公諱益兼。 瑞石公諱萬基, 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文忠公。 其妣西原府夫人韓氏, 郡守有良女。 公媲持平李光稷女。 閨範卓絶, 六親咸服, 明聖大妃尤敬重之。 有八男三女 男春澤 普澤, 觀察使雲澤, 參判 民澤, 校理 祖澤, 大司諫 福澤, 奉事 廷澤 延澤。 女適敎官宋婺源、掌令任徵夏、士人李廣淵。 曰濟澤, 公庶出也。 其銘曰。
維金之望, 莫亢於光。 載其茀祿, 八葉辨章。 綿及後代, 厥德彌卲。 大憲匡世, 文元董道。 維公考翼, 寔爲宗臣。 褒紀帶礪, 終莫緇磷。
是生名卿, 克嗣前烈。 乃盛玉堂, 乃司喉舌。 扶正遏邪, 有脊其言。 畿鎭湖臬, 餘地撥煩。 累被乇羅, 遘時斯屯。 素患安命, 雖枉而伸。
王曰噫歟! 予唯其懲。 奸諛旣屛, 俊髦彙征。 擢秩以召, 恩出常格。 流連列曹, 或宣外服。 世路失平, 荊棘名場。 望實自茂, 掩而愈彰。
六尙三軍, 終焉允臧。 年五十四, 屣脫何忙 其用未究, 其聲則長。 廣之蘆峙, 有崇堂阜。 韓山哲媛, 媲美同祔。 豐碑紀善, 刻示茫茫。
更千百載, 無敢毁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