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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71권 / 비(碑)
남해(南海) 노량(露梁)에 있는 이 충무공(李忠武公) 묘비(廟碑)
남해의 노량에 삼간(三間)의 사당이 있으니, 그 안에 위패(位牌)를 설치하고 고(故) 이 충무공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신종황제(神宗皇帝,송나라 제6대황제) 만력(萬曆) 기원(紀元)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온 나라의 병력을 일으켜 침략해 왔는데, 공이 먼저 북변(北邊)에 있을 때 자주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사람들이 전연 알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신묘년(1591, 선조 24) 2월에 공을 발탁하여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제수하였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날마다 전구(戰具)를 수리하고 사졸(士卒)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왜적(倭賊)과 싸워서 옥포(玉浦)에서 패배시키고, 노량(露梁) 및 당포(唐浦)에서 패배시켰으며, 사량(蛇梁)에서 패배시켜 그들의 귀장(貴將)을 베었고, 또 당항포(唐項浦)에서 패배시켜 그들의 전선(戰船) 40여 척을 부수었는데, 이것은 모두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친 것이다.
그러자 상이 교서(敎書)를 내려 칭찬하고 그의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영등포(永登浦)에 와서도 그들을 패주시키고,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서도 왜적을 유인하여 패배시키니, 성혈(腥血 비린내 나는 피)이 바다에 창일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그들의 배 40여 척을 불지르고 마침내 부산포에 진전(進戰)하여 또 그들의 배 1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진영(陣營)을 한산도(閑山島)에 설치하고는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어가(御駕)를 용만(龍灣 의주(義州)를 말함)에서 맞이할 계획을 세웠는데, 조정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새로 설치해서 공을 임명하므로 왜적이 매우 두려워하여 간첩을 놓아서 우리 제장들을 우롱하였고, 원균(元均)이 또 공을 시기하여 무함하니, 조정에서 이 두 가지를 믿었으므로 공이 마침내 추고(追栲)를 받았는데, 대신의 말이 있었고 상도 공의 공을 생각하여, 관직만을 삭탈하고 종군시켜 죽을힘을 다할 것으로 책임지웠다.
그런데 때마침 모부인이 졸(卒)하므로 가는 길에 분상(奔喪)하여 통곡하고, 즉시 떠나면서 말하기를,
“나의 일편단심은 충(忠)과 효(孝)뿐인데, 지금에 와서 모두 상실하였다.”
하니, 군민(軍民)이 말[馬]을 둘러싸고 울부짖었고, 원근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였다.
한편 원균은 공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으나 적의 꾐에 빠져 군사가 패하자 달아나다가 죽었고, 한산도는 마침내 적에게 함락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서해(西海)로부터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함락하므로, 조정에서 마침내 공을 다시 통제사로 삼으니, 공이 10기(騎)로 달려 순천부(順天府)에 들어가서 도망한 군졸 약간을 수집하여 마침내 오란도(於蘭島)와 벽파정(碧波亭)의 싸움에서 모두 적을 대파(大破)시켰다.
승첩의 소식이 조정에 이르자, 상이 공에게 높은 품계로 승진시키고자 하니, 공의 관작과 품계가 이미 높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장사(將士)들에게만 상을 내렸다. 그리고 천장(天將 명 나라 장수를 말함) 양공 호(楊公鎬)도 은자(銀子)와 필단(匹緞)을 보내어 위로의 상(賞)으로 내리고 이어 천조(天朝)에 아뢰니, 공의 이름이 마침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에 공은 아직도 반찬 없는 식사를 하며 거적자리에서 잠을 잤는데, 상이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리고 또 군량(軍糧) 등 군수품을 보내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애써 따랐다. 상이 공의 수군(水軍)이 고단(孤單)하고 나약함을 염려하시어 후퇴해서 형세를 관찰하게 하고자 하니, 공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한 번 이 항(港)을 떠나면 적이 반드시 상륙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할 것입니다.”하였다.
그때에 천장(天將) 진린(陳璘)과 유정(劉綎)이 수로와 육로로 와서 회합했는데, 공이 그들을 접응(接應)하는 데 방도가 있어서 모두에게 환심(歡心)을 얻었다. 그리고 공이 고금도(古今島)에 나아가 웅거해 있으면서 백성을 모집하여 농사를 경작하게 하되 공사(公私)간에 서로 편리하게 하니, 남방의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가족을 거느리고 따라오므로 적장 행장(行長)이 급히 철군하여 돌아갈 길을 열어 주기를 요구하되 매우 공손한 태도로 하였다.
그런데 두 천장(진린(陳璘)과 유정(劉綎))이 그들의 뇌물을 받고 모두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고자 하므로 공이 그들을 매우 풍자하였다. 적장 행장이 또 공에게 사신을 보내어 총과 칼을 주자, 공이 수적(讎賊)과 통사(通使)할 수 없다 하고 엄한 말로 물리치니, 장사(將士)들의 용기가 저절로 배나 용솟음쳤다.
적장 행장은 계획이 궁박해지자, 드디어 사천(泗川)에 주둔한 적(賊)을 이끌어 자기를 구원하게 하였다. 하루저녁에는 큰별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므로 군중(軍中)이 두려워하였다. 공이 무술년(1598, 선조31) 11월 19일에 진공(陳公 진린(陳璘)을 말함)과 더불어 노량(露梁)에서 적과 싸워 적을 크게 무찔렀는데, 공이 갑자기 적의 총탄에 맞고 절명하니, 진공이 포위를 당하여 위급하였다.
공의 조카 완(莞)은 담력(膽力)이 있었는데, 발상(發喪)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싸움을 독려하여 마침내 진공의 포위를 풀어 주었고 행장은 겨우 도망갈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발상(發喪)을 하니, 우리 군사와 천장(天將) 두 진영(陣營)이 다 부르짖어 통곡하여 그 소리가 바다에 가득하였다.
남해(南海)에서 아산(牙山)에 이르기까지 영구(靈柩)를 맞이하여 통곡하면서 제전을 올리는 백성들이 천 리 길에 끊이지 않았고, 또한 삼년상(三年喪)을 입은 자도 있었다. 승도(僧徒)들은 곳곳에서 재(齋)를 설치하고 다들 말하기를,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고 우리의 원수를 갚아 준 분은 공이시다.”하였다.
공은 안으로 독행(篤行)이 있어 곧은 절개를 스스로 지켰고, 뜻에 옳지 못함이 있으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요인(要人)일지라도 반드시 의(義)를 의거하여 굴복시켰고 꾀를 내어 일을 할 때는 전혀 실책(失策)이 없었으며, 용기를 내어 기회를 결단하면 앞에 굳센 대적이 없었다.
군정(軍政)이 간결하되 법도가 있었고, 한 사람도 망녕되이 죽이지 않으므로 삼군(三軍)이 한뜻이 되어 감히 군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대의(大義)를 들어 왜사(倭使)를 물리침에 이르러서는 뇌물을 받은 자로 하여금 얼굴이 붉어지게 하였으며, 화친(和親)을 주장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마에 진땀을 흘리게 하였으니, 장 충헌(張忠獻)과 악 무목(岳武穆)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가 극도로 쇠약하고 병화(兵禍)가 일어난 때에 천하의 막강한 적을 만나,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모두 전승(全勝)을 거두어 동남(東南)의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국가 중흥(中興)의 위대한 공을 세웠고, 황상(皇上)의 총명(寵命)을 입어 인부(印符)를 내려 주기에 이르렀으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비록 집집마다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린다 할지라도 지나칠 것이 없다.
더구나 이 노량은 공의 깃발[旌纛]이 임한 곳이며 호령(號令)이 닿은 곳으로, 그 정령(精靈)의 무서운 기세가 진실로 억만년이 흘러가도 산을 박차고 바다를 내뿜으며, 바람이 성내듯 거세고 구름이 모이듯 웅장하여 항상 대마도(對馬島)를 짓밟고 강호(江戶: 일본 동경의 옛 이름)를 공격할 기세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엄히 받들기를 더욱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옛날의 사당이 있으나 비좁고 허술해서 공의 신령을 봉안할 수 없으므로 통제사(統制使) 정익(鄭榏)이 포은 선생(圃隱先生)의 이손(耳孫 현손(玄孫)의 손자를 말함)으로, 공의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즉시 이 사당을 고쳐 새롭게 하고, 또 큰 돌을 다듬어 빗돌을 세워 놓고서 학사(學士) 민정중(閔鼎重)을 통하여 나에게 그 사실(事實)을 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글이 대충 이루어지자, 판서(判書) 홍공 명하(洪公命夏)가 그 일을 보고하므로, 효종대왕이 급히 초본(草本)을 거두어들여 특별히 을람(乙覽)을 해 주셨으니, 또한 어찌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그리워했던 뜻이 아니었겠는가.
지금은 효종대왕이 승하하시어 능소(陵所)의 잣나무만 쓸쓸할 뿐이니, 공의 굳센 혼백이 거듭 구원(九原)에서 슬퍼할 것이다. 이를 여기에 아울러 기록해서 시말을 갖추고 옛일을 생각하면서 피눈물을 닦는다. 공의 휘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인데, 덕수인(德水人)이다.
숭정 신축년(1661, 현종2) 10월 일에 쓴다.
금상(今上 현종을 가리킴) 계묘년(1663)에 사액(賜額)을 내리시기를 ‘충렬사(忠烈祠)’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숭보(崇報)에 유감이 없게 되었다. 비(碑)의 역사를 전후하여 도운 사람은 통제사 박공 경지(朴公敬祉)와 김공 시성(金公是聲)인데, 이해 7월 일에 추가하여 새겼다. <끝>
[각주]
[주01] 장 충헌(張忠獻)과 악 무목(岳武穆) : 장 충헌은 송(宋) 나라 때 시호가 충헌인 장준(張浚)을 말하는데, 힘을 다하여 금인(金人)을
막았다. 악 무목은 송 나라 때 시호가 무목인 악비(岳飛)를 말한다. 장준과 악비는 모두 충절이 지극하였고, 금인(金人)을 토벌하는
데 전력하였는데, 특히 악비는 고종(高宗)이 ‘정충악비(精忠岳飛)’란 네 글자를 친히 써 내리기까지 하였다.
악비가 금병(金兵)을 여러 번 격파하고 주선진(朱仙鎭)에 진격하였는데, 때마침 진회(秦檜)가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악비를 불러
들여 죄에 빠뜨려서 악비 부자(父子)를 죽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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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南海露梁忠武李公廟碑
南海之露梁。有廟三間。中設位牌。以祀故忠武李公者也。神宗皇帝萬曆紀元。倭酋秀吉弑其君。擧國來寇。公先在北邊。屢立奇功。而人不甚知。辛卯二月。擢授全羅左水使。公至則日修戰具。撫循士卒。遂與賊戰。敗之於玉浦。敗之於露梁及唐浦。敗之於蛇梁。斬其貴將。又敗之於唐項浦。撞破其四十餘船。皆以少擊衆。上下書褒之。陞其資級。至永登浦敗之。至見乃梁。誘賊敗之。腥血漲海。又戰於安骨浦。燒其船四十餘。遂進戰於釜山。又破其船百餘艘。遂置陣閑山島。積粟整師。以爲迎駕龍灣之計。朝廷爲置三道統制使以處之。賊畏甚行間。以愚我諸將。元均又嫉構之。朝廷兩信之。公遂被追栲。有大臣言。上亦念公功。只削職從軍以責效。時母夫人卒。公便道奔哭。卽行曰。吾一心忠孝。到此俱喪矣。軍民擁馬號泣。遠近嗟惋。元均代爲統制使。爲賊所誘。軍敗走死。而閑山遂陷。賊遂由西海進陷南原。朝廷遂以公復爲統制使。公以十騎馳入順天府。稍收亡卒。遂戰於於蘭島碧波亭。皆大破之。捷至。上欲陞公崇品。有言公爵秩已高。遂止。止賞將士。天將楊公鎬亦送銀段以慰賞。而奏聞天朝。公之名遂得聞天下。時公猶食素寢苫。上特賜諭旨。且送草木之滋。公涕泣勉從。上念公舟師單弱。欲令前却以觀勢。公馳啓曰。臣一去港。則賊必登岸長驅矣。時天將陳璘,劉綎水陸來會。公接應有方。俱得歡心。公進據古今島。募民耕作。以便公私。南民繈屬歸之。賊將行長亟謀撤歸。求道甚恭。兩天將中其賄。皆欲許之。公諷刺甚至。行長又遣使于公。遺以銃劍。公以讎賊不可通使。嚴辭却之。將士勇氣自倍。行長計窮。遂引泗川屯賊以自援。一夕大星隕海中。軍中畏之。戊戌十一月十九日。公與陳公迎戰于露梁。賊大挫衄。公忽中丸而絶。陳公被圍急。公從子莞有膽略。不發哭。督戰自如。遂解陳公圍。而行長僅得遁去。旣發喪。我師與天將兩陣皆號哭。聲殷海中。自南海至牙山。迎柩哭奠。千里不絶。亦有喪之三年者。僧徒處處設齋。皆曰活我命復我讎者公也。公內有篤行。貞介自守。意有不可。雖達官要人。必據義媿屈之。發謀制事。擧無遺策。奮勇決機。前無堅敵。軍政簡而有法。不妄殺一人。而三軍一志。莫敢違令。至其擧大義斥倭使。使中賂者顏騂。主和者顙泚。則張忠獻,岳武穆蔑以加矣。以故當積衰諱兵之餘。遇天下莫強之敵。大小數十戰。俱以全取勝。蔽遮東南。以基中興之偉烈。至蒙皇上寵命。錫以印符。則一國之人。雖家尸而戶侑。不爲過矣。況此露梁者。旌纛之所臨。喑啞之所被。其精爽之可畏者。固將億萬年不泯。蹴山噴海。風怒雲屯。常有跐馬島擣江戶之氣。則嚴奉之擧。尤在所先也。舊有廟。觕隘下窄。不足以妥公之靈。故統制使鄭榏。圃隱先生之耳孫。感公忠義。卽改而新之。又伐大石以爲牲繫。而因閔學士鼎重俾余書其事。文旣粗成。判書洪公命夏以事聞。孝宗大王亟徵草本。特賜乙覽。亦豈拊髀頗牧之意歟。只今仙馭上賓。陵柏蕭森。公之毅魄。重亦飮泣於九原矣。因幷記此。以備始末。俯仰疇昔。爲之抆血也。公諱舜臣。字汝諧。德水人。時崇禎辛丑十月日也 。 今上癸卯。賜祠額曰忠烈。至是而崇報無憾矣。碑役前後相之者。統制使朴公敬祉,金公是聲也。是年七月日追刻。
<끝>
李忠武公全書卷之十 / 附錄二
宋子大全卷一百七十一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