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개(犬) 사돈 들
20년 넘게 개에 미쳐 살았었다. 가난하다 보니 명견을 길러다 새끼를 빼서 돈 벌 욕심도 있었지만 워낙 개를 좋아해서였다. 지금 내 집엔 개가 없다. 내가 길러 본 개는 세 종류였다. 셰퍼드와 土佐(실은 내가 싫어하는 일본의 싸움 개 '바라(薔薇)'라 이름 붙인 놈과 한집에서 살았었다.
요크셔테리어 등. 셰퍼드는 사람도 받기 힘든 소파상 수상자(?)의 직계 후예 이자(Isa)였다. 내 결혼 비용이 73년도 6만 원인데 아내를 만나기 1년 전에 3만 5천 원의 거금을 들여 구입했었다. '바라'는 국내 챔프 다쯔나미의 손자. 91년 강경대 군 치사 사건이 나고 나서 며칠 동안 서울역 앞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특히 밤엔 최루탄과 돌멩이 화염병이 허공을 갈랐다. 난 그런 어느 날 밤 발정이 온 요크셔테리어 암놈을 바구니에 넣은 채 부산에서 올라왔다. 그전 해 추석 때 삼백만 원을 빌려서 산 세계 최고의 오즈밀리언 견사(영국)에서 번식한 녀석이었다. 서울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는 갈팡질팡할밖에. 그래도 기를 쓰고 도로까지 뛰어가 겨우 택시를 하나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서울역에서 종로 삼가까지는 지척인데 촌로인 나는 천신만고 끝에 '개 사돈' 집에 가서 신방을 차려 주는 데 성공한다. 그 다음다음 날 다시 올라와 한 번 더 교배를 시켰고. 서울역으로 나오려 했지만 택시 기사들은 아예 외면이다. 발을 굴러도 허사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택시가 한 대 멎은 것이다.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두 배 요금만 주면 영등포까지 실어 주겠단다. 거기서 열차를 타라나? 머뭇거릴 틈조차 없이 서둘러 새벽 열두 시 4분에 플랫폼에 설 수 있었다. 그 순간의 처연함이란…. 아무튼 내 개 사돈은 열 명 안팎이다.
최고 혈통이지만 모두가 불임견이라는 딱지를 붙여왔었던 그 후로다 녀석은 기적처럼 첫 새끼를 내 집에서 낳았다. 한데 난산 끝에 녀석이 죽었다. 그 새끼를 겨우 한 마리 건져서 내가 키웠다. 마침내 수원의 총각(?)과 짝지어 주어 ‘외손’까지 보았다. 그런데 그 손녀가 불결한 교배에 의해 자궁축농증을 앓다가 제 염마 곁으로 갔다.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으면 나도 중환 중인데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동물병원에 갔을까? 의사의 반대로 돌아오긴 했다. 하나 거짓말처럼 녀석은 밤 한 시 소리 없이 숨져 갔다.
객지에 올라와 6년 그런저런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묶었다. 개가 행간에서 마구 짖는….그리고 이번에 다시 소설집을 내는데 중편 1 단편 8이다. 개가 주인공이다. 당연히 '개 사돈'도 등장할밖에. '바라'의 시아버지(?)는 김천의 음성 한센인이었다.
깊은 산중에서 도사견만 전문으로 키우는…. 그 뒷다리가 불구인'바라'를 끌고 우중에 총 이십 리를 걷고 다시 기차를 한 시간 이상 타고 가서 치른 혼사였다 하지만 수태를 못 했다. 폴립(性病)에 걸렸는데 손을 쓸 수가 없었고 끝내 녀석도 한스럽게 죽었다.
난 애견가라고 자처했었다. 그래서 내 자식들과 짝지은 수캐를 사위라 부르는 건 예사였다. 물론 개 주인은 누구든 '개 사돈'이고. 기가 막히게도 중학교 동기 동창과도 개 사돈이 됐었다. 졸업하고 20년 만의 해후였는데 개 사돈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당시 그는 부산 온천장에 거주했다. 사업을 자식에게 물려준 후 서울에 사는 그 사돈과는 재작년까지 연락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전화도 안 된다. 다른 사돈이야 두말해 뭘 하겠는가?
김천의 사돈이 보고 싶다. 가톨릭 신자가 된 지금 사돈 내외를 연민의 정으로 그리워하고(?) 있다. 사돈은 얼굴이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없다. 지금은 적어도 난 글 속에 '나환자'니 문둥병' 따위의 말은 안 끌어다 쓴다. 그들은 <성경> 속의‘한센병’을 앓았었을 따름이다.
인생 유전! 대중가요 제목 같지만 난 이 말을 들으면 숙연해진다. 종로 삼가며 서울역은 사흘이 머다 하고 올라간다. 희한하게도 거기 볼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영등포도 마찬가지. 도중에 내려 반세기 전의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을 불러 보면 만감(萬感)으로 전신이 흠뻑 젖는다.
아 참 수원! 서울을 지하철로 오르내리면 반드시 거기서 환승해야 한다. 또 사돈 생각이 나고말고. 하나 어디가 어딘지 분간 못 하니 해후 불가다. 이 또한 기가 막힌다.
이번 소설집 <연적의 딸이 살아 있었다>는 중언부언하지만 개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지금은 수원이며 서울역 종로 삼가 영등포를 너무나 자주 밟는다. 그럴 때마다 개 사돈들이 생각날 수밖에. 나 개처럼 살았다 싶어 고소를 날릴 밖에. 오죽하면 내가 필명으로 견지로(犬之勞)를 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