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오는 두려움
2024.02.25.(사순절제2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 14:28-33)
들어가는 말
이제는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서울에 올라와 창경원에 갔었던 기억입니다. 저는 부모님께 풍선처럼 가지고 다니는 장난감 하나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길거리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끝끝내 사주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부모님이 저를 떼 놓고 간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저에게 ‘너 혼자 놔두고 가버린다’는 말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협박(?)이 아무 소용도 없지만, 당시에는 깡통 찬 거지, 아이들을 잡아가는 넝마주이 등 아이들을 두렵게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첫 번째 두려움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반면, 두 번째 두려움은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하늘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세상 속에 하늘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이 보기에도, 한없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10:7은 각각 이 선포가 세례 요한, 예수, 제자들에게 해당합니다. 누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표현합니다)고 선포하셨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를 그저 저 먼 하늘에 그냥 두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중에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에 만족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맞닥뜨리는 현실
저는 하늘나라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땅에서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세상은 이분들이 있었기에 과거보다 나은 세상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머물던 세상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바로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주던 만족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갔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세상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건너가는 세상은 더 이상 이전의 세상이 아니며, 하늘나라가 건설되는 현장입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건너시니 우리도 건널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가져온 예수님께서 건너가라고 했으니 우리는 그분을 믿고 먼저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재된 경험과 현실감각은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이 때 첫 번째 두려움과는 다른 두 번째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의 명령임을 확인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했지만 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루기엔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이 두렵게 하는 것이죠.
첫 번째 두려움이 어둠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으로 인식하면서 찾아온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이 갖는 두 번째 두려움은 이처럼 현실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실 자체가 두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은 예측 불가능하고 고달프기는 해도 두려운 대상은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이 두렵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봅시다. 그들은 현실이 두려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늘나라를 바랐기 때문에 가혹한 현실이 그들에게 두렵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현실에서 오는 두려움과 믿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28-29)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27)는 그분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첫 번째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어둠에서 예수님이 실재하는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어둠이 걷히고 밝아진 그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환영이 사라진 명료한 현실 속이지만, 예수님은 물 위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익숙한 음성을 직접 들은 예수님, 이렇게 실재가 확인된 예수님도 비현실적, 아니 초현실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더 이상 환영이 아닌 실재로 인식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기만 하시면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당신이시라면.” 그는 물 위에 서 있는 분이 예수님이 확실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서 말합니다.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베드로에게는 물 위에 서 있는 예수님도 현실이며, 어부로서의 경험 속에 있는 호수도 현실이었습니다. 이 두 현실 사이에 믿음과 두려움이 공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30)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현실을 본 베드로는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 두려움은 실재를 확인한 예수님조차도 경험에 의한 현실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보다 우선이 된 현실이 그를 물에 빠져들게 합니다. 두려움은 자각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의 가능하심을 불가능으로 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누적된 현실감각은 실현가능한 하늘나라를 불가능한 것으로 확정해 버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믿음은 더 나은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뼛속 깊이 각인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많이 예수를 부인했고, 또 그분의 명령을 거부했었던가요.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1-33)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유령이라고 하면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아무 책망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풍랑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에 대한 오해로 인한 두려움과는 달리, 이미 실재를 확인한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현실이 주는 두려움을 핑계로 그의 믿음 없음을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베드로 앞에는 두 개의 현실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라는 현실과 어부로서 경험에 근거한 세상이라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현실이며 풍랑이 이는 호수도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늘나라도 현실이며 세상도 현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만이 남습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체득한 현실이 아닌 새로 등장한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지점에서 베드로의 믿음은 부족했던 것이 명확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두려움은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나라를 가지고 세상에 들어서기 직전 닥치는 현실적 삶의 문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삶의 무게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의심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건너가 이루어야 할 하늘나라는 세상을 부인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겠다는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생생한 현실과 부딪칠 때 오는 두려움은 예수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믿음은 이 간격 가운데 있습니다.
나가는 말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세상을 향해 먼저(사실은 동행이지만) 보내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건너가셔서 다 이루어놓은 후 우리를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나라가 하늘에만 있다고 믿는다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사실은 동행하지만) 보내시기에, 우리는 현실이 주는 두려움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둠과 현실 앞에서 이중의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 속에 빠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실재함을 드러내실 것이며, 의심 가운데 손을 내밀 때마다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도당동에 있는 어린이를 위한 식당 두루두루가 이전해야 합니다. 얼마 전 임대인이 저에게 전화를 했는데 공장을 운영하는 자신들이 공간을 사용해야 하니 나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월세인 상가도 알아보고 전세인 주택도 알아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라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는데, 그러자 장소는 곧바로 결정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곳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