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암산 기슭의 우렁찬 함성
강원 양구군 동면 원당리
부녀지도자 정 리 리 (44세)
나태와 빈곤의 마을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조 초기 왕권다툼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밭을 일구어 가난하게 살아오는 동안 동면 정씨의 일가를 이루었다. 해방과 더불어 38선 이북으로 공산치하에 강점되었던 지역으로 6·25동란으로 수복되어 주민들이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 맑고 큰 연못이 있었다하여 원당리라 불리었다.
이 마을은 해발 1,200m 의 대암산 기슭에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고 있는 산간마을로써 지금부터 15년 전만 해도 생활은 가난과 빈곤의 틈바구니에서 허덕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각처에서 모여 든 주민들이기 때문에 애향심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소수의 원주민들조차도 생활에 대한 의욕이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올 뿐 주민은 단결할 줄 모르는 외고집들이었다.
가족계획과 절미저축으로
이런 생활이 연속되는 가운데 정 리리 씨는 1968년도에 가족계획 어머니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만 하여도 가족계획 사업이 초창기여서 노인들은 집안 망하는 소리하지 말라고 펄펄 뛰었고 부인들도 눈치만 살피면서 좀처럼 응하려 들지 않았다. 수차례의 어머니회의를 열어 가족계획의 필요성에 대한 계몽을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생각 끝에 호별 방문을 시작하여 차츰 관심을 갖는 부인들도 우선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으나 불안 해 하는 여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정 회장이 먼저 난관수술을 받고 불안 해 하는 여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정 회장이 먼저 난관수술을 받고 며칠 후 가벼운 몸으로 다시 일을 하니 그제야 비로소 안심들을 하고 호응하게 되어 가족계획의 씨앗을 하나, 둘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이 마을의 출산율은 6.4명에서 2년 후에는 2.2명으로 낮추는 놀라운 실적으로 양구군내 시범마을로 지정되었다. 집안에 식구하나 줄이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눈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정경제는 차츰 나아지기 시작하자 다음 해에는 주민들의 호응이 더욱 좋아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참여하는 가운데 생활개선 구락부 회장을 겸하게 되면서 마을발전을 위하여 부녀자의 한 몸을 봉사하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다짐하고 절미저축운동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사실상 어려운 생활 속에 절미저축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부녀회 임원들과 함께 이때 까지도 참여를 꺼리는 가정을 방문하여 이해와 설득으로 스스로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시작하자 일주 일만에 30여 가구에서 60여 가구로 늘어나고 저축한 쌀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으기로 하여 한 되, 두 되 쌓이기 시작한 것을 지난 1979년도에는 70가마니를 팔아서 350여만 원을 마을금고에 적립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백미 63가마가 부녀회 공동재산으로 확보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가정의례 간소화운동을 생활화하기로 하고 자가 혼례거행과 백일탈상 권장으로 가정에서는 40%의 비용을 절감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시작과 함께 지도자가 되어
차츰 의욕을 갖고 일하던 때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자 새마을부녀지도자로 선출되게 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정말 무섭게 일 해 가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의 게으르고 나태했던 과거를 후회라도 한 듯 전 주민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1971년 가을 이 마을의 오랜 숙원이던 30m 의 길이나 되는 교량가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온 주민이 참여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이 터지도록 연일 작업이 계속되었으나 큰 문젯거리가 생겼다. 군청 양수기를 빌려다 계속 물을 퍼내면서 작업을 했는데 돌연 사업비와 연료비가 떨어져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당시 유류 파동으로 기름을 외상으로 구입할 수도 없는 처지였고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는 정 부녀지도자로서는 무척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간 일이 중단되는 동안 주민들은 실의와 허탈감으로 열의가 식어가고 작업장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사업이 중단된다면 마을주민 전체가 어떻게 될 것 인가를 생각할 때 정 부녀지도자는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생각한 끝에 읍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외상으로 달라고 애원해 봤지만 모두가 거절하기 일쑤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교량가설은 끝내야 되겠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재를 털어 교량가설을
마지막으로 남편을 설득하여 논 2,000평을 팔아 그 돈으로 사업을 추진키로 결심하였다. 당시 남편은 1년 전만 해도 도박을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겨우 새 사람이 되어서 처음으로 의장직을 맡게 되었고 특히 이렇게 큰 사업을 시도하였던 것인 만큼 이번 일이 실패하면 남편은 인간적으로 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교량가설작업은 성공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의논 끝에 논 2,000평을 헐값에 팔아 우선 계약금으로 받은 돈 가운데서 기름을 사다가 양수기로 물을 푸면서 교량가설작업은 일주일여 후에 다시 시작되었고 첫눈이 내리는 날 드디어 완공되어 우뚝 솟은 30m 의 다리는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전 주민은 기적 같은 사실 앞에 환호성을 울리며 좋아했지만 정 부녀지도자 부부는 어딘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을주민 전체의 노력으로 큰 수확이 되어 나태와 비협조의 틈바구니에서 협동심과 “하면 된다.”는 새로운 교훈을 심어주게 되었음을 더 큰 보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생산기반사업도 시작하고
이제 협동으로 기적을 이룩한 마을 주민들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내는 자신을 얻었다.
그 다음해부터 주민들은 나와서 일을 하라고 집집마다 방문하지 않아도 주민 스스로가 작업장에 나와 소하천제방 600m, 배수로 800m, 마을안길 500m, 마을광장 500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72년에는 경로당 20평과 도수로 400m 를 설치하는 한편 양어장 100평을 마련하여 3만 마리의 새끼잉어를 방류하여 지금까지 자라나고 있다.
재일교포와 자매결연을 맺고
마을의 성공사례가 이웃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전해지자 1973년 일본 삼중현 삼야진지부 재일교포와 자매결연을 맺게 되어 393만원을 지원받았다. 주민들은 많은 금액이 마을에 들어오니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충전하여 한 순간에 모든 세상이 우리 마을인 듯 좋아했다. 주민들이 이렇게 기뻐할 때 정 부녀지도자는 과연 이 자금으로 우리 부락이 잘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조용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피와 땀으로 벌지 않고 들어온 돈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는가를 되새기며 여러 날 고심 끝에 마을 주민총회에서 결연금 사업계획을 토의할 때 정 부녀지도자는 우리 마을은 지금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고도의 영농기술이 없어 특수작물을 재배한다면 실패할 위험이 많으니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고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체 주민의 소득에 직결될 수 있는 한우를 사서 공동사육하여 가구당 1마리 이상의 한우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고 제의하여 마침내 주민들의 찬성을 얻어 그해 한우 32두를 구입하여 공동사육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소 값이 하루하루 떨어지고 사료구입 마저 어려워 막대한 적자운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자꾸 소 값이 떨어지자 더 손해를 보기 전에 하루빨리 팔자는 등 소 장사와 결합하여 뒷전으로 돈을 빼 돌려 가로채려고 했다는 등 엉뚱한 소문이 떠돌더니 심지어는 술에 만취되어 집에 찾아와 동네에서 떠나라고 소란을 피우기까지 하였다. 정 부녀지도자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가정에 충실하고 이웃 사람들과 마찰 없이 살면 될 것을 무엇이 부족해서 왜 동네에서 욕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하는 회의와 실망을 가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민의 욕 소리를 채찍질로 생각하며
그러나 정 부녀지도자는 굴하지 않고 주민의 욕설과 야유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채찍질로 생각하고 이왕 마을을 위해 내 몸을 바치기로 뛰어든 이상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굳은 각오아래 이 어려운 난관을 꼭 이겨내어 한 번 끝장을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차려 다시 마을일에 앞장서기로 하였다.
우선 내가 하여야 할 일은 나와 뜻을 같이하고 힘써 일해 온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저녁에 집에 모아놓고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이 없어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지만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듯이 소 값이 계속 떨어지면 언젠가는 값이 오를 테니 이때에 일부만 판다 하더라도 적자는 쉽게 메울 수 있을 것이니 같이 한번 주민들을 설득하여 지금보다 잘 사는 마을을 만들자고 눈물어린 호소로 설득하여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조를 편성, 가가호호 방문하여 조금만 더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보자고 이해시켜 한우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나가자 마침내 예상했던 대로 소 값이 회복되어 역경을 극복하였다. 현재는 마을공동기금으로 900만원을 마을금고에 예치해 놓고 한우 5두와 경운기 및 카타기 1대씩을 구입 마을에서 공동관리 운영하고 있다.
황무지를 옥답으로
한 가지 사업씩 추진하여 나가다 보니 또 일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여 다소의 무리가 갈 것이 예상되었지만 시작만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1976년에는 하천가에 버려진 유휴지를 논으로 만들 것을 결심한 후 주민총회에서 마을 앞 하천가에 제방을 쌓는다면 2만여 평의 불모지를 논으로 만들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하천과 황무지를 논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김 종성 씨 소유 하천과 황무지를 논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김 종성 씨 소유 3,104평과 정수근 씨 소유 1,015평을 희사 받아 돌을 주어내고, 제방을 쌓고, 다시 산 흙을 파다 바닥을 메우는 작업이 무려 4개월이나 계속되자, 주민들은 지치고 농사일은 자꾸만 밀리기만 하여 일부 주민들의 불평과 모략중상이 다소 있었지만, 하고자 하는 대다수의 주민들이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주고 하여 꿈만 같은 2만여 평을 옥토로 만들 수 있었으며 그해 영세농가에 분배하여 경작케 함으로써 첫해 75가마의 쌀을 수확하게 되었다. 이렇게 얻어진 자금은 부락 공동자금으로 이용하여 영농자금에 허덕이는 영세농가와 사채에 매달려 사는 마을 주민들에게 연리 3%로 대부하여 주고, 학비가 없어 학업을 계속 못하는 농가 자녀에게도 학자금을 대여하여 잘 사는 부락의 기틀을 잡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77년 주민들의 숙원사업이던 마을회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전년도 객토사업에서 1등을 하여 받은 상금 30만원과 퇴비 우수부락 상금 10만원을 투자하고 군에서 양회 950대, 철근 2톤의 지원과 인근 자매 군부대에서 80트럭분의 모래를 지원받았다. 특히 마을회관의 향토적 미를 갖추기 위해 벽체 하단을 돌로 쌓아 관내에서 제일 깨끗하고 견고한 석조 슬래브 회관을 완공하였는데, 이 둘은 주민 이 용삼 씨 외 3명이 직접 자신들의 경운기를 4대나 동원하여 연 3일간 원당리에서 40여km 떨어진 인제군 소재 군축령 개울에서 운반한 야면석이었다. 또한 감자 저장고 36평, 어린이회관 1동을 신축하여 주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80년도에는 동면 관내에서는 처음으로 주택 16동을 현대식 슬래브로 개량하여 서구식 문화주택을 이루고 있다.
작년에는 냉해 피해로 수확의 많은 감수를 가져 왔지만 호당 소득이 3,037천원으로 군내에서는 최고 소득마을로 도시에 부럽지 않은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
희망 찬 새마을운동의 기수들
금년도에는 마을 호당소득이 500여만 원이 훨씬 넘을 것이 예상되고 있다. 과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보릿고개만 되면 80% 가까운 주민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고 시래기죽이나 산나물로 근근이 연명해가며 살던 그야말로 희망이라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 마을이 이제는 새마을정신으로 굳게 뭉쳐 불가능과 체념에서 가능과 자신감으로 굳건히 다져져 과학 영농하는 농민으로서 근검절약의 합리적인 생활위주로 탈바꿈하였다.
정 부녀지도자와 마을주민들은 밝은 내일을 향한 희망에 찬 새마을운동의 기수로 1983년까지 주택개량을 100% 완료하고, 마을진입로포장 1,000m, 한우 50두 증식과 공동축사 1동을 건립하고, 전 가정에서 10주 이상의 유실수를 식재하는 등 문화 복지 농촌을 이룩하기 위한 희망에 부풀어 있으며, 우뚝 솟은 대암산을 우렁찬 새마을의 합창으로 흔들어 가고 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1981 내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