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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 1편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김구, 이승만, 미군과 소련군 점령,
남북분단,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반탁과 찬탁, 반민특위,대한광복군
대한민국은 정부수립일인 815를 건국일로 하자는 주장과 건국일로 하더라도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진 41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보고 있으면 예송논쟁이 생각납니다, 상복기간을 가지고 남인과 서인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물론 바닥에는 주기론과 주리론이 깔려 있지만 어찌되었던 실용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단군신화에 의해 고조선부터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단지 정부형태가 현대국가의 틀을 갖춘 시점이 1948년 8월15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가 아니고 한성정부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성정부가 만들어진 날인 4월23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첫 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이 처음에 사용한 명칭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입니다, 날짜는 1948년8월15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36년이라는 긴 생활동안 살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옹호하거나 나라의 기반을 세울 때 필요한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지도자로 나설 사람만은 친일행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지금까지 정치 지도자급의 친일행각이 너무나 무시되어 왔습니다, 만약 반공이력 때문에 친일경력을 무시해도 된다고 하면 공개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당당히 스스로 주장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만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별도의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엄청난 피해를 준 국가입니다, 언젠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평화유지를 위해 국가 간의 교류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친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침공한 행위에 대해 북한이 사과하지 않는 한 평화적 교류를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조의 병자호란 후 무력으로 언제든지 쳐들어 올 수 있는 청나라를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하는 북벌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재 우파와 좌파의 구별을 공산주의에 대한 선호도를 기준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하면 우파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 중국과 같은 공산국가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그냥 독재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산업혁명이후 형성된 이익 그룹이 자본가 그룹과 근로자 그룹으로 나누어졌기에 자본가 그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면 우파이고 근로자 그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면 좌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념을 떠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세종대왕의 실용적인 정치 가치관을 무너뜨린 자가 세조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조 이후에는 성리학이 번성하여 명분에만 집착한 정파싸움을 거듭하다가 조선은 근대국가로 발전을 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자멸하여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성리학에 기반을 두는 진영논리에 의한 정파싸움은 그만두고 오로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G7국가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실용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국가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시행 1988. 2. 25.]
[헌법 제10호, 1987. 10. 29.,
전부개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정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밤새 논의를 시작하여 이튿날인 1919년 4월 11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습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그 후 4월 22일에는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 중국, 미주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하고,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습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이에 앞서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뒤이어 4월 23일 경성(서울)에서 한성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기에,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들과의 통합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통합 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펴면서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습니다.
결국 1919년 9월 11일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경성(서울)의 한성 임시 정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통합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중국, 러시아에 흩어져 있던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국내외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단일한 통합 정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hongyw/221559357143
일본제국의 항복과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
남북분단 과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장인
김구선생이
개인자격으로라도
815이후 바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 아쉬움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8일 미군이 들어오기까지
23일간에 임시정부가 들어와
권력을 장악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북에는 조만식선생이 있었고
남에는 여운형선생이 있었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분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투하
● 1945년 8월9일 소련군 북에서 참전함
● 1945년 8월12-15일 미소 양군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합의함
●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
하지만 8월 15일에도 소련군이 청진시에서 4천명의 일본군과 청진 전투를 계속 벌이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고,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기로 합의하였음, 그리하여 소련은 일본이 패망하자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향했음.
1945년 9월 6일 미군은 서울에 주둔하여 즉각 군정을 실시함. 경성 중앙청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된다는 우려로 인해 여운형에게 총독부를 맡기게 했는데
이는 여운형에게 일본의 안전보장과 뒷일을 맡기게 한 것이었음.
하지만 여운형은 8월 16일에 오히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고,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했는데 그런데 8월 20일이 넘어도 소비에트 연방이 오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미국이 남한에 오기 전에 '조선인들이 일본을 괴롭히고 있고, 소련편을 든다'고 거짓정보를 알리자 이에 미국은 남한을 미워하면서 통제된 상태를 원하게 되었음
게다가 3년 군정을 다 한 후 미국은 애치슨 선언을 실시했는데 이는 조선이 제외된 방위선이였지만 미국은 한국 전쟁에서 국제 연합군으로 참여함으로써 적화통일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을 미국이 남조선을 부추겨서 먼저 전쟁을 일으켰고 미국이 다른 국가를 강제로 참가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많은 한민족인들을 괴롭혔다는 거짓 뉴스를
주장하기도 했음,
● 1945년 9월 6일에
1944년 8월에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건국동맹을 결성하였던 여운형은 일본이 패망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미군이 주둔하기 전에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자 서둘러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함,
당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고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중도 좌파인 허헌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 요인이 참여하지 않은 점과
건국준비위원회 단계에서 대다수 우익 인사들이 참여를 철회한 점 등의 약점이 있었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은 남북을 통틀어 군·면 단위까지 인민위원회를 갖추고 한민족의 자주적 노력에 의한 독립 국가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45년 11월이 되자 13개 면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적인 치안을
확보하였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환 과정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
● 1945년 8월 16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광복군 소속의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의 선발대가 미군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
● 1945년 8월 18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환국을 결정하고 같은 날 이범석이 이끄는 국내정진군이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지만 일본군이 둘러싸고 저항하여 부득이 상하이로 되돌아감.
● 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을 맡고 있던 김구는 국무위원회의 명의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함. 이 발표에 의하면 '임정 환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 등의 순서
● 1945년 11월 4일 중화민국 정부의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와 각계 요인 2백 명을 초청하여 귀국 환송회를 열어줌
●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이 제공한 비행기를 이용하여 김구 등 임정 요인 제1진이 상하이에서 서울로 귀국. 귀국 직후 김구는 경교장(京橋莊)에 머무르며, 경교장을 김구 자신의 사저 겸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로 활용하였고, 존 하지 미군 중장은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함,
● 1945년 12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대회가 열렸고,
이날 대회에는 10만 명이 운집함,
이승만의 귀국 과정
● 1945년 10월 4일 미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은 뉴욕에서 귀국길에 올랐음
●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이승만은 미국군용기를 이용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함,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임,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음.
●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함,
이날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고 함,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고,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 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함
●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음.그리고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음,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사령관 하지는 답변을
회피함,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대한 생각은 정확히 알 수가 없음,
● 1945년 10월 21일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함,
● 1945년 10월 중순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함
●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됨. 여기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 정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고 함,
● 1945년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임. 이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으나, 회담에서 논의된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 후 처벌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고 함,
● 1945년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함,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함
● 1945년11월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할 때 이승만은 친히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음
● 1945년11월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을 발표함
● 1945년11월26일 이승만은 '전체 국민은 총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자'며 국민에게 호소함
●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대회에 참석하여 김구와 김규식을 초대함.
● 1945년 12월 2일 이승만의 초대를 받은 김구와 김규식은 돈암장을 방문하여 2시간 동안 회담함
● 1945년 12월 16일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함
● 1945년 12월 24일 이승만은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됨
대한독립군 이후
광복군 귀국 과정
일본이 패망한 이후
소련은 이미 북에 들어왔고
미국은 23일이후에 들어옴
이 사이에 광복군이
바로 들어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킨 이유도
이해가 안갑니다,
그리고 좌파 성향의
조선의용군
연안파 군인들이
중국내 공산세력과 손을 잡고
이후 북으로 간 것도
아쉽습니다,
이것이 백선엽에게 빌미를
제공합니다,
임시정부 지도자 모두에게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이다.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사람도 있음.
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명, 1지대 89명, 2지대 185명, 3지대 119명,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인 것으로 확인됨.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
● 광복군은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창설 이래 군 통수권을 1944년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통제를 받았지만 1944년 8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습니다.
●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항복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합니다.
●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하여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습니다,
● 1945년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안가는
상황입니다,
●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국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을 탈영한 한국인 병력을 모집하였습니다. 1945년 9월 21일 만주국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박정희1917-1979)는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습니다.
● 광복군 대원들은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 이범석의 영도 하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박정희는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당시 광복군 대원수는 20만 명으로 홍보되었다고 하지만 이들은 광복군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만주군 출신들이 광복이 되어 이 시기를
틈타 광복군에 편입하여 위장된 광복군으로 국내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합니다,
●광복이후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제국군과 의병,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 1939년 1월 8일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 그리고 1940년 9월 17일에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 광복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으나 실체적으로는 1946년 1월 15일에 편성된 미군정의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시작이었음
● 남조선국방경비대는 백선엽(1920- ,만주국 중위 출신), 이용무, 양국진, 최덕신(1914-1989, 중국군 출신으로 박정희 정부 때 군요직을 맡은 경력도 있지만 1986년 북한으로 망명감 거기서 1989년에 죽음), 김백일, 유재흥(1921-2011, 일본군 장교 출신), 신학진, 박동균 등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인맥들이
주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