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한국의 심장 파주-세계화 시대를 맞다
한강변 자유로를 시원하게 달려 일산을 지나치다 보면 출판단지 가는 길이 보인다. 오른편에 정자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산이 바로 심학산이다. 우뚝 솟아 있지만 해발 194m에 불과하고, 산 밑에서 정상까지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심학산 정상의 팔각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라.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으로 뻗어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한강은 저 너머 북한 땅을 배경에 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끼고 동서로 흘러드는 임진강과 교회(交會)한다.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던 한강과 임진강은 다시 북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예성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쪽을 보면 서울과 일산이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다시 눈을 동북으로 돌려 산 아래를 바라보면…. 해발이 102m에 불과한 장명산이 마치 용(龍)의 모습으로 능선을 토해내 오도리와 다율리, 당하리로 뻗어간다.
“옛 교하중 자리에 대통령 관저를…”
비록 교하신도시 건설로 아파트촌이 착착 들어서고 있지만, 장명산 좌우와 심학산을 둘러싼 곳에 펼쳐진 드넓은 평지, 그곳이 바로 파주 교하(交河)다. 그래, 바로 이 너른 들판이 당대 최고의 풍수가라는 최창조 교수(전 서울대)가 ‘통일한국의 수도’로 적극 추천했던 곳이지.어디 최 교수가 처음이었나.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12년(광해군 4년)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왕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吉地)”라 하면서 ‘교하천도론’을 적극 개진했으니까. 당시 미중유의 국란(임진왜란)을 겪어 도탄에 빠진 민심을 되돌리고 정치개혁을 시도하려던 광해군은 이 ‘교하천도론’을 의중에 두고 은연중 추진했다. 비록 대신들의 극력 반대로 뜻을 꺾었지만….
그런데 지금 다시 교하천도론이 솔솔 피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최 교수에 따르면 “세월이 지나면 수도의 조건도 변하는데, 지금의 서울은 위로는 북한산·도봉산, 아래로는 한강에 가로막혀 더는 클 수 없는 형국”이라는 것. 지금까지의 국도(國都)를 풍수의 측면에서 보면 ‘장풍국(藏風局·경주와 개성처럼 산간분지와 평지의 점이지역)’→‘득수국(得水局·서울, 공주처럼 동북은 산지, 서남은 평야)’의 단계를 지나 ‘평지룡(平地龍)’의 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파주 교하는 국토의 남북을 관통하는 길목의 정중앙에 서 있고, 한강·예성강·임진강 등 3대 강의 교회지점이면서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항만 입지가 뛰어나고 지성(地性)이 관후박대(寬厚博大)하다는 점에서 통일한국의 수도로 적격이라는 것이다. 최창조 교수는 특히 “교하의 주산인 장명산의 맥에 자리 잡은 옛 교하중학교 자리(지금은 다율 방과후학교)는 대통령 관저를 비롯해 주요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설 최적의 입지”라고 꼽았다.
고인돌 100기 넘게 있는 까닭
그런데 이의신도, 최창조 등 당대 유명한 풍수가조차 간과했던 것이 있으니…. 바로 지금은 옛 교하중학교 뒤 산책길을 따라 20여기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곳 교하읍 다율리·당하리 일대에 10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때 지체 높은 분들의 무덤이 아닌가. 그뿐인가. 교하신도시 터를 비롯한 파주 전역에서 무수한 구석기·신석기 시대 유물이 쏟아진다는 사실. 그러니 교하는 풍수가의 혜안(慧眼)이 아니라도 예부터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혹은 소국(小國)의 도읍으로 각광을 받았던 곳일 게다. 그곳에 신도시가 들어섰으니,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터를 찾아 보금자리로 삼는 사람의 마음은 같은 것이다. 이곳뿐 아니라 적성면 주월리에는 고구려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남하한 백제 온조 세력이 맨 처음 도읍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육계토성이 있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백제 최초의 도읍인 하북위례성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그 형태가 어찌나 풍납토성(하남위례성)과 같은지….
출처:(신택리지, 이기환, 경향신문)
2023-04-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