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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글과 한국어, 아직도 간섭에 시달린다. 정경시사포커스,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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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한국어, 아직도 간섭에 시달린다.
심의섭(명지대 명예교수)
훈민정음과 언문
조선말 개화기에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훈민정음을 한글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글은 만들 때부터 개 짖는 소리, 닭의 울음까지 적을 수 있는 소리글자라고 하였다. 더구나 문자의 창제 기원과 원리, 반포일까지 알려져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어 부르다가 지금의 ‘한글’로 정착되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이었고, 15세기부터는 언문, 19세기 말에 공적 문서의 기본 글자라는 국문, 일제강점기에는 국어가 아닌 조선문, 1910년대부터 한글이라는 부르게 되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을 맨 처음 부르던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다. 세종 25년에(1443년) 창제된 후 1446년에(세종 28년)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4자( ㆍ, ㅿ, ㆆ, ㆁ )가 사라져서 24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반포된 초기에는 '정음(正音)'으로도 불리었고 그 후에는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등으로 불리면서 양반들에 의해 홀대받았다.
이 중에서 언문(諺文)이란 일반적으로 언(諺)자는 상말, 또는 한글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불린 시대적 배경은 사대주의자들이 진서(眞書)라고 숭상하는 한자에 견주어 낮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실록에는 훈민정음이라는 말보다 언문이 더 많이 나온다. 세종대왕이 직접 참여하여 끝까지 챙기었고, 세자를 비롯하여 수양과 안평대군, 정의공주까지 참여해서 많은 공을 들여 창제한 것이 훈민정음이고 언문이다. 실록에서의 언문이란 천한 글이라는 말맛이 없는데 잘못 알려진 것이다. 언(諺)은 말씀 언(言)에 선비 언(彦)을 합친 '선비의 말'이란 뜻이다. 실록에는 언문과 진서가 쌍둥이처럼 나온다. 언문은 한글을 조선시대에 일컫던 말이지 부녀자의 글이나 비속어가 아니다. 중국 글을 진문(眞文), 진서라고 한 것이 문제이지 언문은 훌륭한 이름이다. 언문이 천한 글이 된 까닭은 일제 때 한글로 이름이 바꾸면서 그 당위성을 강조하고 민족주의 고취를 위해 언문을 왕조 유물로 폄훼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듯하다(윤동원).
이러한 언문이 창제된 지 60년이 지나 1504년(연산군 10년) 7월에 그의 폐륜적인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다.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한글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게 했고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는데, 위반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 임금이 발행한 문서를 망가뜨린 죄를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부터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사용하는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를 때리라 명했다. 하지만 조정안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한글은 이러한 핍박을 견디어 내었고 창제이후 450년이 지난 1894년 갑오개혁 때에야 비로소 국문이라 부르게 되어 한글의 위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일제에 의한 한글 수난
그 후 한글은 일제 강점기에 역사상 존망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한글 맞춤법을 제정한 것을 비롯하여 식민지 수탈과 압제의 끝자락에서는 한글이 질식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제는 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과목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를 일본어로 발행하였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식민지시대의 한글 맞춤법이 제정되었다(1911년). 그 후 10년이 지난 1921년에 조선어학회를 창립하여 국어의 통일을 위해 국문의 철자법, 표준어, 외래어표기 등의 통일 및 사전편찬 사업을 성취하였다(1921년).
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를 단일 과목으로 만들었지만 교육 시간을 줄였고(1922년), 또 10년이 지나서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ㄹ’이 첫소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일부 모음 앞에서 ‘ㄴ’이 첫소리가 되지 못하게 하는 두음법칙 따위를 채택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1933년). 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일본어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조선어 과목 폐지와 조선어 금지 및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고(1938년), 한글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창씨개명을 강요해 조선인들의 이름과 성도 빼앗았다(1940년).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한글 연구를 탄압하였고,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중학교에서도 조선어 과목 교육을 완전히 금지시켰다(1943년).
한글만 쓰기 운동
일제의 한글에 대한 무엄한 탄압과 질곡에서 벗어나자(1945년) 조선어학회는 국어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글교육을 진흥시키고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시대적 흐름에 벗어나 이승만 대통령의 아집으로 요상한 ‘한글 간소화 파동’을 일어났으나 잘 버티고 견디었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 한글 간소화정책을 집요하게 추진하려했으나 저항과 여론에 밀려 폐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가 채택되었다. 한글 학자들은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만 쓰기 운동을 시작하였다(1945년). 그 결과 해방 직후의 초·중등 교과서에는 한글만 사용되었으며, 필요시 괄호 안에 한자가 표시되었다. 공문서에는 당연히 한글이 전용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만만치 않은 논쟁을 겪으면서 ‘한글전용에관한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1948년).
그 후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문교부 한글전용특별심의회의 한자어 추방 정책으로 1963년에 문교부는 ‘학교문법통일안’ 공포하였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을 목표로 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목표년도를 1970년으로 앞당기어 강력한 한글전용 지시하고 일시적으로 한자교육을 폐지하기까지 했다. 이어서 1970년 교과서의 한글 전용 단행 등 계속된 일련의 한글 전용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1971년 12월에 다시 한문 교육을 시행하게 되었고 기초 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1970년의 한글전용정책을 번복한 것으로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도록 만들었다. 1972년부터 한글 전용정책이 무산되는 정책의 혼선이 연속되었다. 1988년 1월 ‘표준어규정’과 함께 ‘한글맞춤법’이 고시되었으며, 1989년 3월 1일부터는 이 새로운 맞춤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어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은 폐지되고, 해당 규정은 국어 기본법으로 이전되었으나 해묵은 한글 전용론자와 국한문 혼용론자 사이의 갈등은 상존하였다. 2016년에는 급기야 한글전용 정책이 헌법에 어긋나는가의 여부가 헌법재판소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결과는 같은 해 11월 24일에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이 나왔다.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한글은 온갖 소리를 적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쓰기에도 매우 편리하다. 우횡서, 좌횡서, 우행서, 좌행서가 모두 가능하고, 붙여 쓰기, 띄어쓰기도 역시 가능하다. 대단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굴곡을 거처야 했고, 현재와 같은 좌횡서, 띄어쓰기로 정착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한글 가로쓰기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학자는 주시경이다. 1945년 12월 8일 교육심의회에서 한글 가로쓰기가 의결되었고, 1949년 9월 25일에 정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가로쓰기의 방침을 수립하였다. 1960년대에는 정부의 모든 공문서를 가로쓰기로 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하여 1961년 정부는 공문서 전면 가로쓰기 방침을 채택하였다.
띄어쓰기 역사를 거슬러 보면 이름이나 직책과 같은 명사의 정확한 단어 표기가 필요할 때에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띄어쓰기가 조선 중기, 특히 18세기 말에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개화기에 조선으로 온 유럽 선교사들로부터 본격적인 한글의 띄어쓰기와 가로쓰기가 도입되었다. 한글 가로쓰기의 시도는 1869년 페롱(Stanislas Férron) 신부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한불자뎐(韓佛字典, Dictionnaire coréen-francais)’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중에 현대 형식의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1877년에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목사가 쓴 조선어 교재, ‘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인 것으로 확인된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도입한 최초의 신문이고, 이 신문의 영문판 한 면의 편집을 호머 비 헐버트(Homer B. Hulbert)가 담당하였다. 그래서 독립신문 고유의 우리 글 띄어쓰기를 헐버트가 창안했다고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황준배, 서울로컬뉴스, 2022.3.7). 그러나 한글 사랑에 빠진 헐버트도 한글의 본격적인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구두점을 최초로 제안하고 도입한 공로가 있다. 근대화의 일환으로 19세기 말부터는 가로쓰기가 기존의 세로쓰기 방식과 혼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주시경과 최현배의 노력으로 광복 후부터는 교과서에, 1961년 이후부터는 공문서 등에 가로쓰기를 규범화했다. 단행본이나 신문은 세로쓰기를 했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완전히 가로쓰기로 다 바뀌었다. 영화 자막은 2000년대에 들어서 가로쓰기로 전환됐다.
사라진 네 글자와 한글날
한글은 창제 당시 17개의 자음과 11개의 모음인 28자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다 사용하면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4개 글자를 빼어버렸다. 조선어학회는 그 당시 판단으로 한국어 표현에 별로 사용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삭제했겠지만, 이 4글자에 알맞은 소리표현 방법이 사라지게 되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을 오히려 퇴행시킨 것이다. 오늘날 외국어 발음을 표기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사라진 글자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다. 오늘날 4글자를 살린다면 우리가 어려워하는 외국어도 더 쉽게 발음하고 쓸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에 있는 원래의 모든 표기법을 활용하면, 어려운 발음들도 잘 구분해서 표기할 수 있다. 지금은 24 낱자를 사용하지만 사라진 4자( ㆍ, ㅿ, ㆆ, ㆁ )를 되살린다면 전 세계 언어의 표기와 발음을 그대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앞으로 사라진 4자를 되살리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와 한글은 다르다. 한국어는 말이고 한글은 글자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한국어는 있었다. 우리가 하는 말과 글에서 법칙과 특징을 찾는 것이지 표준말과 맞춤법에 따르라고 간섭하면 한글과 한국어는 더욱 시달리게 될 것이다.
조상이 물려준 한글이라는 보배를 외부의 적과 내부의 갈등으로 지금까지도 안팎으로 시달려오고 있다. 비록 남북이 갈렸지만 한글을 기리고 가꾸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남한은 한글의 반포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고, 북한은 창제일을 ‘조선글날’로 기념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1446년 9월 29일(음력)을 반포일로 추정하고 양력으로 환산한 11월 4일을 한글학회에서 ‘가갸날’로 기념일을 제정하였다(1926년). 그 후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쳤고(1928년), 1945년에는 훈민정음 원본에 따라 반포일도 바로잡았다. 1446년 음력 9월 상순이라 하여 10일을 선택하고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여 기념한다. 한편 북한에서는 창제일인 1443년 12월(음력)의 중간 날짜를 선택하고, 양력으로 바꾼 1444년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한글에 대한 어문정책은 자연스런 말과 글의 흐름을 간섭하면 그 피해는 반드시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규칙과 특징을 찾아내는 것이지 규칙과 규범에 맞추어 언어생활을 하도록 간섭해서는 안 되고, 할 수 도 없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서도 한글을 지켰고, 정책 담당자의 아집도 무력화 시킨 한글의 역사가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제 활짝 열린 글로벌 시대에 걸 맞는 한글의 국제화 과정에서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자임하려면 직접적인 간섭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