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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생각을 하며, 오늘을 보며 글을 써 본다.
우리는 1960년에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라의 장래를 계획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국민들이 민주당에 민의원의석의 2/3가 넘는 의석을 주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그런 기회에 나라를 걱정하는 대신 자기들의 이익에 급급하여 당을 나누고 나눈 다음 싸움질만 하다가 군사혁명을 맞았다.
지금이 내 생각에는 정치인들이 한마음으로 나라의 장래를 의논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나라에 위기가 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지금이야말로 상대방(북한이 아니다)을 묵사발내야 할 절호의 기회로 알고 싸우고 있다.
세상에 야당의 총수가 “이명박 대통령의 멘털리티(사고방식 또는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조선일보기사)고 했다. 시정잡배라면 몰라도 야당의 총수가 ”대통령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생전 처음 들어 본다.
한심한 나라다.
백년전쯤으로 가정하면 “우리 왕이 미친것 같아”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내 환자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 말을 한 사람은 내 환자도 아니니 답답할 수밖에.
내일을 위한 증언
3ㆍ15 부정선거
막 의예과 1학년을 마칠 즈음인(그 때는 4월 1일이 신학기였다) 1960년 3월 15일은 중요한 날이다. 내 삶에서 첫 번째로 성인의 권리인 투표권을 행사한 날이기에 중요하고, 진짜 백성들의 뜻에 따라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대통령이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선거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선거는(1960년3월15일) 각종 부정한 방법을 쓰고서도 현직 대통령과 그가 지명한 부통령후보가 겨우 이겼다고 할 결과였다. 고등학생들 야당후보의 선거연설 집회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강제로 등교시킬 정도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에 혈안이 되었던 선거였다. 자유당의 이기붕후보가 거의 단일후보인 이승만대통령후보의 런닝메이트이면서도 1956년에 동반 대통령후보도 없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장면박사를 아주 적은 표차로 누르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뽑는 나라는 내가 알기로는 우리밖에 없었다.
4ㆍ19 학생의거와 군
이미 선거전부터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선거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거무효를 부르짖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마산의 시위에서 김주열군이 최루탄을 직접 이마에 맞아 죽었고 바다에 버린 그의 시체가 떠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시위의 숫자와 규모가 확대되었다. 결국 4월 18일에는 고대생들이 서울시내 중심부로 진출했다가 학교로 가는 길에 청계천 4가에서 정치깡패들의 기습을 받는 사건이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승만정권이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무엇이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학생들이 4월 19일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진압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권력을 가졌으되 정당하지 못한 집권당(자유당)의 바램과는 반대로 군이 학생들을 비롯한 반대세력을 밀어붙이지 않고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군의 발포를 금지했고, 군이 중립을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내 놓았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때의 우리 군의 역할은 지금까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권력 공백상태에서 그 때만 해도 우리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김일성이 준동이라도 하면 국가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잔불 같았던 때에 우리 군은 국방을 책임지고, 일반 시민들의 치안을 강화하고, 권력공백상태에서 과도정부를 탄생시켜 대한민국 제 2 공화국 탄생을 차질없이 이루어낸 최고의 공로자라 할 수 있다. 만일 박정희가 그때 우리 군의 고위 책임자였으면 아마도 스스로 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때 박정희는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 때 육군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계엄사령관을 지내고 학생들을 향한 발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사람이 송요찬장군이다. 송요찬은 5·16후 혁명정부에 간여했으나 박정희세력과 뜻이 달랐고, 그래서 민정이양과정에서 반박정희 세력에 가담하였다. 그의 군에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당선자가 방문했을 때 그가 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영어를 잘 모르는 그는 큰 주먹으로 지도상의 한국군 위치를 짚고 나서 다른 주먹으로 평양을 찍으면서 “I am here now, and tomorrow I will be there!" 라면서 브리핑을 끝냈다고 한다. 그렇게 아이크를 크게 안심시켰다는 이야기가 내가 군에 있을 때는 군인이면 누구나 아는 일화였다. 다른 일화도 있다. 군에서는 꼭 외워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주의 하나가 국군 보급경제 신조다. 나는 현역 때도 외우지 못했고 지금도 모른다. 다만 어려운 한자로 돼 있다는 것이란 사실은 안다. 송장군이 사단장 때라고 한다. 어느 보병중대에 그가 왔다. 당연히 부대지휘관은 미리 사병들에게 꼭 암기해야 하는 것들을 열심히 반복 학습을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부대에서 고문관으로 유명한 사병을 송장군이 가르키면서 보급경제신조를 외우라고 했다. 중대장은 앗질했다. 하필이면 그 사병이 걸릴 것이 무어란 말이냐며 얼굴이 노래졌다. 그런데 그 사병이 대답하기를 ”더러운 것은 빨아 입고, 헤어진 것은 꿰매 입고, 음식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라고 하더란다. 자기도 잘 모르는 한자로 된 보급신조만 알고 있던 중대장은 더욱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런데 송장군은 ”맞아 똑똑해!“라고 칭찬하더란다. 보급경제신조라는 것이 한마디로 물건 아끼자는 것인데 알지도 못하는 한자로 어렵게 외우라니 사병들이 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외우더라도 실천은 못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런 그가 당시 군에서는 별명이 석두장군(돌대가리장군)이었다니 참 역설적이다.
본론으로 가자.
4ㆍ19의거(혁명)는 혁명을 이끈 최대세력이(학생) 정권을 장악하지 않은 세계역사상 유일한 혁명이다. 혁명주도세력이 정권을 잡으려다 힘에 밀려서 실패한 경우는 많아도 주도세력이 스스로 정권잡기를 양보하고 대신 새로운 정권이 안정되기를 바란 일은 역사에 없다. 이런 태도가 옳았는지, 잘못이었는지를 나는 아직도 분간할 수가 없다. 그 때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 구태 정치인들이 하는 일을 견제했으면 우리의 민주화는 훨씬 빨리 이루어졌으리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경험없는 학생들이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구태 정치인들의 농간에 말려 국가 전체가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과도정부를 이끈 허정은 4ㆍ19를 혁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승만대통령이 물러난 자리에 복잡한 절차가 있었지만 4월 27일부터 8월 18일까지 대한민국의 과도정부를 이끌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제 2 공화국이 탄생하기 까지 대한민국의 정국을 수습한 사람이 우양友洋 허정許政이다. 그는 내각수반, 국무총리, 등의 직함으로 일했지만 과도정부수반이란 이름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키고, 정치보복을 최소화하고 질서유지에 힘을 쏟고 군을 효과적으로 통솔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그의 일대기를 자세히 쓰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제 2 공화국 탄생과정에서 노력했으나 실패한 것을 말함으로서 현재의 우리 정치판의 병폐를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제2공화국
제 2 공화국 탄생당시의 정국상황은 다음과 같다.
광복후 부지기수로 생겨난 정당들은(광복직후 남한에는 약 300개 이상의 정당이 있었다고 함) 6ㆍ25 전쟁을 치르면서 꽤 많이 정비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 헌법상 대통령의 2회 연임금지(삼선금지)조항의 ‘초대대통령에 대한 예외조치’를 허용하자는 소위 ‘사사오입 개헌파동’을 계기로 전체 야당이 ‘호헌동지회’로 뭉쳤고 이것이 민주당으로 탈바꿈하였다. 겉모습은 양당정치가 된 것이다. 물론 민주당에 참여 안한 몇 개의 군소정당은 있었다. 민주당에는 그러니까 각각 성향이 다른 야당의원들이 거의 다 모였고 당연히 파벌이 생겼다. 거대야당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크게 구파(신익희,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윤제술, 허정)와 신파로(곽상훈, 장면, 현석호, 오위영,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갈라져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1956년의 대선에서는 구파의 신익희 대통령후보, 신파의 장면 부통령후보로 선거를 치르다가 신익희의 사망으로 자유당의 이승만대통령, 민주당의 장면부통령이 당선되었다. 1960년의 선거에서도 구파의 조병옥대통령후보, 신파의 장면부통령후보로 선거가 되다가 조병옥후보의 사망으로 장면부통령후보만으로 야당은 선거를 치러야 했다. 신구파가 다투긴 했어도 당시의 민주당에는 최소한의 정치적 양식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파의 구성원들의 출신배경, 정치성향 따위는 여기서 생략한다. 내 기억으로 1960년의 소장 정치인으로 신문에 자주 이름이 나오던 사람이 구파의 김영삼과 신파의 김대중이다. 젊은 나이에 김대중이 민주당의 선전부장(지금의 대변인) 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영삼은 몇 년 전에 국회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각광받았고 혁명정부가 공화당정부로 옷을 갈아입고 정권을 잡은 다음 야당의 젊은 원내총무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 두 사람이 그 때부터 티격태격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마도 죽기까지 그 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도 지금도 그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4ㆍ19 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이 두 파는 계속 싸운다. 혁명후 국회의원 선거(민의원과 참의원)에서는 민주당 공천이면 당선은 떼 논 당상이었다. 당연히 공천 싸움이 심각했고 공천을 못 받고도 공천받은 사람의 반대파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이전투구를 벌이는 곳이 비일비재였다. 국회가 개원하고 보니 신ㆍ구파의 비율이 막상막하였다. 그런 속에서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으로는 윤보선이 되기로 쉽게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그 뒤가 문제였다.
구파의 수장인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내각총리는 당연히 신파에서 지명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윤보선은 같은 구파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였고 당연히 민의원의 인준표결에서 부결되었다(3표 부족). 원내의석이 2/3가 넘는 당에서 대통령을 뽑아 놓고 그 대통령이 지명한 내각총리의 인준을 거부한 세계 역사상 웃음거리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신파의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더 커진다. 당연히 구파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서 장면의 인준을 도왔어야 한다. 그런데 구파는 장면의 인준을 거부하면 당연히 다시 구파에서 총리를 지명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에서 장면 총리 인준 반대를 막후에서 공작하였다. 그래서 장면은 국회에서 겨우(인준 기준에서 2표 초과) 총리인준을 받아 제 2 공화국의 첫 총리가 (결국 마지막 총리이기도 함) 되었다. 국회의석의 2/3을 넘게 차지한 정당에서 총리인준 기준인 과반수에 겨우 2표의 여유로 총리가 인준되었다. 약체 내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나라의 미래나 국가의 발전이나 정치의 민주화는 염두에 없고 오직 개인의 이익, 파벌의 이해관계만이 정치행위의 목표라는 사실이 적라라하게 들어난 것이다.
내일을 위한 증언
이 때의 일을 허정의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알아본다.
허정은 두 가지 중요한 의견을 제 2 공화국 탄생 때에 새 지도자에게 건의했다.
하나는 윤보선에게 (허정은 구파계열-당시 민주당원은 아니었음) 국무총리를 신파에서 선택할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란 갈등을 토론과 타협으로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요체인데 조금 세력이 크다고 같은 구파에서 총리를 지명하면 정국의 혼란만 초래할 것이니 반대파에서 총리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파-구파는 같은 정당 (민주당) 이므로 신파에서 총리가 나온다고 문제 될 것이 없고 그런 다음 양 계파가 토론과 합의로 정국을 이끌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그 때 신파와 구파 사이에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국가 경영 방법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그저 인연, 지연, 학연 등으로 얽혀진 파벌의식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곧 무너진다. 구파가 흔쾌히 신파총리를 받아들였으면 될 터인데 그러지 못하고 인준반대 운동을 한 것이 양 계파의 갈등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두 번째 중요한 건의는 장면총리에게 한 것이다. 허정은 새 정부 탄생에서 인사문제에 전혀 간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다만 국방부 장관은 군 출신에서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그가 신임 총리 장면박사에게 한 말이다.
[내가 과도정부를 이끄는 동안 제일 고심한 것은 군부였소. 나의 잛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가장 중요한 일은 군의 정치적 중립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오. 물론 내각책임제하에서는 국방장관도 국회의원이 맡는게 당연하지만, 당분간은 어떤 방식, 어떤 형식으로든 군의 신뢰를 받는 비정치인을 국방부장관에 기용함이 좋을 것이요. 이런 점에서는 이종찬장군은 적격자요. 내가 억지로라도 이 장군에게 국방부장관을 맡긴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소. 그는 군의 원로이고 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고 몸소 실천한 사람이요. 새 정부에서도 군의 조화를 도모하는 일이 중요할 테니, 이 장군이 사양하더라도 당신이 직접 권해 그 자리를 맡기시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1979년, 269page)
그러나 장면은 국방부 장관에 정치인을 기용한다.
그 당시에도 정치인들은 나라의 장래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없고 다만 개인의 영달과 출세와 이익에만 집착한 행동을 보여 주었다. 지금 정치인들도 내가 보기에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허정은 그래서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런 허정의 건의를 묵살한 결과는 참담했다. 민주당은 분열되어 구파는 신민당을 만들었고, 장면 정권은 군부와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이 두 조건은 정치적 불안을 조성했고 박정희는 쿠데타를 결행한다. 민주당이 분당하지 않고 협력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 장면총리가 군의 신뢰를 받는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기용했다면 과연 5ㆍ16이 성공했을가는 매우 궁금한 질문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
자유당과 이승만정권의 한없는, 그러나 가당찮은 권력욕이 노구의 이승만을 네 번씩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부정선거를 만들어 낸 것이 큰 잘못이었다. 자유당 생각에 이승만이 얼마 못 살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기붕대통령이 탄생할 것으로 보고 저지른 부정선거였다고 생각한다. 1960년 선거에 이기붕이 나오고 싶었지만 그의 인기로는 조병옥을 이길 수가 없으니 이승만을 다리로 해서 이기붕대통령만들기를 한 것이다. (이기붕은 나의 고등학교 동기 동창생의 아버지다. 그래서 이 부분은 쓰기가 괴로웠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기에 썼다).
그 다음 잘못이 윤보선의 총리지명이다. 그 때 처음부터 신파의 장면을 지명했다면 구파가 분당해 나갈 명분이 없어진다. 그러면 어찌되었든 신구파가 협력하는 모양새는 갖추었을 것이다. 장면도 처음부터 총리가 되었으면 신파 일색으로 내각을 구성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어찌되었든 거국내각이 탄생했을 것이고 내각회의에서 다툴지언정 국회밖에서 여론정치로 세태를 그르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을 거쳤드라도 나라를 생각해서 장면이 구파에서 필요한 장관을 기용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에게 그 때의 상황에서 그런 통큰 정치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윤보선이 첫 번째 총리지명을 신파에서 안 한 것이 치명적인 과오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협혁과 타협과 토론으로 이끌어야 할 민주정치의 틀을 세 싸움으로 몰고간 책임은 윤보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도연총리후보가 인준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는 장면이 많은 표차로 총리인준을 받았어도 두 파벌간의 세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 결과 정국불안정이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은?
요즈음 연평도사건으로 해서 나라가 혼란스럽다. 그 중요한 사건을 놓고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는 것 같다. 이 사건을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가 하면 군의 부실한 대응을 질타하기에 바쁘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군의 사기를 올려 주려는 일을 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김영삼은 하나회를 없앤 것을 마치 가장 큰 공로처럼 내세웠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군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생각해 보자. 군은 살인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판이다.
군이란 명예와 사기와 애국심으로 유지되는 집단이다. 그중에 애국심은 가장 중요하다. 그 애국심은 명예를 먹고 자란다. 군이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명예롭다고 생각할 때 사기는 충천한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4ㆍ19를 생각하면서 정치와 군을 생각하니 무려 5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좋아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니 참담한 마음이다.
이 글을 쓰다가 잠시 멈춘 사이에 아주 익숙한 장면이 또 나타났다. 물리적 충돌을 뚫고 다수당만으로 표결을 하는 국회의 모습이다. 하도 많이 보아서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다. 부산의 정치파동에서부터 2010년12월9일의 2011년도 예산안 국회 통과까지 이런 원시적인 모습을 본 것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다.
생각해 보자.
야당은 여당의 단독 기습통과가 싫지 않다. 어차피 제대로 된 정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민주당으로서는 앞으로 총선과 대선 때까지 2년 이상 울궈먹을 대여투쟁의 메뉴를 챙겨 놓았으니 손해될 것이 없다. 나만 지겹게 느껴야 한다. 그놈의 “4대강 사업 반대”, “폭거를 일삼는 여당은 물러가라”, “MB정부 물러가라”, “원천적 독재정권” 등를 앞으로 2년을 들어야 한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우리 야당이 언제 큰 문제에서 타협한 일이 있었나?”, “우리도 그 입장이면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데”하면서 별로 잘못했다거나 반성할 필요도 못 느낀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생각에 더욱 걱정이 앞선다. 야당은 그들이 좌파이건 우파이건 간에 야당이 되면 단골로 “OO정부의 실정을 성토한다”,“XX정권은 원천적 무능정권이다. 물러가라”, “XXX법 결사반대”등등의 구호를 반족할 것이다. 그들이 여당이 되면 “대화로 문제를 풀자”, “대안을 제시해라” 따위의 단골구호로 야당을 압박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개인 이익을 위해서는 뒷구멍으로 야합해서 실속을 차릴 것이다. 2011년이 되면서 더 심해졌다. 야당영수가 “대통령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판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성격파탄자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허정의 말 “민주주의는 타협이 필수다”라는 말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날이 언제일가를 걱정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 누가 말했다. “한국민족은 두 개의 깃발을 들고 산다.” 하나는 죽기 깃발이고 하나는 살기 깃발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언제나 “죽기 아니면 살기”란 투로 일에 임한다. 그래서 더 나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서도 “죽기 아니면 까물어치기다”라면서 극단적으로 나간다. 타협은 지는 것이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없다. “너죽고 나죽자 ” 아니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으로 산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를 않는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제 이런 죽기 아니면 살기나, 나죽고 너죽자 라는 삶의 방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런데 우리 정치계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한 가정이든 단체든 국가든 제대로 된 집단인 경우에는 보통 때는 별 것 아닌 일로도 티격태격한다. 그러나 그 집단이 위기라고 생각하면 단결하고 내부의 갈등은 잠시 해결을 뒤로 미루고 마음을 합해 위기탈출에 힘쓴다. 그러나 못난 집단일수록 보통 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안하게 지낸다. 그러다가 위기가 닥치면 오합지졸이 된다. 적전 분열, 더 나아가 적전 내분을 일으킨다. 우리 국회가 꼭 지금 말한 못난 집단이다. 보통 때 작은 일은 야합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잘 꾸려 간다. 그러다가 예산안이라든가, 개헌이라든가, 중요 외교안건에 대한 비준이라든가, 적국에 대한 정책조율이라든가, 따위의 큰 일만 생기면 우리 정치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가 된다.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는 투다.
내가 임상에서 늘 쓰던 말이 있다. 49%대 51%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 욕을 하면서 시어머니가 절대로 틀렸고 자기만 옳다는 며느리에게 “당신이 51% 옳고 시어머니가 49% 옳지요”라고 말한다. 며느리 욕하는 시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작은 일에는 기를 쓰고 싸우고 큰 일일 수록 양보와 협력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하는 날이 올가를 생각한다. 내 생전에는 기다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날이 보고 싶은 것이 그래도 이 나라를 조금은 앞으로 나가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한 은퇴자의 바램이다.
이런 판에 두가지 소식이 들렸다. 하나는 조선일보의 인터뷰기사다.
미국의 헤리티지재단 에드윈 퓰너 이사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조선일보 2011년1월 1일자)
"9·11 테러 과정에서 봤듯이 나라에 큰 위협이 닥치면 사람들은 한데로 모이게 된다. 한국에서 북한의 위협을 앞에 두고 의견이 갈리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미래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은 민주주의, 열린사회의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영어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가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한 뜻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의 나라 일이기에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어감이 풍긴다. 챙피한 일이다.
년말에 일본에서 온 소식이다.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인 와다나베 요미우리회장이 “지금같이 정치계가 혼란스러우면 일본이 침몰할 수 있다. 여당과 야당이 심기일전해서 거국내각을 만들어 일본의 장래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구해야 한다”면서 정계의 심기일전을 권유했다고 한다. 새해 들어 그의 말이 얼마나 현실화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얼마전에 ‘남한산성’이란 뮤지컬 드라마를 보았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은 것은 몇 년 전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에 대해서 초등학교 때는 한사람은 좋은 사람, 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김훈의 소설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다른 생각을 한 후에 그 소설이 나왔고, 그래서 읽었고, 그래서 나 나름으로는 그가 “김상헌과 최명길은 싸웠지만 서로의 뜻(애국심)을 알았고, 상대가 적이 아닌 것도 알았고, 싸우면서도 서로를 아꼈던 것으로” 소설의 주제를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이렇다.
“그들이 겉으로 싸우면서 결국 끝내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운명에서 나라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생각했고 자신의 안위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뜻이 통했기에 왕이 살고 왕세자만 인질로 잡히는 선에서 항복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왕은 두 사람의 충정을 알기에 누구 편도 들지 않고 있으면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항복한 것은 아닌가?”
황윤길과 김성일은 우리 역사에서 개인적인 감정, 당파간의 알력 때문에 나라 일을 그르친 대표적 인물로 거론된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 당파의 주장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의 뒤에는 국가 안위보다 자기 당파의 흥망에 더 관심이 있는 국가 원로들이 있다. 그들은 타협을 못한다. 왕은 그 와중에서 편한대로 전쟁준비를 소홀히 한다. 당연히 그 때 두 사람의 보고를 듣고 여러 가능성을 놓고 적대적인 당파라 하드라도 이성적으로 토론했다면 전쟁준비를 그렇게 소홀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성일도 침략가능성을 인정했으나 황윤길에 대한 실망과 자기 당파의 우두머리들 때문에 끝까지 일본의 한국침략 불가능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의 풀너 이사장의 말은 매우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한국정치인들의 행태가 못 마땅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4ㆍ19후 제2공화국 때에 국론을 토론하고 나라의 먼 앞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었다. 국민 전체의 자발적인 지지로 국회의석의 2/3이상을 한 정당이 차지한 유일한 정권이 제2공화국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이익, 파당의 이해에 묻혀서 나라의 백년대계는커녕 1년도 못 지키고 군사혁명을 초래했다. 이 쯤 되면 머리가 제대로 박힌 민족이면 같은 잘못은 다시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큰 일이 있으면 더욱 더 분열한다. 지금 북한의 핵개발이 더욱 속도를 내고, 노골적으로 전쟁 위협을 하고 그도 모자라 포격으로 민간인을 살상하는 지경에 와 있다. 큰 일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야! 때는 왔다. 정부가 힘들 때에 더욱 더 두들겨서 망하게 해야 한다”는 태도로 싸움에 열중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나라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티끌만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내일을 위해서 과거를 돌아보자. 잘한 것은 제켜두고 잘 못한 것만 알아보자.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바보다. 우리 국민이 바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족-1>
햇볓정책과 튼튼한 국방력의 확보는 반대 개념이 아니다. 이 문제, 대북정책의 문제는 서로 틀렸다고 싸울 일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머리를 마주 대고 토론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이 큰 문제를 오로지 공산주의라는 적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적도 아닌 적을 넘어트리는 데 이용하고 있다.
싸우드라도 황윤길과 김성일 같이 싸우지 말고 김상헌과 최명길같이 싸워야 한다.
<사족-2>
참고로 말하면 내가 투표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이명박대통령이 처음이다. 대통령 선거에 끼지 못한 것은 1997년 김대중대통령이 당선된 선거뿐이었는데 그 때는 미국 정신분석학회의 Fall Meeting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도 미리 부재자 투표를 하려고 출장계획서, 학회 일정 등을 준비해서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려니까 그런 경우는 해당이 안 된다고 해서 못했다. 정말 확실한 이유로 투표장에 갈 수 없는 책임있는 유권자의 부재자 투표를 막는 그런 법은 빨리 고쳐져야 한다. 투표일에 뉴욕 종합 버스터미널 옆에서 전주식 콩나물국밥을 먹으며 개표 막바지의 중계를 보았고, 호텔로 오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5-16혁명정부에서 중요 직책을 맡았다가 사망한 분의 부인을 (서울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전설인 기용숙교수의 여동생이다.우리 동기생 기정일의 고모이기도 하다.) 만나 정국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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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국현대사의 격랑이 몰아칠 때 민주당의 신,구파는 이념의 대립이 아닌 그야말로 四色黨派的 친소관계로 얽혀 나라를 이꼴로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등장을 이끌어낸 셈이되네요. 나는 공화당원으로 이번에 富者減稅 연장을 끝까지 밀어붙여 오바마를 굴복시킨 공화당의 지도부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을 하고있고, 쉽게 타협에 응해준 오바마에 대해서도 지도자로서 너무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루즈벨트같은 영웅이 나와야 하는데 모두 약해 보여요. 한국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모두 김정일한테 끌려다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