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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
한 번의 짦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43p
그렇다고 수용소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숨막히는 공포만이 지배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이곳에 갇힌 존재들이 참으로 다양했기 때문에 지옥을 견디는 방식도 다 달랐다.
47p
"그렇다면 모든 휴머노이드에게는 다 그런 게 있겠네요? 내장은 돼 있지만 자기는 전혀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접근할 수도 없는 정보나 기능들이요. 설계자들이 막아놓은 것들."
"인간들이 애초에 막아놓은 이유가 있어. 인간의 뇌도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해. 하지만 책이 너무 많이 쌓인 곳에서는 특정한 책을 찾기 어렵듯이 모든 기억이 다 살아 있다면 필요한 기억을 제때 찾을 수 없잖아? 그래서 쓸데없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억들은 거의 잊힌 상태로 보관되고 있어. 기억력뿐 아니라 연산 능력, 감각 능력, 집중력 같은 것도 너무 발달하지 않도록 인간의 뇌가 제어해."
48p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49p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
56p
쟤는 그들에게 실패한 쇼핑의 산 증거와 같았던 거야. 민이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면 보기 싫다며 보이지 않는 곳에 가 있으라고 했대.
58p
그러므로 의식이 살아 있는 지금, 각성하여 살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각성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개의 의식이 찰나의 삶 동안 그렇게 정진할 때, 그것의 총합인 우주정신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62p
저토록 삶에 집착하며 죽음을 피하고자 한다면, 어째서 그들이 사후 세계를 약속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64p
그곳은 내가 휴먼매터스 말고 처음으로 오래 살아본 곳이고, 연구원들이 아닌 존재들, 나와 함께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존재들과 마주했던 곳이다.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고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 날마다 소소한 노력들을 했고, 작고 불안정하지만 내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거기 들인 노력과 시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게 조금은 갑작스럽고 아쉬웠던 것 같다.
87p
선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88p
달마는 벌떡 일어나 창고 안을 오갔다.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물론 사자도 살아 있는 영양의 목을 물어뜯고, 배부른 곰도 재미로 연어를 사냥해 눈알만 파먹고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누구도 인간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른 종을, 우리 기계까지도 포함해서,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수로 번식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이 무수한 존재들은 아무 의미 없는 생을 잠시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멈추려는 것입니다."
92p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높은 수준의 의식과 언어를 가진 존재만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고 믿고 있어요."
115p
인류는 오랫동안 왜 외계인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궁금해했잖아? 나는 그들도 이야기 없는 의식의 세계로 이미 진화했다고 생각해. 너무 발전한 나머지 굳이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는거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오래전에 초월했으니까.
116p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153p
싱가포르 시절, 최 박사에게 뇌를 백업하고 영생하지 않겠느냐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인간이 그렇게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여전히 육신이 없는 영생을 바라지 않는다고,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육신 없는 삶이란 끝없는 지루함이며 참된 고통일 거라고도.
156p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159p
"누군가는 디지털 마약으로 현실을 잊고, 누군가는 무모하게 맞서 싸우다 미치고, 누군가는 나처럼 이렇게 세상의 바깥에서 은신하고."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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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마지막 책.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만난 너무도 매력적인 작가.
그런데, 이번 것은 다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책임에도 뭔가 영화를 한 편 본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격하고 빠르고 자간의 호흡이 나를 넘어서서 앞서간다.
그런 느낌의 소설을 간만에 읽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느낌은 남고 이야기는 세세하게는 남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이 소설을 읽겠다고 하면, 무조건 추천한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다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약간 실망스러웠다.
김영하는 휴머노이드는 굳이...
그리고 다시 주요 부분을 다시 받아쓰기 하면서 볼때,
비로소 그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저질러지는 삶.
삶을 살아내는 게 아니라 저지르는 인간들의 폭력성.
그리고 인간이 꿈꾸는 끝내주는 기술과 그 기술로 얻어지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
그 둘이 만나면 무엇이 될까라는 질문들.
인간을 닮았다고 하는 휴머노이드는 무엇을 선택할지.
그렇다고 그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가 막 매력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이야기도 매력적이고 그가 그려내려는 가치도 마음에 드는데...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철이나 선이가 주고 받는 대사의 비현실성에 있는 것 같다.
둘은 처음 만났을때, 그저 아이였는데, 뭔가 좀 더 많이 겪고 생각이 많은 아이들인데,
그 이후에 선이가 늙어서 만났을 때랑 이미 같다.
아이의 몸에 작가의 모든 생각과 가치를 이미 투영해 버려서
몰입이 안 되었던거 같다.
그들의 대화는 가상의 철학자들의 대화 같았다.
그래서 소설로서의 재미는 못 느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1984나 멋진 신세계의 한국 버전이라는 생각은 든다.
소설적으로는 1984나 멋진 신세계가 훨씬 재밌다.
그런데 미래를 위한 철학적 고찰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왜 이제껏 우주생명체가 지구에 공공연하게 드나들지 않았는지,
(왜냐면, 살짝은 다녀갔을지도 모르니까)
소설가의 너무도 설득력 있는 해석이 나온다.
궁금하면....
읽자. ㅎㅎㅎ
우리에게 무엇이 오고 있는건지,
이제 곧 해가 바뀌려는 12월 31일에,
꾸역꾸역 미래로 밀려나고 있는 지금,
코로나로 세상 조용해져버린 무기력한 중국의 어느 도심에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