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판 시간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2023.5.28. 주일오후예배
마가복음 6장 30절에 보면 사도들이 주님의 지시를 받아 나아가서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마가복음 6장 31절에 나오는 이 짤막한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어떻게 빈들판 시간이 소중한지를 함축적으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한마디 말씀 속에서 네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따로! (분리)
주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합 왕 앞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나서 그를 따로 분리시키는 모습이 보입니다. 열왕기상 17장 3절에 보면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를 떠나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역의 현장과 우리의 삶의 근거지에서 떠나서 주님 안에 숨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이 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 안에 숨고 빈들의 사귐을 갖는 것은 보다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인 구원의 길이라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빈들판이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역의 모습은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빈들판 시간이 살아 있다’ 그러면 우리는 몰라도 주님은 역사하시고 주님의 나라가 부흥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뿌리가 산 즉 열매가 살아 있겠지요.
같은 마가복음 6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허다하게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시고 그 무리를 배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재촉을 하셔요. 얼른 떠나라고! 예수님이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십니다. 거기 나와 있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가게 하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영혼을 위하시고 말씀하신 처사이십니다. 남자만 해서 오천 명이 모였다는데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운동장에 가득 모인 관중처럼 최소한도 이 삼 만명은 모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만약에 제자들이 일일이 악수하면서 “감사합니다. 고기랑 떡 잘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좋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삼 만명한테 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제자들의 마음은 둔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귀가 얇아서 그러한 칭찬과 그 사역의 현장에 머물 것을 아시기 때문에 빨리 재촉해서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실 때도 마태복음 6장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어요. 이 역시 ‘따로’이고 ‘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들판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서 분리 속에서 주님을 묵상하는 것! 사역의 좋고 그름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분리해서 일어서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시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새벽에 제가 잠자는 방에서 일어나서 거실 한쪽으로 가고 또 어느 때는 거실에 있는 식탁 의자에 앉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건너방에 있는 의자에 앉기도 하고 날마다 새롭고 산 길로 가서 빈들판 시간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익숙한 곳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합니다. 같은 집 안에서도 말입니다. 제자된 우리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따로 분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둘째, 한적한 곳에 와서
번거로운 곳이 아니라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낮 열두 시에 기도하려고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지붕 위에 무엇을 널려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아래층에 식사하는 데 번거로우니까 기도 시간도 되었고 해서 한적한 지붕을 택한 것입니다. 이 지붕 위의 삶! 사무엘 선지자가 그 지붕 위의 삶을 살았고 베드로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타고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를 더 집중하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일대일로 만나기 위해서 수고스럽지만 산으로 가셨습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온 시간이 사경이니까 새벽 세 시부터 여섯 시가 밤 사경인데, 그 전에 기도하셨으니까 저녁 자정 전에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지요. 저녁 늦은 시간부터 새벽 세 시까지 기도하셨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주님은 성전에서도 기도하셨겠지만 산에서, 빈 들에서 또 감람산 겟세마네에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습관처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입니다.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로 그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다큐멘터리 '중국의 십자가'를 우리 식구님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여러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 중에 상하이 음악 교사이자 가정교회 지도자인 양심비 여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양심비 여사는 문화대혁명 당시 27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삼자 애국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20년형을 언도받고 계절이 바뀌는 것이 스무 번, 감옥에 들어갈 때는 27살이었는데 출옥할 때는 47살이 되어서 아가씨가 아줌마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 같아요. “저는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다 깊이 잠든 후에 밤 중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감옥이라 따로 한적한 곳을 만날 수 없는데 한적한 시간을 택한 것 같아요. 그래서 깊이 있게 기도하면서도 뭐, 소리 내서 기도했겠습니까? 마음으로 주님 앞에 깊은 사귐 속에서 기도해서 그 출옥할 때 모습을 보면 얼마나 얼굴이 밝은지 몰라요.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다 얼굴이 밝습니다. 성도들도 얼굴이 밝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깊은 빈들판의 시간이 살아 있다면 그 얼굴들이 내 형제처럼 가깝게 느껴지겠지요. 그런 참된 부흥이 복음 안에서 한국교회에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잠간!
우리가 경험적으로 내 주님과의 빈들판 사귐을 가지다보면 한두 시간이 잠시 잠간인 것처럼 훌쩍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한 20분 기도한 것 같은데 두 시간이 넘어버렸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잠간 만나서 이야기하고 서로 얼굴을 대한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열두 시가 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10장 3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말씀인데, 그런데 시간은 벌써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말씀은 베드로후서 3장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가 천년 같답니다. 천년이 하루 같기도 하고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시간대는 영원의 시간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아니 영원한 시간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천국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시간 속에 우리 예수님과 만나고 잠간 잠간 빈들의 사귐 속에서 그 영원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잠간!’ 동안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실 때 한 시간인데,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잠간이라도 주님과의 사귐을 이어간다는 것은 소중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내가 오늘 몇 시간 기도해야지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계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 주님!’ 하면서 사귐을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갑니다. 예전 주님과의 사귐에 익숙하지 못할 때는 새벽 네 시에 알람을 맞추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알람을 안 맞춘 지가 꽤 되었습니다. 밤 아홉 시 반, 열 시에 잠이 들면 열두 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좀 늦게 자면 새벽 두 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새벽 네 시 전에 일어나면 또 잤어요. 기도 시간이 안 되었다고요. 지금은 주님이 일찍 깨워주시면 깨워주시는 대로 기도를 합니다. 마음이 참 좋아요. 여유 있게! 데이트하면서 시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면 만나지를 말아야지, 왜 커피 같이 마시고 있어요. 바쁘게 일을 해야지 말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시계를 보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넷째, 쉬어라!
집은 가족들이 쉬는 곳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기도 생활은 집에서 쉬는 것처럼 영혼에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내 주님을 모시고 적절하게 쉬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소중한 일이요, 삶입니다. 이렇게 쉼을 갖고 다음 길을 주님과 함께 준비하고 위로부터 힘을 입어서 새롭고 산 길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말씀을 처음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에게 적용하겠지만, 이것은 오래토록 주님 모시고 길 걸어온 저와 여러분에게도 새롭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빈들의 시간 속에 우리는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겨버리고 쉼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성령님 안에서 가르쳐주심에 따라서 배우고 지시를 받습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지요. 내 짐을 벗기 때문에 쉼을 얻는 것도 있지만 이제는 주님의 짐을 지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마음속에도 주님이 가르쳐주시니까 쉼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마음을 주시고 그 허락된 믿음을 따라서 섬김을 준비하는 것, 쉼이 있지요.
마태복음 12장 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주님은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식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어요. 쉴 줄 모르고 일만 하는 중독자들을 ‘workaholic 워커홀릭’이라고 영어로 말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죽어라고 일만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보다는 내 주님 곁에서 쉬고,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어서 알차게 삶을 꾸려 가야 할 줄 압니다. 쉴 때 제대로 쉬고 일할 때 제대로 일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빈들판 시간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가깝게 누려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