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벗었다. 벗어 내려놓았다. 배낭 속에는 몇 개의 짐이 들어 있었다. 일터에서 받은 짐이다. 내가 지고 있던 짐은 '교양교육 책임자'라는 짐, '인문학연구소 소장'이라는 짐, '인문고전대학 학장'이라는 짐, '희망대학 학장'이라는 짐이었다. 여러 해 동안 이런 짐이 든 배낭을 나는 지고 있었다. 이제 벗었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 그 역할들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하노라고 했지만, 과연 제대로 했을까?
입은 옷, 신은 양말은 밤마다 벗는다. 지치게 하는 8월 된더위 지금은 집에서 아예 바지를 입지 않고 있다. 물론 속옷까지 벗어던지진 않았다. 벗는 홀가분함은 벗어봐서 안다.
하지만, 벗어던지면 홀가분하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 아비 역할과 내 편의 편 역할까지 벗어던질 수는 없다. 나중에 저 세상 갈 때에나 벗게 될 그건 또 다른 나! 한 학기 후에 교수라는 직업의 짐을 벗게 되면 그때에는 '아비' 또 '남편'의 짐도 더불어 줄어들어, 나는 나랑 더욱 가까이 놀 수 있게 될 건인가? 그런 그림을 그려본다. 편도 거들어준다. '가장'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느냐고, 정말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가볍게 사시라고 진심 담아 말해준다. 고맙다.
이제 나도 가끔 앉을 그루터기가 필요한 나이로 접어든다. 내 다리는 아직 튼튼하고 내 걸음은 빠르다. 그래도 자연이 내게 주는 나이테의 의미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그늘의 그루터기에 가끔은 앉으려고 한다. 내 삶을 다 벗어 놓을 순 없고 그리움, 사랑, 서러움, 미움을 다 벗어던질 순 없지만, 그래도 그것들을 내려놓고 여름 나무그늘, 봄꽃 그늘, 가을 단풍 그늘, 겨울 눈 그늘의 그루터기에 앉으려 한다. 어느 틈에 나도 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루터기의 고마움을 눈치를 채가는 나이이다.
배낭을 내려놓았다는 말은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리 건너 강 저쪽으로. 강 건너 저쪽은 연구실을 비워주고 들어서는 정년퇴직 이후의 들판을 말한다. 그래서 남은 한 학기는 건너갈 다리이다. 아직은 이쪽에 있지만, 다리에 올라서니 저쪽도 보인다. 이쪽은 연구실이고 저쪽은 길뫼재 서실(書室)이다. 두고 나올 책과 길뫼재 서실로 옮길 책을 연구실에서 지금 가르고 있다.
배낭을 벗으니 지게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지게 짐은 배낭을 벗기 전기 전에도 졌다. 예취기로 깎은 잔디, 매번 양이 많다. 퇴비장의 높이를 제법 높인다. 그래도 깎은 잔디 지게 짐은 가벼워서 등이 무겁지 않다.
(Non Ti Scordari Di Me (물망초) - SERGIO LEONARD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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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먼저 고인이 되신 어머님의 명복을 빌면서 오랫동안 적조하신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다시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무엇이든 열심을 내어 사시는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요즘 악기 하나 추가 하셨다면서요?
참, 잘 사고 계신 듯 합니다.
트럼펫을 혼자 독학하고 있는데 재미있습니다.
색소폰을 익힌게 트럼펫을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되는데요.
내가 만들어내는 트럼펫 소리, 그 전달되는 음감 또한 직여주는데요.
색소폰 소리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몸도 건강, 마음도 건강, 생각도 건강~!
전형적 모범생이 상상이 되는 건 제 잘못 아닙니다~! ㅎㅎㅎ
증말 오랫간만입니다.
더위가 좀 수그러들었습니다.
변함없이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