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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1. 성막을 주신 목적
하나님께서 성막에 대해서 모세에게 가리치실 때에 그분의 마음속에는 세 가지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셨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이에 반하는 인간들의 죄악에 관해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는 그 죄인들이 구원에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이셨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실 한 장소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즉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이심으로 죄성으로 오염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 가운데 그대로 거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던 방법을 볼 수 있다. 그 처음은 날이 서늘할 때에 에덴동산을 거니시며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신 사건이다(창 3:8).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방법과 특정한 장소에서 인간들을 만나셨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 준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고(출 3:4),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고 명하셨다(출 3:5-12).
세 번째로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구속받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출 13:21). 구름은 낮에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하였고, 불은 밤에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광야 생활 40년 내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다.
네 번째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대로 성막을 건립하기를 마쳤을 때 그분께서는 성막 상공 그 구름 위에 임재하셨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8). 성막이 건립되기 전에 이스라엘은 그 구름이 움직일 때에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막이 건립된 후에도 그 구름으로 그들의 이도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출 43:36-37).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 때에 지어진 성전 가운데 임하셨다. 성전이 완공되고 나서 솔로몬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하셨다. 이에 대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대하 7:1). 또 연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다"(대하 7:2)고 기술한다. 그리고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과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반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대하 7:3)고 했다.
여섯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약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성경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의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고 했다.
일곱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의 공생에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후 모든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요 14:17;요 16:17). 오늘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신다(엡 1:14). 또 성령께서 모든 성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각 성도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고전 6:19).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우리가 그분께 속하게 되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복음의 물결이 온 세상에 바다처럼 흘러 넘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을 특정한 삶에게만 나타내신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가! 우리의 증인된 삶을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길 원한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조인됨을 가르치시기 위함
성막을 주신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인간의 철저히 조인됨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인간의 죄악된 성품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치는 우리가 나중에 살피게 될 성막의 예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죄인된 인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지성소를 닫아 놓으셨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막 울타리에 쳐진 세마포로 만든 벽이 죄인들의 성막 출입을 막고 있다.
규정된 길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다. 여기에는 조금의 예외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희생 번제의 피를 통해서였다. 이 희생 제물은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그럼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첫 번째는 구약 시대의 성막의 식양에서, 그 다음은 성전에서, 마지막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서 보여진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한 길이 오직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길로 나아와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의 자리로부터 구속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행 4:12). 구원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다(엡 2:8-9;롬 4:5).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길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진노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요 3:18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요 3:16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또 요일 5:11, 12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을 통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이다.
3) 구원을 위한 오직 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
성막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이셨다. 그것은 번제물의 흘려진 피를 통하는 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 시대의 성막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 번제물의 피 흘림에 대해 말하기를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히 9:21)라고 했고 22절에서 이것의 의미를 덧붙인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피 흘림이 없으면 아무런 사함도 없다고 말한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잇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3-24)라고 말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의 몸을 주셨고, 죄를 위해서 그의 피를 흘리셨음을 강조한다. 히 10:9은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 첫 것이란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성막을 가리킨다. 다음 히 10:10은 이렇게 계속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도다." 구약 시대에 많은 번제들이 여러번 드려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한 번의 드리심은 그 모든 것보다도 더 우리를 온전케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9:14).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실로 우리가 받은 구속과 용서는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그 피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그분의 보혈로 우리는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분의 보혈로 우리는 깨끗게 함을 받았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또한 우리는 그분의 보혈로 화평을 얻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대환란 기간에 성도로 하여금 사탕에게 대항해 승리케 하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바로 지금까지도 사탄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히 2:14은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되...."
2. 성막을 구분하는 세 개의 휘장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찾아오셔서 성막이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먼저 지성소에 놓여야 했던 언약 궤에 대해 말씀하시고 맨 마지막에는 성막 들에 있는 번제단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막에는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분류하는 세 개의 휘장이 있었다. 우리 사람의 편에서는 성막뜰, 성소, 지성소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순서와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거하신 지성소에 놓였던 언약 궤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하시고 마지막에 성막뜰에 대해 말씀하셨다. 즉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첫 관문부터 시작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로 죄인으로 하여금 당신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셨던 하나님 자신이 거하셨던 곳에서부터 시작하셨던 것이다.
한편 지성소에 놓여진 언약 궤와 성막뜰에 있었던 단(壇)은 성막의 양극단을 대표한다. 언약 궤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결코 무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공정하게 심판하셔야 했다. 반면 성막뜰에 있었던 번제단은 죄인들이 그분의 자비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던 장소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계속하여 세밀하게 연구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약 궤에서 곧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맨 먼저 성막뜰에 있는 번제단을 통하여서만 죄인들이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즉 죽음 없이는 그 어느 죄인도 절대 공의이신 하나님 앞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속죄를 위한 제물이 있어야 했고, 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단(壇)을 명하셨던 것이다. 이 단의 희생 제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진리를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제물은 하나님을 죄인들 앞으로 모시고 나오는 셈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신 것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고자 하심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 앞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의 부족을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갈보리 십자가까지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전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시고 하늘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빌 2:5-11). 즉 영광 가운데 계시던 그분께서 수치를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치욕의 자리에서 본래의 영광스러움으로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만나기 위한 완전한 은혜의 장을 여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완전한 의(義)의 옷을 입게 되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다.
성막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묵상할 때, 지성소의 언약 궤로부터 놋쇠 단까지 이르는 길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놋쇠 단에서 하나님의 궤로 가는 길이 속죄의 피로 넘치는 길임을 알게 된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요 3:16). 그러나 그리스도의 흘리신 속죄의 보혈이 각 사람에게 샘물처럼 솟아나는 생명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3.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께서 가지고 게신 기준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수준임이 성막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준수되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어떠한 용서하심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며, 조금의 오차도 허락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단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요구에서 나온 십계명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안에 놓여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다. 단지 희망이 있다면 속죄를 위한 제물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요구들은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힘입음으로써만이 충족되어질 수 있다. 성경은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라고 말한다.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자리에 있게 한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언약궤 안에 함께 놓여졌다. 아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던 제사장이었으며, 이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언약궤 안에는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셨던 음식인 만나의 항아리도 놓여졌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영양분은 항상 하나님께로만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기억시키기 위함이었다.
언약궤의 맨 위는 순금으로 평평하게 덮여 있고 그 위에 그룹 둘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을 속죄소라 하였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의 초점은 여호와는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속죄 제물의 피를 요구하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것을 통한 속죄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낸다.
인간이 죄를 지닌채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의지하여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죄인들을 대신하여 충족시키시는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지키시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사랑을 베푸실 수 있으셨다. 롬 3:26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 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
4. 성막과 그리스도의 말씀
성막은 요 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대응을 이룬다. 양자가 어떻게 대응관계를 형성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놋쇠단(번제단)이 놓여있었던 성막뜰에 해당한다. 번제는 단(壇) 위에서 하나님께 드려졌고, 이 희생 제물에 의해서만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성막뜰의 단과 성소 사이에는 또한 놋대야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물을 담아 두는 물통처럼 생긴 단순한 그릇으로서 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물로 자신을 청결케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 그 곳에서 손과 발을 씻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먼저 세상과 접했던 더러운 부분을 청결케 해야 한다. 이것은 히 10:19-22에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스도는 또한 자신이 곧 진리 되심을 말씀하셨다(요 14:6). 성막의 휘장 안쪽으로는 성소와 지성소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성소는 지성소보다 큰방으로서 제사장들이 이곳에서 하나님께 진리로 예배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들어갔던 성막의 성소에는 촛대(등잔)와 진설병상(떡상), 향단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세상의 빛과 생명의 떡이 되시고 모든 믿는 자들의 중보자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내가...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지정소와 짝을 이룬다. 죄를 대속하는 대제사장의 중보 사역에 의해서만 이스라엘은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은 구약의 광야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외형적인 회막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장막에서 죄인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따라서 그를 주로 고백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충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 일을 행하시고 난 후 그리스도께서는 "내가...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할 수 있으셨던 것이다.
요일 5:11, 12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 되심을 말해 주고 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5.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성막
성막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성막에 있던 모든 기구들은 그분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다.
먼저 성막 자체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 오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처소였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고 성막의 모든 식양들도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미리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성막이 예배의 중심지였다. 비록 이후에는 성전이 성막을 대신했을지라도 그 진정한 시작은 광야에서였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성막에 대한 식양의 본을 따라 건립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에 대해 지시하실 때에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라고 하셨다. 성막의 구조는 모세의 구상에 일임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것이다.
히브리서는 특별히 모세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성막을 지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성막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곧 성막의 궁극적인 완성이시다. 요 1:14은 성막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거하시매"라고 번역된 헬라단어 "eskenosen"은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시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장막을 치심으로 거하셨다(tabernacled)는 것이다. 이는 구약 시대에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갖는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에 거하시기 위하여 세우게 하셨던 구약 시대의 성막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사람 가운데 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6. 교회의 모형으로서의 성막
성막은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헬, 에클레시아)의 모형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또한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기 때문에(골 2:9-10) 신분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엡 1:22, 23은 그리스도를 몸 된 교회의 머리로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또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성막의 본을 따라 건립된 성전을 비유로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갖게된 신분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즉 성막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예표함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묘사하는 것도 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라고 말하고 있다.
7.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양상
성막은 또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보여 준다.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속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들의 안식과 평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다양한 면들을 보여 준다. 성막에서 볼 수 있는 구원의 양상들은 이후에 계속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성소와 지성소에는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성막을 보는 사람이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느냐 내부에 서 있느냐에 따랄 두 개의 극단적인 입장이 생기게 된다. 이 입장들은 서로 분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성막의 외부는 남의 눈을 끌만한 것이 없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분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그분의 내면에는 신성(神性)이 충만했다. 것이었지만 그 내부에는 놀랄만한 광채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것은 곧 인간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된다. 즉 예수께서는 외모상으로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성막의 밖에 서있는 사람들은 뜰을 둘러싸 쳐진 하얀 세마포장과 뜰 안쪽에 서 있는 건물의 지붕 밖에는 볼 수 없었다. 하얀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의를 상징한다. 뜰 안쪽에 서 있었던 건물의 지붕에서는 뜨거운 햇빛에 바랜 해달 가죽의 우중충한 덮개 밖에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죄인, 혹은 자연인을 상징한다. 이들은 성막을 바라보더라도 자신이 그것에 빨려들만한 특별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번제물의 흘린 피를 의지해서 성막 안으로 들어갈 특권을 부여받은 제사장은 그 내부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직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지만, 오늘날은 모든 신자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히 4:14-16).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참되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성전 밖의 불신자와 성전 안의 성도가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바라본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들은 엄청나게 다른 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성전밖의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의를 상징하는 하얀 세마포장으로 둘러쳐진 성막뜰 울타리의 벽만을 본다. 즉 불신자는 그리스도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심지어 그분의 이상과 도덕성을 찬양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는 아마 그리스도의 지혜와 가르침에는 갚은 감명을 받을지라도 그 분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는 코웃음 칠 것이다. 그는 성전 내부의 광채, 곧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영광은 보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기껏해야 위대한 성인 중 한 삶 정도로만 받아들여질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참 보화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도덕성과 인간성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고귀한 생을 살았고 사람들에 의해 순교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분께서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외부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만드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그들은 또한 종종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비웃는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뿐이다.
외부에 서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단지 한 명의 순교자로 생각하지만 내부에 있는 사람은 빌립보서 2:6-8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8.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먼저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행하셨고, 그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먼저 찾아 오셨다.
1) 구약의 실례
이에 대하여 먼저 구약에 나오는 실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인류의 초창기 시절부터, 곧 에덴 동산에서 이 사실은 명백히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과일을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나오셔서 아담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아담이 대답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질책하셨다. 그러시고 나서 구속자를 보내시기로 약속하셨다(창 3:15). 그리고 구속자가 오실 때까지 그에 대한 대치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피 흘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짐승의 가죽옷"(창 3:21)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주셨던 상징적 대치물이었다.
또한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도 먼저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두 형제는 각각 따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시고 가인의 것은 열납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제사 법에 순종하여 아벨은 피 흘림이 있는 번제인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고, 가인은 피 흘림이 없는 '당의소산'으로 제물을 삼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인의 제물은 인간 자신의 선행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교훈하는 것이다.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지 아니한고로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분하여 함이 어찜이냐고 물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해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먼저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어떤 제사를 드려야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지 가르치시기 위함이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그의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 후 약 수 백년이 지나서 노아 시대 때에도 인간의 악함이 세상에 관영한 것을 보시고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 이십 년이 되리라"(창 6:3)고 하셨다. 인간이 극도로 악했을지라도, 그 분께서는 또 다른 백 이십 년간의 회개 기간을 주시는 은혜를 인간에게 베푸셨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때문에 하나님이 홍수로 그들 모두를 심판 하셨던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의 땅과 큰 민족을 약속하실 때에도 먼저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창 12:1-3). 그 분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에 그 곳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먼저 행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3:9-12). 애굽에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보내기 거부했을 때 하나님은 바로의 장자를 비롯해 애굽의 모든 장자에게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으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출 12:2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가르침대로 양의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출 12:7) 아무런 심판도 당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라고 말씀하셨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양의 피를 자기 집 문설주에 발랐으며, 이로 인해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2) 신약의 실례
신약 성경 역시 구원을 주시기 위해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갈 4:4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될 때가 차서 성자 예수를 전 인류의 구속자로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속자는 창세 당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약속되어 왔었다(창 3:15). 범죄한 인간이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공의로운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었다.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먼저 구속자를 약속하셨다. 즉 롬 5:8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들이 너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어야만 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행이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에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성도들과의 영원한 교제를 위해서도 먼저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면 그들을 데리러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도 성도들이 그분과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먼저 찾아오신다. 이 놀라운 화목을 위한 그분의 약속은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그 곳에서 하나님과 죄인의 화목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심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미래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미래의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실 것과 그 때에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끌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살전 4:13-18). 계 21:1과 계 22:1도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살게될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유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과 화목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찾아 오셨으니 말이다.
3) 성막을 통한 실례
성막도 역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을 나타내는 표본이 된다. 성막의 건립에 대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놓일 언약궤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셨다(출 25:10).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또 그러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 그러나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는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길을 따라 나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관을 궤 속에 넣으라"(출 25:21). 한편 지성소는 휘장에 의해서 성소와 분리되어 있었는데, 그것의 의미에 관해서는 이후에 논의될 것이다.
성막 건물 안에 있는 지성소 바깥쪽은 성소였다.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순금 등잔, 그리고 향단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진설병 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영혼의 양식을 섭취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5)라고 하신 주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순금 등잔은 "내가 세상의 빛이로다"(요 9:5)라고 말씀하셨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또 향단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한다. 요 9:4은 성도들의 기도와 향단의 연기를 연관지어 말한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
성소 역시 성막뜰에 대해서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성소 바깥쪽 성막뜰에는 놋으로 만든 큰 물두멍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청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물두멍은 성도들을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상징한다. 이는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하신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바깥쪽을 향해 더 걸어가면 성막뜰의 끝 부분에 번제단이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다. 히브리서 10:12은 그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들이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성막 뜰 역시 외부 세상에 대하여는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즉 성막은 한편으로는 번제를 드리러오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려져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막으로 나오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통로인 동쪽 입구를 통해서만 들어와야 한다는 제한성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구원을 위한 길은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야만 한다는 제한성을 갖는다.
한편 성막에서 하나님은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의해서만 자신에게로 나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길을 마지못해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그분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주신 것이다.
신약선경은 그 분에게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즉 눅 19:10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요 1:12-13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한다.
또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소유한자, 즉 그 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주어지지 않는다(요일 5:10-12).
한편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그분께로 나오기를 거부한다.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 5:4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리라"(요 3:16)라고도 약속하셨다.
성막으로 가는 길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직행로였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면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로부터 성막뜰에 있던 번제단으로 나가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반대의 순서였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제단으로 먼저 나와야만 했다.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방향으로 성막으로 들어가야 할지 생각해 보자. 성막뜰의 울타리는 세마포로 된 벽으로 둘러 처져 있어서 성막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동쪽에 있는 입구를 통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일단 성막에 들어간 자는 맨 먼저 희생제물을 드리는 장소인 번제단을 바로 볼 수가 있었다. 제사장은 예배자가 바친 번제물 없이는 그를 위하여 더 이상 성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번제단을 통과한 후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놋으로 만들어진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순금 등잔 그리고 향단이 놓여 있었다.
성소 안쪽의 휘장의 내부에는 지성소가 있었다. 그곳은 하나님 자신이 거하셨던 가장 거룩한 장소였다. 신약 성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이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히 10:19).
구약 시대에는 단지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1년에 한 번만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성막을 바라볼 때,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즐거워하는 대제사장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에 대한 우리의 부족을 그리스도께서 채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실로 그 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한편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의 위치에서 하나님께우리의 섬김을 들려야한다. 그러나 그런 때에 조차도 주심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4). 실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9. 적용
당신은 어떠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정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성막의 내부로 들어와 있는가? 즉 다시 바꾸어 말하면 당신 자신이 죄인임과 그 죄에 대한 대가를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과거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던 자리를 떠나서 현재 그 분을 당신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는가? 성막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기 위해 그 내부로 가는 길은 오직 희생 제물에 의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는 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1, 요 10:9, 10). 또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출입문을 통해 성막 안으로 들어 온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모형인 번제단을 마주 보며 걸어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성막이 모든 사람에게 배타적일 수도, 포용적일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막의 문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만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 얻는다는 것이다. 즉 그 한길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막문이 밖에서 닫혀졌지만 이미 그 길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문이 안으로 닫혀지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구원의 길로 들어오는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속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성막이 어떤 이들에게는 닫혀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열려있다는 사실은 마치 범람한 홍수를 피하기 위해 노아가 방주를 지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동물들과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에 여호와께서 그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창 7:16).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은 방주 안으로 들어간 노아와 그 일행을 홍수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믿음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방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셨다.
어떤 이들은 제외되고 어떤 이들은 포함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성막에서도 드러난다. 율법은 인간의 무서운 죄악과 절망적인 상태를 알게 함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반면에 성막은 믿음으로 나오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죄를 사망으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후 용서와 완전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막을 주셨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는 구원으로 나아갈 희망이 없는 자들이 철저히 자신의 조인된 모습을 인정하고 그분이 예비해 놓으신 길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준비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롬 8:3-4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은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2장
성막의 명칭들
이 책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치셨던 구조물의 "성막"으로 이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몇 개의 다른 이름들이 있다. 이 구조물에는 일곱 개의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들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사역을 예표한다.
성막의 이름들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가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을 잘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에 있어서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장막
성막은 종종 장막으로 불렸다(출 39:32, 33,출 39:40). 장막은 성막의 바깥 덮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장막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긴 순례여행시에 사용되던 것이었다. 따라서 성막을 장막이라고 한 것은 성막이 잠시 머무는 장소였지 영구적으로 머무는 장소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임시로 설치하도록 하셔서, 그 백성을 머물게 하거나 또는 이동시키고자 하실 때 언제든지 지었다가 다시 쉽게 거둘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런 생활 역시 한시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광야 생활을 전제로 고안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궁극적인 약소의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영원히 거하도록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이 땅에서만 존재하는 한시적인 것이며 영원한 천국의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다(계 21:22). 그리스도의 몸은 그분을 구주로 고백한 각 개인들로 구성된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던 각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을 이루는 구성원이 될 것이다.
성도들의 육체 또한 한시적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살게 되겠지만 그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지 않는 이상, 그의 육체는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진정한 사람-영혼-은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 성경도 성도가 몸을 떠나면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5:8).
성도의 몸에 대해서 고후 5:1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한다.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의 몸은 장막집(tent-house)과 같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기다리는 동안만 거기에 체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예비해 놓으신 집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 땅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저기에 아무개가 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가 거하는 장막만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성도라면 언젠가는 영원히 거할 처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몸이 환란을 많이 당할수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처소를 더욱더 고대하게 된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임시 처소로서의 장막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가장 부유한 계층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택보다는 오히려 장막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에 관해서 히 11:9-10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알고 있다면 당신이 거하고 있는 처소에 대한 당신 자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당신의 다른 소유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한시적 은총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마치 영원히 그 곳에서 거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당신이 믿는 바는 이 세상 것들인가 아니면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인가?
"장막"은 또한 만남의 장소로서의 성막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출 39:33, 40).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였다. 사실상 그곳은 희생제물이 흘린 피에 의지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분은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막의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들이 앞서 서술한 바 희생 제물의 피에 의지하는 방법으로 나올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만나고 교통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원의 사역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길을 닦아 놓으신 것이다. 이 사실은 히 10:19-22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을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 성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가장 먼저 사용하신 이름은 "성소"였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성도는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실 한 곳으로 특별히 구별하신 장소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 우주적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 역시 하나님의 성소이다. 우주적인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모든 곳, 모든 세대의 성도들 전체,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 전체를 가리킨다(엡 1:22-23).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의 몸된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성전으로 불리워진다. 엡 2:19-22은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라고 말한다.
각 성도들 또한 교회의 구성원들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성도들 전체를 포함하는 우주적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리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우주적 교회와 더불어 각 성도 개인도 성전으로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 그분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고 권고한다. 성도들 안에는 성령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성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본질상 구약 시대의 성막이나 성전과 같은 외형적인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일 뿐이다. 구분은 성도들 개개인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곧 그분에게 속한 자이다. 그래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3. 성막
"성막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여 계시는 곳으로서의 장소를 강조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레 1:1의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셨던 것처럼 현재도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요 14:23)고 말씀하셨다.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은 요한계시록 3:20에서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것은 바울의 기도에서도 나타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사실인가! 이에 대해 계 21:3은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말한다.
4. 회막
성막은 또한 "회막"이라고도 불렸다(출 27:21, 레 1:1, 민 1:1, 신 31:14 등등). 여기서 "회"(회(會), congregation)라는 단어에 주의해보자.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임은 단하나였음을 가리킨다. 그 모임 안에는 나뉨이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는 몸된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셨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교회는 개별적인 지역교회가 아니라 오순절로부터 시작하여 성도들이 승천하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 날에 이르기까지 거듭난 모든 성도들로 구성된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말한 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를 두고 한 것이다. "한몸"이라는 말을 주목해 보자. 각 성도는 몸을 이루는 구성원이지만 그 몸은 단 하나이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20).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몸된 교회는 지역교회도, 특정 종파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종파에 상관없이 세계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간에 많은 분열이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특정 종파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도라 불리워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파들이 있음으로 얻게되는 긍정적인 유익은 여러 가지 교리들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방편의 교리에서든지 치우침이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종파들은 너무나 자주 극단적으로 특정 교리를 강조하고 그것을 일반화시키려 하는 우(寓)를 범한다. 어떤 종파나 교파에 속해 있든지 우리의 관심은 항상 성경을 살피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언제나 성경이 말하는 바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성막은 "특정한"(the) 회중에 주어진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나뉨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음에 분명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교회내에도 나뉨이 있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그들이 한 몸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마치 다른 목적을 위해 섬기는 것처럼 나뉘어서는 안된다고 촉구하였다. 하나님께서 몸의 각 구성원들을 세우신 목적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강조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5).
5. 여호와의 장막
구약 시대의 성막은 또 "여호와의 장막"으로도 불리웠다(왕상 2:28). 이 이름은 성막이 하나님 자신이 친히 거하셨던 장소임을 강조한다. 그곳은 단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하나님 자신이 실제적으로 이 땅의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이처럼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각 성도의 삶 안에서 이 땅에 거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사실인가, 이 일의 이루어짐은 우리에게 위로를 줄 뿐아니라 동시에 경고도 준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우리와 함께 하심에 관해 말씀할 때 우리는 많은 위로를 얻게 된다. 히 13:5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위로에 관한 또 다른 말씀은 신명기 31:6이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심이라 하시니라"(수 1:9)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곳에 행할지라도 그분의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고전 6:19).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음을 깨달았던 시편 기자의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이처럼 '여호와의 장막'이라는 명칭은 여호와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에 보듯 하나님께서 친히 실제로 각 성도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점검하게 된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죄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엄격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 것은 각 성도 자신이 곧 여호와께서 친히 거하시는 장막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고전 6:19에서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밝힌 것도 같은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6. 증거막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처소로서의 성막을 또한 "증거막"으로도 불렸다(출 38:21). 지성소에 놓였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담긴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이들은 각각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분 앞으로 나아갈 때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 하나님의 지속적인 권능에 대한 증거들이다.
특별히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기준을 갖고 계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기준 자체는 결코 낮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를 대속하는 희생이 없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성막 안으로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정해주신 희생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 성막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그들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요 1:2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을 드러내는 빛발하는 증거들이 되어야 한다. 그 안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고 고백하는 각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는가를 스스로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돌려지도록 해야 한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하나님을 향해 목마르도록 해야 한다. 소금은 또한 부패하지 않게 보존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금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죄악을 미워하는 분이심을 세상에 대해 나타내는 증인들이어야 한다.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해 낼 때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그분의 나라가 확장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또한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빛이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영혼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찾아 올 수 있도록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신"(고후 5:20)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그분의 개인적인 대표자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진 책임이 얼마나 엄숙한 것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무인가를 말해 준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보고 있다. 책을 읽듯이 세상은 우리를 읽고 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세상이 우리의 삶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를 물어 보야야만한다.
구약 시대의 성막이 주변 세계에 대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증거였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에 대한 동일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복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을 그분께로 이끄는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원한다.
7. 증거의 장막
성막에 주어진 일곱 번째 이름은 "증거의 장막"이다(민 17:7-8).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이들을 대표하는 지파를 증거하기 위해 열두 지파의 지팡이를 성막에 두었을 때 처음 사용된 이름이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 17: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에 간직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제사장의 권세를 주신 것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셨다(민 17:10).
오늘날의 성도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라고 하셨다. 즉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그것에 대해 하늘 아버지께 요청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위에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선택받았다. 성경은 성도에 대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성경에 대해서 항상 좋은 것만을 말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말씀하신 그 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다 말해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성막이 증거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자신이 그 분에 대한 증인이 된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과연 그 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중인이 되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충분히 알고 있는가? 그리고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있는가?
제3장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행군 중에 장막을 치고 한 곳에 일시적으로 머물 때 하나님께서 그 열두 부족의 장막의 위치와 성막의 위치와 성막의 건축 재료들을 일일이 정해주신 사실은 다음과 같은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 성막의 위치
<정지시 이스라엘 장막 배치도>
이상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막은 이스라엘의 진영 사방 네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네 부족의 중앙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들 중 아무곳에서나 거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한가운데 자리에 거하시기 위해, 곧 이스라엘의 중심에서 통치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성막이 그들의 중앙에 위치했기에 백성들이 성막으로 나아가기도 용이했고, 다른 종족들로부터 그것을 지키기도 쉬웠다. 성막을 덮고 있었던 구름은 진(陣) 전체로 퍼져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람들을 보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앞으로 나오게도 하신다. 신명기 23:14은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도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4).
신약 성경 또한 이 진리를 강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계 1:13은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있다고 말한다 또, 계 2:1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계심을 이야기한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이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거하시고 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마친 후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강을 건넜다. 그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을 때의 언약궤의 역할을 주의하여 살펴보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7).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강은 갈라졌고 백성들은 마른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건너가기를 마칠 때까지 그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서 있었다. 이것은 성막이 지어졌을 때 지성소에 놓였던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각 성도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니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 사탄과의 영적 싸움 중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요일 4:4의 말씀으로 우리는 승리를 외칠 수 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허하고 계신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영적인 필요도 채우신다.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2. 성막 건축 재료의 준비
성막을 짓는데 소용되는 재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이미 모아졌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것들이 성막을 지을 재료로 쓰여질 줄 몰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왔던 금, 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것들이 성막 건축에 소용되었다. 실로 광야 어느 곳에서 이 재료들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것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출발에 관해 지시하시면서, 친히 모세에게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 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21-22)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로서 오랜 세월 애굽 사람들을 섬겨왔지만 한번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품삯을 다 받게 하신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모든 집의 장자들을 치시던 날 방에 이스라엘 민족은 급히 애굽을 떠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을 잊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5-36).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건립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거기에 필요한 대부분의 재료들을 이미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재료들을 소유하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성막을 짓기 위해 억지로 바치도록 강요받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마음을 바라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출 25:2).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기꺼운 마음으로 이 물건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게 하셨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기꺼운 마음으로 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헌물의 대가로 하나님의 호의를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베풀어주신 그 은혜들로 인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바쳤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했다. "여호와의 명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출 35:4-5). 또 29절에서도 말하기를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고 했다.
아침마다 모세는 줄이 이어 가져오는 백성의 자원하는 예물을 받았다(출 36:3). 마침내 그들은 모세에게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라고까지 하였다. 그 장면을 그려 보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여 쓰기에 오히려 남음이 있도록 예물을 가져왔던 것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 36:6-7).
이 얼마나 보기 드문 놀라운 일인가! 오늘날에는 들어보기조차 힘든 놀라운 사건이다.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데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바쳐졌다는 예가 있기는 하지만 몹시 드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감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드림이 빚을 갚는 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므로 바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그분의 일이 확장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고후 5:14).
한편 신약 성경에도 헌물 또는 헌금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 그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나라"(고후 8:9).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께 사랑으로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헌금에 관해서 성도들은 또한 "이것이 곧 적게 심은 자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아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하려 하심이라"(고후 9:6-8)는 말씀을 듣는다.
또 영적인 도움을 입어 왔던 사람은 그 도움을 베풀었던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갈 6:6에서 이것이 잘 나타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명하신 의무이다. 또 성경은 이렇게 계속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성도들은 매일 매일의 양식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잠언에서도 나타난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잠 11:24-25).
이러한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늘날 양적으로 많은 재물만을 바쳐야 한다는 그릇된 사고(思考)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즉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느끼는 부담만큼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보다도 가장 우선되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하지 않은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촉구할 때에 이같은 기본 원칙을 말하였다. 즉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드렸던 마케도냐 교회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 기본 원칙을 언급하였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즉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헌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의 중요성은 롬 12:1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주의해 보자. 이것은 자기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기 이전에 어떤 조건이 선행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롬 12장 앞에 세 장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11장 끝 부분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찬가로 끝을 맺는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이 찬송 후에 곧이어 바울이 롬12장 첫 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께 최소한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우리들은 전적으로 그분께 속해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 진리는 고전 6:19-20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즉 구약 시대에 성막에 거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값으로 사셨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성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들은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교회에 소속된 심술궂은 한 사람을 보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도록 해야 한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
3. 성막 건축 방법
성막 건축 방법에 대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라고 하셨다. 이처럼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서 철저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도록 한 것은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관한 진리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성막과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히 8:5은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또 히 9:23도 같은 말을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동물 희생 제물)로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예수 그리스도)로 할지니라."
이에 이어 히 9:24은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한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구약 시대의 성막이 "참 것의 그림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 따라 지어진 성막에 대하여 히 10:1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성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는 말을 주의해서 보라. 구약 시대의 성막과 예배는 장차 오는 하늘나라의 모형이었다. 특별히 성막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계획과 성도들이 행해야 할 것, 그리고 예배 방식과 우리가 신앙 성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의 모형이었다.
예를 들면 죄인의 구원에 관해서 성막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직접 죄인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리라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삶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신 길을 통해서만 나아가야 한다. 죄인인 인간 자신의 모습 그대로는 죄 없으신 그분 앞에 결코 나아갈 수 없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성막 건축 방법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식양에 따라야 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히 8:2은 이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마이 한 것이 아니니라." 또 구약 시대의 성막이 개인의 구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히 8:10이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죄인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방법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엡 2:8-9과 같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또 그 구원이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딛 3:5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엡 2:10은 이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을 위한 길이 오직 한 길 뿐이라는 진리가 가장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는 곳은 행 4:12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인 요 14:6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갖는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편 하나님의 식양에 따라 지어진 구약 시대의 성막은 개인의 구원과 관계된 진리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 전반에 관한 진리와 교훈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에 거하시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의 생활 전반을 지켜보셨던 것이다.
오늘날 구약 시대와 같은 외형적인 구조물로서의 성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성막인 모든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그 속에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이 일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분은 성도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4:4-5)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이 살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거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다.
또한 성막 전체의 구조와 기구, 제사장의 역할, 이 모든 것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만들어지고 시행되어야 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하늘나라의 모형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성막이 이스라엘의 삶을 지도하는 율법 체계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갈 3:10은 특별히 이 원칙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성막에 관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식양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저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오리가 구약 율법 아래 살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노력할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다(갈 1:9). 왜냐하면,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행 4:12).
4. 성막 건축 재로
출 25:1-7에는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할 재료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 가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은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족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든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성막의 재료들과 심지어 그 색깔까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세세한 것은 이 후에 논의되겠지만 각각의 재료에 대한 기본적 의미는 여기서 살펴보겠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그 재료들이 각기 기본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 모든 곳에서 그러한 상징적 의미들이 필연적으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 재료(혹은 색상)들과 그것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재료(색상), 상징적 의미
*금, 신성(神性)
*은, 구원
*놋, 심판
*청색, 천성(天性)
*자색, 왕권
*홍색, 희생
*나무(아카시아),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가는 베실, 공의
*기름, 성령
*수양의 가죽, 속죄
*염소털, 속죄
*해달의 가죽, 그리스도의 인성 또는 외모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결합되었다는 사실은 성막의 기구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는데 금으로 싸여진 나무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나무는 그분의 인성을 상징하며, 금은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다. 이것에 관해서 롬 3:25-26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 1:21-22). 하나님은 인간과 화목하지 않아도 부족할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반면에 인간은 그분과 화목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이 일을 이루셨다. 즉 그분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충족시켜 드렸으며(요일 2:2)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그 특권을 마음껏 누림과 동시에 화목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할 의무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
즉 행 4:12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원을 위한 길은 유일하며 우리는 이 진리의 선포에 대한 책임을 위탁받았다(고후 5:18-19). 따라서 우리는 이 책임을 충성을 다하여 수행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복된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자. 이 화목의 메시지를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맡고 있는 책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막 전체 재료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성막이 기본적인 두 종류의 재료-나무와 금-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먼저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나무는 조각목이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결을 가진 무겁고 튼튼한 나무였다. 또한 해충에 의해서 피해를 잘 입지 않는 나무이므로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가장 이상이라 하겠다.
성막 건축에 관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조각목이란 중근동의 사막 지역에서 잘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를 말한다. 이 사실에서도 이사야 53:2이 예언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수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널판들을 금으로 싸라고 지시하셨다(출 26:29).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만남을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인성과 신성은 신약 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며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잘 나타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이 14절에서 밝히 드러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라는 단어는 표현되어진 것 또는 나타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인도해 내다"(to lead out)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완전한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나타내셨다. 때문에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리스도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인간에게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끄실 수 있는 완전한 신인(神人)이시다. 인간의 몸으로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몸으로 부활하셨기에, 그분만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격을 이어주는 진정한 화목의 다리가 되실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이러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제4장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 발을 들여 놓은 곳이 성막뜰이다. 동쪽에 있는 문을 통해서 성막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그 곳에서 그들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보게 되어 있다.
지성소와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성막뜰의 전체 너비와 길이는 각각 45.6m, 22.8m였다. 그것은 큰공간이라고 할 수 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성막뜰 가운데에는 휘장으로 분리된 두 개의 방이 있었다. 그 방 전체 크기는 너비가 13.5m, 길이가 4.5m, 높이가 4.5m이었다.
성막들의 물두멍을 지나서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방은 성소였다. 너비 9m, 길이 4.5m 크기인 이 방은 하나님과 인간을 대표하는 제사장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제사장은 휘장문을 지나서 이 성소로 들어갔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문이라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 10:1-2).
또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양된 성도가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 뿐임을 보여준다.
성소 안쪽의 휘장을 지나면 그 곳은 지성소였다. 그 방은 너비 4.5m, 길이 4.5m, 높이 4.5m되는 공간이었다. 속죄소가 놓여있는 그 방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장소였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르므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 놓여있던 휘장은 죄인의 몸으로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상징한다.
다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을 의지해서만 모든 사람이 당신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이유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제 성막뜰과 성소, 지정소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막뜰의 울타리
여기서는 성막뜰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성막뜰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실 때에 그분은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 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편을 당하게 할지니..."(출 27:9)라고 했다. 여기서 1규빗은 약 45.6cm이기 때문에 성막뜰의 한 쪽 길이는 약 45.6m정도 되었다. 그리고 그 넓이는 50규빗, 곧 22.8m 정도 되었다(13절).
그런데 논리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지성소에 거하시고 계시는데 성막뜰이 따로 꼭 필요하셨겠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그리고 성막뜰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 그분께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분리를 인간들에게 요구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올 자들을 극히 제한하시기 위해 백성들의 대표자로 제사장만 따로 있을 수 있는 장소로서 성막뜰을 만들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신 곳은 어떤 종류의 죄에 의해서도 오염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막뜰을 통해 죄의 오염을 막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숨기워져 계셨고, 세상은 그분에 대해 가리워져 있었다.
한편 성막뜰은 동편만 제외하고 휘장으로 쭉 두른 울타리였다. 그 휘장으로 쳐진 벽을 만든 재료를 주의해서 보자. 그것은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계 19:8에서 나타나듯이, 공의를 상징하는 "세마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공의의 심판을 집행할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계 19:14) 그분을 따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성막뜰의 울타리는 하나님께 나오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공의를 만족시켜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마포장이 걸려있던 말뚝은 매우 높게 세워졌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것을 넘어서서는 성막뜰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공의의 벽을 넘어설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 공의의 세마포장은 사회의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그가 큰 죄를 지은 죄인이든지 아니면 높은 덕망으로 존경받는 성인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 된다.
한편 세마포장은 말뚝에 걸쳐져 있었으며 그 전체 높이는 2.25m 였다(출 27:18). 그 말뚝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상징하는 세마포장을 지탱하기 위해 충분히 튼튼한 놋으로 만들어졌다.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세마포장의 벽을 뛰어 넘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을 겪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마포장이 말뚝으로 지탱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죄인들은 동쪽으로 나있는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는 외에는 어느 곳으로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허락되지 않았다. 세마포장을 넘어서 가기에는 그 담은 너무 높았다. 그 담을 넘어서 들어가기를 애쓰는 사람의 결국은 사망이다.
여기서 말뚝은 구약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이것이 약 2:10의 근거가 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 이상의 것임을 기억하라. 성경학자들은 구약의 율법 안에 모두 613개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복음 10장은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순종의 또다른 설명을 보여 준다. 즉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을 때(눅 10:25),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사는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데에 그때까지 실패한 사례를 여러 차례 지적할 필요도 없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그런데 그 율법사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눅 10:29)라고 주님께 물었다. 이는 그때까지 그 율법사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노력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했던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율법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진정한 의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했던 이유가 있다. 또 고전 1:30에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아주 하찮은 정도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못될뿐더러 그러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 것과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자신의 죄가 장벽이 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음을 성경은 단호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에 대한 갈 3:24은 이렇게 말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성막을 둘러싸고 있던 벽은 율법을 완전히 지킴에 있어 인간은 절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정도의 의로움을 가지지 못했다면,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율법은 말한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율법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게 한다. 그 자신이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갈 4:8).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율법은 죄로 만신창이가 된 인간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한다. 즉 인간이 죄에 종노릇하며 스스로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욱 죄악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고, 또 죄에 대해 민감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게 된다. 성령이 그 속에 거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게 된다. 극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해 갈급하게 하는 것으로 율법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한편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즉 그것은 우리로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한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모든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세마포 울타리 밖에 서 있던 사람은 성막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의에 미달하는 죄인은 그분 앞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것을 가능케 하는 길을 만들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모든 사람 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우리는 의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졌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2. 성막의 문
성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했다. 하나님의 공의의 장막이 사람과의 사이에 높게 드리워져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한길로 나오는 자는 그분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은 문에서 시작되었다.
성막문 건축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딴 이십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출 27:16).
그 문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나 있었다. 성막뜰의 다른 입구가 어느 곳에도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막의 문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경은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 되심을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요 10:9;요 14:6;행 4:12).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세마포막은 단색이었다. 그러나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 백색의 네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었다(출 27:16). 성막 전체도 이 색깔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완전한 신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특성을 나타낸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색깔로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셨다.
청색과 홍색을 혼합함으로 만들어지는 자색은 종종 왕권(王權)과 관련지어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이 색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 청색과 홍색의 혼합으로서의 자색은 신성(神性)과 희생 제물의 피의 결합을 말한다. 즉 이는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그 분이 죄인의 대속 제물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실 것을 보이는 것이다.
홍색 또는 적색은 피의 색상이다. 성막의 출입에 칠해졌던 이 색깔은 죄를 위해 드려진 번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킨다.
백색은 완전을 의미한다. 즉 이는 인성을 가지셨으나 죄는 전혀 없으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 오셨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빌 2:6-11에서 바울은 성막의 문을 이루고 잇던 네 가지 색깔이 가리키는 바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취하셨는가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먼저 6절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흰색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대해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홍색에 병행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는 8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끝으로 자색에 대응되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해서는 9-11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온통 백색이었던 세마폭막을 제외하면 성막은 이 네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네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진 입구는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과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 또한 같이 재료와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구원의 문 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분 외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성막의 색상에 대한 또 다른 대응의 신약성경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예를 들면 4복음서가 각각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자색). 마가복음은 섬기는 자로 오셨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며(홍색), 누가복음은 완전한 인간이셨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백색). 또한 요한복음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청색).
4복음서가 있지만 그들은 구원을 위한 네 가지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위한 단 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각기 다른 면들을 강조하고 있을 분이다.
복음 자체는 네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성경은 천국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영원한 복음이라고도 말하며, 사도 바울은 "내 복음"(롬 2:16)이라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각각의 경우 그 기본이 되는 요소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하심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복음은 단 하나인 것이다.
성막의 문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다. 실제로 그 문의 넓이는 9.12m 였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게서는 모든 사람에게 초대장을 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까지도 이렇게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예수님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 주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들 민족 가운데서 태어나셨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를 성막의 자색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묘사했다.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또 한 부류는 로마인이었는데 그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계층이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성막의 홍색에 대응하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당시 전세계에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전해주었던 헬라인들이 예수님의 시대의 또 한 부류를 구성하고 있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성막의 흰색에 대응하는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비교적 소그룹이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나머지 한 부류로 자리 잡았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성막의 청색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어느 부류에 속했느냐에 상관없이 초대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분께로 나아올 수가 있었다(마 11:23; 요 3:16).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께로 나아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않으시리라고 약속하셨다(요 6:37).
이것이 세마포장과 네 색상의 문이 함축하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나타내는 세마포장은 "그 자리에 서 있으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네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넓은 문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가 뜻하는 의미의 감격을 안다. 문은 단지 하나 뿐이지만,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6:37이 말해주듯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자는 아무도 쫓겨남을 당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서는 단지 한 문으로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그와 비슷한 많은 모조품들을 늘어놓는다. 잠 14:12은 경고한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탄이 아무리 정교하게 다른 모조품들을 만들어 놓고 유혹할지라도 우리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요 10:1; 행 4: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가장 잘 요약되어 나타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제5장
번제단
1. 번제단의 목적
성막의 기구들 중 여기서는 번제단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번제단은 희생제물이 드려지던 장소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예표한다.
번제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만들지며..."(출 27:1,2).
단(壇)은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성막문으로 드러오면 석막뜰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던 기구였다. 즉 그곳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첫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죄에 대한 대속제물이 드려지는 곳에 하나님은 죄인을 만나러 오셨다 만약 인간이 죄에 대한 번제물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의 결국은 사망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래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죄에 대한 대속물에 의해서 뿐이다.
그러므로 번제단 역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단"(altar)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원어는 '들리워진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마도 예수께서 "내가 땅에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생각하시며 하신 말씀일 것이다. 희생 제물이 드리워져서 단 위에 놓여져야 했듯이, 그리스도도 들리워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다.
번제단은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죽음을 당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게 흘렀고 번제물의 몸은 불길에 휩싸였다.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한편 번제단은 성막뜰의 입구와 성소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소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리신 곳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과의 화목에 도달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저주의 자리에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단 하나뿐임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설명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보혈을 흘려주셨던 장소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 된다. 이에 대해 히 9:22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인생의 진정한 터를 닦는 셈이 된다. 이에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라고 고백했다.
구약 시대 성막에서는 정기적으로 계속해서 번제가 드려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영원히 세상 죄를 대속하셨다. 이것에 대해 히브리서 9:25-28은 말한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 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또 히 10:1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4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갖는다고 히 10:12은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즉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드리심은, 구약 시대 제물에 의해 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덮어지기만 했던 죄들과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롬 10:10)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대속물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처음 구출되어 나온 것은 어린양의 흘린 피 때문이었다. 즉 어린양을 죽여서 그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지나 가실 때에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시고 그 집의 잠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죽이지 않으셨다. 이와 관련하여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애굽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보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피 없는 애굽인의 가정에 내리셨던 장자의 죽음 재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피를 흘리는 제사만이 죄에 대한 대속으로써 하나님께 열납되어질 수 있음은 가인과 아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도 볼 수 있다(창 4:3-5).
한편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난 동물 희생 제사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답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어린양일지라도 그것이 살아있는 상태로는 충분한 제물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속은 반드시 피 흘림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양은 반드시 죽어져야 했다. 레 17:11은 말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지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만찬가지로 그 용모가 아무리 아름답고, 그 품성이 아무리 완전한자라 할지라도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완전성을 칭송한다. 그분의 흠 없으신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분의 덕성을 이야기한다. 그분의 위대한 가르침과 놀라운 비유들에 경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그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우리의 믿음 없이는 어느 곳에도 구원은 없다. 그분의 삶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보혈)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롬 5:8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한 롬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말한다.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에 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2. 번제단의 외양(外樣)
성막 기구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번제단의 모양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모세의 생각대로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성막 건축에 대해서 모세에게 지시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가르쳐 주셨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40). 히 8:5도 말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이는 번제단의 제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비록 번제단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어 번제단의 나무에 전화하실 수 있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작업은 단지 번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것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도 단지 사람들이 행했던 일을 십자가를 만들어 그 위에 그분을 올려놓는것 뿐이었다. 사람 편에서 한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왜냐하면 그 외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을 깜짝 놀라시게 했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3:8에서 그리스도를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라고 언굽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하심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류를 위해 구원자를 주시겠다고 하신 첫 약속은 창 3:15부터 기록되었고, 그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록은 요 3:16에 나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구약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기록되게 하신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따른 것이었다. 즉 그것은 그 약속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이 우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순절에 행한 설교에서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미리 의도된 것이었고, 그 의도대로 하나님은 법 없는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순종하여 세상의 죄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리스도는 결코 힘이 없어서 사나운 폭도들의 희생물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또한 실패한 순교자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 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신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대적자들도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분을 해하지 못했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어라"(요 7:30).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어라"(요 8:2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비로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게 허락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분의 생명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예수 자신이 기꺼이 육체의 목숨을 버리셨던 것이다. 요 19:30은 말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놀랍고 오묘하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3. 번제단의 재료
번제단을 만들 때에 사용했던 재료를 살펴보자. 그것은 먼저 "조각목"(출 27:1)으로 만들고, 그 위에 "놋"(출 27:2)을 입혔다.
그 나무는 사막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아카시아라고도 불리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실로 그리스도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사 53:2) 같은 분이셨다. 인간으로서의 그분은 가장 좋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 사셨고,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단이 놋으로 싸였다는 사실을 주목해보자(출 27:2). 번제단은 밤낮으로 불이 붙여졌었기 때문에 그 표면은 그곳을 견디어 내기 위한 보호막으로 덧 입혀져야 했다. 여기서 "놋(brass)"으로 번역된 원어는 "청동(bronze)"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서 만든 놋은 현대 과학의 산물이지만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만든 청동은 고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이 책에서는 성경에 나온대로 "놋"이라고 하겠다.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육체로서 심판을 받으셨다(빌 2:6-8).
특별히 여기서 나무로 만들어진 번제단과 관련해서 주목할 풀리지 않는 기적 중의 하나는, 밤낮으로 붙여진 불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에도 그것이 변형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죄 없으신 몸을 가지셨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이세상의 죄악과 접하셨을지라도 단 한번도 죄에 굴복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 기적이시다.
한편 번제단은 네 모퉁이 위에 네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출 27:2). 희생제물은 이 뿔들을 이용해서 묶여졌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따로 다른 어떤 것으로 묶여지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끈이 그분을 거기에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뿔은 능력을 상징한다. 번제단의 뿔들은 번제단 위의 희생 제물을 통한 구원과 관련은 갖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이러한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더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번제단의 뿔들은 사방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복음이 세계만방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번제단의 희생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복음 전파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복음이 복된 소식(Good News)인 것과 우리 자신은 그 "소식"을 사방으로 전파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임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복음을 특정 지역에 한정해선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듣기 원하는 세계 곳곳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
번제단의 뿔은 또한, 사람이 박해받을 때나 또는 어떤 이가 자신의 생명을 취하려고 할때에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솔로몬 왕이 아도니야를 죽이려 할 때 그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왕상 1:50) 잡았다고 했다. 또한 요압도 다윗을 떠나 아도니야를 좇고 난 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왕상 2:28) 잡았다고 했다.
번제단이 이렇게 자비를 구하며 도망 온 사람들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죄와 사탄의 사슬로부터 도망 온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멸하셨다. 히 2:14-15은 말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탄을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약 4:7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사탄이 우리를 괴롭힐 때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복시키고, 그 다음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는 사탄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하도록 하시지만, 대환란 기간 중에는 그들을 반드시 내어쫓으실 것이다(계 12:9). 그리고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계 12:11) 저를 이길 것이다.
4. 번제단 위의 불
여기에선 번제단 위에 있던 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 불은 하늘에서 점화되었기 때문에 아주 신성한 것이었다. 성경에서 불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이 번제단의 불은 결코 꺼지게 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다른 곳으로부터 점화된 불이나 인간이 붙인 불은 번제단 위에 올려놓지 못했다.
번제단의 심판의 불을 붙일 수 있었던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던 것처럼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심판하신 분도 하나님 한 분이셨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나 인간이 만든 법이 그 분을 돌아가시게 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생명을 내어주셨던 것이다(요 10:17-18).
이것은 죄에 대한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죄를 정죄한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죄의 나무 가지는 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근원이 되는 죄의 뿌리까지는 뽑을 수 없고 죄에 대한 완전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값대로 징벌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져서 지옥불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심으로써 그릴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에 우리는 요나처럼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라고 고백할 수 있다.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나니"(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나니"(고후 5: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한편 하나님은 번제단의 불을 결코 꺼드려서는 안된다고 특별히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좋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레 6:12-13).
또 불은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여호와에게서 나왔다고 레 9:24은 말한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 따라서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 근원은 사람과는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만든 불이나 또 다른 곳에서 점화시켜온 불을 번제단에 붙이려는 사람에게 징벌이 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려 했으나 그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켜버렸다(레 10:1-3).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엄격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의 행위에 혼합된 구원은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엡 2:8-9). 자신의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삶은 저주의 자리에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상 타락한 인간의 행위는 죄에 대한 대가로 지불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완전한 신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구원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성경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과해야 한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5. 번제단 위의 제물
단지 하나님의 심판의 불만이 세상 죄를 위해 드려진 대속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열납하실 수 있으셨다. 그것은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이나 인간이 만든 것들이 그 번제물에 섞일 수 없었다.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운 불은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는 이것이 특별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지 않으셨음을 그들은 가시적으로 알 수 있었다(창 4:3-5). 그것은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태운신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엘리야가 준비한 번제단에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렸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 18:38).
또 솔로몬왕 시대에 성막의 본을 따라서 지어진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대하 7:1) 가득했다고 했다.
구약 시대의 번제물이 예표하고 있는 진정한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여러번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은 이간의 모습을 입으신 신인(神人)이셨기 때문에 단 한번의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7-18). 즉 이는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드리심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다 충족시켜 드릴 수 있으셨다는 말이다.
히 7:27은 말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아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또 이보다 앞서 히 7:25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라고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구약 시대 제사장은 절대로 앉아서 그의 직무를 수행해서는 안되었다. 성막의 기구 중에 의자는 포함되진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는 구약 시대 제사장의 직무는 단회로 끝날 수 없고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예수님과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고 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그리스도는 구원의 사역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히 1:3이 이야기하는 근거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은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도들에게 약속을 주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는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 믿음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한번 영접하면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 매일매일 다시 번제단을 쌓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영원히 계속되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요 3:16).
한편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적인 안식에 대해서 히 4:9-10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실로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쉬게 하시는 분이시다.
구약 시대 성막에서 번제는 태워서 드려졌고, 그 재는 성막 외부의 깨끗한 장소에 치워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리신 후에 그분의 시신도 어느 누구도 놓여지지 않았던 새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도 재로 변했다.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쉼을 얻는 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였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을 충족시켜 드렸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에 비로서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로서 믿을 때에 이를 분명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롬 5:1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8,9절은 이렇게 계속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8:1은 이렇게 우리에게 사죄의 확신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러한 성경의 약소들을 받아들일 때에 느끼는 평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곧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때에 비로서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요일 1:7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경은 또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제6장
물두멍
1. 물두멍의 목적과 재료
성막뜰에 놓여진 기구들 중에 번제단 다음에 놓여졌던 기구는 '물두멍' 또는 '놋대야'였다. 그것은 제사장이 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물두멍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18-21).
모세는 놋(또는 청동)으로 물두멍을 만들었다고 출애굽기 38:8에서 말하고 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그 당시 거울은 윤이 나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써 모세는 이를 가지고 물두멍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던 것이다.
성막의 기구를 배열하는 순서는 구원의 진행과 아름다운 대응을 이룬다.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한 출발 장소가 된다. 그 곳에서 죄를 위해 번제가 드려지고 그 피에 의해서 인간이 구원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로 믿을 때에 완성된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주의 자리로부터 구원받았다.
구원의 두번째 단계는 성화의 단계로 더 잘 알려진 분리(seperation)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성도의 행함과 관련되어 있고 정결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물두멍과 대응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도의 정결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세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때 이루어진다. 곧 영화의 단계라고도 하는 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다함께 영화롭게 변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15:51-53).
여기서 물두멍은 성화 또는 분리의 단계인 구원의 두 번째 단계를 가리킨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번제단에서였다. 그리고 물두멍은 죄에 대한 속함을 받은 후에도 성도들은 그의 매일 매일의 삶을 정결하게 유지해야함을 교훈한다.
신약성경은 모든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점차 성숙하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촉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자신을 정결케하기 위하여 물두멍 앞에 멈추어 서지 않는자는 결코 성화에로 나아갈 수 없다.
2. 물두멍의 용도
성막뜰에 놓여졌던 물두멍의 용도를 살펴보자.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인 성소로 들어가기 전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을 정결히 했다. 왜냐하면 광야에 세워진 고로 성막뜰에는 항상 먼지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매일 매일 손발의 먼지를 씻는 것은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를 고백함으로 깨끗게 용서함 받는 것을 상징한다.
물두멍은 그릇과 그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릇에 있는 물로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었다. 이것은 성도의 생활과 아름다운 대응을 이룬다. 손은 섬기는 것을 가리키고, 발은 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성막의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었던 것은 곧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렸을지라도 그의 손과 발을 씻지 않으면 어느 제사장도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에 그렇게 하려 했다가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는 자만이 죽기를 면할 수 있었다(출 30:20-21).
구약 시대 제사장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모형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 1:6) 분이라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에게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따라서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은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과 교제하러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는 반드시 매일의 삶 속에서 죄로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히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함을 교훈한다고 불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정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고, 또 진정한 교제도 나눌 수 없다. 이것은 예배의 의식적인 형식을 지키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야만이, 곧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자신을 정결케 한 자만이 비로서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 24:3). 그 다음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하고 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4).
우리는 번제단을 통하여 저주의 자리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물두멍을 통하여 매일 매일의 죄로부터 정결함을 얻는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자신의 손과 발을 규칙적으로 정결히 샜던 것처럼, 우리들도 일상적인 삶에서 오염된 것으로부터 자신을 규칙적으로 정결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번제단은 우리의 의로움을 이야기해 주는 것인 반면, 물두멍은 말씀의 능력을 통한 우리의 성화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죄로 만연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능력에 관해서는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 즉 롬6장은 우리의 이런 분리된 생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기반을 두며, 그 분과 함께 우리자신도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세상과는 분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롬7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삶에서 종종 겪게되는 환란, 즉 영과 육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롬8장은 성령의 소욕을 좇을 때 그 갈등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이러한 구원과 분리의 양면은 둘 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의 경험에서도 나타난다. 즉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았고 그 후 광야에서 분리된 생활을 했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전도 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 전도사업의 결과로 성도가 된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지침이 거의 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아이에게 주어져야 하는 영양분은 그가 자라가면서도 똑같이 공급되어야 한다.
영적인 출생은 매우 중시하면서도, 그 성장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영적인 성숙으로 자라갈 수 있는 적절한 영양분은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런 영적인 고아들을 돌보는 영혼의 고아원됨을 깨달았다. 이처럼 번제단은 구원을 나타내고 물두멍은 성장을 상징하고 있듯이, 구약 시대의 성막에서는 구원과 성장 양면을 모두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을 경배하기 위해서 그 분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죄들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것이 요한일서 1:7-9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한편 성경에서 놋은 종종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세마포장을 받치고 있던 버팀목도 놋으로 마들어졌고, 번제를 드리던 장소였던 번제단 또한 놋으로 입혀졌었다. 마찬가지로 몰두멍 또한 놋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로부터 정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3. 물두멍 안의 물
물두멍 안에 담겨 있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성경은 종종 말씀의 적용을 통해서 오는 정결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성경은 또한 영혼의 새로운 출생은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이야기한다. 즉 성경은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라고 말한다.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벧전 1:23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미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도,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계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말씀하셨다.
즉 성경은 성도들의 성화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엡 5:26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거듭된 성도들이 번한 죄들은 물두멍에서 깨끗케 된다. 이것은 그들의 원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된 후의 일이다. 원죄에 대한 대가는 번제단에서 지불되었고, 그 후에 더럽혀진 것들은 물두멍에서 깨끗케 된다. 다시 말하면 정결케 되는 일은 거듭나기 전이 아니라 거듭난 이후의 일이다.
물두멍은 거울로부터 취해진 윤이 나는 청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그 곳에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기 전 그들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세상과 끊임없이 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되어질 것이 요구된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정결케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그리고 대답한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나이다"(시 11:9).
그렇다면 얼마나 자주 말씀으로 우리를 정결케 해야하는가? 그것은 객관화시켜 한계를 논할 수는 없다. 물두멍에는 항상 물이 채워져 있었고,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소로 들어가기 전에는 언제나 자신의 몸을 아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손은 우리의 섬김을 나타내고 그들의 발은 우리의 행함을 상징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들은 오염으로부터 깨끗케 되어야 할 필요 아래 놓여 있었음을 기억하라.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요일 1:7-9도 그렇고, 잠언 28:13도 그러하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자기의 발이 씻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때 예수께서는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당신께 속하게 될 수 없으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베드로를 깨웠고, 그래서 그는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 사람이 구원받을 때, 동시에 그 영혼은 이미 깨끗하여졌다. 따라서 구원받기 위하여 또다시 그 영혼을 깨끗게 하여 거듭나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 더러움으로부터는 정결하여져야 한다.
각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전 6:19-20은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것을 촉구한다(롬 12:1-2). 그러므로 죄를 범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요일 2:1-2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번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그 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하는 길도 마련하여 두셨으니 말이다.
제7장
성소와 지성소
1. 성막 건물의 구조
성막뜰은 길이 45.6m, 넓이가 22.8m 였던 반면, 그 곳에서 있던 장막으로 된 건물, 곧 성소와 지성소는 단지 길이가 13.5m, 넓이가 4.5m, 높이가 4.5m되는 조그마한 것이었다.
성막의 첫 번째 방은 성소라고 불리는 공간이었다. 그 크기는 길이가 9.1m, 넓이가 4.5m, 높이가 4.5m였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그곳에는 세 종류의 기구가 놓여 있었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순금등잔, 생명의 떡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진설병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향단이 그것이다.
성막 건물의 두 번째 방은 지성소였다. 그 방은 넓이 4.5m, 길이 4.5m, 높이 4.5m되는 정육면체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특별한 예배의 장소로서 언약궤가 놓여져 있던 곳이다.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언약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을 상징한다. 그 기준은 이간 자신의 힘으롯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질 수 있다.
언약궤 위의 속죄소는 대속제물의 흐르는 피에 근거해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의 피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히 10:19-20).
이 건물의 서쪽, 남쪽, 북쪽은 순금으로 덧입혀진 딱딱한 나무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것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건물의 동쪽은 성소로부터 들어올 수 있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을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휘장이 되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도 다른 휘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마 27:51).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께로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상하심으로 우리가 그 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 것이다(히 10:19-20).
성막 건물의 동쪽을 제외한 서쪽, 남쪽, 북쪽의 벽과 지붕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어졌다. 이 벽과 지붕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보혜사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2. 성막 건물의 기초
성막 건물은 은으로 된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이것 역시 각 성도의 생활의 기반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각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라고 말했다.
성막 건물은 광야의 모래 바닥이 아닌 굳은 땅에 터를 잡아야 했다. 출 30:11-16에는 이십세 이상된 남자들로부터 은을 걷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랄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의 생명의 속전이었다. 전쟁이 일어났거나, 봉사의 일이 있을 대, 또는 상속받을 때에는 각 부족의 남자들의 수를 세어 그 수만큼 세금을 내게 했는 데 그 때 내는 돈을 속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내는 돈은 속전이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죄를 속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피 흘림에 의해서 뿐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레 17:11은 말한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22도 말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벧전 1:18-19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구조사 중에 걷은 돈을 어떻게 속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은 출 30:12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나타난다. "네가 그리스도 자손의 수효를 따랄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라는 말을 주의 해 보자. 그 돈은 죄의 저주로부터 속함을 받기 위한 돈이 아니라, 온역으로부터 속함을 받기 위한 돈이었다.
이 속전은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 30:16).
인구 조사를 할 때면 언제나 많은 폐단들이 뒤따랐다. 사람들의 수를 셈으로 그들의 군사력을 스스로 알게 되었고, 이런 경향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힘을 더 의지하도록 하였다.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은 인구조사 할 때에 다윗이 범했던 죄들을 말한다. 그는 적들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사람들의 힘을 의지했다. 다윗의 이러한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위에 온역이 내렸고, 그것으로 인해 칠만 명이 죽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의 수효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뢰했던 기드온의 예도 나온다(삿 7:1-6). 처음에는 삼만이천 명의 백성이 그를 좇아서 싸우러 나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백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기드온은 이 말씀에 순종했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싸운 결과로 미디안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조사시에 속전을 내게하셨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배경들을 제공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끊임없이 그분을 의지하도록 기억시키는 역할을 했다. 속전은 20세 이상의 장정 모두에게서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을 스스로 믿는데서 오는 재앙을 없게 하려 함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단지 속함 받은 백성이며, 이 속함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임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하는 교훈을 준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고, 속함 받는 백성이 되었다(고전 6:20).
이스라엘의 군대는 실제로는 하나님의 군대였다. 왜냐하면 그것을 위해서 그들이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 그분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그분 덕택이기 때문이다.
한편 속전이라 말, 곧"ransom money"는 "구속을 위한 돈(atonement money)"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구속(atonement)"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덮개"라는 뜻이다. 이것을 그리스만이 우리 성도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임"(at-one-ment)이란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덮어두신 것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칭함 받는 죄인인 것이다.
이처럼 인구 조사시에 의무적으로 돈을 내게 한 것은 그 와중에 백성의 수효를 자랑하는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돈은 죄를 저지르기 전이라도 그 죄를 속(贖)하였다. 이 속전은 나중에 모아져서 성막에서 섬기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자원하는 자만이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앞에서 성막은 은으로 기초한 터에 세워졌고,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우리의 구원을 상징한다고 했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구속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우리자신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 터 자아 이제는 권능있고 부요한 존재들이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초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는 말씀이 응하게 된다.
우리의 구원이나 섬김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 잡을 때 뿐이다. 이것들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이라는 터 위에는 기초할 수 없는 것이다.
3. 널판
구약 시대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널판들 또한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고..."(출 26:15)라고 말씀하셨다.
조각목은 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로서 그것은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사 53:2)라고 묘사된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광을 예표하는 금으로 덧입혀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모두 널판에서 상징되고 있다. 즉 조각목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덧입혀졌던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셨으나, "육신이 되어 유리 가운데"(요 1:14) 거하시러 오신 신인(神人)이시다.
널판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성도 개개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가가 사람은 그분 안에 굳건히 서있게 된다. 성막 건물의 널판들도 은으로 된 기초 위에 똑바로 버팀목에 연결되어 서 있었다. 여러 개의 널판들이 모여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었듯이,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하나됨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셨다(요 17:21-23). 엡 1:4-6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특별히 6절의 말씀을 인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 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위에서 성막의 널판들은 은으로 된 터 위에 기초했다고 했다. 이것은 세상에 살지만, 그것에 속하지 않은 성도들을 아름답게 비유한다. 갈 1:4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듯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이다.
또 널판 하나하나는 성도 개개인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 널판도 한때는 볼품 없는 사막의 한 가시나무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하나님의 성막의 한 부분을 이루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는 많은 과정들을 겪어야 했다. 먼저 도끼로 베어지고 그런 다음 건조되는 과정을 지나서 결국에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벗겨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하는 금으로 입혀졌다. 성막의 널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하신 그 분 안에 연합되어 점점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자로 맞추어져 간다.
출 26:26-28에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어 그 널판들을 지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띠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금으로 싸여졌다. 특별히 28절의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라는 말을 주의해 보자. 이 중간 띠에 의해 모든 널판들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성도들을 예표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고전 12:12-14).
또 에베소서는 성도들을 건물로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4. 성막 건물의 덮개
사막의 모래 바람과 가끔 내리는 비 때문에 성막은 이에 견딜만한 적당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호막에 대해서 특별한 지시를 모세에게 내리셨는데 이는 출 26:1-14에 기록되어 있다.
보호막은 네 종류의 덮개로 되어 있었다. 즉 해달 가죽, 수양 가죽, 염소털, 앙장 덮개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각각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1) 해달 가죽의 덮개
성막 건물 가장 바깥쪽의 덮개는 "해달 가죽의 덮개"(출 26:14)였다. 이것은 다른 나머지 세 덮개의 위를 덮는 보호막이었다.
이것은 서구 세계에서 알고 있는 해달과는 다른 것이었고, 중동 지방에도 없는 것이다. 이 동물은 나일 강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바다동물인 돌고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돌고래 가죽은 매우 질겨서 신발과 같은 강한 내구성을 요하는 물건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곤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 지방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부터 성막을 보고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바깥에서 볼 때 단지 이 덮개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사막의 태양과 바람에 의해서 색이 바래지기까지 하였다. 그 덮개만 보고는 성막 내부의 아름다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덮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상징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 분은 사람의 마음을 끌만한 아름다움이 전혀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3).
사람들은 성막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내부로 들어가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성도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만 그 분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셨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요 17:6).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고로, 우리가 증거하는 그분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분을 나타내는 삶들을 살아야 하고 그러므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그분을 알기를 원하는데로 나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으실 것을 시 22:6-7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이사야도 예언했다.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며 우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4).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분의 존재는 모독을 받고, 그 이름은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도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바랄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자. 성막의 "내부"에 들어온 이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들이다.
성막의 덮개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성막의 덮개는 또한 우리의 죄악들을 인하여 상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몸을 상징한다. 죄악된 인간들이 그분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그분의 얼굴에 침뱉었으며, 하나님의 피조물들인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을 때리고, 조롱하였다. 즉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지으신 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수치를 당케 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언된 것들이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내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자들에 의해 행해진 죄악들이다.
2) 수양 가죽의 덮개
첫 번째 덮개 바로 밑에 덮어서 성막의 내부를 보호했던 두 번째 덮개는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출 26:14)으로 만든 것이었다. 보호막 중 두 번째로 덮어진 덮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니 않았지만 성막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모두 네 겹의 덮개가 있었기 때문에 수양 가죽의 덮개는 성막 안에서도 밖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수양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 사용되던 동물이다. 즉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번제물로 바쳐졌다. 신약성경 중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수양과 같은 희생제물로 표현한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그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 주셨기 때문에, 그 분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편 수양 가죽을 덮개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두질하여 진한 빨간색으로 염색해야 했다. 그리고나서 성막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연결하여 한 완전한 덮개로 만들었다.
그 붉은 물 들인 가죽은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이야기는 창 3:21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난 후, 자신과 하와는 벌거벗은 것을 알았다. 그들의 죄가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도록 했던 것이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덮을 수 있는 것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만든 덮개는 인정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를 그들에게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였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결단코 용서하실 수 없으시지만 대신에 그분의 자비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죄를 덮어 주셨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위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짐승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그 동물을 죽여야만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이후에 모든 속죄 제사의 근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조금의 예외도 없다. 인간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되는 짐승을 데려와야 했다.
가인은 이러한 법을 어겼다. 때문에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창 4:3-5). 반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고(창 4:4) 하나님은 그 제사를 열납하셨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수양은 이삭을 대신한 희생 제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 뿐인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 다음의 구절을 주목해 보자. "아브라함의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그 전에 이삭이 "전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어떻게 준비하실지 아브라함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그 땅 이름을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의미의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 속죄제물을 준비하셨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후에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곳이었던 모리아 산에서 있었다. 또 이와 동일한 지역인 갈보리 언덕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수양은 궁극적으로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수양 가죽으로 만든 붉은 물들인 이 덮개는 성막의 내부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진정으로 보호받으며 안식할 수 있다.
3) 염소털로 만든 덮개
수양 가죽의 덮개 바로 밑의 보호막은 옆소털로 만든 것이었다(출 26:7). 성경에서 염소는 종종 죄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 덮개는 성막 내부에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앙장으로 만든 덮개 바로 위에 씌여졌던 것이다.
염소털로 만든 덮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드려지신 대속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네 개의 덮개가 각각 그리스도를 어떻게 상징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도록 하자. 먼저 가장 바깥쪽의 해달 또는 돌고래 가죽으로 만든 덮개는 멸시받으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두 번째 수양가죽의 덮개는 희생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세 번째 염소털로 만든 덮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가장 안쪽의 네 번째 덮개는 왕으로서, 종으로서, 완전한 신인(神人)으로서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네 번째 덮개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다시 본래로 돌아와서 염소털로 만든 덮개를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염소가 대속 제물로 드려졌다. 이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 한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제로 두 마리의 염소가 드려진 방법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한 염소는 죽여서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렸다(레 16:15). 이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나머지 살아있는 한 염소 위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고백한 후 그 염소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광야 먼 곳으로 내보냈다. 이 염소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여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고 죽음의 자리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친히 담당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만일 사탄 자신이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였다고 그 어느 누구가 송사할지라도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사탄은 그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불과 유황 못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계 20:10).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구속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요 1:29; 벧전 3:18).
인류의 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분 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고후 5:21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잔"이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일컫는 것이었는가? 그분은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므로 아마도 그것은 죽음 그자체 보다는 죄의 잔을 말씀하신 것 같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을 기꺼이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요한복음 10:17-18은 말한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하심 안에는 어떠한 죄도 거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의 죄들이 자신 위로 옮기울 것을 아시고는 그 잔을 옮겨 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구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죽음이 옮기워지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 분께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크게 소리 지르셨던 이유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보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당신의 외아들이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자신의 등을 돌리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분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그렇게 괴로워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어두움을 내리셨다.
속죄일에 한 마리의 염소가 속죄제로 바쳐졌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들의 죄의 대가를 속하셨다. 그리고 살아있는 염소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멀리 보내졌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그것을 영원히 먼 곳으로 보내어 버리셨다.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십자가 상에서 마치셨을 때, 세상은 다시 밝아졌고, 성전 휘장은 둘로 찢어졌다(히 10:19-20).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나오는 자는 누구나 그분을 뵈러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이러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을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대속주(代贖主)로 영접하는 사람들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속한 분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거하게 되고 심판 아래 머물게 된다.
고백과 회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해주신 바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잠 28:13은 말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4) 앙장으로 만든 덮개
가장 내부에 씌워졌던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앙장"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위는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 놓아졌다.
성막이 건립되면 이것이 제일 먼저 성막의 건물을 덮었고, 그 위에 다른 덮개들이 차례차례 씌워졌다. 그리고 성막 내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앙장으로 만든 덮개뿐이었다. 바깥쪽에 있던 덮개들은 볼품없는 것들이었지만 가장 내부의 이 덮개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성막의 내부로 들어온 사람만이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앙장은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어졌다. 이 앙장은 모든 영광 가운데 계시고 완전한 공의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먼저 흰색은 죄 없으시고 공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신성을 상징하는 청색은 그리스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또 홍색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이 죽으심을 나타낸다. 청색과 홍색을 혼합한 자색은 그분의 왕권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앙장에는 펼쳐진 날개를 가진 그룹의 모양이 베실로 수놓아졌다. 그것들은 마치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제사장들 위에서 항상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경에서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그룹은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성막 안의 거룩성을 보호하는 자로 나타난다. 동시에 그 거룩한 성막 안에 있는 사람의 거룩도 보호한다. 그룹은 창세기 3:24에서 처음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을 두셔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룹은 인간의 죄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되는 것을 지키는 역학을 하는 천사라고 할 수 있다.
제사장들이 성소 암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천장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룹을 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항상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보시고, 보호하시고 계시다는 사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시편 기자는 당신의 백성을 항상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깨달은 후,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시 33:18-19).
성막 밖에 있는 세상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이런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자연인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4; 고후 3:3-4). 단지 거듭난 사람의 영혼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의 최대의 열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많이 아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하여 이전에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다(빌 3:7-9).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바울의 열망은 빌 3:10에 간절히 나타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으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 될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뵈었을 때 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단지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즉, 번제단 앞에 멈추어 서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가 성소 내부로 들어가서 다른 것(진설병상, 향단, 순금등장)을 접하면 접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보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제8장
성소로 들어가는 문
1. 문과 휘장의 차이
성소의 문과 지성소의 휘장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둘 다 커튼 같이 쳐 있는 것이었지만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성소에 쳐있는 커튼은 "문'이라 부르고 지성소에 쳐 있는 커튼은 "휘장"이라 부르기로 하자.
제사장은 성막 출입문을 통하여 성막뜰로 들어온 후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 씻음을 위하여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치 후 "문"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소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인 지성소로 나가는 것도 "휘장"을 통해서였다.
먼저 성소로 들어가는 문에는 그룹들이 수 놓아져 있지 않았지만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는 그룹들이 수 놓아져 있었다. 우리가 이미 제7장의 성막의 덮개 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보호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성소로 향하는 문은 사람의 들어오고 나감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은 사람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쳐놓은 것이었다.
또 문은 놋으로 된 기초 위에 다서 개의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커튼을 쳐 놓은 것이었다. 반면 휘장은 은으로 된 기초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커튼을 쳐놓은 것이었다.
이 모든 비교들을 통하여 문과 휘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뚜렷해진다. 즉 성소의 문은 제사장들이 매일 매일의 직무를 위해 출입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성소의 휘장은 대제사장들이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1년에 단 한번 들어가는 것 외에 어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성막 건물의 동쪽 끝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후 에덴동산의 동편을 지켰던 그룹을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창 3:24).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막에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성막의 번제단에서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사람이 당신과 교제하는 문으로 다시 나올 수 있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이 둘로 찢기워지기까지는(마 27:51; 히 10:19-20)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하늘의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2. 성소 문의 재료
성소의 문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재료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성막(성소)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출 26:36)라고 지시하셨다. 세 가지 색깔을 실로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만든 성소문은 성막 외부에서 성막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성막뜰의 문과 유사하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는 정해진 하나의 문을 통하여 들어와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그 하나의 문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색깔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청색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홍색은 희생을, 자색은 왕권을 각각 상징한다. 그 분을 위하여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었는데(출 26:37),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신인(神人)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성막들에서 보기에는 성소로 가는 문이 항상 닫혀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성소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은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 성막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단지 제사장만이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금 성막에서 예배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기 때문에 하늘성소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자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성소의 문에는 그룹이 수 놓아져 있지 않았다.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호하슨 것이었는데 그것이 수 놓아져 있지 않은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했다. 예수께서는 '나는 문이라"(요 10:7-9)라고 말씀하셨다. 즉 목자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목자되심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요 10:4). 또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심으로 구분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언급하셨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들은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특권을 가르쳐준다. 첫째는 우리가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 나가기 위한 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께서는 항상 우리의 앞서 행하시는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아울러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성소 문의 기둥
성소의 문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문장을 위하여 기둥 다서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지며 또 그 기둥을 위하여 받침 다서을 놋으로 부어 만들지니라"(출 26:27)라고 지시하셨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각목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키고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다. 조각목을 금으로 입혔다는 것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금을 입힌 조각목 문기둥은 그리스도가 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지탱하는 기둥이 도어 주신 것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려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주신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려 나아갈 수 있는 문이 되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받은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친히 그 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주셨던 것이다.
한편 성소의 문은 놋으로 된 기초 위에 세워졌다(출 26:37).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따라서 성소문이 놋 위에 세워진 것은 우리죄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기둥이 있어야 성소 문의 커튼이 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완전히 다 담당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성소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생겨난 것이다. 실로 인간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상하심과 죽으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문으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것들을 두고 하신 것이다.
제9장
진설병상
1. 상(床)과 떡
진설병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자.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정금으로 싸고 주의에 금테를 두르고..."(출 25:23-24).
이미 살펴본대로 조각목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정금으로 싸여졌다. 나무와 금의 만남은 그리스도의 신인(神人)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지라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지 않으셨다. 성경은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고 말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진설병상에 대해서 모세에게 지시하실 때에 "상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출 25:3)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상 위에 놓인 이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아름다운 상징이다. 떡은 으깨어지는 과정을 거친 고운 분말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 이 세상에서 받으셨던 고난을 나타낸다.
떡은 또한 뜨거운 열에 노출되어 구워져야 한다. 이것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에게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떡에는 효모(yeast)를 넣지 않았다. 성경에서 효모는 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효모를 넣지 않은 떡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떡은 밀을 베어 내어 그것을 으깨어 분말로 만든 후, 뜨거운 오븐에 굽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은 죽음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을 거친 산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과 갈보리 언덕에서의 타오르는 고통을 경험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모든 고난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길이었음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피방울 같이 흘리신 그리스도의 땀과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을 우리가 진정으로 알게된다면, 예배의 형식만 갖춘 빈 껍데기 신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겪으신 것들을 깊이 깨닫게 될대 우리는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12:1-2은 모든 성도들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떡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고, 그 준비하심은 특히 영혼의 양식을 상징하는 진설병상에서 두드러진다.
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출애굽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민족은 어린양의 피로 장자 재앙시 심판으로부터 구원되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에서 애굽 민족과 구별되었다.
성경에서 애굽은 종종 세상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역시 세상에 거하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필연코 애굽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메마른 광야를 행진해 나갔는데 단지 하나님의 권능만이 그 행진을 가능케 했다. 광야는 그들이 영원히 거주할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은 단지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지 위해 거쳐야 할 장소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을 통과하여 지나가야 하는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 삶을 예표한다.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준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9-10). 구약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행하실 것을 믿음으로 내다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전까지는 믿음으로 드리는 동물 희생 제물의 피의 번제를 받으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히 11:13에서 계속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우리 각자는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항상 반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태도는 딛 2:11-13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따라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갈 1:4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구속사역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예수께서는 죄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주장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거기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이 세상에서 비록 우리가 많은 고난을 겪게 될지라도 그 때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따라서 성막 안에 예비되어 있는 진설병상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광야 생활을 도우셨는지를 계속적으로 기억하게 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영혼의 양식을 준비하고 공급하셨으며 그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광야 생활을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이시라. 즉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10:10) 태초부터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던 생명의 떡이시다. 그리고 성육신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이 되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섭취함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 말씀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영적인 성장을 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특히 성경 중 가장 긴 장으로 이루어진 시편 119편에서 기자는 신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비중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며 이야기한다. 이 웅장한 시편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다"(시 119:9).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재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시 119:30).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104). 이 모든 말씀은 우리들이 세상을 사라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말씀의 떡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교훈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떡
성소 안의 상 위에 놓여진 떡은 매일 매일의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했던 제사장들의 식량으로 주어졌다. 그것은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하늘로부터 내렸던 만나보다도 더 참 떡이 되셨던 자신을 보이시면서 예수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같은 맥락 안에서 주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 6: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51).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말씀의 중요성은 요 6:63절에서 잘 나타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또 당신의 살을 먹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적인 육체의 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말씀하셨던 것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력 있게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도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한다. 성도들의 양식은 살아있는 말씀(예수 그리스도)과 기록된 말씀(성경)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한편 성막의 떡은 규칙적으로 새것으로 갈아 놓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할 필요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받았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가 이전에 하루 섭취했던 영양분을 가지고 그 다음 날까지 견딜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어제 아무리 말씀을 공부하는 데에 전념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오늘을 살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자라가고 그 지식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을 완전함에 도달한 자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라고 말한다.
매일 매일 신선하게 말씀을 섭취해야 할 필요성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때 매일 매일 섭취했던 만나에서 가장 잘 보여진다. 예수께서도 구약 시대의 만나를 먹는 것에서 그분의 말씀을 섭취하는 것을 비유하셨다(요 6장).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서 만나를 내리실 때 모세에게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출 16:7)라고 말씀하셨다. 만나는 아침에 하늘로부터 내렸고, 아침에 거두어 들여야 했다. 저자에게는 이것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할 필요에 관한 아름다운 상징으로 다가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에 대해서 이렇게 지시하셨다.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출 16:16). 각 사람은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 거두어야 했다.
필요한 정도 이상을 거두어들인 만나를 다음날 아침까지 보관할 때에는 그것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출 16:20). 여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내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날 그날의 양식을 섭취해야 한다. 오늘의 영양을 어제 섭취한 양식에 의존해서도 안되며, 내일 먹을 양식을 오늘 한꺼번에 섭취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4. 떡을 먹는 자의 자세
성막의 성소 안에는 의자가 놓여 있지 않았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선 챌 떡을 먹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출받은 날 밤에 유월절 어린양과 발효시키지 않은 누룩없는 떡을 먹었던 방식을 기억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언제라도 신속히 애굽을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라도 응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분의 즉각적인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섭취하고 그것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그렇게할 때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신 말씀을 체험하게 된다.
당신은 생명의 떡이니 그리스도를 섭취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분께 헌신되어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을 때 우리가 그분을 더욱 많이 알려는 열정보다 한낱 종교적 모임이나 조그마한 교리문제에 대한 논쟁에 빠져 있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 것인가.
열두살 밖에 안되셨던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보라. 마리아와 요셉이 유월절을 맞아 전례대로 예루살렘에 어린 예수와 함께 올라갔다가 절기를 마치고 집으로 출발하였다.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중에 어린 예수가 없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 돌아왔더니 예수는 성전에서 율법 선생들과 함께 앉아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고 계셨다. 마리아는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이 어린 예수처럼 성도인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이 되신다(요 6:35).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섭취해야 한다. 이에 관한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여호수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성도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말씀이 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매일 매일 말씀의 양식을 섭취하여 우리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한 섬김의 제사로 드리기를 힘쓰자.
제10장
순금등대
1. 등대의 구조
등대를 만들도록 명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다.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출 25:31-32).
좀더 세부적인 사항을 말씀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37-40)라고 명하셨다.
등대가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39절)을 주목해 보자. 한 달란트는 90파운드(약34kg)보다도 좀더 무거운 무게이다. 그것은 금을 측정하는 단위로 한산하면 약 1500온스 또는 약1370트로이 온스이다. 한 온스당 금의 가격을 고려하여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해 보라.
등대는 주형에 떠서 주조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큰 금덩이를 망치로 두들겨서 제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등대는 하나의 금덩어리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말씀하신 후에 내리신 그분의 마지막 지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40절).
등대는 또한 촛대로도 일컬어지지만, 그것은 오늘날 보통 생각되는 촛대와는 구별된 것이었다. 초가 등대처럼 동일하게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순금 등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빛은 등대에 특별히 마련된 금그릇에 있는 기름이 타면서 비추어졌다. 성경에서 기름은 종종 성령을 상징한다. 이것은 성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성막에 관한 모든 조명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등대에 관한 예표론
등대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등대의 줄기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여섯 개의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세상에 빛을 발하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 해석이 타당하게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예를 들어 등대는 나무로 이루어져 있진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다른곳에서 살펴보았듯이 금으로 입혀진 나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대는 순수한 금으로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예표한다.
따라서 여기서 등대는 화목의 장소인 성소 안에서 모든 것을 밝히 비취듯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후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는 지성소 안의 속죄소 역시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한편 성소 안의 등대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게 되었는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어떠한 자연의 빛도 그 안을 비추지 못했다. 오직 등대의 불빛만이 성소안을 비추었다. 그러므로 이 순금등대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소에서 섬길 수 있는 성소 내부를 비추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항하고 있는 것이다. 또 등잔 안에 담겨진 기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서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성소 안에 자연의 빛이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 세상을 연상하게 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 이니라"(고전 2:14).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칙칙한 동물 가족의 덮개밖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배부로 들어간 사람들은 순금등대의 불빛에 비춰진 성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적인 그의 나라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경험 할 수 있다. 불신자들은 그분을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소유한 한 위대한 스승으로는 평가할 수 있을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성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내부'에 들어감으로써 성도가 얻을 수 있는 타오르는 열정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평가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세상에 관한 각종 세속 철학과 이론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무조건 파괴를 주창하는 혁명과 같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외부적 견해에서 보면 이런 결론들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또한 등대가 세상의 빛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예표한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하신 말씀은 참된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필연적으로 성소안에 있는 순금등대가 성도의 모형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순금등대가 세상의 빛된 성도의 모형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성막의 외부로 나와서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었어야 한다. 그러나 등대는 항상 성막의 내부에 있었고 그래서 세상은 그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만약에 등대가 그리스도와 교회-그 분과 연합하여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한다는 의미에서-를 상징한 것이라면, 그 순금 안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나무가 들어있어야 한다. 또한 성막의 외부를 비출 수 있도록 위치하고 있었어야 한다.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와 식양들은 각각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성소 안의 순금등대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비록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들만이 그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인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을 예표하는 사람들이었다.
3. 등대가 발하는 빛
순금등대에서 나오는 빛은 진설병상을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향단 가지도 비추어 주었다. 또한 성소 전체에까지 빛을 발하였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그 장소가 상징하는 바대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 빛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에 수놓아진 그룹들을 비추어 주었다. 사실상 대제사장들만이, 그것도 일년에 단 한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휘장의 그룹이 대신 상징적으로 지성소 안에 게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휘장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했다.
순금 등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하는 진설병상을 비추었고, 기도의 처소를 가리키는 향단에도 빛을 발하였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를 예표하는 지성소의 휘장에 수 놓아진 그룹에도 빛을 비추었다.
이처럼 성소 안을 두루 비추는 등대의 빛은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빛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거니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 1:5-7).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 장소인 성막에서의 등대 불빛은, 성령님을 통하여 어두운 곳을 비추셔서 교제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처소에서 고백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그 빛이 진설병상과 향단을 비출 때에 알게된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빛이 되며, 안전하게 인도하는 목자가 된다. 또한 우리의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생활은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으로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해 보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요 9:5).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을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도리라"(요 12:35-36).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장사되신 후 다시 하나님과 함께 성소에 거하시기 위해 부활,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거하셨던 것처럼 더 이상 육신으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던 휘장이 둘로 찢어졌기 때문에 이로써 모든 성도는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우리가 빛 가운데로 행할 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처럼 우리서로도 사귐이 있고,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5).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영적인 어두움에 거하고 있으나, 구주로 믿는 자들은 영혼의 빛 가운데에 행하게 된다.
등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어두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지금 우리는 비록 실재(實在)하는 성막에는 나아갈 수 있고, 또 빛 가운데로 행할 수 있다.
4. 등대와 성령
등대를 이루고 있는 구조물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덩이로 연하게 하고"(출 25:31).
등대는 여러 개의 조각들이 한데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순금 한덩어리를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것이었다. 각 줄기의 꼭대기에는 기름을 쏟아 넣을 수 있는 잔이 있었다. 그 줄기는 모두 일곱 개였기 때문에 빛을 낼 수 있는 그릇도 일곱 개였다.
순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을지라도, 일곱 줄기는 이땅에 계실때에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이미 그리스도와 일곱 영의 오심에 관해서 예언한 바 있다. 등대의 일곱 줄기가 상징하는 바는 사 11:1-2를 읽음으로써 명확해 진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량과 재능의 신이요 지시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니라."
계 1:4 또한 일곱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성막 안에 있던 등대의 일곱 줄기와 하나님의 일곱 영과의 연관성을 계 4:5에서도 볼 수 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줄기는 어두운 세상의 서도들에게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시에 상징하는 등대를 살펴볼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롬 8:9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즉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 예수께서는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3-15)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대해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여기에서 깨닫게 되니다.
베드로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도한 성막의 등대를 이루고 있는 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그 일곱 줄기는 그분이 부여받으신 일곱 영을 상징한다. 이 사실은 계 3:1에서 보여진다. 즉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순금 일곱 등대의 일곱 줄기와 성령에 관해 언급한 사 11:2을 비교해 보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사 11:1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배경이 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쌍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리고 이어 2절에서는 성령의 일곱 가지 특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사야 11장 전체는 특별히 세상 끝날 완전히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 왕국이 아직 완전히 도래치 않은 신약 시대인 현재는 눈에 띄지 않는 영적인 메시야 왕국이 존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며(히 10:21).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벧전 2:9)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사귈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일곱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며,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바 되었다(엡 2:6). 여기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육체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적인 특권을 가리키는 것이다.
5. 등대의 일곱 가지와 성령
사 11:2에선 성령의 일곱 가지 다른 면들이 나타나 있다. 이는 등대의 일곱 가지와 상응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첫 번째, 성령은 "여호와의 신"으로 일컬어졌다. 이사야 11:2이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니"(영어성경 NASB를 직역한 것임. 개역성경은 다른 순서로 번역되어 있음-역자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등대의 가운데 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마주보고 있는 한쌍의 가지는 이사야 11:2에 나오는 성령의 일곱 특성 중 두 번째 부분이다. "지혜와 총명의 신", 지혜는 지식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총명은 성령의 사역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등대의 그 다음 마주 보고 있는 줄기는 이사야 11:2의 다음 부분을 계속해서 나타낸다. "모략과 재능의 신", 사 9:6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일컫는 이름의 하나로 "모사"를 들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부분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시키려고 할 때 우리를 모략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또한 엡 6:10이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신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이처럼 모든 성도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하여질 수 있다.
순금등대의 세 번째 마주 보고 있는 가지는 성령의 일곱 특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이사야 11:2의 마지막 부분, 즉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과 대응을 이룬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요 16:15)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의 가슴 깊이 타오르는 열정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자라가는 일이었다(빌 3:10).
또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권능에 과한 새로운 이해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욥은 이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하나님을 알아감에 따라 우리는 그분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운 감정이나 느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공경심을 포함하는 경외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사 11:2).
한편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으로 그분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에 일곱명이 함께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 사도 요한은 이때를 내다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음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여기서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6. 등대의 일곱 가지 자체이 상징적 의미
순금등대의 일곱 가지는 그 자체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등대가 금을 망치질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출 25:31), 지금은 하늘에 오르셔서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받으신 고난을 상징한다. 금덩어리는 의도된 모양으로 갖추어지기 위해서 망치로 두들겨졌다. 녹여져서 본을 뜨기 위한 주형에 부어진 것이 아니라. 딱딱한 금덩어리를 쪼아나갔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참혹히 못박히셔야 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당신의 뜻한바 대로 빚으시기 위해 단련하시는 분으로 종종 묘사된다.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고백했다. 사도 베드로도 말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둘째로 순금등대는 성소의 외부에 있지 않았고, 내부에 놓여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향하여는 숨기워 계시며, 하나님의 제사장적인 가족을 이루는 성도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바깥에 서 있는 세상은 그분을 위대한 스승 내지는 위대한 사람 정도로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는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열정을 가지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과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이같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단지 성령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순금등잔이 발하는 빛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알게하는 성령님을 생각하게 한다. 그분의 귀중함은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만 비로소 알 수 있게된다. 성막의 외부에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 빛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우리는 푯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4).
셋째로 순금등대 위에는 기름을 담아 놓은 일곱 개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충만을 연상하게 한다. 이사야 11:2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임을 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이스라엘 역사 중 순금등대가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시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 만족은 어두움을 상징하는 광야에 있었는데, 그 광야는 그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과 대조를 이루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순금 등대는 광야같은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영적 필요에 넘치도록 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즉 우리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모르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들이 보이실 것이다.
한편 성경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과 대조하여, 성도들을 빛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명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1-6).
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거하는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에 대해 시편 32:8은 이야기한다. "내가 너의 갈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다섯째로 일곱 개의 등을 받치고 있는 일곱 가지는 성령이 사람과 함께 거하심을 나타낸다. 성소 안에 거하시는 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 안에도 성령께서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각 성도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정이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5)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지금 각 성도 안에서 행하고 계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갈 수 있는 것은 영화로운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고 있는 성령님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알도록 하여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일하신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신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고, 또한 그것을 누리게 한다.
여섯째로 순금등대는 진설병상의 맞은 편에 위치하여 그 상에 빛을 비추었다. 그러므로써 제사장들은 어두움 가운데에서 떡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마찬가지로 각 성도는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에서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된다.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각 성도에게 비취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알아가는 데에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실 때에, 그 말씀은 분명 살아서 우리에게 확실한 교훈을 준다. 이에 대해 히 4:12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말씀을 조명하는 일은 성령 외에는 불가능하며, 만약 성령께서 가르치지 않으신다며, 거기는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할 것이다. 단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써만이 성도는 그를 지탱해 주는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게된다. 성령으로써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영양분과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곱째로 등대가 비추는 빛은 또한 금으로 된 향단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이곳을 비취어 주는 빛이 없이는 제사장들은 기도의 제단을 태워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금단(金壇)은 예배와 간구 그리고 기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어느 누구도 찬양드릴 수 없고, 예배 드릴 수 없다. 신약성경은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오늘날 성도들이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고 있는 것은 모두 성령안에서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성도는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심지어는 어떻게 지도 받으며 기도해야 할지도 가르치시는 성령에 의해서 할 수 있다.
필자는 개인기도 시간엘 종종 이렇게 기도하곤 한다. "하나님,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할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문제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성취되지 못한다면 저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이와 같이 간구하면 성령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보이시고 우리의 요구에 분명히 응답하실 것을 믿는다.
제11장
향단
1. 향단의 구조와 위치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대로 성소 안에는 진설병상과 순금등대도 같이 놓여 있었다. 이젠 우리의 관심을 향단에로 집중시켜 보자. 이 단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의 바로 앞쪽인 성소의 서쪽에 놓여졌다.
이 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출 30:1)라고 명하시고 계속하여,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출 30:6-9)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정금으로 입혀졌다. 정금으로 입혀진 나무로 만든 다른 기구에서처럼 향단도 인성과 신성을 갖고 계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향단의 위치는 성소의 중심이었다. 즉 속죄소와 언약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잇는 휘장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장소로서 그 안에 있는 것 외에는 향단이 그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할 때보다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는 때도 없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2. 향단과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향은 분향단 위에서 끊이지 않고 피워져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끊이지 않고 계속됨을 예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사도 요한도 또한 성도를 위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가"(요일 2:1). 그렇다면 과연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막뜰에 놓여있던 번제단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라면, 성소 휘장 가까운 곳에 놓여진 향단은 지금도 하늘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다. 구속과 화해는 번제단에서 이루어졌고, 속죄를 위한 간구함은 향단에서 행하여진다. 그러므로 향단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막에서, 번제단으로부터 향단까지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구원의 그림이 된다. 그분의 죽으심은 번제단에서 상징되며, 우리의 생명과 중보가 되시기 위한 그분의 부활하심은 향단에서 상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생각해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영적인 축복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이것이 바울이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고 말한 근거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정죄보다 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즉 그분은 이상적인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고 말씀하신 이유가 된다.
3. 향단과 성도의 기도생활
향단은 또한 우리의 기도생활에 관하여도 이야기한다. 향단에는 계속적으로 불이 피워져 있었어야 했지만, 불을 피워 향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루 중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특별한 기도 시간을 정해두고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말한다. "쉬지말고"라고 번역된 말의 본래 단어는 신약 시대에 계속적으로 기침하는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사용되던 단어이다. 그의 기침이, 계속되는 한 번의 긴 기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한번의 긴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속적으로 자주 간격을 두고 기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전심전력을 해야 할 특별한 시기도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의 육체는 안식할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루 24시간 내내 기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때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실 수 있다.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강도만큼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리도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야 할 책임을 맡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까지 그들을 다스려줄 왕을 원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사무엘에게 요청했을 때,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겼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죄가 된다는 원칙을 나타낸다.
사도 바울도 중보기도를 매우 중요시했음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그의 말에서 나타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딤전 2:1-4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삶들을 위해서 하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2절).
성경에 나오는 중보기도 중 가장 괄목한 것 중의 하나는 출 32:10-14에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10절)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고하고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그는 뜨겁게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셨다.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보내는 시간의 중요성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눅 10:38-42). 예수께서 그들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 장만에 바빴다(40절).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르다가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돕도록 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했을 때, 주심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조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 42절).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지금 그분은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게시지 않지만, 우리는 기도로 그분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사악한 소돔성을 멸하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해 간청했다(창 18:23-33). 그는 의인 오십인을 인해서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했고(24절), 하나님께서는 그러겠노라고 동의하셨다. 그 도시에는 그만한 숫자의 의인이 없음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인 사십오인으로도 용서를 주시기를 간청했다(28절).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러마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간구는 열명의 의인으로 인해서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32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리라고 하셨으나, 역사는 그 도시에 단 열명의 의인도 살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른 이들을 위해 신실하게 중보하는 자의 모본이 되었다.
성도가 행하는 일 중 가장 고상한 직무는 중보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보다는 우리의 경배를 더욱 기뻐하시기 때문에, 섬김보다는 기도를 더 기꺼이 받으신다. 섬김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의 관계 안에서만 열납하신다. 섬김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영적인 전투는 섬김의 시간보다는 기도의 시간에 승리로 이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데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기회를 찾기에 다른 사람보다 열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축복된 특권이며 가장 위대한 책임이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지고, 이것은 심지어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직무이다. 아무리 좋은 설교도 그 자체만으로는 영들을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바로 기도이다.
향단은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나타냄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에로 나아가도록 교훈한다. 속죄의 장소인 번제단은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며, 기도의 장소인 향단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보호하심을 입는 사실을 상징한다. 우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중보기도에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특별히 오랜 세월동안 주님과 함께 동거해온 한 아주머니를 생각한다. 그녀는 15년동안 거의 침대에서만 생활하다시피 했으나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님께선 그녀를 중보기도의 도구로 사영하여 일하고 계심을 확연히 느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와 같은(출 17:8-16) 역사적인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의 맞아 골짜기에서 싸웠으며,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이를 위해 기도했다. 아론과 홀의 도움으로 모세는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고, 그 기도는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무릎을 꿇는 중보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 않는다.
제12장
지성소의 기구들
1. 지성소와 속죄일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해 계신 곳으로 상징된 장소였다. 성막에 마련된 이 특별한 방에는 언약궤와 속죄소가 있었다. 언약궤는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며,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는 그의 백성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맨처음 접하게 되는 속죄소는 아무리 죄인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통해서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낸다. 즉 죄인이 속죄제물의 피에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통해서 성막 안으로 들어온 후에 그가 가지고 온 피를 속죄소에 뿌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을 충족시키고, 화해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롬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고아이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또 계속되는 구절은 이러한 인간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만족히 여기셨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4-26절).
또 매 속죄일마다 피가 뿌려졌던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죄의 대가로 인간의 피를 받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으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의 기준을 채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베푸실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진 않으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분의 공의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족되지 안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우리의 대속자이며 중보자이시다.
한편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휘장으로 막혀져 있었다. 이 중후한 휘장은 매 년마다 한번 있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대제사장도 희생제물의 피를 포항해서 규정된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외의 사람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는 죽임을 다하였다. 또한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일년 중 다른 때 또는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는 죽임을 당하였다.
성막에 있던 다른 두 휘장 즉 성막뜰로 들어오는 입구와 성소로 들어오는 입구에 쳐진 휘장은 초대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속죄의 장소로 나와서 화목의 장소로 들어가도록 초대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휘장은 그리스도의 초청을 생각하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러나 이 두 휘장과는 대조적으로 지성소에 쳐져있던 휘장은 제사장들에게조차 닫혀져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이전 구약 시대에는 임의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죄인들의 심판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는 법을 궤 안에 가지고 있었던 지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셨던 곳이었다.
2. 언약궤
언약궤에 관해서는 출 25:10-16에 기록되어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는 순금을 입힌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셨다(10, 11절).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히 그분의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심을 상징하는 기구였다. 그것은 성막 전체에서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기구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하고 계신 보좌의 상징이었다. 사실상 성막은 언약궤가 놓일 곳을 마련코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하고 계신 보좌였다. 사실상 성막은 언약궤가 놓일 곳을 마련코자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여 계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그들 주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8절)라고 지시하신 후, 가장 처음 말씀하신 기구가 바로 언약궤였었다. 이는 언약궤가 성막의 가장 중심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형이 된다. 그리고 언약궤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던 분이시다(요 1:14).
언약궤는 안 쪽, 바깥 쪽 모두가 금을 입힌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두 속성 즉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그러나 언약궤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향하고 있는 다른 기구들과 구별된다.
즉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물두멍은 말씀을 통해서 깨끗게 하시는 그분의 사역을 가리키며, 진설병상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또한 순금등대는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향단은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나 언약궤는 그리스도 자신 곧 그분의 사역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를 상징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때 그분의 행하신 것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그것들의 지정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강조점이 그리스도 자신보다는 오히려 그가 행하신 사역들 위에 놓여진다. 그분의 행하심에 대해서 살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내가 그리스도와...알려하여"(빌 3:10)라고 고백했던 이유이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알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알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살핌으로써 그분 자신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성소의 언약궤가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반면, 속죄소는 그분의 행하심을 드러내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3. 언약궤 안의 내용물
언약궤 안에 놓여 있었던 것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것들을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또한 약속이 되신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의로움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성도의 의(義)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그들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보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화평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성도의 화평이 되신다. 생명의 떡을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신다.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혜가 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들은 그리스도 자신과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깨어지지 않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거두어 들여서 하루 이상 보관했을 때에는 벌레가 생기고 부패하던 만나를,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셔서 언약궤 안에 보관할 수 있게 하셨다. 출 16:34은 만나를 보관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히 9:4은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는 금항아리"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만나는 광야생활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던 양식이었으므로,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지속시켜 주는 예수그리스도를 내다보는 상징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사역을 드러내는 표시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실 때에 주님은 광야생활 때에 하늘로부터 내렸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여 말씀하셨다.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모두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떡을 떼는 사람들은 영생을 누린다. 그러므로 언약궤 안에 놓여있던 만나는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시키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 되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는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6장에서는 만나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떼어 먹는 말씀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만나는 다지 육신의 생명만 유지시켜 주었던 반면,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요 6:58, 63).
한편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놓여 있었다.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 지팡이는 하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시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민수기 17장에는 아론의 권위가 문제시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팡이에 싹이 돋아나게 하심으로 그분이 아론과 그의 자손들 위에 축복을 내리시는 증거를 나타내신 사건이 나와 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때의 아론의 지팡이가 언약궤 안에 보관된 것이다.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던 또 다른 것은 십계명 판이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처음 받았던 십계명 돌판은 우상 숭배하는 백성들을 보았을 때 깨뜨려졌다(출 32:19).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십계명판을 주시면서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신 10:2)고 말씀하셨다.
깨어진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의 법을 게속하여 거스리는 인간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이 나타내고 있는 바대로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라고 말한다.
두 번째 돌판은, 사라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키시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주(主)이시며 왕이시다. 그리고 그 돌판은 왕으로서 권위를 행사하실 때 사용하실 공의의 법을 가리킨다.
세 번째 돌판은 죄를 범한 인간들 가운데에서도 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기준이 그 돌판을 통하여 제시되었고, 기 기준들을 절대적인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언약궤 안에 놓여져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기준들을 잊지 않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또한 그 돌판이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안에 놓여졌다는 사실은 그 기준들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하나님의 기준을 맞추려는 이간의 시도는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낮추어 적용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2:10은 말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완전하신 기준을 드러내며 오직 완전 무결하신 그리스도만이 이 거룩한 기준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히 12:14은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전가받아 거룩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여받게 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4. 속죄소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의 맨 위는 속죄소(시은좌)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모세에게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출 25:17)라고 지시하셨다. 그것의 크기에 대해 말씀하신 후 그분께서는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출 25:18)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계속해서 이렇게 지시하셨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1, 22절).
속죄소는 일차적으로 죄인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나아가 속죄소는 언약궤 위에 놓여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율법이 들어 있는 그 궤를 친히 덮으시고, 자비를 나타내심을 보여준다. 즉 육법을 어기는 인간의 커다른 죄악을 덮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속죄소에 뿌려지는 대속제물의 피를 통해서는 누구에게든지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 돌아오는 속죄일에 속죄소에 대속 제물의 피를 뿌리어 지성소로 들어갔고, 그러므로써 해마다 사람들의 지은 죄들이 덮여졌다. 이것에 대해서 신약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않으사..."(히 10:3, 4, 히 10:12).
흘려서 뿌려진 피는 하나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 하실 수 있게 하였다. 피 뿌림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애굽에서 구원될 당시 유월절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이 유월절 사건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12장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사람들만이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성경은 말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하신 공의와 절대적인 은혜에 근거해서만 죄인들을 만날 수 있으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속성은 만날 수 있는 특정 지점을 필요로 했다. 그 장소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십자가였다. 구약 시대의 속죄제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제물은 단지 일시적으로만 죄들을 덮는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영원히 죄를 담당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자신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인류에게 가져오게 하기 위한 중보가 되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죄소가 되어 주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위한 길은 단 하나이며 그밖의 다른 길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반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속죄소는 단단한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속죄소는 그것 자체로는 독립된 하나의 기구이면서 동시에 언약궤의 뚜껑을 이루고 있었다. 또 속죄소는 나무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고 순전히 금으로만 만들어졌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를 나타낸다. 또 이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러 오시기 이전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분이 성육신 하시기 이전 상태에 대해서 요 1:1-2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여기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 1:14에서 분명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속죄소 양 끝에는 금으로 쳐서 만든 그룹 둘이 있었다. 이 그룹들은 날개를 넓게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다. 그 그룹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속죄소에 계실 때에 흠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거룩을 보호해 드렸다.
5. 속죄소의 영적 의미
속죄소가 상징하는 의미는 롬 3:25에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바울은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곳에서 "화목제물(propitiation)"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히 9:5의 "속죄소(mercyseat)"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그러므로 롬 3:25과 히브리서 9:5을 비교해 보면 속죄소가 향하고 있는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속죄소가 되시며, 동시에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2:2; 요일 4:10).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로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을 채워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심에 있어서도 자신의 공의의 기준을 포기하시지 않으셔도 되었다. 즉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의를 전가 받으며 그 의로 구원받는 것이다.
구약 시대 제사장의 직무는 끝마침이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성막 건물 안에는 의자가 없었다. 즉 율법을 받을 때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희생제물을 드려야만 했다. 그 제물들은 죄를 없게 하지 못했고 다만 일정 기간 동안에 한시적으로 죄악을 덮어두게 했을 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는 제사장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이렇게 비교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또한 속죄소는 하나님을 위한 안식의 장소를 상징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후에 누리게 될 완전한 안식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안식(rest)"이란 단어는 피곤으로부터 쉼을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의 심리 행위가 정지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4장은 이와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안식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다. 즉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투쟁의 마침이 되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속죄소에 대해서 지시하실 때에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4:22). 이와 관련해서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사람과 만나 주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 삼하 6:2은 이렇게 말한다. "(다윗이)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또 시 99:1도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속죄소 위의 그룹사이에서 사람을 만나셨다. 혹자들은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속죄소에 뿌려진 피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레 16:14-15은 제사장들에게 속죄일에 행할 제사 규례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여기서 속죄소에 뿌려진 피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그 피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에게 나오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얼마나 아름답게 반영하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사셨으며 또한 죽으셔서, 지옥으로 마땅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만나게 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사셨고, 그분의 공의와 죄에 대한 심판을 입증하는 죽음을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 공의의 측면에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으셨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죄인들을 용서하기 어려우셨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우리의 속죄소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충족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따른 충분한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으로써 공의의 율법을 완성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가치있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사 42:21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재케 하려 하셨으나..."라고 한 말씀을 성취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삶을 사셨으며 그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그리고 자비는 다른 어떤곳에서 보다도 갈보리 언덕에서 절정에 달한다. 십자가 위에서 이 일들을 이루셨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8, 31)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죄악을 율법을 통해 깨닫고 나아가 자신이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율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그것으로 끝나며 구원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한편 율법을 세우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지만 그것은 결국 당신의 거룩하심, 공의로우심을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 속죄소의 완성이시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 흘려진 보혈로서만 죄인들은 속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6. 속죄소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
이 곳에서는 속죄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통하신 장소였음을 기억하자.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의사소통 하셨던 수단이 창세 이래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작업이다.
에덴동산 시절, 처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직접적인 교통함이 있었지만, 죄가 그 관계를 깨뜨렸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동산 밖으로 내쫓았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꿈과 이상으로, 또 직접적인 음성으로 구약의 족장들 및 선지자들과 계속해서 교통하셨다. 그런 다음 마침내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 자신께서 이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의사소통 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가장 주된 수단은 성막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속죄소 위의 그룹들 사이에서 자주 말씀하셨다.
먼저 속죄소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은 그것이 언약 궤를 덮고 있어서 내부에 들어 있던 율법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며, 그것을 범한 사람에게는 사망이 주어진다.
갈 3:10은 율법을 범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로 남아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가지려고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도 범치 말고 완전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물론 주 예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그것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으셨기 때문에 그렇게하지 못하는 우리를 판단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대신 율법을 친히 성취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다. 즉 그분은 율법에 따라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감당해 주셨던 것이다.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위에 모두 씌워졌다.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믿음으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을 주장하지 못한다.
언약궤 안에 놓여 있는 율법을 덮고 있던 속죄소는, 곧 율법을 덮고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속죄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상징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게 한다.
속죄소가 율법을 덮었고, 속죄소 위에 뿌려진 피가 죄를 덮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고, 율법의 선고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는 당신의 삶으로, 그 다음에는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께 손가락질하며 "당신은 율법을 폐하였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친히 죽으심으로 그 분은 율법의 요구를 채우지 못하는 모든 인간을 위한 죄의 형벌을 받으사 율법을 성취하셨다.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다른 구절도 율법의 연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율법 자체로는 하나의 오류도 없지만, 인간 본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어져야 했다. 어느 하나도 간과 될 수 없었다. 이것이 속죄소에 피를 뿌리게 한 이유이며, 그 속죄소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가 비록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율법을 지킨 셈이되는 것이다.
한편 구약성경은 속죄소가 언약궤로부터 떨어져서 율법을 완전히 덮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그들 중에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많은 재앙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젖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 위에 실어서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냈다. 그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면서 이 소들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고 간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살아가심을 나타내는 증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다. 그런데 사무엘상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땅, 곧 벧세메스로 돌아온 언약궤에 속죄소가 덮혀져 있지 않아 거룩한 율법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열린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본 백성들은 모두 죽임을 다하였다.
즉 언약궤 속에 있는 율법을 들여다 본 백성들에 대한 심판은 19절과 20절에 나온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속죄가 없이는 율법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된 상태를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만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속죄소를 통해 이루어진 또 하나의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대표자를 통하여 죄인들과 만나 주시는 장소였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 대표자는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 피를 뿌리고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간구했던 대제사장이다(레 16:14-16).
오늘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주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구든지 지성소를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어느 누구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것을 볼 수 없었으나, 백성들은 단지 믿음으로 성전뜰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육신적인 눈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보좌를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속죄소를 통해 이루어진 또 하나의 특별한 은총은 그 곳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진 장소였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고 지시하셨다.
속죄소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어떻게 교통하셨는지의 예가 민 7:89에 나온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아마도 모세는 지성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휘장 다른 쪽인 성소 안에서 다른 제사장들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은총의 장소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지성소에서 우리와 교통하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악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보좌이신 속죄소에 계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
제13장 지성소의 휘장
1. 휘장의 외양
전 장에서는 지성소 안의 언약궤와 속죄소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는 지성소 입구를 덮고 있던 휘장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 보자.
성막에 관하여 모세에게 지시를 내리실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청색, 자식, 홍색실로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출 26:31-33)라고 말씀하셨다.
휘장은 세마포로 말들어져서, 그리스도 자신의 완전한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상징하였다. 휘장 위에는 그룹들이 청색, 자색, 홍색의 세 가지 색상의 실로 수 놓아졌는데 이들은 모두 성육신하시고 또 십자가 희생 구속사역을 성취하심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여러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 말씀과 관련된 것이다.
성막뜰로 들어오는 휘장이나 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는 그룹이 수 놓아지지 않았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만 그룹들이 수놓아졌다. 또한 그것들은 성막의 내부 천장에도 수 놓아져서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수 놓아진 그 그룹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위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들은 에덴 동산 동편에서 "생명나무의 길을"(창 3:24) 지켰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을 보호하는 것을 상징했다.
한편 그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돌아오는 속죄일에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에게 닫혀져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0:20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육체"로서의 휘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를 덮고 있는 이 휘장은 언약궤와 속죄소가 자리한 그 내부로 들어감에 있어서 길이 되는 동시에 장애가 되었다. 즉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길이 되었고 그 외 다른 때는 길을 막아주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지성소를 막아 두어야 했던 이유는 언약궤와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의 의미와 관계가 있다. 앞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순금으로 싸여진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언약궤는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고 언약궤 안에는 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을 증거하는 십계명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사람은 그의 출생시부터 사망 때까지 이 기준들을 완전하게 지켜야 했으나 아무도 지키지 못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지키셨다. 그러나 속죄소로 덮여진 십계명이 든 그 궤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는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던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구약 시대 동안 땅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보좌였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속죄소와 지성소 휘장위의 그룹들은 하나님의 기준이 어떤 방법으로건 포기되어질 수 없음과 그분의 거룩하심이 보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입구에 가려진 위장은, 대제사장은 제외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 바로 앞에는 나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성전에 있던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히 10:20은 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였음을 보여준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 휘장의 의미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지성소의 입구를 덮고 있던 휘장은 대제사장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속죄일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던가, 대제사장이 속죄일 이외에 들어가려 할 때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 16:2). 그 휘장 안 쪽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고 언약궤 안에는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송사하는 율법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규정하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 안에 들어와서는 안되었던 중요한 이유이다.
성막뜰과 성소로 들어오는 입구에 드리워진 휘장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고 있었지만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었다. 성막뜰로 들어오는 휘장은 희생 제물로 들임으로써 통과할 수 있었고, 성소로 들어오는 휘장은 화목의 장소로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경배의 처소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도록 허락되어지기 전까지 대제사장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서 직무를 감당할 때 성소 휘장과 내부 천장에 있던 그룹들을 바라봄으로써 자신들이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휘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휘장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시고 죄없으신 인성을 상징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러한 몸을 가지셨었다(요 1:14).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 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흠 없으신 존재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지극히 세세한 부분까지도 어기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실 때와 관련하여 두 가지 특별한 진리를 살펴보자. 첫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한점의 죄도 없으셨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전적으로 드러내셨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실 때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기준을 나타내셨다. 한 점의 죄도 없는 완전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완전한 존재는 없다. 언뜻 들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을 주저앉게 만드는 것 같으나 이 때에 우리는 복음(Good News)을 듣게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리스도의 완전함은 결국 이에 미치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들의 불완전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을 때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먼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접한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욥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스스로 한하여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욥 42:6).
한편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실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가르침을 가장 제일로 찬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애 중 가장 큰 목적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진 않고는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또한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의 목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휘장도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길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장 위에 있던 그룹은 에덴 동산의 그룹이 생명 나무의 길을 지켰던 것과 같이(창 3:24)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죄인이 함부로 나오지 못하도록 지켰다.
또 예수께서는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죄값이 지불되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하여지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가르치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 11, 롬 3:23).
즉 그것은 구약 시대에 성막 내부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대가로 속죄 제물의 피가 뿌려져야 했던 것처럼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흉내낸다거나 구약 시대와 같이 율법을 지킴으로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반드시 샘물과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그 보혈에 자신의 죄를 씻어 정결케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에 자신의 소망을 두는 자들은 롬 3:19-20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셔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한편 지성소의 휘장은 금으로 싸인 조각목으로 만든 네 기둥으로 받쳐졌다(출 26:32). 이 네 개의 기둥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하여 각기 다른 측면에서 조명해 주고 있는 네 복음서를 연상하게 한다.
즉 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을 나타낸 반면, 그것을 받치고 있는 네 기둥은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마태), 죄인을 섬기러 오신 중(마가), 죄없으신 완전한 인자(누가) 및 하나님의 아들(요한)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지지하고 있는 사복음서를 가리키고 있는 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겠다.
3. 찢어진 휘장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에 성전에 있던 휘장이 찢어진 사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그것은 이 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막에 있던 휘장의 두께가 약 10cm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의 두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몇몇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올 뿐이다. 그중 한 전설은 황소 두떼가 반대 방향에서 서로 잡아당기더라도 그것을 찢을 수는 없었다고 전한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휘장의 목적은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이에 반한 인간의 거룩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서른세 해를 지내시는 동안에 이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사셨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신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율법을 범한 형벌의 대가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럼으로써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구원의 사역을 마치셨을 때에 일어났던 사건을 좀 더 주의깊게 살펴보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1).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지, 사람으로 말미암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준을 채워 드리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삶은 완전히 화목되었다. 하나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하실 수 있게 되었다. 히 1:3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이름을 시인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롬 10:9-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는 멀리 보내졌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가 우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사실을 주의해 보자(마 27:51). 조그마한 구멍을 통하여서조차도 지성소 안을 들여다 보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어물이 되었던 그 휘장이 이제는 통로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에 당신의 몸이 우리를 위해 상하시고 찢어지신 것처럼 휘장도 둘로 찢어졌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지금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보시는 눈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바라보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죄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해결되었고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는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졌다.
구약 시대의 번제물은 죄를 영원히 먼 곳으로 보낼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 일을 성취하셨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이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4, 5, 10 ,14).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소의 휘장이 왜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구약 시대의 번제는 계속 반복해서 드려져야 했지만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히 10: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시고, 모두를 위하여 한 영원한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길을 만들어 놓으셨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분만이 구원을 위한 길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즉 사람이 아무리 구원을 위한 다른 방법을 만들어 낼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이외의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고 말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 이외의 다른 길을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가려 할 때에는 죽임을 당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진 않고 다른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영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받게 하는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이라고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둘로 찢어진 휘장을 제사장들이 수선하려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구원의 길로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휘장을 수선하려던 제사장들의 시도와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결국은 영원한 죽음인 것이다.
구원에 관하여 디도서 3:5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롬 4:5도 이렇게 말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이."
당신은 처참한 죄로 찌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참 소망임을 진정으로 깨달았는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개인의 구주로 모셔들였는가? 만약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면 영원히 늦기 전에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제14장
경건의 시간을 위한 제언
성막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을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되새겨야 할 것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막으로 나아갔으나 오늘날 성막이 필요치 않으며 직접 영적으로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 다는 점이다.
나는 경건의 시간과 관련하여 각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향하여는 마음의 문을 닫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는 시간을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갖기 위하여 엄청난 투쟁을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매사에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잘 배열함으로 매일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 당신의 매일 매일의 시간표 속에 경건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이 시간을 위하여 하루 15분을 따로 떼어 놓으라고 권하는 바이다. 하나님과 홀로 만날 수 있도록 이 시간을 확실하게 정해 놓으라. 경건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신은 다른 시간을 희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경건의 시간을 갖기를 너무나 갈망하지만 그것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신은 다른 시간을 희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경건의 시간을 갖기를 너무나 갈망하지만 그것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도저히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면 나는 당신이 평소에 행하고 있는 일들의 목록을 적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일들의 중요도에 따라서 순서적으로 목록을 작성해 보라.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충분히 확실하게 정하라. 그리하여 아래쪽에 있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들은 경건의 시간을 위하여 지워버려라. 이 작업은 당신이 누리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시간표에서 어떠한 것을 제하고 어떠한 것을 더해야 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도록 하라.
성막에 대하여 지금까지 배워 온 진리들의 경건의 시간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음을 당신은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뜰의 동쪽 끝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세상을 향하여는 문을 닫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한 문을 닫고 하나님과 홀로 보내는 조용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서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과 장소로 들어가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행하기를 의도하신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1. 성막뜰로 나아가라
성막뜰의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죄를 위한 번제를 드리던 번제단이 있었다. 경건의 시간에 죄를 위한 번제가 영원히 드려졌음을 인하여 그리스도인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10:12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말씀한다.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성도는 죄를 위해 드려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음을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에 대해 로마서 6장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또 새롭게 살리심을 받은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성막에서, 번제단을 지나 성소 쪽으로 걸어가면, 거기에는 물두멍이 놓여 있었다. 물두멍은 정결을 위한 기구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먼저 경건의 시간에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불되었음을 감사하고 또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로 자신의 삶에서 고백되어야 할 죄는 없는 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적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을 읽을 때 자신에게 깨끗함을 받아야 할 부분이 없는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요 15:3에서 들었듯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게 하는 능력이 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즉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엡 5:26) 거룩하여졌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다...내가 주께 번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 11).
하나님의 말씀은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약속한다. 우리의 생각에 떠오르는 죄들을 고백하고 나서는 그분이 하신 약속대로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감사해야 한다.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도 용서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을 너무도 슬픈 일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신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 자신에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두멍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죄악을 고백함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하나님께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2. 성소로 들어가라
구약 시대 성막의 물두멍을 지나서 제사장들은 성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의 마음의 문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졌다. 우리의 경건의 시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말씀에 기초하여 고백한 죄들을 용서받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문은 하나님을 항하여 열리게 된다. 세상을 향해 나있는 성막뜰의 문은 닫혀져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성소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의 문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졌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둔다. 이 두 사실은 오늘날의 경건의 시간에 있어서도 진리로 다가온다. 즉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는 마음을 닫는 것이요, 님과 홀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세상을 항햐여는 마음을 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하여는 활짝 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간을 계속적으로 훈련해 나가면서 당신은 세상을 향하여는 닫히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열리는 은총을 더욱 더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제사장은 그의 왼편에서 성막을 비취고 있는 순금등잔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 순금등잔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신을 드러내시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관하여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라고 말씀하셨었다. 오늘날 경건의 시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한편 성소 안에서 순금등잔은 맞은 편에 놓여 있던 진설병상을 환하게 비취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다(요 6:35, 48).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시고(요 1:1),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섭취함으로써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섭취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심에 관한 성경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우리의 경건 시간 중에 가장 중심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에 두어져야한다.
성소 안에는 또한 지성소를 들어가는 휘장 바로 앞에 놓은 향단이 있었다. 향단은 기도의 장소이고, 특별히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 기도의 장소이다. 경건의 시간에 깨끗게 하는 물두멍의 자리는 개인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였다면, 향단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장소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한 직무나 기도에 헌신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3. 지성소로 들어가라
구약 시대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은 일년에 한 번 돌아오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곧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성소의 휘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둘로 찢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 사실에 대해서 히 10:19-20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마 27:51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사건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받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경건의 시간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시간에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앞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하여 경건의 시간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떠난다. 예수께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간구하기 위하여 경건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한 이후에야 비로소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아갈 준비를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경건의 시간을 마치고 나올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행하시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요 10:4).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앞서 가실 때 성도들이 그가 이끄시는 곳으로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경건의 시간을 마치고 그 장소를 떠날 때와 관련하여 구야 시대 제사장이 성막을 떠날 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설병사을 지날 때 성도는 기록된 말씀을 주셔서 그것을 섭취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순금등잔을 지나면서는 하나님의 일을 각 개인에게 밝히 알게 하시는 성령을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물두멍 옆에서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번제단을 통과하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세상을 대하여는 죽어진 존재임을 되새길 수 있다. 그런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생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성도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와 같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에도 성막을 생각하도록 하라. 처음에는 단지 몇분의 시간밖에 보낼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그 시간을 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하면 당신은 곧 세상을 향하여는 닫히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활짝 열리는 그 놀라운 시간은 더 많이 갈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통하여서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고백한 죄로부터 깨끗게 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영적인 강건함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또한 그 은혜의 보좌 앞에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간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뵙고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을 성실하게 보내면서 말씀을 매일의 삶에 적용시켜 나간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삶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출처] 성막과 그리스도 (청계산기도원) | 작성자 순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