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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옆에 분에게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인사하겠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찾읍시다". 아멘.
지난 주 북한과 극적 합의로 무력도발의 재발방지를 약속받고 당분간 평화무드로 가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북한에서 우리 확성기를 왜 그토록 두려워할까요. 생각해 보세요.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에 혼자 보초서고 있는데 남쪽에서 이런 노래가 들려옵니다. '소원을 말해 봐 니 마음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 봐 넌 내 옆자리에 앉아 그저 내 이끌림 속에 모두 던져봐 지루한 날들이 넌 지겹지 않니? 너의 소원을 들어줄게 난 그대 소원을 이뤄 줄 행운의 여신'이런 가사가 들려오니 북한군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한 확성기가 중2보다 더 무섭답니다. 중2는 어디로 튈지 몰라서 무서웠는데 확성기는 어디서 들리는지 아는데도 못 말리니 더 무섭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배라는 말은 없지만 11절에 보시면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말씀이 곧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이 '얼굴을 뵙다', '나와서 입 맞추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에 나간 장수가 승리하고 돌아와서 왕 앞에 나아가 그 손등에 입 맞추듯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예배하되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가끔씩, 때때로, 한 달에 한두 번, 일 년에 몇 번이 아니라 '항상'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주 찾아뵈라는 말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예배하라는 말은 사실상 매일 매일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37절을 보시면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있게 하며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40절에서는 "항상 아침저녁으로 번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예배자가 되길 원합니다. 이것은 레위지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나라요, 그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본문의 시가 언제 기록되었는가 하면 7절에 "그 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날에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날입니까? 위에 보시면 다윗이 법궤를 찾아 와서 하나님의 장막 안에 두고 제사를 한 날입니다. 그 날 제사 뿐 아니라 모든 예배자가 함께 먹고 즐거워했습니다. 무엇을 먹었습니까? 3절에 보시면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인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골고루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날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의 떡을 나누어 먹고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2절).
그럼 우리는 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프랭클린 지글러는 '예배학 원론'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예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예배한다. 예배는 사람의 발명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제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교제로 자신을 제공하시고 사람은 이에 응답한다. 하나님은 사랑을 제공하여 예배에서 인간으로 응답하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예배의식을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배드림을 허락하셨고 예배를 통하여 만나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들어올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귀를 막으시면 부르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내가 있듯이 하나님이 허락하시기에 예배할 수 있는 줄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기회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는 위대하시므로, 26절에서는 하늘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27절에서는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으므로, 31절에서는 통치자이시므로, 33절에서는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시므로, 34절에서는 선하시고 인자가 영원하심으로, 35절에서는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36절에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배에 있어야 할 내용을 말합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알리라고 합니다. 이름을 불러 아뢰는 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그가 행하신 일을 알리라는 것은 9절에서 말한 전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기사와 말씀을 기억하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노래하며 찬양하고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찬양할 때는 위에 5절에서 보면 비파와 수금을 타고 제금을 힘 있게 치고 나팔을 불며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29절에는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그 제물은 어떠해야 하느냐면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구별된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만 따로 기록해 놓은 시편 96편에서는 이 제물을 '예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에는 감사와 기도, 말씀선포와 찬양, 예물드림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늘 무시당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종종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할머니는 그것이 말뿐임을 압니다. 할머니는 아들부부가 좋은 것, 귀한 것은 골라서 항상 자기 아들 주려고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을 봤습니다. 할머니 먼저 드시라고 하면 할머니가 덥석 받아 드시겠어요, 손자한테 안 주고 내 주는 게 고마워서라도 괜찮다고, 손자 먹으라고 양보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내외가 자기 아들, 손자만 챙기니까 할머니는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으로 주님을 먼저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이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제사장을 향해 책망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어찌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가장 좋은 것으로 살지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섬기고 더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내 아들들을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본질이고 또한 하나님도 우리에게 축복으로 화답하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진리의 약속을 붙잡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방인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대상은 당연히 다른 것이고 예배드리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극정성으로 제물을 차려 제사하지만 우리는 정성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믿고 그 분의 보혈로 죄씻음 받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피는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니라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성소에 나아가게 해주셨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과 다른 피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을 약속하셨을 뿐입니다. 이 약속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제사와 우리의 예배가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예배를 더 기다리고 기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예배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배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며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했습니다(삼상2:30). 우리 삶에 예배가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곧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 들어간 한 미국선교사가 지하교회 성도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활을 보니까 너무 딱해서 도움을 주고 싶어서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도가 말합니다. "제 소원은 목청껏 찬양하며 예배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꼭 필요한 것 말해 보세요." "성경책 한 권만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유시장이 되면서 조금 모은 돈이 있는데 십일조 드릴 곳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이 소원을 다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에 임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배야말로 사단의 공격을 막는 최선의 방어입니다. 예배에 실패한다면 넘어뜨릴 기회를 사단에게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이 살고 소생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예배는 내 믿음의 상징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표입니다.
다윗은 주의 전에 있는 하루가 천 날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서 제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엘벧엘의 신앙, 즉 우리가 벧엘로 다시 올라가서 내가 피난 가는 길에 만나주시고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약속해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자고 했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내려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까 고민하며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취임식 준비보다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며 예배하였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일컬어 포기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3포 세대라고 했는데(연애·결혼·출산)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 세대’, 여기에 꿈과 희망마저 포기하는 ‘7포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다른 것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란 뜻에서 ‘n포 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선다면 우리에게는 포기와 실패, 좌절과 절망이 익숙한 단어가 아니라 낯선 단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길 소원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가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고 오늘 다윗처럼 예배가 회복되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승리의 삶을 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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