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아니 엊저녁 늦은 밤부터 내리던 눈이
오전 내내 그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 도량으로 옮겨 온 이후로
가장 많은 눈이 온 날로 기록될 것 같다.
오전 내내 눈을 쓸고 또 쓸고
한 세 번 쓴다고 쓸었는데도
이만치 쓸고 나서 다시 대웅전 앞으로 가 보면
수북이 눈이 쌓여 있기를 한참 반복만 하고 있다.
그래도 또 쓸고 또 쓸면서
참 행복한 정취 속에서 내 마음도 함께 쓸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고생스럽지만은 않다.
고생이라니 이런 고생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한 10여 미터 쓸고 나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또 눈숲을 바라보며,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눈꽃을 보곤한다.
한참을 쓸다가 서서
멍하니 감격에 젖어 있다가 또 쓸고
또 한참을 서 있다가 또 쓸고
이런 재미를, 이런 행복감을 나혼자 누리기 아까울 정도...
오늘은 아침부터 함께 살고 있는 재현 법우가
오전중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여 일찍 내려가 버렸고,
끊임없이 뿌려주는 눈 덕분에 차가 올라오질 못해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터라
조용한 도량의 정취는 더없는 적요와 외로움이 가득하다.
참 행복한 눈소식.
지난 몇 일 간 날씨가 하도 추워서
먼저번 눈이 왔을 때는 잠깐 눈을 쓸다 보면
귀도 시리고, 손도 꽁꽁 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마침 오늘 내리는 눈은 끈질기긴 해도
날씨가 포근한 터라 얼마든지 느껴줄 수 있어서 좋다.
해탈이 도솔이도 모처럼 만에 신이 났다.
그래도 도솔이가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모나지 않아
아무에게나 잘 달라 붙기도 하고
아주 끝까지 따라 다니면서 그 작은 입으로 깨갱 거리고 논다.
눈이 오니까 참 좋다. 너무 좋다.
도량의 풍경이 이렇게 고요했던 적은 아마도 없었던 듯 하다.
이렇게 적적하고 명상적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느낄 만큼
오늘은 참 좋다.
그런데 점심 때 아래로 내려갔더니
눈이야 계속 내리지만
얕은 산이지만 산 위에서의 정취에는
도저히 견줄 수 없다.
아니 아래쪽에야
차도 많고 건물도 많고 사람도 많고 하다보니
눈도 견디기 어려운 듯
내리는 족족 금새 녹아 없어져
도시가 되려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런 날은 눈에 갖힐 일이 있더라도 산중에 있는 편이 좋을 듯.
오후에는
멀지 않은 이웃 절로 또 산으로
발길을 옮겨 좀 걸어야 겠다.
이런 날의 풍경 속에서
난 작은 꿈을 꾸곤 한다.
산골짜기에
조용하고 적적한 깊은 산골에
작은 오두막 법당 하나 짓고
봄
여름
가을
또 겨울의
제각기 아름다운 온연한 모습과 벗하며,
계절의 질서
법계의 이치에 모두를 맡기고
텃밭 하나 가꾸면서
마음밭도 함께 가꾸면서
마음에 일 없게
입에는 말이 없게
뱃속에는 밥이 적게
밤에는 잠이 적게
머리에는 생각이 없게
그리고
책 몇몇 권과 벗하면서
자연과 벗하면서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를 느끼면서
좋은 도반 몇몇과 벗하면서
야생의 풀들과 나무 숲속에서 먹거리를 구하면서,
부족한 듯
불편한 듯
외로운 듯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진다.
또 하나의
자연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