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鄭文)은 자가 의덕(懿德)이며, 초계현(草溪縣) 사람이다.
그 부친 정배걸(鄭倍傑)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이 예부상서 중추사(禮部尙書 中樞使)에 이르렀으며, 유학으로 문종(文宗)을 보필하였고 죽은 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중 상주국 광유후(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尉 門下侍中 上柱國 光儒侯)에 추증되었다.
정배걸의 처 최씨(崔氏)는 어질었으나 자식이 없어서 친족의 딸을 양육하였는데, 성년[笄]이 되니 정배걸에게 권하여 첩으로 삼게 하였고, 얼마 안 되어 정배걸이 죽자 〈첩이〉 유복자(遺腹子)로 정문을 낳았다. 나이 겨우 15·6세에 영리하기가 마치 노성한 사람과 같았다.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여 「군위민천부(君爲民天賦)」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만물이 시들어진다면 나는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베풀 것이요, 풍속이 완악하고 흉악해진다면 나는 천둥과 벼락같은 노여움을 내리리라.”라고 하였는데, 문종이 듣고서 여러 차례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정문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선종(宣宗)이 국원공(國原公)이 되니 정문은 그 부(府)의 녹사(錄事)가 되었다. 〈선종이〉 즉위하니 직한림원 겸사문조교(直翰林院 兼四門助敎)에 발탁되었고 곧이어 우습유(右拾遺)로 전임되었다. 대간(臺諫)에서 논박하여 아뢰기를, “정문의 외조부는 처인(處仁) 부곡(部曲) 출신이니 마땅히 간관(諫官)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전중내급사 지제고(殿中內給事 知制誥)로 고쳐서 임명하였다.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되었다.
숙종(肅宗) 10년(1105)에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태자빈객(刑部尙書 政堂文學 兼太子賓客)에 임명되었고 검교사공 예부상서(檢校司空 禮部尙書)를 더하였다. 근무하던 중 갑자기 병이 나서 들것에 실려[舁] 집으로 돌아가니,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으나 곧 죽었다. 왕이 매우 슬퍼하며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特進 左僕射 叅知政事)에 추증하였고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였으며, 관비(官費)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정문은 사람됨이 공손하고 검약하였으며 순박하고 과묵하였다. 살림을 돌보지 않아 거처하는 방은 겨우 비바람을 가렸다. 관직에 있을 때는 삼가고 조심하여 형조(刑曹)를 맡은 것이 10여년 이었는데, 일찍이 함부로 형벌을 처리하지 않았다. 일전에 서경(西京) 행차를 호종할 때 기자(箕子)의 사당(祠堂)을 건립할 것을 청하였고, 사명을 받들어 송(宋)에 가서는 하사받은 금과 비단을 시종하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다 서적을 구입하여 돌아가니, 송인(宋人)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아들은 정복공(鄭福公)·정복경(鄭福卿)·정복유(鄭福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