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강대국을 만드는 마법의 손
줄리어드 음대 강효 교수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그가 음악을 무기로 일어섰다. 올해 두 번째를 맞는 대관령국제음악제 의 주제는 ‘전쟁과 평화’. 이 음악제 예술 감독을 맡은 강효 교수는 “분단 60년째를 맞았지만 남북은 여전히 나누어져 있고, 지구 곳곳에서는 아직도 분쟁과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면서 평화와 희망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답답한 삶 속에서도 우리는 가장 빛나던 순간들의 기억을 곱씹으며 고통과 상심을 견뎌나간다. 원수 같은 남편도 한때는 파란 뺨을 가진 청년이었고, 지금은 사감 선생 같은 아내도 그때는 걸음마다 라일락 향기가 나던 아가씨 아니었던가. 단지 내가 그것을 외면하고 있을 뿐. 일상을 한 걸음만 벗어나면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오롯한 화톳불이 되어줄 텐데. 그리고 여기에 클래식 선율이 흘러준다면. 망상이라고? 이런 꿈은 지난해 대관령 국제음악제에서 현실이 되었다.
단순히 한밤의 야외 콘서트가 아니라, 자연의 영감이라는 테마로 2주 동안 45개의 콘서트, 5개의 공개 레슨, 18개의 마스터 클래스 등이 열려 숲길을 돌아서면 음악이 흐르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했다. 그리고 올해 제2회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오는 8월 3일부터 19일까지 열리게 된다. 베자드 바즈바란이 작곡한 ‘깨어남’을 테마로 월드 프리미어 공연이 열리는 등 지난번 페스티벌보다 더 큰 규모다. ‘아스펜’이니 ‘탱글우드’를 부러워하던 애호가들에게는 그야말로 ‘별빛처럼 쏟아지는 음악의 축복’인 셈. 이런 선물을 준비한 이가 바로 강효 교수다.
천성이 띄엄띄엄하고 촌스런 필자에게는 현대음악에서 말하는 진보성이란 것이 발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름을 강조하기 위한 인위성의 발현’인지는 여전히 판단 유보 상태다. 물론 시대에 뒤떨어지는 낡은 생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음악은 자연의 모방에서 출발한다”라는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음악에 있어 ‘대자연’이란 거대한 배경은 그 출발이자 결국은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점만큼은 조금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천여 년이 지나도록 바이올린의 몸통은 여전히 가문비나무의 울림을 들려주고 있고, 호른은 인간의 호흡에서 생명의 동력을 받아 울고 웃는다. 이는 동서양 음악 공히 마찬가지. 하지만 이미 대도시의 귀퉁이에 남루한 육신을 의탁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루소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고전음악의 선율과 리듬에 침잠되어 있는 자연의 정취를 흠향하면서 이 팍팍하고 까칠한 삶을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하여 대관령에서 열리는 국제음악제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일 테고.
사실 이런 대대적인 국제음악제를 연 주인공이 바로 강효 교수다. 그는 널리 알려진 바 줄리어드 음대 교수다. 이 대학은 전 세계에서 훌륭한 아티스트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으로 ‘음악계의 하버드’ 정도로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소위 음악의 ‘분더킨트天才兒’가 모두 그곳에 몰려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곳에 한국인 교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그것도 가장 인간의 목소리를 닮았고, 가장 핵심적인 독주 악기인 바이올린 파트를 담당하는) 덩달아 자부심을 느껴진다.
행복한 스승의 미소 스승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영주, 길샤함, 김지연, 안 트리오, 캐서린 조, 리비아 손, 이유라…. 그리고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름을 지어주고 세종 솔로이스츠에 입단시켜 활동하고 있는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 그 뿐인가, 지금 이 시간에도 프리스쿨에서 자라나는 많은 분더킨트 들. 그의 손을 거쳐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또한 용틀임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세계무대에서 집중적으로 조명 받아온 데는 그의 공로가 지대함을 숨길 수 없다. 이보다 더 행복한 스승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미소. ‘해맑다’는 형용사가 꺼려지는 연세지만, 적어도 올해로 환갑을 맞은 한국인 중에 그보다 더 잘 웃는 사람을 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우리의 속세적인 욕망을 대표하는 수백억대 부자나 권력을 잡은 이들은 웃음과 거리가 멀다. TV 9시 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이 이런 속세적인 권위를 비웃는 정신적 가치로서의 ‘웃음’을 역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신의 가치인 음악을 설파하고 나누기에 평생을 바쳐온 강효 교수의 웃음은 폭소나 박장대소는 아니지만, 그와 동년배의 어른들에게는 보기 힘든 미소가 새어나온다. 항상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
“딱히 인상 쓴다고 나아질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라고 왜 감정의 기복이 없겠어요. 젊어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소리를 못 내거나, 이해를 못하거나 하면 초조하고 긴장되었지요. 마음의 풍랑이 일기도 하고”
강효 교수는 그의 미소에 대한 집요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언젠가 자신의 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돌 불상의 군집 속에 들어가 조용히 마음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불상처럼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2~30분. 그때 일본인 내외가 떠들면서 들어오는 것이 보였고, 그는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사람은 왜 불상 가운데 앉아서 저러고 있을까?’라고 생각할까 하는 사념도 있었을 것이고,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춰온 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열없게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나가버렸다. 강교수가 다시 앉으려고 보니 불상은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전혀 미동 없이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사방이 조용해졌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날 뛰게 한 것이더라고요. 연주 때 긴장을 하게 한 것도 나고, 사회생활 하면서 어떤 일에 기분 나빠하는 것도 나고. 절로 웃음이 나더라고요.”
어찌 보면 원효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일맥상통하는 이 이야기에서 ‘강효’라는 인물을 읽는 키워드가 있다.
 이제는 바이올리니스트보다는 명교수로 세계에 알려진 그. 1969년 이래 30여 년간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 상임 실내악 주자였고 많은 현대 곡들의 미국 초연을 했다. 1978년 줄리아드 음악원에서의 교수 생활을 시작으로 또 다른 ‘악기’인 제자들을 연주하고 있다.
잘하는 것을 잘하게 하기 누군가를 가르쳐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것이 피붙이인 자식이나 조카라면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에 열통을 터트리거나 회초리를 들고 싶어진다는 것을. 또한 그것이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사이라서 ‘화를 내기가 곤란한 상황’이라면 ‘에라, 니가 알아먹든 말든 내 할 만큼만 하면 그만이다’라고 포기해버리게 되는 마음을. 앞서 소개한 이미 거장의 반열에 들었거나, 혹은 주목받고 있는 줄리어드의 영 아티스트들이라고 해서 달랐을까? 아니다. 스승의 눈에 제자는 늘 모자라는 존재로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강효 교수는 제자들의 연주 중 ‘가장 잘하는 부분’을 칭찬하는 것으로 본인 스스로가 깨닫게 하여 그들을 ‘예술가’(기술자가 아닌)로 키워내려고 하는 것이다.
음악은 테크닉에서의 차이도 있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즉 해석 능력 (악보 해독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예술관의 유무, 건강성 등이 ‘거장’과 ‘잘하는 테크니션’이란 그 얇은(하여 끝 간데 없이 넓을 수도 있는) 경계의 좌우를 결정한다. 어쩌면 앞서 소개한 ‘강 교수의 빛나는 훈장 - 제자들’은 그런 철학적 기반에서만 자라나는 것일지 모른다.
“완벽주의거나 아니면 간절할 때만 완전성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완전’이라는 영역은 진짜 혼자서 하는 것이지 누가 옆에서 알려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세종 솔로이스츠의 첫 멤버들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처음이고 해서 ‘완전한 소리’를 내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조깅을 하면서 갑자기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로는 잘하는 부분을 칭찬해주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는 방법을 쓰게 되었지요. 그 아이들을 믿어주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강효 교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칭찬 교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워낙 호들갑과 과장이 지천이고, 몇 줄의 글, 몇 초의 영상으로 ‘과장’하고 왜곡하는 것이 많다 보니 ‘말이 그렇지 어떻게 웃음과 칭찬으로 교육을 하나’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칭찬과 웃음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배려에서 출발한다. 그 자신 역시 1964년 혈혈단신으로 (그것도 급작스럽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된 경우라 힘든 시절을 보냈기에 까마득한 후배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효 교수의 대학 1년 선배이자 수십 년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를 지켜봐온 중앙대학교 이종협 교수는 “성품이 곧고 강직한 분입니다. 정말이지 드물고 귀한 사람이지요. 음악밖에는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단언한다. “당신 스스로가 도로시 딜레이 교수에게서 어머니의 정 같은 따스한 배려를 받았고 그것을 다시 후배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1964년 바이올리니스트 세놉스키가 내한 공연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그는 연주 잘한다는 청년 강효를 오디션하게 되었는데, 단 1분 정도만 들어보고 ‘당장 이 청년을 미국으로 데려 가겠다’며 바로 강효 교수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아들을 미국에 데려가 키워보고 싶습니다”라며 당시 자신의 공연 개런티를 내놓았다. 성실한 의사이자, 가족음악회를 열 정도로 클래식 마니아였던 강교수의 아버지는 “이제 그 애는 당신 아들이요”라는 한마디로 승낙을 했고 석 달 뒤 강교수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은 했지만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세놉스키는 연주 여행 스케줄 때문에 강효를 지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줄리어드 음대에 오디션을 보고 입학을 허가 받았고, 20세기 바이올린의 대모 도로시 딜레이 교수를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 같은 분이셨지요. 적응에 힘들어하니까 자기가 휴일에 그림을 그리니 같이 그려보자며, 집으로 직접 불러서 같이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연주하며 살뜰하게 살펴주셨습니다.”
사실 몇 마디 말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그의 언행심사言行心思는 은연중에라도 드러나는 법. 그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증언은 아주 많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 씨의 사례도 한 예일 것이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녀는 무리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레슨비를 봉투에 넣어 드리고 난 다음 날, 강 교수는 그녀를 불러 “너희 아버지에게 땡큐 카드를 썼으니 갖다 드려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그 카드를 열어본 김지연과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펑펑 쏟아야 했다. 그 안에는 “지연이 같이 재능 있는 아이를 가르치게 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지연이가 크게 성공하면 그때 아버님과 술 한잔 같이 하면 어떨까요?”라는 메시지와 그녀가 납부한 레슨비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힘들어하는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도 그렇지만, 도리어 예민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배려해 ‘땡큐 카드’라는 방식을 이용하는 섬세한 마음에서 ‘강효’라는 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경우가 비단 김지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역시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안 트리오의 바이올리니스트 안젤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안 트리오의 어머니가 아스펜 국제음악제에서 안젤라에게 레슨을 많이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약간의 돈을 마련해 봉투에 넣어 보냈던 모양이다. 그날 밤 강 교수는 안젤라의 집으로 전화를 하여 레슨비를 돌려보내겠다고 하면서 “안젤라 어머니,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라며 한사코 마다했다. 그렇다고 고마움의 표시를 한 안젤라 어머니가 “아, 그래요?”라며 냉큼 돌려받을 리도 만무했다. 그때 강교수가 내놓은 해법은 “일단 제가 돌려드릴 테니 나중에 안젤라 활 바꿀 때 보태세요”였다.
이 에피소드를 전해 듣고서 솔직히 ‘설마 이런 동화 같은 일이?’라고 의구심을 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는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강효 교수 또한 돈 한푼이 아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강효 교수를 직접 만나보고 나서는 ‘이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담백한 성격이며, 신중한 태도 그리고 자신보다 ‘제자’들을 앞세우는 모습 때문이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학생 스스로 ‘내가 잘 한다’라고 느낄 때 제일 많이 배우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약간 우울해 보이는 학생이 연주를 잘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명심이 있는 학생이라고 해도 그것이 의욕이 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스승이 하는 일이라고는 충고나 ‘칭찬’ 정도일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스승이 미치는 감화는 영겁永劫이다. 교사는 자기의 감화가 정지하는 바를 결코 말하지 않는다’라는 헨리 애덤스의 격언은 어쩌면 강효 교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데서 좌절하는 일이 많은 요즘, 자신보다 더 자신을 믿어주고 바라보아 주는 스승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고 힘이 되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음악 강대국으로 거듭날 때까지 강효 교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종 솔로이스츠다. ‘21세기의 이무지치’(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클래식 앨범이 필립스에서 발매한 이무지치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다)라고 불리는 세종 솔로이스츠도 바로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가능성은 있으되 그 미래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젊은 아티스트들을 모아 창단한 이 다국적 실내악단은 1995년 창단 이래 급성장을 거듭했고, 급기야 작년에는 미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NPR(National Public Radio)에서 선정한 ‘올해의 아티스트’로 뽑혀 일주일 내내 세종 솔로이스츠의 연주 실황이 방송되었다.
이는 대편성 현악 단체로서는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단일 시장으로는 가장 큰 시장으로 구분되는 미국의 클래식 팬들은 그야말로 일주일 내내 발음하기도 힘든 세종 솔로이스츠의 연주곡을 들어야 했고, 잘 조련된 그들의 선율에 흠뻑 빠져들었다. 또한 이 젊은 아티스트들은 아스펜 음악제를 연간 2백 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해내며 ‘세종’이라는 이름과 ‘한국인의 문화적 우수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세종솔로이츠 단원들과 함께 한 강효 교수
사실 아무리 재능 있는 연주자라도 무대 경험을 계속해서 쌓지 않으면 발전이 더딜 수 있다. 더군다나 아직은 연륜이 짧은 젊은 아티스트들은 해외 무대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다면 서서히 도태될 수도 있다.
강효 교수는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무한한 기회의 장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문화강국 한국’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곳 멤버가 되면 세계적인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회사의 주목을 끌게 될 만큼 크게 성장했다. 무대 경험을 쌓고 커리어를 키워나가며 ‘차세대 예비 거장’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용재 오닐 같은 경우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입단 승낙이 났지만 그곳을 포기하고 세종 솔로이스츠의 입단을 선택할 정도다.
“제가 뭐…. 아이들이 잘한 거지요. 사실 음악은 유니버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좋은 것이 많습니다. 훌륭한 역사도 있고, 예술적 성취도 있지요. 이런 좋은 것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재능이 있고 노력도 많이 하니까….”
말수도 적은 편에, 워낙 한마디 한마디 신중을 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강교수라지만 드러내놓고 자랑해도 모자랄 만한 업적을 소개하는 데도 한참을 뜸을 들여 생각한 뒤 담담하고 건조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특유의 소년 같은 미소로 빈 부분을 채워 넣는다. 물론 인터뷰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염화시중拈花微笑의 미소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는다. 하지만 앞서 배운 선배가 연주를 마치고 바로 뛰어와서 후배들을 충심으로 리드해주고, 후배들은 선배의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이 외국에서 홀로 고군분투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든든한 받침대가 되어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한 사람의 아티스트가 주목을 받고 커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금전적 투자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주회를 주최하고 알리는 것에서부터 스폰서십을 마련하고 악기를 대여하는 등(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 같은 명품 고악기를 살 수 없기 때문에 연주를 위해 빌리기도 한다. 물론 강효 교수가 힘을 써준 결과다) 새로운 아티스트를 키워내기 위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물심양면으로 살펴준다. 그는 인간 누구나 다 특별한 점을 갖고 있다는 진리를 알기에 학생의 장점을 발견해서 들려준다. 꾸짖음보다는 스스로 성장해나가는 제자를 지켜봐 주고,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먼저 본보기를 보이는 그에게 단 하나의 가르침은 바로 ‘칭찬’인 것이다. 이런 스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음악을 듣는 것만큼의 감흥이 몰려온다.
그 자신이 PR하는 것을 싫어해서 90년대 초반까지 그가 서울에 왔다 갔는지 가족을 제외하고는 몰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자들의 일’에는 발을 벗고 나선다. 그리고 이제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27년 동안 아스펜에 참가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자연과 함께하는 음악축제를 열고 싶었지요. 강원도 대관령의 자연환경이 아스펜 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아티스트도 많기 때문에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내 조국에 봉사하고 싶군요.”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진저리가 날 때 ‘강효 교수’를 생각해볼 일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고 음악으로 봉사하려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그를 보면서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구나’라는 걸 느끼게 될 테니까. 그의 음악과 그의 미소를 통해서 말이다.
취재 후기 | 음악계의 거목 강효 교수가 만들어내는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쉬었다 갈 수 있는 그늘이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그늘에서 배우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거지요. 점심으로 ‘삼계탕’을 먹으면서 연신 맛있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저런 부드러운 강효 교수에게서 배웠으리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그의 웃음을 흉내 내게 됩니다.
글쓴이 : 양영찬(극작가) 담당기자 : 백승관 기자
출처 : 월간행복이 가득한 집 http://www.design.co.kr/magaz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