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얘기를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에 스스로
참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 하나 제대로
붙잡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과 가르치심을 통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마음을 여지없이 낮추시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시므로 그때에 제가 주님 앞에 드린 찬양이 바로 이겁니다.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제 자신의 위기는 언제나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배가 더부룩하게 불러 말씀과 기도가 갈급하지 않을 때입니다.
제가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꼭 있다면 딱 한 가지
내가 주님을 사모한다는 이 한 마디 뿐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지독한 이기주의이긴 하지만 40년 가까이 지금까지 주님 앞에 끊임없이 구한
것은 바로 이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더 많이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하는 사모함을 주소서’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님께서 이러시는 것 같더라고요. ‘이제 사모하는 것은
그만하고 받은 은혜를 사랑으로 이루는 기도는 할 수 없나?’고 하시는 겁니다.
‘네가 나를 너무 사모하고 나를 너무 알려고 하는구나’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기도 제목을 바꿀까요? ‘바꿔라 내가 네게 준 복을 복되게 하라
내가 네게 준 그 약속을 네게 이루어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해 봐라’ 하십니다.
그래서 충성이란 어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충성은 신실, 믿음이나 진실이나
똑같은 말이 아닙니까?(피스토이, 피스토스) 충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서
이루어져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발현이죠. 성령의 은사처럼 출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겨자씨로 오신 주님이 진리와 하나가 된 진심에 의해 발현되십니다.
산상보훈의 8복이 이루어지면 밖으로 발현이 되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됩니다(마5:14)
그래서 롬2장이 말씀하기를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육체에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곧 심령에 할지니 하십니다.
문제는 이 구원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너무 너무 길어요. 그래서 말씀을 나누는
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속에서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고, 영광이 되고 온전한 인격이 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인본주의로 적당히 처리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인내로 말씀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 방법이 더 빠르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생명의 역사는 속성재배가 없는 줄 알면서 장대높이뛰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교육을 통한 스스로의 절제나 악을 피하는 등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훈련은 금생이나 내생에 약속 있는 복입니다(딤전4:8) 그런데 오래 걸립니다.
갈6장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선을 행함을 보통 착한 일을 한다는 개념으로 선이라고 하는데 롬 2장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하시고” 참고 선을 행한다는 말은 그분의 이름 앞에서 엎드려서 배운다는 것
곧 십자가의 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는 단회적이며 점진적이고 영원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단번에 깨닫지만 자신의 것으로 체화되는 시간은 자신이 처리되는 기간이
있기 때문에 아주 깁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과 자기 관점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가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동행하는 걸 멍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 성령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세자 책봉을 받고
가정교사로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의 스승에 의해서 진리 안에서 내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며 거룩함으로 어떻게 영광에 나아가며 그 영광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하나가 되며 어떻게 온전하게 되며 그 사랑이 물밀 듯 들어와서 어떻게
내가 사랑에 이르는가를 인내하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너무 길어요.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짐 또 다짐합니다.
제가 언젠가 동료 목사들하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고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승려들을 보고 거짓말 한다고 비판하는데
그 사람들의 가르침은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가르침은 듣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거짓말이지만 그 사람들이 득도해 보겠다고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배워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복음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들을 쉽게 하는데 틀림없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한다 그런데
왜 그 믿음이 행함이 안 되느냐? 왜 말뿐이냐? 정당한 말에는 열을 올리면서 정작
정당한 행동을 할 때에는 왜 꽁무니를 빼느냐? 그럼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냐? 그럴 수는 없다 그러면 그 말씀을 이루는 인내가 우리에게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도 지금까지 해당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세월을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의 보좌를 앙망하고 사모했지만 모자랍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에 비해 나타나는 열매를 평형저울에 달아보면 영 형편없습니다.
계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그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바로 동참 이 “메토코이”가 그리스도의 형제로 그에게 참예한다는
말입니다. 형제란 한 배에서 났고 한 솥 밥을 먹고 동거 동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다 함은 그 맏아들의 영, 곧 장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놓아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셨다’고 히2장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동참해 주신 겁니다. 죄에 동참해 주셨고 음부와 사망에도
동참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를 빛과 생명으로 끌어올려 동참해 주십니다.
동참해 주셨으면 우리도 그의 죽음에 동참해 자신을 드려야 되고 그의 다시 사심에
동참해야 되고 그의 영광에 동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요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오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니 어떻게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땅에서 난 인간은 땅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계속 받고자 하기 때문에 신앙이 어릴 때는 하나님과 늘 티격태격 싸웁니다.
욥의 지금 기도나 엘리바스나 소발이나 빌닷의 얘기는 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묻지 않고 전부 자기 생각 자기 이론을 내놓고 계속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대에는 21세기의 욥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 자기가 옳아요.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옳다 하고, 감리교는 감리교대로
다 옳다고 합니다. 성결교는 성결교대로 옳다고 하고, 오순절은 오순절대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그들에게 사랑이 없느냐. 성경을 안다는 것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사랑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은 것인데, 하나님이
사랑이시면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억지소리 같지만 성경을 가마솥에 넣고 삶을 수만 있다면 그 진국은 구원일진데
그 구원이 뭐냐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시키는 사랑입니다. 복음의 종착역은
우찌무라 간조가 말했듯 진화의 종국 곧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은 다 받아들이지만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소홀한 것 아닌가
자성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방법이 잘못되었지 않았느냐? 그 말씀을 자기화 시키는
방법이 잘못되지 않느냐? 아니 무지하지는 않는지 반드시 다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