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원죄론 (原罪論)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5:12-14).
신앙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왜 멸망을 당하게 되는가?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것보다, 먼서 자신이 죄인(罪人)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기만 하면 치료책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罪人)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는 어떤 측면이 있는가?
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罪)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死亡)이 왔나니”(12상) 하고, “죄와, 사망”(死亡)이 함께 등장합니다.
㉠ 이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심을 알고도 범했으니, “사망이 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②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하)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는데,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14상) 합니다. 즉 금단의 과실을 범하지 않은 자들도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 이점에서 12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과, 14절의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이라는 상반(相反)된 표현을 음미해보아야만 합니다. 이 두 구절을 결부시키면 아담처럼 선악과를 범하지 않은 자들(14)도, 죄를 지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되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③ 사도는 대답하기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4하) 합니다.
㉠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오실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 “표상”이란 “모형”이 된다는 말입니다.
㉡ 이점을 사도는 “부활장”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하고 말씀합니다. 아담은 개인(個人)으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시조요, 대표자(代表者)의 자격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아담이 죄를 범할 때에 온 인류는 “아담 안에” 있은 것이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를 “원죄”(原罪)라고 말합니다.
㉢ 히브리서 7:10절은 원죄교리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는 “조상(祖上)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합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때는(창 14:20) 아들, 이삭도 태어나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증손자인 레위가 태어날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④ 이런 맥락에서 인류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을 때에, 아담의 후손들은 어디 있었던 것이 되는가?
㉠ 모든 인류는 그의 조상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서 함께 죄를 범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아담 이후의 자손들이 다 죽었다, 즉 사망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死亡)이 왕 노릇하였나니”(14상)가 이런 의미입니다.
㉡ 예를 들어 “태어나자 죽은 어린애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죄를 짓기는커녕 죄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에게 덮쳤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는 원죄 하에서 태어난 것이며 사망은 그 어린애 위에도 왕 노릇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성경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 59:2) 하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 분리(分離)된 상태에서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난 후에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끊어진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쪽이 아닌 반대편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죄(原罪)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⑤ 이점을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 51:5)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무슨 뜻인가 하면 다윗은 자신이, 99%를 잘해오다가 밧세바를 범한 1%를 잘못했다는 식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 덩어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신다”(렘 17:9-10)는 점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罪人)임을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⑥ 사도가 이처럼 “원죄” 교리를 역설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첫 대표자로 말미암은 “원죄교리”가 세워지지 않으면, 새로운 대표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교리”도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4하) 말씀한 것입니다.
㉠ 이 시대는 원죄교리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원죄교리를 부인하고 나면, 결국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담당하셨다는 대속교리도 부인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려가 아니라 그들은 대속교리를 “도살장의 신학”이라고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 원죄설의 어두운 면만을 보지 마십시오. 같은 원리(原理)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이 되어, 절망 중에 있던 온 인류에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하고,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18-19절을 분해하면,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8-19) 하는 대조(對照)가 드러납니다. 사도는 이 영광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원죄교리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⑦ 고린도전서 15:45절에는 의미심장한 진술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시조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침투한 “죄”가 온 인류에게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몸에 짊어지시고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처리하심으로, 아담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원죄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 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고린도전서 15:4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마지막 아담”이라 했으면, “마지막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째 시조(始祖)가 되셨기 때문에, “둘째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시조는 더 이상 아담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고 말씀합니다.
㉢ 형제여, 첫 아담이 있는가 하면, 마지막 아담이 계십니다. 인류의 대표자인 “첫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대표자가 되시는 “둘째 사람”이 계십니다. 그리고 “원죄”가 있는가 하면, 더욱 넘치는 “원복음”이 있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원죄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