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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거유이며 의병장이다.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홍으로 춘천의 가정리에서 중곤(重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이항로, 김평묵, 유중교등 화서학파 거유들에게 차례로 배웠으며, 유중교의 사후에는 그를 이어 선비들을 이끌었다. 을미년에 단발령이 있은 후, 처신방법을 두고 논의한 결과 의병을 일으키는 길, 망명하여 도를 지키는 일, 자결하거나 은거하는 길의 세 가지 노선을 정리하고 그 자신은 두 번째 길, 즉 망명하여 도맥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인사우들이 봉기하자 이를 후원하였고, 후에는 그 자신이 대장으로 추대되어 호좌의진을 영도하게 되었다. 영월에서 등단한 유인석은 곧장 제천을 장악하고, 개화정부의 명을 받드는 지방관들을 처단하였다. 이후, 친일정책의 지방거점인 충주관창부를 공략하고, 영남지방까지 병력을 파견하여 기세를 올리는 등, 을미의병기 최대 전과를 올려 사방의 의병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군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온 호좌의진은 이후 주변의 여러 고을을 장악하고 사실상 군정을 실시하면서 가흥과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결국 관군을 이끌고 온 장기렴의 군대에게 패하여 제천을 내주었고,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서북지역에서 재기하기 위하여 서행길에 올랐다. 도중에 서상렬 같은 핵심간부를 잃고 서북지역에서의 재기도 여의치 않아 압록강을 건넜다. 이후 유인석은 만주지역에 항일운동의 근거지를 만드는데 전력하였으니, 이는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효시가 되었다. 한때 귀국하여 강학활동을 하면서 향약활동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나, 정미의병이 좌절되면서 다시 블라디보스도크로 망명하여 해당지역에서 활동하던 지사들과 협력하다가 만주로 이주하여 1915년에 서거하였다. 이처럼 그의 생애의 마지막 20년은 의병의 최고 지도자로서 의병의 화신과 같은 삶이었다. 그의 사후 항일의병은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군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바로 전해인 갑오년과 연장선에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갑오년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이어 한반도가 청일전쟁터가 됐고 갑오경장이 행해졌다. 이후 간지로 기억되는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 기미독립운동(1919) 등이 일어났지만 120년 전 을미년처럼 3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 ‘을미’ 이름이 붙어 불린 적은 없다. 1895년 초 일본은 독(毒)이 올라 있었다. 청일전쟁 승리에 따른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랴오둥 반도를 차지했으나 러시아 주동으로 독일·프랑스가 소위 ‘3국 간섭’을 벌였다. 결국 랴오둥을 반환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얄밉게도 그 대가로 랴오둥 반도의 항구 뤼순, 다롄을 조차 받았다. 조선도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 했다. 러시아에는 탁월한 외교관 베베르(웨베르라고도 부름)가 있었다. 1885년 첫 주한(駐韓) 러시아공사로 부임, 10년 넘게 근무했다. 고종과 민비 모두 그를 좋아했다. 1895년 7월 러시아는 일본을 의식해 베베르를 멕시코 주재 공사로 전보키로 했다. 그런데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유임시켜 달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한 달 후인 8월(음력), 러시아공사 교체기에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의 지령을 받은 미우라공사가 일본 불량배를 동원해 궁궐에 침입, 민비를 시해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일본수상은 이토 히로부미, 외상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단발령은 을미사변으로 점화된 의병에 불을 질렀다. 이른바 을미의병이다. 제천의 유인석, 홍주(홍성)의 김복한, 춘천의 이소응 등이 이듬해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왜적을 토벌하자”는 기치를 걸고 인근 관아를 점령하고 서울로 올라갈 기세를 보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베베르 및 친러파의 주선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도피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고, 동시에 친러내각이 등장했다. 새 내각이 단발령을 철폐하고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리자 의병활동은 잠잠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동시에 광무개혁을 단행했고, 독립협회가 설립돼 외세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으나 그 한계는 명확했다.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은 묵살됐고, 독립협회는 해산됐다. 왕은 국민주권주의에 의한 근대적 국가를 원하지 않았다. 을미년도 조선 왕실과 지도층의 무능함,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낸 한 해였다. 12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또 미·중·일·러 등 강대국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
첫댓글 충북 제천시 진주강씨 선조님들은 류 인석 문인으로 의병운동에 참여 훌륭한 분들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