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최근 서구에서는 터부시해 마지않던 섹스라는 대화 주제가 죽음의 문제로 대체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이는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해 말하기는 쉽게 되었다.
죽음은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그렇듯이 세계적으로 노령사회가 되어갈수록 죽음의 문제가 화제가 되는 이런 추세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바로 일주일 전 사촌 동갑내기가 내가 보기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중학생 아들과 아래 초등학교 쌍둥이 아들들은 사망한 날 다음 날에야 비로소 수학여행에서 돌아오기 때문에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고 했다.
그런데 조문 가서 들은 얘기로는 화장한다는 것이었다. 평소 죽는다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도 않고 있던 나에게 젊은 나이에 죽어서 갈 자리는 더더욱 준비하거나 염두에 둔 바가 전혀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중학생 혹은 초등학생인 이들 세 아들들은 나중에 커서라도 어디에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게 될까?
개인 묘지가 있다면 거기 가겠지만 화장한 경우 유골을 어디에 뿌렸는가에 따라 어느 산자락 혹은 어느 강가에 가서 추모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서울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 건립을 둘러싸고 혐오시설이라 하여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산 적이 있으며 이로 인해 서울시는 '산골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뜻도 내비친 바 있다. 그 조감도도 이미 나온 바 있다.
개인 묘지가 있지만 주로 공동묘지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최근 서울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 조성과 맞물려 혐오시설 수용과 배척 여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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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2004년 말까지 서울시내에 최초로 건립될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의 조감도. 총 5만평 규모로 지어질 추모공원에는 무연 무취의 최첨단 화장로 20기, 호텔수준의 유족대기실, 장례식장 12실 등을 갖춘 승화원과 납골 5만 위를 안치할 수 있는 추모의 집이 들어서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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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작 산 사람을 위한, 죽은 자들이 머물 건축과 조경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해 현대적으로 건축형식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논의되고 있지 않는 매우 딱딱한 이야기 주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사람은 어떤 집에서 사는가? 우리나라에서 '산골(散骨)정책'에 대해 논란이 많은 상태지만 서구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자연매장 제도가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와 관련된 건축 경향에 대해 짚어보는 것은 우리나라 장묘 문화 발달에 있어서도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묘지와 건축
영국에서 어느 역에서든 열차를 타보면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자그마한 교회부속묘지나 빅토리아 시대 풍의 공동묘지들을 수많이 지나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산에 있는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영국 공동묘지의 경우 으레 천사 같은 고결함을 간직한 무덤들로서 묘비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으며 내부는 무성한 버들리아(라일락 향이 나는 하얗거나 노란 색의 송이들이 있는 관목으로서, 이는 1715년 사망한 영국의 식물학자 아담 버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와 애도의 염이 두텁게 배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도 현대의 공동묘지들은 황량하기 그지없으며 평평한 마당으로 되어 있다. 이런 곳은 마치 슈퍼마켓 주차장의 승강기처럼 영적 고양을 위해 무진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는 마치 이미 포기해버린 인내력 테스트와도 같은, 아무런 특징도 없는 정체 모를 막연한 묘비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바로 이것이 현대인들이 죽음을 맞는 방식이며, 이런 묘지들은 마치 모든 공포심을 없애고 대신 평범함과 진부함으로 채우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과거 공동묘지 건축 역사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건축가인 켄 워포울은 실상 건축학의 근원과 발달은 시신의 매장에 힘입은 바 클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인간적 조경의 심오한 변화를 주도해온 원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워포울은 금년 '최후의 풍경화 : 서구 공동묘지의 건축학'(리액션 북스 출판사)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나아가 공동묘지는 과거 문명, 신념체계, 족보학 등의 측면에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예컨대 스페인의 건축가 페드로 아자라는 인류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중 대부분이 땅에서 나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와 같은 지적이 그다지 들어맞지 않는 것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더글라스 데이비스와 알스테어 쇼라는 두 명의 사회학자는 20세기 후반 화장제도가 급증하게 되면서 화장장이야말로 "사회적 아이덴터티를 전멸시키는 바로 그 중심"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에서는 이제 공동묘지 조경이나 경치에 대해 도대체 아무런 역사적 흔적조차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자연매장' 방식이 급속도로 번져나가고 있다.
생태환경 고려한 자연매장 제도
우리나라 서울시 측에서도 납골시설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면서 '산골정책'을 제시했다. 즉 2002년 서울시 화장률이 57.1%에 이르렀으나 납골 시설을 짓는데 필요한 땅과 예산확보가 어렵고 산림훼손도 심각하다며, 대형 유골 저장함에 유골을 붓도록 하는 방식이나 땅을 30㎝ 정도 파고 유골을 뿌린 뒤 흙을 덮는 방식 등을 선택해 용미, 벽제, 망우, 내곡리 등 시립묘지 한두 곳에 유골을 뿌릴 수 있도록 하는 '추모의 동산'을 시범적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장기적으로는 산골 정책이 옳지만 갑자기 산골 정책 운운하는 것은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자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화장률이 일정수준이 넘은 뒤 공립 장묘시설을 서서히 줄이면서 산골 정책을 펴나가는 게 순서라며 산골에 대한 시민의식이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추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의 경우는 어떤가? 스테파니 윈리치에 따르면 1993년 칼라일 지역 단 한 곳에서 시작된 자연 매장 숲이 이제는 영국 전역에 160여 곳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연매장제도 지지자들조차도 이 매장 방식이 급속하게 널리 퍼진 현상에 대해 깜짝 놀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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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우리 시민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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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원 | 우리나라 산골정책 방침이 서구의 자연매장과 어떻게 다르며 달라야 하는가와 상관없이, 산골정책을 포함하여 이들 화장과 생태환경을 고려한 자연매장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수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묘지 건축 혹은 묘지 조경학에 미치는 그 영향은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매우 멀리에까지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사후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와 같은 목적론적 문제가 아닌,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단지 기술적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은 역사적 흐름과 결코 썩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워포울의 지적에 따르면 19세기가 시작되는 벽두에 이미 뻬르 라쉐즈는 자신의 저서 서문에서 새로운 죽음의 문화가 서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것은 죽음에서 질병의 고통과 종교적 두려움의 문제를 제거하려 했던 계몽시대와 프랑스 공화정이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의 편린이기도 하였다.
스톡홀름 숲 속 공동묘지
20세기 들어 그와 같은 급진적인 방식으로 공동묘지 건축의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스톡홀름의 숲 속 공동묘지였으며, 이는 현대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와 타협을 잘 이루어내기 위한 방식이었다.
이 공동묘지는 널리 바라다 보이도록 탁 트인 잔디밭으로 되어 있으며, 풀로 우거진 작은 언덕과 그 꼭대기의 숲이 있고, 탁 트여 하늘이 바라다 보이도록 되어 있어서, 결국은 인적 없는 묘지에는 집중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든다.
반면 이 스톡홀름의 숲 속 공동묘지에서 묘지들이 아름다운 숲 속에 불규칙하게 산재해 있도록 배치한 것은 삼림과 풍경의 집단적 체험이야말로 인간의 정서를 틀 지운다는 점을 뜻했다. 워포울에 의하면 건축사가 마르크 트레이브는 최근 스톡홀름의 숲 속 공동묘지를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하며 심오한 현대 조경물"이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영국의 전통적인 공동묘지와 스톡홀름의 숲 속 공동묘지 둘 다 조경과 건축 디자인에 있어서 엄청나게 창조적인 모델인 동시에, 당대 시대 및 환경에 대한 정치적 기록들과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델들이었다. 둘 다 한 세기 이상을 내다보고 원칙과 기준을 정했으며 그 영향력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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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숲속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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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펄뮤터 |
| 각국의 화장률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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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화장률(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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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21% 벨기에 35% 체코공화국 76% 덴마크 71% 핀란드 28% 프랑스 19% 영국 71% 헝가리 34% 에이레 5% 이탈리아 7% 네덜란드 49% 노르웨이 32% 포르투갈 20% 스페인 15% 스웨덴 70% 스위스 76% 미국 27% 한국 33.7% (한국의 경우 2000년 통계임)
(출처: 영국화장업협회) / 문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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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날 서구 공동묘지의 통합적인 문화적 기능은 이제 더 이상 안도감을 주고 있지 못하다. 다른 변화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대체로 보아 화장 제도야말로 공동묘지를 대체한 것이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의 시신을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화장하는 것, 둘째 매장하는 것, 셋째 그 자체가 머물 공간을 건축하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방식 모두 당대 사회 및 그 사회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도전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화장률 통계를 보면 명확한 패턴과 놀라운 변동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카톨릭 교회측은 화장에 대해 반대 의사를 약화된 형태로나마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다. 에이레,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지의 낮은 화장률은 이 점을 반영한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중에서도 편차가 크게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서는 쉽사리 설명할 수 없다.
똑같이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체코공화국과 헝가리 같은 나라가 큰 편차를 보여주는 점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네덜란드 등이 체코공화국, 덴마크, 영국, 스위스, 스웨덴 등에 비해 화장률이 왜 낮은가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여기에는 종교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개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 프로테스탄트 문명권에 속하는 미국도 화장률이 낮다는 점이 이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사실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면서도 화장률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연구성과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워포울은 단순하지만 여러 정황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북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화장도 어떤 형식이든 매장도 괜찮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묘지를 나중에 다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땅위에 불룩 둥근 봉분을 만들어 매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남유럽 국가들은 화장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땅 속이든 땅 위든 어떤 식으로든 매장하는 것을 좋아하며, 단지 십 년만 지나도 묘지 자리를 재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한 자세를 견지한다.
한편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아직도 부활신앙이 꽤 강한 편이어서 매장을 선호하며, 묘지 자리의 재활용 및 '자연매장' 풍습은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다.
화장장 건축
화장제도는 공동묘지 건축에 대해, 나아가서는 죽음이나 사후의 명성과 추억에 관한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억제효과를 미쳐왔다. 워포울에 따르면 이렇게 화장장 건물과 그에 따른 추억의 정원 등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건축, 조경, 전반적인 미학적 설계 등에 관한 저서나 논문이 출간되거나 발표된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사실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보기 드문 비평가에 속하는 컬은 "영국의 화장장들이란 게 대부분 고통스러울 정도로 진부하기 짝이 없으며 디자인의 빈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고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로 짜여져 있는 탓에 이를 무리 없이 해결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혹평하였다.
영국에서 화장장 건물들은 죽음의 신비나 의식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전달하는 바가 없으며, 실내외 공간과 장례 행렬을 통일적으로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즉 화장장 건물들이 예쁘긴 해도 깊이 있는 심오한 맛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덤이든 납골당이든 유해를 안치한 최종적인 건물이든 간에 실상 시신이야말로 안장된 곳을 설계하고 명확하게 표현 해내기 위한 중심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시신이 없는 경우 건축이 해야 할 그 어떠한 역할도 없어지게 되면서 일종의 경건한 전통적 형식주의로 빠져든다.
따라서 깔끔하게 정돈된 추억의 장미공원, 유골 안치소의 정밀한 배열, 수수하며 삼가는 자세의 화장 예배 등속의 그 어느 것들도 기념비적인 조경을 갖춘 공동묘지이기는커녕, 무덤이나 납골당의 윤리적 힘조차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장제도에 대해 건축가들이 의미 있는 대응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화장을 보다 더 선호하여 선택하게 된 이유라는 게 인체란 죽어서 재로 변하며 그 바탕에는 불멸주의 사상에 대해 명확한 반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워포울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BC 1세기 경 로마의 건축가이자 공학자) 형 인간"에서 르 꼬르부지에(1887-1965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이자 작가로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모더니즘 학파의 지지자였으며 수많은 기능성 콘크리트 건축물 및 고층 주거단지 등을 설계했다)가 항상 근거로 삼았던 6피트 키의 런던 남자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지난 역사의 대부분에 있어서, 바로 그 인체의 크기와 형태야말로 건축의 기본 척도와 등급을 제공해 왔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북미 지역의 경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대영묘 형태의 벽이 있는 무덤과 봉분을 갖춘 지상 매장 제도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한 크고 형식적인 건축물을 만드는 일을 포함하여 불멸의 기념비적 공동묘지를 위한 새로운 표현형식과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다.
워포울에 따르면 이탈리아 북부 산 카탈도 지역에 있는, 로씨가 설계한 "죽은 자들을 위한 타워 블록"은 이와 같은 새로운 형식주의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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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산 카탈도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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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드 론티 |
| 스페인 해안 공동묘지
최근 스페인 건축가 세자르 포르텔라는 스페인 갈리시아주 피니스테르에 스펙타클한 공동묘지를 설계했다. 포르텔로는 대서양 쪽을 향한 갑 지역에 위치해 있는 공동묘지를 화강암 직육면체들이 서로 임의의 각을 이루면서 바다를 바라다보도록 하면서 연속해서 배열하는 형태로 설계했다.
각각의 화강암 직육면체는 매장을 위한 12개의 감실를 두도록 하였다. 이 화강암 직육면체는 인간의 덧없음과 무상함 혹은 자연의 침식작용이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한다는 도전적인 모습으로 대서양을 맞서 바라다보는 형태로 되어 있다.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는 자연매장에 대한 선호도 증가가 있는데, 이는 건축학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된 형식주의 조경 전통에 대해서조차도 저항하는 것이 된다. 자연매장 지지자들은 마치 지구상에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능한 한 재빨리 가다듬지 않으면서 가꾸지 않은 경치 속으로 융합되어 가도록 공동묘지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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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갈리시아 피니스테르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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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사오 스즈키 |
| 자연매장과 건축
로마 카타콤의 묘비명과 묘비문 등에서부터 18세기 이후 비석 숭배물에 이르기까지, 과거 2천 년 동안 매장과 장례의식의 가장 커다란 역할이라고 하는 게 후세에게 각자 삶의 기록들을 전해주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매장의 급증 현상은 정말 놀라운 급진주의를 가늠케 한다고 본다.
최소한 어떤 형태일지라도 매장 지점의 디자인이나 묘비명 측면에서 보았을 때 자연매장은 바로 이런 역할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와 후세에 아무런 기록도 전하지 않고자 하는 바램은 적어도 서양 문명권에 있어서조차도 예기치 않은 최근의 현대적 현상이라고 일컬어진다.
현대의 자연매장 제도는 선사시대나 기독교 이외의 신앙체계에서나 발견되는 잔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종류와 형식의 생태인식의 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말을 살아온 수많은 노년 계층은 이제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이미 너무도 많은 역사가 기록되어 왔으며,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간에 자연과의 조화야말로 역사의 천사에게 무거운 작업량을 추가하는 것보다 더욱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영국 콜니 자연매장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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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콜니 자연매장공원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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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최근 만들어진 영국의 숲 속 매장 제도에 대한 아주 좋은 본보기는 2000년 문을 연 캠브리지 동쪽 노위치 부근의 콜니(Colney) 숲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매장공원은 12에이커에 달하는 장년기에 이른 무성한 숲 속에 조성되어 있다.
돌로 된 비석도, 나아가 참나무·벚나무·흑단나무·마호가니 같은 단단한 목재로 된 비명까지도 전혀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매장에 부수되는 모든 것들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될 수 있는 재료들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이 곳의 매장 구역은 임대기간이 2099년 만료되도록 되어 있다. 모든 구역이 가득 차게 되면 이 곳 전체가 다시 자연 숲으로 되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며 어느 한 트러스트 측의 보호 하에 놓이도록 되어 있다. 장례식은 온갖 종교의식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아니면 아예 장례식 그 자체가 없을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이 공동묘지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조경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이 자연매장공원의 핵심은 묘지들이 가능한 한 빨리 자연 숲의 서식환경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자연으로의 복귀야말로 궁극적인 최종 바램이라는 식으로 자주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지곤 한다. 예컨대 이곳에서 85세 남자의 묘를 표시하는 조그만 한 목재 표식에는 "이 푸르고 조용한 곳에서 나는 평화와 안식 속에 잠들었노라"고 쓰여져 있다.
콜니 숲은 전혀 무섭지도 않으며 병적이지도 않다. 숲 그 자체는 수십 년 동안 가만 내버려둔 채로 지나고 나면, 마치 성당의 오솔길과 큰 나무 밑 풀숲처럼 나무로 된 차양막을 뚫고 통과되어 나오는 경사지의 황금빛 햇빛을 받는 것처럼 절묘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파른 대지는 삼림을 통해서 구불구불한 오솔길 망을 만들어주고 있으며, 나무 사이로 호수와 멀리 내다보이는 다른 조망권의 장관도 언뜻언뜻 바라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woodlandburialparks.co.uk에서 엿볼 수 있다.
지금 살아가고 사람들 중 누구도 사후에 가서 묘지 위치 선택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든지 트랙이나 순환도로의 오른쪽과 왼쪽의 묘지 위치가 뒤바뀌었다든지 하는 등의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동묘지가 죽은 사람들, 아닌 산 사람들을 위해 설계되고 만들어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서구인들은 묘지의 위치가 두려움과 걱정과 불안을 완화시켜주며 여읨과 슬픔을 가라앉혀 주며 달래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우리나라는 풍수지리설 등으로 그 도가 훨씬 지나치지만 어쨌든 묘지에 대한 기본 생각 자체는 동서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하지만 20세기를 살아 나온 사람들은 이제 이 점에 대해 어쩌면 요령부득이 되고 말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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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콜니 자연매장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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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호 |
| 빈익빈 부익부
공동묘지 건축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영국의 경우 시민문화의 퇴조 및 재정난이라고 하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2002년 '3개 주 화장장 분쟁'이라는 무시무시하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건에서 불거져 나왔던 것처럼, 장례문화는 곧 당대의 시장경제 구조를 반영한다.
당시 30년 가까이 앨라바마주, 조지아주, 테네시주의 3개 주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시신들에 대한 화장업무를 담당해오던 해당 화장장 측은 화장로 시설 자체가 잘못되고 결함이 있었던 탓에 화장을 대기하고 있던 3백 구 이상의 시신들이 야외 숲 속과 야외 헛간에서 방치되어 부패하거나 얕게 판 구덩이에 싸여진 채 방치해왔다. 이에 관한 소송 등을 비롯하여 최근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http://www.lieffcabraser.com/cremations.htm을 참고하면 된다.
결국 미국에서도 부자 계층은 거창한 사설 장묘를 통해 배타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반면, 가난한 계층 사람들은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지원을 받는 값싼 매장이나 화장에 급급해 하면서도 규제도 거의 받지 않으며 따라서 위신도 거의 없게 된다.
서구 상류사회에서 죽음의 문제가 대화주제로 터부시해 마지않는 섹스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아직은 정도가 덜 하지만 서구의 서점가와 도서관에는 불치병, 여윔, 슬픔 등에 잘 대처하는 법에 관한 책들로 가득 차 있을 정도이다.
어찌 보면 서구인들은 죽음의 신비 및 그 고통에 대하여 훨씬 더 어른스러워지며 생각이 깊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워포울은 그보다는 오히려 현대 문화가 정작 바로 그 죽음에 관한 대중적인 모습 속에서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고 여기고 있다.
즉 크게 파손된 채 내버려져 있는 과거 시대의 공동묘지들을 비롯하여, 나아가 현대의 공동묘지들이 풍기는 실용성을 앞세운 황량함과 삭막함, 그리고 화장장 건물과 그 정원에 대해 가다듬어야 할 게 많다며 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게 구는 것들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길거리를 말끔하게 청소할 뿐만 아니라 과거 한때는 죽음에 대해서까지도 장엄하게 모셔 마지않았던 바로 그 근현대의 시민문화에 대한 믿음이 크게 와해되었다는데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본보기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장장을 혐오시설로 보아 이를 배척하는 움직임이나 산골정책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크게 일고 있지만 정작 망자를 모시는 건축이나 조경에 관한 논의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도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실정을 고려하여 산 사람들을 위한 바람직한 매장건축의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한 번쯤 되짚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재작년인가 다른 일로 노르웨이 오슬로를 찾았다가 마침 우연한 기회가 있어서 오슬로 도심 가까이에 있는 엄청난 규모와 넓이의 공동묘지가 국립묘지를 겸하고 있는 곳을 휴식 삼아 찾아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산 사람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도심 가까이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