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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
진승 · 오광의 농민봉기를 기폭제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진 타도의 물결은
마침내 항우와 유방의 숨 막히는 각축전으로 집약되었다.
이들의 대조적인 성격과 천하를 놓고 벌어진 팽팽한 접전의 드라마를
중국인들이 놓칠 리는 만무한 것이어서,
일찍이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에 넣어 특별히 지면을 할애했다.
항우가 고향을 눈앞에 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최후를 맞는 장면은
명문장으로 꼽히는 《사기》 중에서도 최고의 문장으로 여겨진다.
항우는 초(楚)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직을 지낸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항량의 손에 길러졌는데,
소년 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숙부 항량과 함께 양자강 하류 강동에서 거병하여
양치기를 하던 초의 왕족 심을 회왕으로 추대하면서 반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유방도 역시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그는 항우와는 달리 이름 없는 농민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농사에 뜻을 잃은 그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는 유력 가문인 여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뒤에 권력을 독단했던 유명한 여후이다. 고향의 말단 관직에 오른 유방은 죄수들을 인솔하여 여산릉 축조에 동원되었는데, 도망하는 이가 속출하여 화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아예 이들을 풀어주고 스스로 유격대장이 됨으로써 반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항우에 비하면 그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한 것이었다. 유방은 항량의 진영에 합류했고, 이들은 함께 진의 수도 함양을 공략하는 대출정에 나서게 되었다.
초 회왕은 장군들을 독려하면서 말했다.
"최초로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리라."
항우는 북로, 유방은 남로를 택해 각기 출진했는데
항우는 장감이 이끄는 진의 주력군 20만을 거록의 전투에서 궤멸시켜 용맹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막상 함양에 먼저 당도한 이는 유방이었다.
유방은 기원전 206년 함양에 입성하여
진의 허수아비 3대 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漢)왕을 칭했다.
그는 모든 재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으며
군기를 엄정하게 하여 민폐가 없게 하였다.
단 3조의 법,
이른바 약법 3장만을 남긴 채
일체의 법을 폐지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뒤늦게 관중에 다다른 항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실제로 홍문에 진을 친 항우의 군대는 40만,
유방의 군대는 10만에 불과했다.
만일 양군이 전투를 벌인다면,
유방의 군대가 패주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냉철한 유방은 현실을 직시하고 수치를 무릅쓰고 항우를 찾아 홍문에 나아갔다.
항우의 모신인 범증은
유방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자객에게 명해 검무를 추게 하면서 항우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방의 목숨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장량이
유방의 호위 무장인 번쾌를 불러들였다.
번개같이 날아든 번쾌는
됫박만한 술잔으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칼로 쓰윽 베어서 모조리 먹어 치운 다음,
유방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그를 죽이고자 하는 항우의 처사가 얼마나 용렬한 것인지 가차 없이 질책했다.
가슴이 뜨거운 항우가 멈칫하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범증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미 허사였다.
이것이 유명한 홍문지회(鴻門之會)이다.
함양을 장악하게 된 항우의 처사는
유방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미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함양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궁궐을 불사르고, 여산릉을 파헤쳐 재화를 획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관중 지역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로 일찍이 서주와 진이 일어났던 거점이자 경제적 기반이었다.
뒷날, 유방의 모사 소하는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방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주는 커다란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관중의 경영에 주력하여 든든한 후방의 보급원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항우는 초나라의 후예로서
초를 멸망시킨 진에게 복수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며,
역사를 되돌려 진 통일 이전의 사회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공신들에게 전국을 분봉했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그의 논공행상적인 영토분배는
매우 무원칙한 것이어서 커다란 불만을 샀다.
제후 왕들의 불만은 각지의 반란으로 표출되고
그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특히 척박한 땅을 분봉받은 유방의 불만은 대단한 것이었고,
때마침 항우가 초의 의제를 살해하자
찬탈자를 친다는 명분을 얻은 유방은 행동을 개시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활해
사림과 훈구가 대립하는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사실 항우와 유방,
즉 초와 한 사이의 3년이 넘는 대결에서
항우군의 무공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항우는 '산을 뽑을 만한' 힘을 지녔던, 중국사 전체에서 빼어난 무장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보급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후방기지의 건설에 실패한 항우는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많은 인재를 잃었다.
유방의 명장 한신도 항우의 휘하였는데,
그를 얻은 유방은 열세를 만회하고
항우 군에 마지막 쐐기를 박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해하(안휘성 화현)에서 겹겹이 포위된 항우의 귓가에
사방으로부터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가 유래하였다.
'어느새 고향 사람들까지 한나라의 군대가 되었던 말인가?'
비감한 심정에 빠진 항우는
한밤중에 일어나 주연을 베풀고,
애마 추와 연인 우미인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시, 해하가(垓下歌)를 남겼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덮었건만(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했도다,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時不利兮騶不逝)
추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騶不逝兮可奈何)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한단 말인가(虞兮憂兮奈若何)
4주 만에 포위망을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향 마을 앞에 선 그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의 목은 한 군에 투항한 고향 친구 여마동에게 주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기원전 202년
최후의 승자 유방이 마침내 제위에 올라 한(漢) 왕조를 세우니,
그가 바로 한 고조이다.
한 고조는 말했다.
"나는 장량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은 한신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안다.
반면 항우는 범증 한 사람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이유이다."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항우보다 뛰어난 개인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인재를 잘 활용했으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언제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마침내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 제국은 기원을 전후한 약 400년간의 장구한 통치 속에서
진시황이 꿈꾸었던 만년 제국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번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