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수필 8월호

[고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미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우리 삶의 본질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는 의미일까? 오늘 새벽 마주한 상황은 어쩌면 본질의 언저리를 설핏 들여다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지만, 제트기가 지나간 흔적 같은 하얀 궤적이 하루의 첫 페이지를 채워 놓았다.

 지난 밤 처음으로 119구급차를 불렀다. 저녁 무렵 집으로 모시고 온 아버님이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신 것이다. 당황하며 아버님을 부축하는 동안 아들은 주치의인 시동생에게 영상 통화를 연결했다. 서울에서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시동생은 바로 올 수가 없어 구급차를 부르기로 했다. 주치의의 안내에 따라 심호흡을 유도했다. 곧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신속하게 아버님을 휠체어로 옮겼다. 코로나19 때문에 보호자는 동승할 수 없으니 다른 차를 이용하란다. 아들과 함께 서둘러 구급 대원들이 일러준 병원으로 뒤따라갔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할 무렵 구급차에서 연락이 왔다. 청주시내의 병원은 응급실 이용이 여의치 않아서 다른 지역 병원을 알아보는 중이란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곳이 대전 성모병원이다. 아버님은 응급실 한 쪽에 별도로 분리 되어 있는 병실에서 치료를 받으셨다. 발열 증세가 있어서 일단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검사 결과에 따라 2주 정도 보호자도 함께 격리 치료실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과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경황 중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나온 것이다. 합리적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 3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 고민 끝에 결례를 무릅쓰고 둘째 시누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했다. 죄송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한시름 덜었다. 그런데 정작 난감한 상황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어차피 병실은 혼자 지켜야 하는 터라, 잠시라도 차에서 눈을 좀 붙이라고 아들 등을 떠밀어 보낸 뒤였다. 링거를 맞고 계시던 아버님이 소변통을 찾으셨다. 간호사가 가져 온 소변통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얼른 아들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직접 아버님의 용변 시중을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직장암과 폐암 두 번의 암을 극복하시는 동안에도 직접적인 병시중을 든 사람은 큰아들인 남편과 시간이 용이한 둘째 시누이였다.

그때였다. 아들을 호출하려는 순간 아버님의 단마디가 전광석화처럼 튀어나왔다.

 “그 통 이쪽으로 갖고 와라”

 내가 핸드폰에서 눈을 뗐을 땐 이미 바지를 내리신 뒤였다. 그곳엔 한결 같은 모습으로 한 집안의 위계질서를 지휘하던 어른 대신 한 아이가 있었다. 통을 받쳐드리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비집고 까닭 모를 슬픔 한 조각이 올라와 목울대를 건드렸다.

 자존감이 높은 아버님은 푸른 대나무 같은 분이다. 곧고 높지만 부드럽게 휘어지는 탄력성 있는 대나무처럼, 유연하고도 강직한 성품을 지니셨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집으로 모시는 것을 마다하시고 지금까지 혼자 지내신다. 큰 시누이와 맏며느리인 내가 틈틈이 드나들며 가사를 도와드리는데, 전화를 먼저 드리고 출발하면 당신이 먼저 청소를 해놓으신 뒤다. 들고 간 반찬을 받아 들고는 바쁜데 어서 가서 일보라고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내게는 ‘언니(큰 시누이)가 다 해 놓고 갔다’고 손을 못 대게 하시고는, 시누이에게는 똑같은 변명으로 철없는 며느리를 배려하셨다.

구순을 넘기신 아버님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다가 서울로 상경해 개인 사업을 하시며 인생 여정을 지나오셨다. 검소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오남매를 바르게 키우셨다. 나에겐 ‘존경심’과 연상 단어로 떠오르는 몇 안 되는 분이시기도 하다.

 유교적 가치관으로 예의범절을 으뜸으로 가르치시면서 큰 느티나무처럼 넉넉한 품으로 그늘을 드리우신다. 명절이 되면 나이든 자식들과 손자들까지 일일이 덕담과 이름이 적힌 봉투를 나누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부족한 맏며느리의 생일까지 그냥 지나치신 적이 없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집안 대소사에 소홀 할 때가 많은데도, 제사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면 늘 맏며느리의 수고를 치켜세우셨다.

 다행이 아침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퇴원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통화 중에 있던 시동생과 마침 근처에 있던 응급의학과 의사가 내 휴대폰을 넘겨받아 통화를 하게 된 결과였다. 아버님은 폐렴 초기와 과호흡증 진단을 받았다. 손에 든 처방약 봉지가 가볍지만은 않다. 약과 함께 담긴 숙제의 무게이리라.

보잘것없는 연민이 가없는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내가 받아든 과제다. 부디 석양이 빚어 놓은 고운 노을빛을 갑자기 나타난 먹구름이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혹여 심술궂은 구름이 장난기를 발동하더라도 휘둘리지 않기를. 때때로 현실적인 고달픔이 이성의 시야를 흐려놓는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켜켜이 간직했던 고마움 한 조각 꺼내어 씻어 내는 기지를 발휘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짧고도 긴 인생 여정, 밝고 평탄하지만은 않은 길이다. 본질적으로 유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고상하게 위엄을 지킬 수 있는 존재, 종족을 위해 따스한 유전자를 전파할 줄 아는 종種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차창 밖 풍경을 보시던 아버님께서 밤사이 눈이 내렸냐고 물으셨다. 살짝 새어나온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 내 눈에도 하얀 이팝나무꽃이 설화雪花처럼 보였다.

  “아버님, 이팝나무꽃이 정말 하얀 눈꽃처럼 보이네요.”

[신금철(수산나)]

시아버님을 향한 애정이 묻어나네요.
누구나 나이들면 어린애가 될 수 밖에 없지요. 고상한 품위도 강한 성격도 다 놓고 떠나야할 것들이네요.
나이들면 건강하여 자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큰 바람이지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고미화]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어느 때가 되면 나약한 인간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존엄성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듯합니다.

[이승애]

선생님의 글은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저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문장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미화]

고맙습니다.
흉내 낼 수 없는 탄탄한 실력을 갖추신 분께서 들려주시는 칭찬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감사인사드립니다.

[성산 김일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미화]

부족한 글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정옥]

구순이 넘으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보며 삶의 본질을 생각 합니다.
유교적 가치관, 예의범절도 급박한 상황에는 어쩔 수 없지요. 고미화선생님의 아버님께 대한 연민과 존경심이 절절합니다. '켜켜이 간직했던 고마움 한 조각 꺼내어 씻어 내는 기지를 발휘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글귀가 감동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미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성실하신 선생님의 모습 본받아야 하는데
저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네요.

[一又]

고미화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처럼 편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긴세월 함께한 아버님의 병환에 온 가족이 애정을 주시니 잘 살아오신 삶이시군요. 며느님 한테 그런 정을 느끼시는 시아버님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미화]

문득 에너지 넘치는 선생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늘 열정적인 선생님께 배운 것이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이방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깊은 의미를 찾으셨어요.
어려움에도 잔잔한 문장이 침착한 성품이 배어나는 듯합니다.

[고미화]

마음과 달리 제 자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희들에게 한결 같은 등불이 되어 주시는 선생님께 깊은 감사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유동진]

어김없이 나이가 드는 우리는 모두 삶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공감합니다. 절제된 표현, 의미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고미화]

사물에, 상황에 무심히 지나치지 못 하고
관조하게 되는 것도 나이가주는 선물인 듯합니다.
부족한 글에 세련된 강평, 고맙습니다.

[최아영]

스릴과 감동, 아버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보잘것없는 연민이 가없는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

<고상하게 위엄을 지킬 수 있는 존재, 종족을 위해 따스한 유전자를 전파할 줄 아는 종種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를 읽으며 자숙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좋은일이 더 많으시길요^^

[고미화]

스릴까지요? ^^
부족한 글 봐 주시고 응원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히, 유쾌한 나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