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닭니’의 연화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마을에는 바다가 있었다. 서해안 격렬비열도에서 가장 가까운 태안반도 천수만 리아시스 연안은 땅끝 그림자끼리 꾸불텅꾸불텅 이어져서 얼핏 보면 커다란 호수처럼 출렁거렸다. 유년의 소년은 이 세상의 모든 마을에는 반드시 바다가 옆구리처럼 붙어있는 줄만 알았다. 장원이네 뒤란이나 현수네 마당에서도 바다가 보였고 외갓집이나 당숙네 대밭에서도 언덕바지만 넘으면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갯바구니를 들고 바닷가 백사장에 앉아 있으면 수평선 너머로 안면도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게와 조개와 망둥이를 잡던 악동들이 겁도 없이 고두리 해안선(800미터)까지 개헤엄 내기를 거는 바람에 나 혼자 쪼그려 앉아 조마조마하게 구경하곤 했다. 내가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듯 수평선 저쪽에서도 누군가가 건너편 바다를 바라보며 있으리라 상상하며 하염없이 웅크려있었다. 나는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줄 알았다.
.
어린 나이에 서울 유학길에 오른 나는 향수병에 시달리며 콧물을 삼키곤 했었다. 우선 표준말에 적응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만원버스와 콩나물 학급, 매연과 소음, 미로처럼 빽빽한 골목길과 전선줄 사이에서 내 몸은 싸-하게 가물어갔다. 자취방 벽을 타고 스미는 빗물 그 방구석을 받치는 썩음썩음한 걸레 냄새를 견디기 힘들어 숟가락 잡을 때마다 울컥 어지럼증에 시달려야 했다. 한동안 키가 자라지 않아서 왜소증의 불안에 시달렸고 학급 석차 역시 꺼져가는 연탄불처럼 푸석푸석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딱 한 가지 자취방 호마이카 밥상에서 일기만큼은 열심히 썼다.
그러나 고향의 여자 동창생들에겐 내 힘듦도 사치스러웠던 것 같다. 키 작은 중학생 하나가 교복을 입고 동구 밖에 들어서면 그미들은 아줌마들 틈에 섞여 마늘밭 매다가 재빨리 밀짚모자를 깊게 덮고 얼굴을 감췄다. 그랬다. 겨울철, 바다에서 게와 조개를 담은 갯바구니를 들고 우리 집 마당으로 지나려다가 나를 피하여 서낭당 길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미들의 아비는 모두 가난했으며 남존여비를 받들어온 토종 고집쟁이들이었다. 육남매 건 팔남매건 모두 초등학교 졸업장으로 마감시키고 대개 똑똑한 아들 하나만 골라 찍은 다음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
나이 삼십 직후쯤, 천수만 누이들의 얘기를 쓰고 싶었다.
대보름 전날 사내아이들이 나를 따돌리고 즈이끼리 쥐불놀이를 떠나면, 모둠불 태우던 누나들 옆에 서성이던 거뭇거뭇 그림자 같은 기억들이다. 그미들조차 심심할 때 소년을 놀리기도 했다. 내가 술을 잘 마시거나 장가를 두 번 이상 갈 거라고 하여 우우 보름달 아래서 울리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였나, 나는 그미들의 좁은 어깨를 바라보다가 무심히 연화라는 이름을 붙여보았다. 꺾어온 아카시아를 내 책보 속의 찐고구마와 바꿔먹자는 영악스러운 연화도 있었고, 우는 나를 껴안고 달래다가 함께 우는 착한 연화도 있었다. 아픈 얼굴들이 한꺼번에 바구미 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묵은 항아리 바닥을 박박 긁어냈는데도 또 어디선가 또 기억의 물이 고여서 그 옆에 웅크린 채 흙탕물이 가라앉길 기다리곤 했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 ‘닭니(푸른나무)’를 썼고 나중에 ‘꽃 피는 부지깽이(온누리)’와 ‘토메이토와 포테이토(작은숲)’까지 연결시켰다. 열 권 정도의 책을 발간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탈진 상태가 되어 다음 책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
먼저 ‘닭니(鷄虱)’의 기억이다.
닭니는 보통 이(虱)보다 더 까맣고 십분의 일 정도로 훨씬 더 작으며 일단 몸에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집 닭장은 담벼락을 기준으로 안팎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닭들은 바깥에서 모이를 쪼다가 저물녘이 되면 바가지만한 구멍을 통하여 안창에 들어가 잠을 잤다. 닭장 철망 사이로 토끼풀이나 흘린 곡식도 뿌렸고 더러는 미꾸라지도 던져주면 닭들이 구구구 대가리 디밀고 모여들었다.
나와 병준이(3세)만 남기고 나머지 가족들은 서울 박람회에 구경 갔던 1960년대 초반이 배경이다. 외할머니가 병준이를 업고서 외갓집에 다녀왔으므로 나 혼자 토방에 앉아 햇볕을 쬐던 이른 봄날 오후였다. 노랑 병아리 한 마리가 무심히 철망 사이로 몸을 들이미는 것이다. 순간 ‘아차 큰일 났다’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들어가자마자 어미 닭들이 부리로 쪼아대면서 병아리의 노오란 깃털이 금세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안 돼. 쥑이지 마.”
나는 울면서 닭장 안에 뛰어들었다. 갑작스런 틈입객에 깜짝 놀란 닭들이 날개 치며 푸타타탁 뛰어올랐고 그 바람에 부리에서 빠져나온 병아리가 구멍을 통하여 안창으로 도망쳤다. 어미닭들이 안으로 쫓아 들어가 마구 쪼아대면 큰일이므로 소년은 담벼락 구멍을 몸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옴싹달싹 못했다. 움직이는 틈새에 어미닭들이 구멍을 침탈하면 병아리를 쪼아 죽일 게 분명하므로 소년은 통로를 막은 채 울멍울멍 버텨야 했다. 그렇게 몸으로 구멍을 틀어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이구. 울 액이.”
병준이를 업고 토방을 넘으려던 외할머니의 비명 소리에 잠이 깨었다. 밀려오는 저녁놀이 태연스레 모이를 쪼는 어미닭의 그림자까지 빨갛게 뒤덮는데 외할머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우리 액이 닭니 때문에 워쩐댜?”
닭장 바깥으로 도망치는 병아리를 보며 안도하는 순간 나는 온몸의 힘이 빠졌다. 외할머니는 발가숭이 손주를 아궁이 아래로 끌고 가더니 참빗으로 머리칼을 벅벅 긁어대었다.
티팃팃팃.
빗살 사이로 걸린 닭니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불길에 타는 소리가 쟁쟁 어지러웠다. 땡감나무 가장이가 통통하게 물오르던 이른 봄의 환영이다.
.
다음으로 연화라는 작명의 이름들인데.
기실 첫 번째 연화는 실증 여부도 가물가물하다.
그미는 쇳밭둑 당숙 회갑 때 장님 거지를 따라온 아홉 살 단발머리 소녀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한머리 악동들은 그가 단지 장님이라는 이유로 악마로 돌변했다. ‘생강밭을 밟았다’는 거짓말을 꾸미면서 돌멩이를 던지며 벌떼처럼 쫓아다녔다. 온몸에 돌우박을 맞은 늙은 장님 거지는 분기탱천 지팡이를 휘둘렀고 맨 앞에 쫓아가던 영환이가 스쳐 맞았다. (제대로 맞았으면 눈알이 빠졌을 정도로 ‘빠각’ 소리가 났다.) 마을 어른들이 조무래기들을 나무라며 내쫓았고, 포장 아래 잔치 국수와 술 한 잔으로 그니를 간신히 달랬던 것 같다.
잠시 후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 포만감으로 잠이 든 장님 거지 옆에서.
“야.”
단발머리가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글씨 좀 가르쳐 줘. 넌 학교에 다니니까 공부 잘 하겠지. 나도 열 살이 넘기 전에 글자를 배워야겠다.”
공책과 몽당연필을 내미는 손바닥이 은행잎처럼 샛노랗게 반짝였다. 나는 네모 칸마다 아라비아 숫자를 써줬고 해와 달과 토끼와 모자를 그린 다음 그 아래에 ‘해’ ‘달’ ‘토끼’ ‘모자’라고 써 줬다. 소녀가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글씨 연습을 시작하자 아주 잠깐 산토끼 맑은 눈이 반짝거렸고 공책 속의 모자가 조붓하게 고개를 조아렸던 것 같다. 그뿐이었고 우리들은 영원히 만나지 못했지만, 이따금 꿈속에서 ‘성냥팔이 소녀’로 되살아나곤 한다.
.
두 번째 연화는 내 아내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8남매의 맏딸이었던 그미네는 소도시 초등학교 뒷문 골목길에서 구멍가게를 했다. 가을이 되면 학교마다 운동회를 열었는데 그게 완전히 면소재지 전체의 잔치였다. 그미는 아이스케키 통을 짊어지고 운동장 틈새를 누비며 팔았다고 한다. 아이스케키 세 개를 팔면 한 개가 남았으니 구멍가게에 앉아 온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문이 남았던 게다.
그러다가 한 시간 거리의 이웃 학교 운동회까지 진출한 것이다. 젊은 아낙이었던 장모님과 일곱 살 소녀가 아이스케키 통을 하나씩 메고 만국기 휘날리는 낯선 동네 교문에 들어섰단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팔렸는데 갑자기 날이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는 것이다. 운동회를 집행하던 학교 측은 파장을 선언했고 구경꾼들이 비를 피해 썰물처럼 투덜투덜 빠져나갔다. 모녀의 케키 장사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아이스케키 통을 든 채 빗길을 치렁치렁 헤치는데, 아뿔싸 통 안의 얼음과자가 녹기 시작하는 것이다. 케키 공장에 도착하기 전에 죄다 녹을 게 뻔하므로 묘책이 없었다.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고.
“우리 둘이 죄다 먹어버리자.”
그들 모녀가 장대비 쏟아지는 추녀 밑에 앉아 막대기 비린 맛이 날 때까지 아이스케키를 깨물었다고 했고.
.
세 번째 연화는 사돈의 팔촌 되는 일가붙이 여동생이다.
아줌마는 시장에서 국화빵(풀빵이라 불렀음)을 구워 팔았다. 빵틀은 가로 세로 구멍이 다섯 개씩 총 스물다섯 개였다. 먼저 연탄불 위의 빵틀 구멍마다 헝겊 막대기로 재빨리 기름을 칠한다. 구수한 칫칫 소리와 동시에 아주 엷은 밀가루 반죽을 담은 주전자를 들이붓는 것이다. 밑바닥부터 노릇노릇 익어질 때쯤 양재기에 준비해온 앙꼬무치를 갈고리로 떼어 가운데 집어넣는 동작이 아주 빠르다. 마지막으로 다시 팥소 위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빵틀을 한 바퀴 돌려 양쪽 다 구워지면 갈고리로 빼내는 것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재빠른 솜씨였지만 아무리 열심히 손을 놀려도 가난의 등짐은 벗어날 수 없었다.
사돈네 소녀는 연탄불 옆에서 동화책에 빠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끝말 이어가기나 스무 고개를 했던 기억이 가장 또렷하다. 그러다가 손가락 빨아대는 나에게 사돈 아줌마가.
“하나, 먹어라.”
뜨끈뜨끈한 풀빵을 내밀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그 옆에 달라붙곤 했다. 나중 얘기지만, 뜨개질 밤마실을 나온 풀빵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병철이는 풀빵을 준다고 허먼 츰엔 ‘싫유’ 허구 도망치더니 야중에는 얼굴이 빨개진 채 몽기작몽기작 와선 ‘아줌마 하나만 주면 안 되나유’ 허더랑께유.”
아낙네들이 바닥 치며 배꼽을 잡으면 이불 속에 숨은 내 몸으로 신열이 잉잉 달아올랐다. 풀빵사돈네 연화는 이사 가던 날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눈이 시뻘겋게 울었다는데, 이상하다, 나는 안도감으로 아랫도리가 부풀었다.
네 번째 연화는 1년 선배였고, 두 살 더 많았다.
학년 1등을 해서 종업식마다 우등상 받으러 나가는 수재 소녀로 기억된다. 그러나 날품팔이 그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직전 이미 서울의 당구장집 식모로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중학교 입학의 꿈을 접은 마지막 시험에서는 서울의 사립 중학교로 가는 동철이에게 1등을 놓치고 2등을 했다. 학교 측도 야속했다. 졸업식날 최우수 학생에게 주는 도지사상을 동철이에게 수여한 것이다. 마지막 학기에 단 한번 1등을 놓친 게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집 여자 애라는 사정이 더 컸던 게 확실하다. 그미는 졸업식에 불참하면서 담임선생님께 마지막 편지를 썼다.
선생님은 제가 중학교에 못가더라도 공부만 잘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이미 희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식장에서 1등으로 도지사상을 타는 게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실제로 도지사상은 제가 타는 게 맞습니다. 선생님은 바르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저는 1등으로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희망이 없는 졸업식장엔 나타날 수 없습니다.
1967년 2월 14일 나쁜 아이 연화 올림
마지막 연화는 우연히 조우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르쇠로 지나쳤다.
그미의 남동생이자 대학교수가 된 내 친구를 만나는 길이었다. 열한 살 때였던가. 학예회 때 ‘가을 밤’을 독창하던 꾀꼬리 6학년 선배를 가슴에 담으면서 나는 ‘가을이라 고요한 밤, 달이 밝아서’라는 음계를 수도 없이 반복으로 불렀었다. 김교수가 중형 마트 정육점을 가리키며 즈이 누나라고 슬쩍 치고 나갈 때, 그미는 마트 안의 정육점에서 시뻘건 고기 도막을 절단기에 들이미는 중이었다.
그 후 몇 차례 찾아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이루지 못했다. 다가서다 돌아서고 또 그러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한 번은 고기도막 바코드를 붙이던 무심한 눈빛과 마주쳤지만 내가 먼저 눈을 돌렸으니 아,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장면이다. 풋보리 소녀를 초로의 모습으로 둔갑시킨 세월의 간극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모진 세월 그렇게 보냈구려.
즈이 살붙이들 기둥 되었다가, 주방 도구나 물걸레로 거침없이 변모하며 그렇게 남들만을 위한 의자로 인생의 칠부 능선을 보냈구려. 강산이 너덧 차례 바뀌도록 나무도마로 남아 쇳날 받으며 식솔들의 밥과 옷과 구들장을 꾸려냈구나. 상추 같은 웃음 던지며 진열대 거울 앞에서 머리끈 묶던 연화, 후덕한 군살이 붙은 초로의 연화를 보면 자꾸 눈이 시렸다. 그만큼 관음증도 깊어갔다. 더러는 용돈을 받으러 즈이 어미를 찾아온 후리늘씬 막내아들을 올려보는 장면도 잠자리마다 오래도록 복기했다. 그미가 포풀러 아들내미를 눈알에 쑥 넣고 단물 빨아 마실 때마다 신산고초를 함께한 기미의 흔적이 봉숭아 씨앗처럼 터지고 있었다. 인생의 나이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로 그렇게 기우는 중이었다.
기억력이란 것은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때로는 생물처럼 변화무쌍 유동치던 성장 소설 ‘닭니’는 2003년에 출간했었다. 다섯 소녀를 한 사람으로 뭉뚱그려 조합했는데 기실 몇 사람은 가슴이 너무 아파 잘라낸 것이다. 고무신을 꺼내려다가 물에 빠져 거품으로 떠난 연화가 그렇다. 훔친 시계를 들고 도망치다가 트럭에 부딪친 연화를 도저히 형상화시킬 자신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죽을 만큼 맞으면서도 우는 동생 때문에 어머니 따라 도망칠 수 없었다는 연화의 사연이 가로막으면 미루나무 이파리도 함부로 흔들리지 못했다. 아부지를 닮은 주정뱅이 사내에게 시집가기 싫어 양잿물을 마신 누이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위눌림으로 숨이 콱 막힐 것 같다. ‘닭니’는 그해의 ‘올해의 우수도서’로 추천되기도 했지만 3쇄 3500부를 끝으로 절판되었으므로 이제 그 책은 구할 수 없다.
첫댓글 첫문단을 뚝 떼어 한편의 산문시로 만들어 주세요. 내용과 운율이 파도 같네요....
공감! 첫문단 그대로 시입니다. 글구, 너무 아파서 쓰지 못한 나머지 연화들도 부탁해요. 가난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몇 명의 연화가 있지요. 한 명은 과수원집으로 시집 가서 면장사모님이 됐구요, 한 명은 성이 다른 남동생이 재벌급이 돼서 그 덕으로 잘 살고, 나머지는 소식 모르고, 대체로 해피엔딩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