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14장의 장편소설이며
1~13장까지는 아래에 연재되어 있습니다.
1/사랑, 장마로 오다
2/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3/첫 키스의 향기
4/철길이 닿는 바다
5/검은 그림자
6/굴레의 사슬
7/연못둥지과수원
8/안개 속의 덫
9/뒤틀리는 운명들
10/색깔이 다른 피
11/성(城)을 떠난 사막
12/장남들의 곡예비행
13/보이지 않는 길
14/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
<14장 마지막 이야기>
연리지漣理枝를 꿈꾸다
입천장 표면이 서로 달라붙은 것 같은 갈증으로 눈을 떴다. 입술은 물론 목구멍까지 타들어가듯 바짝바짝 말라 건조했다. 지난밤을 돌이켜 되뇌었다. 이별의 슬픔을 감내하지 못한 그녀는 물론 나 또한 그 자리에 그대로 널브러져 잠들고 말았던 것이다. 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다. 낮은 조도의 미등은 은은하여 여전히 황홀하기까지 했다.
정라를 살폈다. 그녀는 나를 마주한 채 서너 뼘 건너에 잠들어 있었다. 더구나 지난 밤 이별의 아픔과 과한 술에 고갈된 모습으로 풀풀거리며 알코올의 잔량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물과 화장으로 얼룩진 본연의 얼굴, 내가 옆에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않는 본능, 사람 냄새 나는 인간 그대로의 아름다움이었다. 아아, 도대체 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보고만 있어도 안쓰러운 이 여인을 어떻게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누구도 다시는 사랑할 수 없으리라.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나의 첫사랑이 그녀이듯이 나의 마지막 사랑도 그녀이어야 한다. 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고조할아버지부터 맺어졌던 굴곡의 대물림, 식민지를 함께했던 할아버지들의 신의, 징용과 동란에 휩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삶에 치열했던 아버지들, 그리고 그녀와 나!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사랑일 터.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고,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서 하나의 몸이 된 연리지,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기 하나뿐이어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의 새 비익조, 옛 시구詩句를 빌려 미래의 꿈을 실어 보냈던 간절한 다짐들. 그녀와 나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서 하나의 몸이 된 연리지 같은 운명이리라. 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아니하면 날지 못한다는 비익조 같은 운명이리라.
그깟 가난이 대수랴. 그녀가 내 청춘의 전부였는데 미래의 두려움이 고작 가난이더냐. 가난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치부하며 살자. 지나가는 감기처럼 시간에 흘려보내면 이겨질 것, 죽을 각오로 사랑을 불사르자. 그녀와 결혼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운명에 당당해지고 남을 일이다. 한줄기 햇볕조차 없는 암흑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자, 이제길고 길던 갈망의 세월을 끝내고 성스러운 마음가짐으로 그녀와 하나가 되자.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며시 포개었다. 결혼하자는 의미의 입맞춤이었다. 정라는 입술의 기습에 실눈을 뜨며 지그시 나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마치 오래된 아내처럼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결혼을 허락한다는 의미의 몸짓이었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마른 입술이 촉촉해졌다. 감미로웠다. 달콤한 입술, 세상 어디에도 이처럼 부드럽고 황홀한 촉감은 없을 터였다.
손은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장마와 함께 벼락같이 찾아왔던 가슴의 촉감이 손끝으로 되살아났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던 순간, 생각이란 더구나 할 수 없어 가슴으로부터 손을 뗄 수도 없었던 순간, 잊을 수 없었던 전율이 그때처럼 고스란히 손바닥으로 전이되기 시작했다. 실핏줄을 타고 세포 구석구석으로 내달리는 가슴의 감촉, 오랜 시간 꿈꾸어 왔던 가슴의 추억이 참으로 강렬하게 휘감겼고, 전율은 덩어리로 사무쳤다.
미등 속에서, 떨리는 감각에 의존하여 가슴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상의를 벗기고 비밀스러운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었다. 낮은 조도의 불빛 속에서도 뽀얀 속살이 부끄러운 듯 눈앞에 드러났다. 숨을 몰아쉬며 나머지 속박의 겹을 정성스럽게 걷어냈다. 나 또한 자유를 속박하고 감추었던 겉치레의 옷을 어설프게 벗었다. 세상에 처음 태어나던 순간의 부끄럼 없는 알몸이 그녀 앞에서 닻을 내렸다. 그녀와 나는 비로소 에덴동산의 자유로운 몸으로 태어났다.
나의 입술은 서툴렀다. 입술은 그녀의 목덜미와 귓불을 마구 헤매었다. 가슴과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순간 포도 알 같은 돌기가 입안에 들어왔다. 태초의 본능으로 유전된 유아의 기억이었을까, 치아를 빌려 양순하게 돌기를 잘근거렸다. 돌기로부터 출발한 경련이 그녀의 온몸으로 내달리는 듯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나의 호흡이 그녀의 숨소리와 교차되어 엇갈렸다. 멈출 수 없었다. 아니, 감히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안았다. 나의 몸이 그녀를 뜨겁게 품었다. 그녀의 몸이 나를 뜨겁게 보듬었다. 처음으로 기억해야 할 그녀의 몸이 내 몸이었고, 처음으로 간직해야 할 내 몸이 그녀의 몸이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하나의 몸이 될 연리지 같은 운명이었다. 서로가 한 몸이어야 했던 비익조 같은 운명이었다. 내 몸은 그녀의 몸에, 그녀의 몸은 내 몸에, 바야흐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 된 서로의 몸을 통해 과거의 사슬과 아픔의 상처는 걷히고, 화해와 용서와 미래의 희망이 새순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긴긴 어둠을 밀어낸 먼동이…… 창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어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와 나의 온몸을 감싸 안고 소담스럽게 토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