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 사관은 한국사 공격이 고조선이란 동일한 대상에게 집중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두 사관의 고조선사 공격의 핵심은 고조선 역사에 대한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광대한 영역을 모두 삭제해버리고 고조선이 단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영토적 야욕을 채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관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했던 것은 한강 이북이 중국사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의 영토를 영구히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북공정은 현재의 한강 이북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사에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도 있다. 우리 사회는 역사 침략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모든 문제는 밖에 있다는 듯이 대응해왔지만 사실은 안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우리 사회 내부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식민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잉태한 식민사관은 일제 패망이후에도 살아남아 우리 국민들의 현재의 역사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의 적자嫡子들은 실증사학이란 외피를 입고 살아남아 현재의 한국사를 식민사학의 아류로 만들었다. 이런 아류 식민사학자들이 가장 집요하게 공격하는 부분도 역시 고조선사인데, 이는 아류 식민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사관, 중화 패권주의 사관과 동일한 역사 인식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일제 식민사관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한국사는 식민지 상태로 출발한 것이 된다.
중국 동북공정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고조선사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된다. 시조가 중국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주장은 번지수가 틀린 대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을 부인하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시작한 고조선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사는 한국사라고 대응해 왔던 것은 그간 단군조선을 부인해왔던 한국 내 아류 식민사학의 말 못할 속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솔직히 고백하고 반성할 때가 되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반성의 소산이다.
이 책은 그간의 연구사와 문헌사료, 고고학 사료에 대한 연구 검토와 현지답사라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만주는 물론 내몽고에서부터 한반도 남단까지 고조선의 강역을 직접 광범위하게 답사했다. 그 결과 한나라에 항복한 고조선의 항신(降臣)들이 고조선 부흥운동에 나섰던 사실들을 밝혀냈으며, 그간 한반도 북부에 있다고 주장되어왔던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중국 고대 사료와 하북성 현지답사로 찾아낼 수 있었다.
비파형 동검 하나를 보기 위해 흰 눈 덮인 대륙을 대여섯 시간씩 달렸던 그 순간, 멀리 서해가 바라보이는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 정상에 올랐던 그 감격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문헌사료를 살펴보면 살펴보는 만큼, 유물을 분석하면 분석하는 만큼, 현장을 답사하면 답사하는 만큼 고조선은 그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고조선사의 많은 의문은 이렇게 풀려 나갔고, 우리는 새로운 고조선의 실체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책이 고조선의 관심이 새롭게 모아질 수 있도록 고조선의 새로운 시작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었던 연구들이 있었다. 이 책이 안팎의 적에게 둘러싸인 우리 민족의 국가 고조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눔으로써 갚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한가람 역사문화 이덕일 연구소장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유사시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 핵심 논거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삼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의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쓴 중국 사서는 하나도 없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
이병도: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군국지’(郡國志)에서도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삼국사기 “낙랑군 등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이런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계 포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객도 있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ㅇ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
경기도 교육청과 동북아 역사재단의 갈등 무엇이 문제인가?
◇ 사회자: 최근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역사왜곡에 관련해서 경기도 교육청이 발간한 자료집이 하나 있습니다. "동북아 평화 교육 자료집". 이걸 놓고 경기도 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 두 단체가 해석차로 갈등을 빚고 있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덕일 소장님 무엇이 가장 문제인가요?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이덕일: 경기도 교육청에서 발간한 자료집은 현직 선생님들이 17분이 모여서 만든 자료집입니다. 자료집에 나와있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해가지고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교육부와 외교부를 통해서 수정권고로 문제제기를 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내용들이 무엇이냐면 경기도 교육청 자료집에서는 단군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더니 동북아 역사재단에서는 단군은 신화다. 그 다음에 고인돌을 고조선 묘제라고 했더니 동북아재단에서는 중국 동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고조선 묘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얘기를 했구요. 그 다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간도문제에 대해서 경기도 교육청 자료집에서는 간도가 한때 우리 영토였던 적이 있다라고 했더니, 동북아재단에서는 간도는 우리 영토였던 적이 없다라고 하고 또하나는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 경기도 교육청의 자료집은 백두산 정계비가 국제법상 유효하다라고 했는데 동북아역사재단은 백두산 정계비는 국제법이 성립되기 이전에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없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만, 요정도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 사회자: 굉장히 여러 분야에서 해석 차이가 있네요. 그럼 우선은 왜 경기도 교육청은 이러한 자료집을 내놨을까요?
◆이덕일: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들이 현재 국사 교과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인식을 하고서 이런 자료집을 만들었는데 그 자료집에서 나온 내용에 대해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선제적으로 공세를 펼친 겁니다.
◇ 사회자: 단군이 신화냐 역사적 사실이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덕일: 단군을 신화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이게 별로 성공을 못거뒀어요 워낙 일본사람들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해방이후에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이 계속 역사권력을 장악하면서 이 사람들이 소위 자기들은 신민족주의 사학자라고 하면서 계속 단군신화로 밀어붙이니까 일반국민들은 근거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서 해방이후에 오히려 신화라는 인식이 더 퍼져나갑니다.
단군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내몽골 만주까지 다 걸쳐져 있던 겁니다. 거기에 제가 최근에도 답사를 가봤는데 중국 내몽골 적봉이란 곳에 가면 석성 , 돌로 만든 성이 있는데 이건 완전 고구려 백제성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쪽에서 나온 자료집을 보니까 지금부터 4천년 전의 석성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럼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중국과 전혀 다른 우리와 똑같은 계통의 돌로 쌓은 석성들 그게 무엇이냐 이거죠. 그게 바로 단군조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조선은 일본이나 중국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거죠.
간도문제에 있어서도 동북아역사재단은 우리 영토인적이 없다라고 하는데 이건 진짜 역사공부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면 이 사실 하나로 그양반은 숟가락 놔야 합니다. 간도문제는 조선후기에 우리 백성들이 간도로 많이 넘어갑니다. 1900년대 초엽에 십만명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니까 간도 관리사라고 하는 어윤중 이범윤같은 인물을 보내서 조사를 시킨 다음에 분쟁이 되니까 분쟁의 해결점은 백두산 정계비거든요.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을 조사하자라고 해서 당시 김우식이라는 사람을 파견해서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하게 합니다. 그런데 백두산 정계비문제를 생각할 때 백두산정계비는 우리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설치하게 됩니다 청나라에서 목극등이라는 사람이 대표로 나왔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선부라는 인물을 보냈는데 목극동이라는 청나라 대표가 조선대표에게 당신은 나이가 많으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해서 이 사람이 안따라가요 목극등과 조선에서는 통역관이 올라가서 한것이기 때문에 백두산 정계비 자체가 불리하게 되어있습니다만 그 불리하게 되어있는 백두산정계비에서도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했습니다.
동쪽으로 토문이라고 하는데 토문이라는 것은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지리집에 보면 혼강 북쪽에 토문령이라는 고개가 있다고 기록이 되어있고, 중국 쪽에 있는 간도 쪽에 있는 강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1909년에 우리나라를 거의 장악하고 난 다음에 동청철도 만주철도 부설권과 간도를 바꾸는 겁니다.
일본이 청나라와 불법적으로 회담을 해가지고 조약을 맺어서 일본이 바꾼거지 대한제국은 넘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동북아재단에서는 우리땅이었던 적이 없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은 중국의 입장아니면 일본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는거죠.
◇ 질문: 아무튼 동북아역사재단은 수정권고를 교육청 쪽에 내렸으니까요 그분들이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덕일: 그러니까 큰 문제라는 거죠. 동북아 역사재단이라는 데를 설립하고 매년 수백억씩 국민세금을 지원할 때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 쪽의 입장을 서서 논리를 개발하고 제공하고 맞서라는 건데 거꾸로 중국이나 일본 극우파 입장에서 자꾸 논리를 전개하잖습니까?
◇ 질문: 고인돌 같은 경우 고조선의 고유 묘제냐 중국 동부에서도 발견된다?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덕일: 고조선의 표지유물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고인돌도 있고 비파형 동검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은 다 고조선의 강역들인데. 예전에 요문제 이전에 어떤 문제가 있냐면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을 평안남도에 있는 작은 국가였다 어떻게 보면 나라도 아닌 부족국가 정도였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중수교 이후에 중국에 왔다갔다하게 되니까 그쪽 중국 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조선 유물유적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고조선 강역이 확정되기 이전에 우리민족의 이동경로가 세군데입니다 하나는 중국 남방으로 가서. 백족 묘족이 되고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쪽으로 가고 또 한쪽은 몽골이나 만주 한반도 일본 이런 쪽으로 이동을 하는거죠. 그러니까 중국의 산동반도에서도 고조선의 유물이 나온다라는 것인데 산동방도도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 사회자: 그런데 동북아 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든 거 맞죠?
◆이덕일: 설립 목적은 그런데요.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이 동북아역사재단이 얼마나 우리 역사를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 극우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가에 대해서 일차 사료적 배경을 가지고 쭈욱 책을 쓴 책이 한국사 그들이 남긴 진실이라는 책인데 이 책에 나와 있는 부분이 무엇이냐면.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은 한강 이북은 한사군 영역이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강역이었다. 고로 한강 이북은 중국의 역사 영토다라는게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입니다. 중국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을 그대로 판박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조선시대때 성호 이익선생은 한사군은 만주에 있었다라고 얘기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석주 이상용,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던지 이런 분들은 일관되게 한사군은 만주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분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국수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사료가 있다는거죠. 일차 사료가 중요한거죠, 한사군이 설치됐을 당시의 사료를 예를 들면 사마천 사기라던지, 후한서 삼국지 같은 중국 고대 사료들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한데 거기서 딱 하나만 말씀드리면 한사군의 중심지 낙랑군의 위치를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기지재요동(其地在遼東) 요동(遼東)에 있다 이게 한번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동이 어딥니까? 만주 아닙니까?
[참고]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漢書』「薛宣 열전」‘師古曰:「樂浪屬幽州」
(『한서』「설선 열전」, 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後漢書』「崔駰 열전」,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
(『후한서』「최인 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후한서』「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史記』 「夏 本紀 太康地理志」,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사기』「하 본기 태강지리지」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晉書』「地理志」樂浪郡조-遂城:秦築長城之所起
*『明史』 「地理志」 永平府 : 昌黎-西北有碣石山.東南有溟海)(『명사』 「지리지」 영평부 조, 창려 서북에는 갈석산이 있고 동남에는 어두운 바다가 있다)
반면에 조선총독부나 조선사 편수회에서는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제 시대때는 조선사편수회 관점에서 배울 수밖에 없겠지만 해방이후에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공부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럼 당연히 1차 사료적 근거가 있고,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낙랑군의 강역을 중국 사료를 가지고 조사해보면 하북성까지 걸쳐있는데 우리가 그 땅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 사회자: 중국의 사학자들이 들고 나오는 사관은 과거의 일제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비슷하고,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건가요?
◆이덕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국민 세금이 지원이 된다는 것이죠 누가 보더라도 지금 동북아 역사재단이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장이 아니다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습니까? 논쟁의 옳고 그름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럼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은 중국을 위해서 동북공정을 하는데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국민세금을 써가면서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에 장단을 맞추냐 하는 점이라는 것이죠. 가장 큰 문제가.
◇ 사회자: 동북아 역사재단은 당초 구성될 때 어떤 기준으로 구성이 된 겁니까?
◆이덕일: 인문사회계에는 정해진 설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데, 특히 상고 역사 관련 기구가 만들어지면 한국 역사학계에는 소위 정설이라는게 있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의 정설을 따르는 사람만 학계에 대다수 남아있기 때문에 국민세금으로 동북공정에 맞서라고 기구를 만들게 되면 결국은 정설이라고 불리는 일제 식민사학을 지원하는 꼴이 된다는 이야깁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이 건재하게 뿌리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는 조선의 얼인 조선어와 조선사를 치밀하게 통제하고 조작했다. 일제는 조선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논리를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창조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가 국사학계 태두로 서울대에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정설로 굳혔다. 그가 주장하는 실증사학의 미명을 거둬내면 황국사관이다.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서울대학교가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민족사관이 단절되면서 식민사관은 견고하게 한국사를 틀어쥐었다(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저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주한)
김용섭 교수 회고록(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을 보면 '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 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김원룡이라고 한국고고학을 이끌었다고 불리는 분이 있다. 전 서울대 교수신데 이 분이 만든 이론이 원삼국론이다. 중국이 지금 북한을 유사시 먹기 위해 소리내는 이야기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철기문화를 부정하면서 철저하게 우리나라를 남한에 가두게 하는 이론이다. 그런데 역사학의 거두로 불리는 이병도 교수 이분은 더 심합니다. 이분은 일본 정부에서 돈 받아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힘쓰셨는데, 그 덕에 지금 우리가 왜곡된 내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우리나라 역사교육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김용섭(80)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 번은) 너덧 명의 중년ㆍ노년 교수가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768쪽)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제창하고 수립한 중심인물로 꼽히며,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인 김원룡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그의 제자였다. 이런 식으로 학교 안팎에서 압력이 거세지자 "그리하여 나의 문화 학술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나도 이 학교를 떠났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윤내현 교수의 사례
“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출처: 환단고기(http://www.hwandangog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