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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차돈
황원갑 <역사소설가>
이차돈(異次頓)은 우리나라 불교사상 최초의 순교자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앞날이 촉망되던 빼어난 젊은 귀족이었건만 그는 왜 현세의 영화를 뿌리치고 아까운 한 목숨을 스스로 버렸을까. 이차돈은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만 비상한 일이 생기는 법”이라면서 서라벌과 신라를 불국정토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칼날 아래 목숨을 던지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비록 가사를 입고 중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는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여 어떤 고승ㆍ대덕 못지않게 신앙심이 투철한 불제자였고,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순교는 만구(萬句)의 독경(讀經), 천승(千僧)의 설법보다도 더욱 우렁찬 사자후(獅子吼)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한국불교 1,600년사에서 이차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떤 고승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차돈이 고귀한 흰 피를 뿌려 신라불교의 새벽을 밝힌 이적(異蹟)의 순교지인 경주시 동천동 406번지 북악 소금강산 기슭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세워져 있다. 경북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된 백률사는 이차돈의 거룩한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추사(刺楸寺)의 후신이다.
백률사는 서라벌 오악(五岳) 가운데 북악이었던 금강산 남쪽 기슭에 있다. 북악 소금강산은 경주 남산보다 훨씬 낮고 규모도 작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동쪽으로는 토함산 연봉, 서쪽으로는 옥녀봉과 선도산, 남쪽으로는 반월성과 남산 연봉이 천년고도 옛 서라벌을 감싸 안고 빙 둘러서 있다.
백률사 대웅전은 조선 선조때 중창하고 근래에 재건한 것인데, 대웅전 동쪽 암벽에 신라시대 작품인 칠층탑이 음각되어 있다. 다른 절들과 달리 대웅전 앞에 탑을 세울 자리가 없어서 암벽에 새긴 것으로 보이니 이는 비록 절터가 비좁아도 이 자리가 바로 이차돈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그 옛날의 그 절, 곧 자추사 터라는 사실을 말없는 웅변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주시 인왕동 76번지 국립박물관에 가면 백률사, 옛 자추사에서 출토된 이차돈순교공양석당(異次頓殉敎供養石幢)이 있다. 육각형의 석당 1면에는 이차돈의 장엄한 순교 장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어, 참다운 구법ㆍ수도자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가를 잘 일러주고 있는 듯하다. 이 석당이 발견되고 발굴된 곳 근처 어딘가에 이차돈의 무덤이 있을 것이지만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신비로 남아 있다.
오늘의 경주는 중소 규모의 관광도시에 불과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이 땅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도읍이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가 정치적ㆍ군사적 이유로 몇 차례씩 수도를 옮긴 데에 비해 신라는 건국에서 망국에 이르기까지 1,000년 동안 서라벌이 유일한 도성이었다. 따라서 신라 전성기에는 서라벌에 약 18만 채의 집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니 추산해보건대 이는 인구 100만의 거대한 도시였다. 오늘의 경주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55년 8월이었고, 1968년 12월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 대청(大淸) 초년(547년) 양(梁)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오고, 천가(天嘉) 6년(565년)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중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寺寺星張塔塔雁行)……. 이후 삼한(三韓)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四海)를 통틀어 한 집이 된 것이 삼성(三聖 : 아도ㆍ법흥왕ㆍ이차돈)의 위덕(威德)으로 이루어짐이 아니랴. -
절들이 별자리처럼 총총히 늘어서고 탑들은 기러기 떼 지어 날아가듯 서라벌 전체가 광장(廣壯)한 불국토를 이루게 된 것은 이차돈의 거룩한 순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ㆍ전시중인 이차돈순교공양석당을 보자. 석당이란 돌로 길게 기둥처럼 깎아 세운 것이다. 또한 당(幢)이란 기도나 법회(法會) 같은 의식이 있을 때 절의 문 앞 당간(幢竿)에 다는 불화(佛畵)를 그린 기(旗)로서 괘불(掛佛)이라고도 한다. 이차돈을 공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석당은 윗덮개인 개석(蓋石)이 없어진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한 면에는 그림이, 다른 다섯 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들은 오랜 세월을 겪는 동안 마멸이 심해 판독할 수 없지만 그림은 한눈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임을 알아볼 수 있다.
이차돈이 아직도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은 방금 머리가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반쯤 허리를 굽힌 채 이차돈은 아직도 서 있는 자세이다. 그의 발 앞에는 방금 잘린 머리가 떨어져 있고, 그 머리가 베어진 목에서는 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다. 거기에 하늘에선 꽃송이들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는 장엄한 광경이다. <삼국사기>는 이 대목을 이렇게 썼다.
- 장차 목을 베려 할 때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가로되,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을 받음이니 부처님의 신령하심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를 베자 잘라진 데서 피가 용솟음치는데 핏빛이 젖과 같이 희었다. 여러 사람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佛事)를 반대하지 않았다. -
<삼국유사>는 이 장면을 좀 더 상세히 그려보였다.
- 염촉(厭髑)은 죽음에 임해 맹세를 짓고 형리는 그의 목을 베었다. 붉은 피가 아닌 흰 빛깔의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다. 햇빛이 사라져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며 꽃비가 나부껴내렸다. 임금은 슬퍼하며 용포자락에 눈물을 적시고 재상은 걱정하여 조복(朝服)에 땀이 배었다. 샘물은 말라 고기와 자라들이 뛰어오르고 나무는 부러져 잔나비가 몰려가며 울부짖었다. -
이 석당은 ‘통일신라 때인 9세기 말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백률사에서 출토되었다.’ 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나중에 백률사로 찾아가 알아보았더니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발굴한 것은 사실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만일 그 위치를 알아낸다면 그곳이 바로 위대한 순교자 이차돈의 무덤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드디어 북산(北山)의 서령(西嶺)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 : 宮人)이 그를 애도하여 좋은 터를 잡아 난야(蘭若 : 절)를 지어 자추사라 이름하였다.’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북산 북악, 즉 소금강산 서쪽 기슭 어딘가에 그의 무덤이 있을 듯하다.
<삼국유사>의 이차돈 기사인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髑滅身)’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원전으로 삼은 뒤 없애버린 것으로 알려진 <신라본기>와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 ‘향전(鄕傳)’ 등을 인용했다. ‘촉향분예불결사문’은 현재 경북 경주시 내남면 탑동리에 있던 남간사(南澗寺)의 일념(一念) 스님이 이차돈 순교 약 300년이 지난 806년(애장왕 7년)에서 820년(헌덕왕 12년) 사이에 이차돈 순교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이차돈을 북악의 서쪽 마루에 장사지냈다고 했는데, 고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모은 ‘향전’에서는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 머리가 허공을 날아 북악 금강산에 떨어졌고, 그 자리에 장사지냈다고 하여 조금은 내용이 다르다. 또한 ‘향전’은 매월 초닷새날 아침마다 향로(鄕老)들이 흥륜사(興輪寺)에 모였는데 이는 이차돈의 순교일이 바로 8월 초닷새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앞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817년(헌덕왕 9년) 8월 5일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圓) 등이 이차돈의 무덤을 수축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여 이 날이 그의 순교일임을 뒷받침했다. 또한 흥륜사의 스님 영수(永秀)가 그 무덤에서 예불할 향도(香徒)들을 모아 결사(結社)하고 매월 5일에 그를 추모하는 법회를 베풀었다고 썼다. 따라서 이런 기록들이 전하는 사실로 마루어보건대 이차돈공양석당이 바로 817년 8월 5일 혜륭ㆍ효원 등이 세웠다는 그의 비석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로라면 527년(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이 순교하기 전까지는 임금조차 뜻대로 불교를 공인하지 못하고 절도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신라의 왕권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차돈의 순교 기사가 이보다 1년 뒤의 일로 나온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 변방에 자리 잡은 지리적 악조건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의 속도가 매우 늦었다. 그러던 것이 지증왕 때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증왕 초기는 이차돈이 태어날 무렵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던 법흥왕 14년에 그의 나이가 22세였다고 했고, ‘향전’에는 26세라고 했는데, 22세라면 지증왕 6년인 505년, 26세라면 지증왕 2년인 501년이 그의 출생년이 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지증왕 3년부터 순장(殉葬)을 폐지하고 우경(牛耕)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임금이 죽으면 남녀 5명씩을 함께 산 채로 파묻어 죽이고, 소를 부려 논밭도 갈 줄 모르는 미개한 나라가 신라였다. 국명을 신라로 정하고 임금을 왕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지증왕 3년부터였다.
512년(지증왕 13년) 이사부(異斯夫)의 울릉도 정복과 그 2년 뒤 가야의 지배권 확보를 발판 삼아 신라는 국력을 키우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재위 15년 만에 지증왕이 죽고 태자 원종(原宗)이 즉위하니 곧 법흥왕이다. 법흥왕은 즉위 3년 뒤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다시 3년 뒤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해나갔다. 이차돈의 왕의 근시직(近侍職)인 사인(舍人)이 된 것도 그 무렵으로 추산된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의 성은 박씨요 이름은 염촉이라 하면서, 염촉은 또는 이차(異次) 혹은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이는 방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겨레는 예부터 성이 없고 이름뿐이었는데, 삼국시대에 한문자가 들어오면서 중국식 성명을 갖게 되었고, 이차돈도 잇마루를 이사부(異斯夫)로, 거칠마루를 거칠부(居漆夫)로 표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가 박씨라는 사실도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그의 성명이 박염촉이라고 한 뒤 ‘그의 부친은 누군지 알 수 없으나 조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이라면서 또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김용행(金用行)의 「아도화상비(阿道和尙碑)」를 상고해보면 그의 나이 26세였고, 부친은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海大王)’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라 16대 걸해왕은 탈해왕(脫解王)의 후손으로 석씨(昔氏)이니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이차돈은 귀족인 진골 가문에서 태어나 나이 이십 안팍에 왕의 근시직인 사인 벼슬에 나아가 장래가 촉망되는 빼어난 인품의 젊은이였다.
다시 <삼국유사>를 인용한다.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여 절을 세우려고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공목(工木)ㆍ알공(謁恭) 같은 대신들의 반대의 소리가 높았다. 이때 이차돈이 임금에게 이런 계책을 일렀다.
“제가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빌미를 삼아 제 목을 베신다면 신민(臣民)이 모두 굴복하여 감히 임금님의 뜻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내 뜻은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너를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을 것까지야 있으랴.”
“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身命)이오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아침에 불법이 행해진다면 이 한 목숨도 아깝지 않겠나이다.”
임금이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이며 이르기를,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위 대사(大士 : 菩薩)의 행실이라 하겠구나!” 하고 감탄했다.
법흥왕이 사방에 형구(形具)를 벌여놓고 위세를 보이며 신하들을 불러들인 다음,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고의로 지체시켰다!”고 짐짓 노한 척했다. ‘향전’에서는 이차돈이 왕명이라 하여 절을 세운다는 뜻을 전하자 여러 신하가 임금에게 와서 간하니 임금이 이차돈에게 책임을 지워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전했다고 처형했다고 한다. 모든 신하가 벌벌 떨며 부인하자 법흥왕이 이차돈을 잡아오라고 시켜 문책했다. 이미 임금과 밀약이 있었던 바라 이차돈이 아무 변명도 하지 않자 임금은 성난 목소리로 이차돈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처형을 맡은 무사들이 이차돈을 묶어 끌고 가자 이차돈이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향전’은 그의 유언을 전했다. “대성법왕(大聖法王)이 불법을 일으키려 하므로 내가 신명을 돌보지 않고 이승과 얽힌 인연을 끊고자 하오니 하늘은 상서를 내리시어 두루 인민에게 보이소서!” 그리고 옥리가 그의 목을 베자 당연히 붉은 피가 흘러야 마땅하거늘 이게 무슨 조화 속인가! 난데없이 젖같이 흰 피가 분수처럼 한길이나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놀라는 사이에 갑자기 하늘이 빛을 잃고 사방이 컴컴해지는 가운데 지진이 일어나듯 땅이 흔들리고 하늘에선 꽃잎들이 비오듯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이차돈이 이처럼 전대미문의 장엄한 이적을 일으키며 순교하자 왕은 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신하들은 진땀으로 속옷을 적셨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투어 뛰어오르고 곧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원숭이 떼가 구슬피 울부짖었다.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동무들도 서로 돌아보며 애간장이 끊어지듯 피눈물을 흘리며 마치 친부모 형제와 사별하듯 애통해 하며 이차돈의 관을 뒤따랐다.
한편, <삼국사기> 법흥왕 15년 조는 김부식이 스스로 밝힌 대로 김대문의 <계림잡전>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용한 내용이 또 다른 기록인 김용행의 「아도화상비」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아도화상비나 그 비문은 전해지지 않아 모두를 알 수 없지만 그가 인용한 <계림잡전>이 전하는 바는 이렇다.
법흥왕이 불교를 믿으려고 하나 여러 신하가 따르지 않고 말도 많았다. 근신(近臣) 이차돈이 아뢰되 “청컨대 신의 목을 베어 중의(衆議)를 정하소서.” 하니 왕이 가로되 “본시 불도를 일으키려 함인데 죄 없는 너를 죽일 수는 없다.” 하였다. 이차돈이 다시 “만일 불법이 행해진다면 신은 죽어도 한이 없나이다.” 하였다. 이에 왕이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매 죄다 가로되 “지금 보건대 중들은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으며 언사가 기괴하고 거짓스러워 상도(常道)가 아니오니 이것을 만일 그대로 버려둔다면 후회하게 될지 모릅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를 입을지라도 감히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하나 이차돈은 홀로 나서서 “지금 저 말들은 옳지 못합니다. 대저 비상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 비상한 일이 있나니, 듣건대 불법은 그 뜻이 깊다 하오니 꼭 믿어야 할 줄 압니다.”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사람의 말을 물리칠 수 없고 너 홀로 의논이 다르니 둘 다 좇을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형리에게 내려 처형토록 했더니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니라 흰 피가 용솟음쳤고 이를 모두 괴이롭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반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고, 법흥왕은 천경림(天鏡林)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를 짓고, 왕비는 영흥사(永興寺)를 세웠으며, 이차돈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가 순교한 북악 소금강산 기슭에는 자추사를 세웠다. 이차돈을 추모하고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그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곳, 그의 무덤가에 세웠다는 자추사는 사라져 없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백률사가 서 있다. ‘나인(內人)이 그를 애도하여 좋은 터를 잡아 절을 지어 자추사라 이름했다.’ 나인을 안사람으로 해석하여 이차돈의 부인이라고 풀이한 사람도 있고, 궁녀들이라고 풀이한 사람도 있으나 그 정체를 상고할 길은 없다.
자(刺)는 잣, 추(楸)는 밤이니 백률(柏栗)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추사는 이차돈 순교 기사에만 나오고, 백률사는 서라벌의 명찰로 여러 차례 기록되었으니 자추사가 백률사로 개칭된 듯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률사에는 대비상(大悲像 : 觀世音菩薩像)이 있었는데 영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한다. 효소왕 때 국선(國仙) 부례랑(夫醴郞)이 말갈족에게 잡혀가 그의 부모가 이 대비상에 빌자 국보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불어 부례랑을 구출해오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래서 임금이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백률사에는 만파식적과 더불어 금척(金尺)ㆍ화주(火珠) 등 ‘신라 삼기(三奇)’로 치던 보물이 있었다. 특히 화주는 빛깔이 수정처럼 맑고 고운 구슬로서 빛을 통과시켜 솜을 비추면 불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영험하던 대비상도 임짐왜란 때 대웅전과 함께 불타 없어졌고, 금동약사여래입상만 국보 제28호로 지정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ㆍ전시되고 있다.
또한 백률사 송순(松筍)은 ‘경주 팔괴(八怪)’의 하나로서 다른 소나무들은 순이 나지 않지만 이곳 소나무들은 가지를 치면 송순이 생긴다고 한다. 그것은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 머리가 이곳에 떨어져 불법을 일으켰기 때문에 생기는 신이기사(神異奇事)라는 것이다.
이차돈이 법흥왕을 설득하여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세우고자 했던 흥륜사는 약 100년 전에 아도가 공주의 병을 고쳐준 대가로 천경림에 짓고 불법을 펼치던 바로 그 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육촌장(六村長) 중심의 부족연맹국가로서 왕권이 강하지 못했던 신라 사회에서 혁신적인 외래종교 불교가 뿌리내리기에는 숱한 박해와 탄압이 뒤따라야 했다. 이차돈의 고귀한 순교로 인하여 신라불교는 비로소 입지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역사적 고찰 흥륜사는 재건을 보게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 직후 시작된 흥륜사는 법흥왕의 조카로서 왕위를 이은 진흥왕 5년(544년)에야 완공되었다. 흥륜사가 완공되자 진흥왕은 ‘대왕흥륜사’라는 현판을 내리렸다.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인 흥륜사 금당에는 뒷날 신라 10성(十聖)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소상이란 진흙을 이겨서 만든 상으로 10성은 아도ㆍ이차돈ㆍ혜숙(惠宿)ㆍ안함(安含)ㆍ의상(義湘)ㆍ표훈(表訓)ㆍ사파(蛇巴)ㆍ원효(元曉)ㆍ혜공(惠空)ㆍ자장(慈藏) 등이다.
순교자 이차돈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영원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이적을 보이며 거룩한 순교의 길을 택함으로써 신라불교는 찬란한 꽃을 피우고 원효ㆍ의상 같은 고승대덕을 배출하며 민중을 위한 서민대중의 불교로 튼실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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