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농협의 역사는 과거에서 탈피하는 과정이었다.
해방 후 우리는 참으로 초라한 시절을 보냈다. 5.16 혁명 후 정부에서는 경제발전을 위해 고속도로 같은 기간시설 건설과 자본을 활용하는 금융토대를 만드는 것이 시급했다. 계(契)만 했던 시골에 정부는 갑자기 농협형태의 기구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농협의 시작은 무에서부터 배우면서 시작된 농민경제활동이었다.
“나의 인생은 온전히 법전농협의 탄생과 성장, 정착의 역사였다고 생각해”
법전농협은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태어났고 그 중심에 척곡리의 이병흠 전 법전농협 이사장이 있었다.
이병흠씨는 전주이씨 한산군 후손으로 시드물에 정착하신 추만 이영기선생의 맏아들 시겸의 자손이다. 문중의 전통을 잇고 지켜가는 사이 벌써 88세, 문중에서 가장 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인생 궤적을 따라 법전농협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자.
“나는 5.16혁명 후 군에서 제대하고 1962년에 척곡2리의 이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당시 이장은 비료, 농약, 소금 등 정부에서 배분하는 농업자재들을 농민들에게 전달하고 수금하는 복잡한 역할이었고, 이장들은 종종 금전사고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이장역할은 모든 농자재의 지식과 농민들과 소통하고 관리하는 경험을 얻는 중요한 기회였다.
1958년에 정부는 농업의 진흥과 장려를 위하여 필요한 영농자금의 대여를 목적으로 하는 ‘농은(農銀)’을 만들었지만, 61년에 발족된 농협으로 통합되었다. 1962년에는 먼저 이동별 단위농협을 추진하고 농민들에게 조합기금을 조성하게 했는데, 척곡2리 이장이었던 나는 이동협동조합의 설립에서부터 법전단위농협의 형성에 참여했다. 이동협동조합은 곧 법전과 오미 두 개의 마을협동조합으로 통합되었고, 농자재 배분과 농민의 출연금을 기반으로 영농자금의 대출을 실행하는 자율적 협동조합이었다.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의 협동조합은 금전사고가 많았고, 관리나 금융의 지식이 없어서 실패하는 마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동단위농협이 생긴 지 10년 만에 정부주도로 ‘면단위농협’을 전국적으로 발족시키고 이동단위 농협들을 인수하게 해서 아직 낙후된 농촌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게 했다.
문제는 각 이동농협이 워낙 부실하여 출자자만 있었을 뿐 출자금은 모두 증발하고 없었다. 법전도 이동에서 받은 빈껍데기 명부를 끌어안고 1973년 1월 개인이 기금을 내어 방 한 칸짜리 셋방에서 ‘법전면단위농협’을 발족시켰다. 첫 조합장은 소로리의 이경식씨가 맡았는데, 지역의견의 문제, 출자금의 문제, 인력의문제 등 총체적난국이었다. 더구나 출자자이자 고객인 농민들은 너무 가난했다. 결국 군지부에서는 새로운 제도의 모색이 필요했다. 농협의 도입시기에는 모든 것을 중앙에서 지도하고 도별로 관리하고 경쟁했다.
정부는 면단위농협의 인력확충을 위해서 농협중앙회가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봉화군지부에서 관리하는 입사자격시험을 시행했다. 나는 과감히 이장을 그만두고 첫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이때 여러 사람이 응시했는데, 나는 다행히 합격해서 첫 농협공채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했지만 모든 게 부실해서 틀을 갖추는데 주력했다.
부실한 출자명부를 인수한 법전단위농협은 출자금 확보가 우선이었다. 아직 중앙회에서는 운영을 위한 지원 자금이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빈 명부의 출자금을 채우기 위해 양잠을 추진하고, 벼수매장을 찾아가서 빼앗다시피 수금하여 기금을 확보해 나갔다. 처음 몇 년간은 무보수로 활동했다. 1973년 법전면 소로리가 춘양면에 이관되면서 소로리의 이경식 조합장이 사퇴하고 어르말에 살던 이희수씨를 조합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법전 기헌고택 강신중씨의 도움으로 본인의 면사무소 앞 땅을 내주어서 논을 매립하고, 봉화군지부의 설계와 각 동네의 부역을 통하여 인력을 지원받아 법전농협의 사무소를 신축하기에 이른다. 1974년 봄에 사무소를 완공하고 법전농협은 번듯한 사무소를 갖게 되었다. 농협사무실은 우리 법전농협의 큰 가치였다. 집이 생기니 중앙회에서 차입을 받을 수 있었고 중앙회에서 3%이자로 차입하여 일반에게는 7%로 대출했다. 드디어 조합장에게 17,000원의 급료를 지불했다.
이후 이재수씨가 조합장을 이었고, 1982년에는 자립조합으로 승격되는 성과도 거두었다.
신용사업은 빠르게 안정되어 1978년부터는 자본을 충당하고 흑자로 전환되었다. 경제사업은 주민들의 소규모 농산물을 모아서 외부공판장에 연계 판매하면서 법전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법전의 농산물 외부판매 실적을 보고 여러 단위농협에서 사례를 연구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첫 조합원 직선제를 통한 조합장의 선거가 있었고, 나를 아껴주셨던 분들의 추천과 능력을 인정받아 조합장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어서 직선 제2기와 제4기 법전면단위농업협동조합장을 역임했다. 2005년에 법전농협창립과 성장과 안정까지 40년의 법전농협역사를 지키다가 명예롭게 퇴임했다. 그동안 과분하게 주민들의 사랑과 큰 은혜를 입었고 나는 혼신을 다하여 법전농협의 안정과 농민들의 지원을 위하여 노력했다. 모든 것이 민간주도의 사업이지만 각 면 사이에 실적경쟁이 치열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농협은 주민들의 희생과 지원으로 세워진 기관이다. 말없이 바로선 농협을 지원하고 축하해주던 분들의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제는 법전농협이 춘양농협과 합병하여서 나와 법전농협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분들의 노력이 사라진 것 같아 송구하고 파출소, 중학교, 새마을금고까지 소멸된 법전은 아쉬움이 많다.
법전농협은 주민들에 의한 주민들의 기관이었고, 성장이 궤도에 올라서고는 주민의 복지를 위하여 많은 노력도 했다. 주민들과 호흡했고 많은 사랑과 혜택도 나누었다. 나는 지난 40여년의 농협사랑을 언제나 자부심으로 안고 산다.” ‘
2021.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