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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 설원기와 야사
1. 1456년 5월 17일 박 팽년이 썼다는 차원부 설원기 기(記 )를 보면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러 가지 야사(野史)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차원부 설원기에 보이는 야사
(1) 이양중은 그가 초야에 숨어 있을 때에 자신의 마음에 차원부가 비명에 간 것을 깊이 원망하지 않다가 자신이 화에 연루된 깊은 분노를 견디지 못하여 고장 사람들이 천렵(川獵)한 곳에 이르러 술을 담아 놓은 그릇을 깨뜨리고 떠났다. 그 때 사람들이 망우지자(忘牛之子)와 파료지공(破醪之公)이 분노했다고 하였다.
* 이덕무(1741-1793) 간본 아정유고 제3권 계사년 봄 유람기에 있는 내용
이양중(李養中)은 고려가 멸망하자 은둔하여 살았으며 원통하게 죽은 차원부(車原頫)의 죽음을 분하게 여겨, 타어회(打魚會)에서 막걸리를 담아 놓은 술병을 깨부수었으니 사람들이 파료옹(破醪翁, 막걸리 병을 깬 노인이란 뜻)이라 불렀다. 길재(吉再)가 등잔을 던진 것과 조 운흘(趙云仡)이 책상을 친 사실들이 《숭악집》에 나와 있다.
* 이 덕무가 인용한 숭악집 (임창택 저 1682-1723, 개성출신 문인) 의 해동악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海東樂府 草本無註解。入榟時補錄。
破醪翁 李養中當麗亡。遁在野外。常憤車原頫之寃死。於鄕人獵魚會。打破盛醪器。人謂破醪翁。○吉再投燈。趙云仡擊案。
(2) 몸은 비록 초야에 숨어 있었으나 신(辛)을 죽여야 한다는 지조나 지론(持論)이 정대 하였으며 林견미 廉흥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집념은 그들이 자신의 친척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聖神文武康獻大王과 智仁誠孝恭定大王(태종)께서 요동을 정벌하자는 최영의 모의를 매우 딱하게 여기었다.「요동을 정벌하자는 모의는」최영의 본심이 아니였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태조의 위덕(威德)이 날로 치성(致誠)한 것을 두려워하여 요동을 정벌하자는 모의로 태조가 명나라에 죄를 짓게 하려는 것이였다.
* 이 긍익(1736-1806) 연려실기술 태조조 고사본말 고려말 정사의 문란에 있는 내용
최영(崔瑩)이 나라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마침 명 나라에서 철령위를 두게 되자, 모두 원 나라를 섬기자는 논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는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또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풍설도 있어서, 최영이 실로 꺼려하였으나 죄를 줄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 나라에 죄를 짓도록 만든 뒤에 그것을 핑계로 제거하려고 해서 드디어 이 계획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이 긍익이 인용한 해동악부는 심 광세(1577-1624)의 해동악부(1617년간행)에서 인용한 것이다.
(3) 그 실상인즉 임, 염(林,廉) 두 집에 속한 사람은 많으면 이 백 명 적으면 백 여 명으로 그 가운데 괴수는 법으로 처형 하였으니 이는 의리의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가문만 하나도 없이 죽은 게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사는 정몽주등 제인(諸人)들의 70여 가문도 조준 조반 등이 사사로운 혐의를 품고 남김없이 도륙(屠戮)하였으니 하늘에 닿은 원망을 어떻게 다 기록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후로는 태조의 세상에 없는 공, 개국의 공을 도리어 원망하게 되었으나 결국 태조의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는 덕화(德化)로 돌아갔다. 그런데 정종과 태종이 왕위를 순리로 전수(傳授)받지 않기를 조준과 조반 등이 바라는 바였다면 사태의 변화를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권별(?-? / 권문해 1534-1591 대동운부옥의 저자의 아들 ) 해동잡록 본록
조반, 조준등이 임견미ㆍ염흥방을 제거한다는 구실을 빙자하고 사적인 감정을 품어 한때 의관(衣冠)한 자제(子弟 대가의 후예)들로 자기들을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살(謀殺)하여 그 수가 거의 천여 가에 달하였으며 또 한 동리에 사는 정몽주(鄭夢周) 등 70명의 집도 모두 죽이고 남기지 않았으니 하늘에 이르는 원한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본록(本錄)
(4) 풀지 못한 여한을 먹고 마시며 산다는 운재(雲栽)를 본받으면서 비로소 그가 삶을 온전히 하였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고「운재」는 이인임의 동성 조카이다.「여한을 먹고 산다」는 것은 운재가 이인임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분히 여기고 時事가 이미 글러버린 것을 한스러워 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인임이 운재가 벼슬을 버린 것을 비난하고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산에서 나무를 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는 것은 좋기는 좋지마는 어찌 이처럼 미련스럽게도 쓰디쓰게 굶주린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운재가 그 편지를 받고 답하기를 「하루는 열두 시간이 있는데 奸人을 죽이지 못한 여한을 먹고 사니 비록 녹을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쓰디쓰게 굶주릴게 있겠는가? 다행히 미련한 조카의 소회를 펼 수 있다면 또 한 번 죽는 것이야 어찌 싫어하겠는가?」 하였다. 이인임이 또 답장을 받고 내심으로 매우 꺼려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인임이 귀양 갔다. 대체로 그 뜻을 거절함으로써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삶을 보전하려고 꾀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분노하여 한번 죽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 이였다. 그렇지만 실은 l시대의 불행을 원망한 것이다.
*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내용중에서
【안】 《송경지(松京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운재(李雲栽)는 인임의 조카였는데, 인임의 행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자신은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 안정복이 인용한 송경지는 개성에서 발행된 문집을 말하는 것이 송도지, 송도잡기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발간된 책으로 주조 개성지역에 있는 야사등을 모아둔 책으로 보인다. 김 육 (1580-1658)의 잠곡유고에 있는 송도지 발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송도지 발문>
산경(山經)과 지지(地志)는 대개 《서경》의 우공(禹貢)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우공 한 편(篇)은 넓고 큰 구주(九州)를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후세의 서책으로 《구우지(區宇志)》, 《풍토기(風土記)》, 《서경잡기(西京雜記)》, 《동도사략(東都事略)》과 같은 종류의 책들은 한결같이 어찌 그리 간편(簡篇)이 많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세대가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일이 더욱더 번잡해지매 박학한 선비가 듣고 본 것을 다 전하고자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잡하게 하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송도는 오백 년 동안 고려의 왕업(王業)이 있었던 곳이니, 지(志)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러 차례 병란을 겪어 문헌을 상고할 수가 없으며, 옛 자취를 찾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몹시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장연 군수(長淵郡守)를 지낸 조신준(曺臣俊)은 나이가 80세나 된 한 고을의 유로(遺老)이다. 그가 지은 《송도잡기(松都雜記)》는 옛 역사를 참고하고 간간이 세간의 풍속을 기술하였다. 나는 이 책을 가져다가 보고,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것을 주워 모아 이 《송도지》를 만들었다.
국가(國家)의 흥망과 교화(敎化)의 득실, 인재(人才)의 성쇠, 고금(古今)의 풍속을 간략히 기록하였으며, 음풍농월한 시문이나 잡다하고 쓸데없는 말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빼버리고 기록하지 않았다. 비록 가필하고 삭제한 것과 상세하고 소략한 것이 적절함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훗날 옛것에 뜻을 둔 자가 있다면 혹 취할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보고 감동하며 권장하고 경계하는 도리에도 역시 조금은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 1456년 7월 박 팽년이 썼다는 차원부 설원기 기(記)에는 송도지,송도잡기,송경지등에 나오는 야사등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박팽년이 1456년 5월에 차원부 설원기 기(記 )를 쓰면서 정사에 없는 야사등을 썼다면 그러한 야사들은 당시의 사대부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을 것인데 차원부 설원기에 등장한 야사등은 1400년대 개인 문집등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고 1500년대 중반이후에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한 송도지,송경지,송도잡기,숭악집등의 야사에서 등장하고 있다.
(5) 발가벗고 울분을 되씹는 조자의(曺子義)를 본받으면서 결국 죽고 말겠다는 그의 마음을 가졌다. 조자의는 조민수의 동성 일가인데 자기주장을 견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발가벗고 울분을 되씹는다는 것은」 최영의 정치하는 것이 어려움에 분노하고 도 예측할 수 없는 요양(療養)의 상황을 염려하여 한 여름에 숯을 많이 쌓아 놓고 그 가운데에다 불을 붙인 다음에 발가벗고 말하기를「정권을 쥔 최영의 머리를 구워서 온 나라 사람들과 같이 그 고기를 먹겠다.」하고 최영의 정치하는바가 어려움이 있음을 들추어 말하였다. 그때 태조와 조민수가 공무로 조자의를 방문하였는데 조자의가 이처럼 발가벗고 곁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분노 하다가 이어서 통곡하였다. 조민수가 몸을 구부려 옷을 덮어 주면서 무례하다고 말하자 조자의가 비로소 깨달은 듯이 말하기를「이장군은 어디서 오셨습까? 그리고 아저씨는 어디서 오셔서 무례불경(無禮不敬)한 미친놈의 말을 들으셨습니까? 남은 분노가 몸에 두루 감돌았는데 발가벗은 일신(一身)에 옷을 덮고 여기에 장군을 뵐 필요가 뭐 있겠소이까?」
하고 덮었던 옷을 버리고 울면서 두 공(公)을 향해 두 세 번 미안하다고 절을 하였는데 마땅히 최영의 집에서 죽겠다는 것처럼 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요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또 실지 최영의 뜻도 아니였고 조자의가 미친 것처럼 한 것도 그의 아저씨 조민수를 가르킨 것이 아니였다.
*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내용중에서
【안】 《송도잡기(松都雜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조자의(曹子義)는 조민수(曹敏修)의 종인(宗人)으로 지론(持論)을 잘하였는데, 요동을 치는 잘못에 분이 나서 한여름에 나무를 쌓아 불을 질러 알몸으로 구우며 말하기를 ‘최영의 머리를 구워 나라 사람과 함께 먹어야겠다.’ 하고 이어 곡을 하였다. 그러나 요동을 친 것은 최영의 진의가 아니라 한다.
* 안정복이 인용한 송도잡기등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고, 만약 송도잡기의 위의 내용이 차원부 설원기 기(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면 차원부 설원기에서 인용했다고 하였을 것인데 없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 중,후반부터 이러한 야사등이 등장한 듯하다.
(6) 공론을 엄폐하고 사사로운 독기를 품었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하륜의 심한 짓은 동궁에서 술을 마실 때 사사로운 독기를 품었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하륜의 심한 짓은 동궁에서 술을 마실 때 외람되게 옷에다 술을 엎지른 것이고 하륜의 가장 간사한 짓은 동궁을 따라가 동궁이 의심하도록 만든 것이다.「옷에다 술을 엎지르고 동궁이 의심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것은 하륜이 은밀히 화의 덫을 만들어 사건이 발발하려던 찰라에 감사(監司)로 나가게 되자 그 모의가 이룩되지 않을까 염려 하였는데 전별(餞別)하는 자리에서 동궁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말 할 수 없었다. 하륜의 일이 잘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동궁의 옷에다 술을 엎지르자 동궁이 매우 노하여 말없이 돌아갔다. 그러자 하륜이 겉으로는 취한체하고 동궁에게 사죄해야 하겠다고 하면서 동궁을 쫓아가 내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동궁이 또 문을 닫고 보지 않자 하륜이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 전에 하륜과 절친한 궁인이 동궁에게 사죄해야 하겠다고 말하기를「하륜이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출발을 눈앞에 두고 꼭 아뢸 말씀이 있는데 손님이 많아 아뢰지 못하고 이렇게 문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하륜이 또 궁인을 통해 간절히 빌자 동궁이 비로소 노기가 풀려 주위사람을 물리치고 하륜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륜이 말하기를「주상께서 작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고 하자 동궁이 타 이르기를 「어린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것은 주상만 그런 게 아니라 경도 자녀가 있으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하륜이 말하기를「차례로 왕위를 전수한다는 뜻은 일찌기 편전에서 주상께 들었습니다.」
하니 동궁이 냉소(冷笑)하였다. 하륜이 또 말하기를「왕씨들이 귀양 가던 날 무분별하게 당하였습니다.」하니 동궁이 믿지 않고 흔쾌히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으며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하륜은 모의가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울자 동궁이 도로 웃으면서 하륜을 위로하기를 「사세(事勢)가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이숙번은 용맹과 지략이 이 사람보다 뛰어 난 데 지금 안성군사로 있으니 이숙번이 돌아올 시기를 기다려 처리하는 것이 지당하겠습니다. 하니 동궁이 웃으며 말하기를「사세가 급박하다면 1년 뒤에 하륜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 하륜이 신덕왕후의 일가와 묵은 원한이 있다는 것을 동궁이 벌써 알고 있으며 김문표 등의 공론이 격발(激發)한 내용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궁이 그의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내심 의혹하지 않고 다만 중당에서 술로 위로 하였다. 동궁이 하륜과 이야기할 때에 동궁을 모시는 두서너 시종들이 병풍 뒤에 또는 중당 난간의 안에 숨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색이 변하여 떨었는데 동궁이 혹 오발(烏髮)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동궁이라 한 것은 깊은 뜻이 있으니 독자는 깊이 음미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성현(1439-1504)용재총화(1525년 경주에서 간행) 내용에서
호정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 당시 정안군(靖安君)이던 태종이 집 잔치에 참여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태종이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부을 적에 호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상위의 찬과 탕을 뒤집어 엎어, 왕자의 옷을 더럽히자,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났다. 호정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노하여 가니 가서 사죄해야겠다.” 하고 드디어 따라나섰다. 종이 태종에게 고하기를, “감사가 옵니다.”하였으나,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大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므로 호정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중문(中門)에 들어가니 호정도 또 중문에 들어가고, 내문(內門)에 들어가니 또한 내문에 따라 들어왔다. 태종이 비로소 이를 의심하여 돌아보고, “웬 일이냐?”고 물었다. 호정은 말하기를, “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어 엎은 까닭은 장차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 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침실로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호정이 말하기를, “신은 왕명을 받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 이안군(移安軍)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 것이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신도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머물러 기다리겠사오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십시오.” 하고 호정은 드디어 떠났다.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 그 연고를 말했더니, 이숙번은 아뢰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사온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종과 이안군을 이끌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빼앗아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와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이 남문 밖에 막차를 쳐서 그 가운데 앉고 또 막차 하나를 그 밑에 치니, 사람들이 누구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는데, 호정이 올라와 가운데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머지 않아 재상이 될 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호정과 이숙번의 힘이었다
* 박 팽년(1417-1456)이 1456년 7월에 썼다던 차원부 설원기 기(記)에도 1차의 왕자의 난과 관련한 하륜(1347-1416)과 태종(1367-1422) 의 야사가 있는데 이러한 야사의 바탕이 되는 사건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과 관련된 것이므로 이러한 야사가 1400년초반 개인문집등에 등장하여야 하는데 없다가 박팽년이 1456년 7월에 썼다던 차원부 설원기에서 최초로 등장했다면 성현(박팽년보다 21살 연하)이 용재총화에서 이러한 야사를 인용했다면 출처를 밝혔을 것인데 그 출저는 없다.
(7) 이것이 또 태종이 그전부터 아는 바인데 어찌 태종이 평소 모의하였던 것이겠는가? 이는 모두 하륜이 만든 것이고 하륜의 간사함이다. 군친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영원히 어긋나게 하더니 결국에는 머무르는 자리에서 기둥에 화살을 맞히는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하륜이 태종으로 하여금 지친(至親)을 지극히 사랑하는 덕을 손상하게 하였다는 것이요 또 태조가 임시 머물던 날 태종을 불러 볼 때에 태조가 태종을 향하여 활을 겨누자 하륜이 태종으로 하여금 기둥 밑에 엎드려 맞지 않게 하였는데 그의 본의를 따져본다면 태조가 활을 태종에게 겨눈 것이 아니라 실은 적신(賊臣) 하륜이 활을 태종에게 쏘았다는 뜻이다.
* 이긍익(1736-1806) 의 연려실기술 태조의 함흥주필 내용중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하여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兩殿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자, 태종이 면복(冕服)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가졌던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해서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축수편(逐睡篇)》
* 이긍익이 인용한 축수편은 편자,연대미상의 야사집이다.
(8) 용이 적전에서 튀어 오르자 신하들이 재앙을 받았다.「용」은 태조를 말한 것이다. 적전(赤田)이는 것은 태조가 살았던 함길도 덕원의 이름이다.「용이 적전에서 튀어 올랐다는」는 것은 태조가 봉이 적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봉을 쫓아갔다는 뜻이다. 다만 변란이 일어난 날 태조가 태종만 원망 하였을 뿐 하륜의 음모가 안에서 움직인 것은 의심치 않은 채 궁중내관 가운데 태종과 연관된 자들을 모두 죽이니 그들이 토한 피가 5~6승(丞)이였다. (가) 처음에는 궁실을 버리고 적전으로 들어가 의병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북적(北狄)으로 가려고 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하였기 때문에 용이 적전에서 튀어 올랐다고 말한 것이다.
(나)「신하들이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태종이 날마다 임시 행재소로 사자를 보내 문안 하였는데 태조가 분개하고 원망하여 수행한 사신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일국의 신민들이 태조가 죽인 것을 원망하지 않고 태조가 애통해 하는 것만 보아도 처절(悽絶)하게 여겨 따라 죽을 마음만 있었지 사는 낙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 변란에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이익(1681-1763) 성호사설 (산승온해)의 내용
태조(太祖)가 적전(赤田)에 행차한 것은 크게 북적(北狄)을 몰아서 기어이 탁란한 여러 신하를 제거할 생각이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중국에 가서 호소하려고 했던 것인데, 정희계(鄭熙啓 ? - 1396) 등이 산승(山僧)인 온해가 쌍성(雙城) 용씨(龍氏)의 아들에게 준시를 인하여 이르기를,
북해에 고기 난다는 이야기를 뉘 일렀나 / 誰說騰鱗北海間
오늘날 금의로 돌아왔다 말을 마오 / 莫言今日錦衣還
풍패에서 노래하던고조는 나 아니라 / 予非漢祖歌豊沛
촉도가 간험했던 당 명황이 부끄럽네 / 反愧唐皇蜀道艱
라 하였다.
* 정희계는 1396년에 사망하였는데 야사에서는 1398년 1차 왕자의 난(1398)이후까지도 살아있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 이규경(1788-1863)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설림(說林)》에 이르기를,
“방번(芳蕃)ㆍ방석(芳碩)의 난(亂)에 태조가 함흥(咸興)에 나가 있을 때, 옛날 태조의 고향 친구였던 한 노인이 닭 두 마리와 말술을 직접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태조가 술을 마시고 거나해지자, 절운(絶韻)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비늘 달고 북해에서 날아올랐다 이르지 말고 / 休道騰鱗北海間
오늘날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왔다 말하지 마소 / 莫言今日錦衣還
내 풍패에 노래하러 옴이 아니고 / 我行不是歌豐沛
도리어 당 명황의 촉도난이 부끄럽네 / 却愧明皇蜀道難
했다.”
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에,
“태조가 적전(赤田)에 행행한 것은 한번 북적(北狄)을 몰아내고 탁란(濁亂)한 제신(諸臣)을 제거하려다가 뜻대로 안 될 경우에는 중국에 가서 호소하려 함이었는데 정희계(鄭熙啓) 등이, 산승(山僧) 온해(溫解)가 쌍성(雙城) 용씨(龍氏)의 아들에게 준,
누가 말했나 북해에서 비늘 달고 날아오른다고 / 誰說騰鱗北海間
오늘날 비단옷 입고 고향에 왔다 말하지 마소 / 莫言今日錦衣還
나는 풍패에서 노래하던 한 고조가 아니고 / 予非漢祖歌豐沛
도리어 당 명황의 촉도난이 부끄러워 / 反愧唐皇蜀道難
한 시를 인용하여 만류했다.”
하였는데, 《설림》에 기록된 것과 자구(字句)가 많이 다르니,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패승(稗乘)에 태조의 연구(聯句)가 있는데, 태조가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三尺劍頭安社稷]’ 하자, 최영(崔瑩)의 대련(對聯)에 ‘한 줄기 채찍으로 건곤을 안정시키리[一條鞭末定乾坤]’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꿈속에서 지은 시에,
종고 소리 중외에 떨치니 / 鼓鐘聲振通中外
여기가 바로 삼한의 만세 터전일세 / 正是三韓萬世基
하였는데, 실록(實錄)에서는 이를 ‘무인 삼월 무신삭 야몽(戊寅三月戊申朔夜夢)에 지었다.’하였다.
규경(圭景)은 삼가 상고하건대, 삼월삭(三月朔)은 의당 병진삭(丙辰朔)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실록에서 무인 삼월 무신삭(戊寅三月戊申朔)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아마 삼월 무신일(戊申日)인 듯하다. 그리고 《대동경세력략(大東經世曆略)》을 상고하건대, 명(明) 나라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1368~1398) 31년은 곧 우리나라 태조 7년인 무인년이다. 무인년 삼월 초하루가 무신일이고 보면, 삼월 삭일(三月朔日)이라 하지 않고, 삼월삭(三月朔)이라고만 일컬은 데서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 차천로(1556-1615) 오산설림초고 에서
태조는 처음 덕원(德源)에 물러가 계시다가 또 함흥으로 갔다.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이 사신이 보내어 문안을 드리자, 그 뒤부터 문안 행차가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태조는 사신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죽이니 죽는 사람이 잇달았다. 그 때 사람들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태조가 마음에 두지 아니함을 슬피 여겼다. 공정대왕이 돌아오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나올는지 짐작 못하여 근심하고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무학의 힘이면 태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하였다. 공정대왕이 수소문하여 찾아 가지고 굳이 청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부자지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사옵니까. 내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개의(介意)치 않았다. 오래 되자 무학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르자, 태종이 가는 차비를 차려서 보냈다. 함흥에 이르러 태조를 뵈니, 태조는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아무를 위하여 유세(遊說)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무학이 웃으며 말하기를, “전하 왜 믿지 않으시나이까. 빈도(貧道)와 전하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이 몇 해이오니까. 오늘은 전하를 위하여 한 번 위로할 뿐입니다.” 하니, 태조의 얼굴빛이 약간 풀어졌다. 이렇게 되어 머물러 같이 자게 되었는데, 태종(太宗)의 단점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같이 하기를 수십 일이 되니, 태조는 무학이 태종에게 가담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더욱 그를 믿게 되었다. 그 뒤 수십 일이 되어 무학이 태조를 모시고 같이 자게 되었다. 야밤에 무학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태종이 참으로 죄과가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은 다 이미 죽었습니다. 단지 이 사람만 남았사온데 만일 끊어 버리신다면, 전하께서 평생 고생하여 이룬 대업을 앞으로 누구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남에게 부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혈속(血屬)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 번 다시 생각하시기 원하옵니다.” 하니, 태조도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환궁할 뜻을 가졌다. 무학이 이내 급히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태조께서 성안에 들고자 아니하므로, 처음에는 소요산(逍遙山에 이르러 수개월을 머무르다가, 마침내 풍양(豐壤 평양)으로 가서 궁을 짓고 지내셨다. 이 뒤로 무학의 종적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위의 야사는 함흥차사 관련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함흥차사는 야사(꾸며된 이야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함흥차사 야사의 출발을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서 찾고 있다. 만약 1456년 박팽년이 차원부 설원기를 쓰면서 그 당시 널리 회자되었던 함흥차사 야사가 있었다면 한번쯤은 정사라든가 개인문집등에 있어야 하는데 그 내용은 없는 듯 하다.
3. 잠정적인 결론은 차원부 설원기에는 1500년중반(또는 그전부터라도 별 의미는 없다) 개성지방에서 회자되었던 야사를 인용하고 있는듯 하다. 함흥차사는 이야기는 차천로 오산설림초고에서도 나온다.
첫댓글 "잠적적인 결론은 차원부 설원기에는 1500년 중반"으로 보는데 이번 류릉 성역화에서 구월산 류릉의 비각에 있는 두개의 비석을 보면 1681년 류상운, 1861년 류기영 선조의 고려 대승공 비문에 원파록과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
1610년 원파록이 나온 이후에도 선조들은 류차달의 아들은 류효금 한명으로 종통을 이어왔는데 1964년 차류대종회가 결성되었다. 일종의 종친회라 생각한다.